▲ 공사판 막노동자로 일하러 다닐 때(오른쪽이 전태일). ㅣ 전태일기념사업회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제자들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 가셨다.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자 많은 사람이 그 말씀을 듣고 놀라며 "저 사람이 어떤 지혜를 받았기에 저런 기적들을 행하는 것일까? 그런 모든 것이 어디서 생겨났을까? 저 사람은 목수가 아닌가? 그 어머니는 마리아요,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다 우리와 같이 여기 살고 있지 않은가?" 하면서 좀처럼 예수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 (마가 6:1-3)

밤 깊은 때, 아마도 열한 시가 좀 지나, 종종걸음으로 서울역 근처의 지하도들을 지나갈 때면, 우리는 밤이슬을 피하여 지하도 벽에 앉아 졸고 있는 사람들의 초라한 모습을 보게 된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그들의 야윈 얼굴에서, 비탄으로 깊게 패인 그들의 주름살에서, 실의에 잠겨 빛을 잃은 지 오래인 그들의 힘없는 눈매 속에서, 자신들을 인간쓰레기로 만들고 있는 ‘부한 환경’에 대한 깊은 분노가 타오르고 있는 것을 우리가 읽을 수는 없는 것일까?....

전태일의 정신적인 성장과장 가운데에서 이 당시에 이미 자기를 거부하는 ‘부한 환경’에 대한 비판, 그리고 그 현실과 싸워 이기려는 분명한 의지가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고 한다면, 우리는 그가 남들처럼 고등교육을 받을 수 없었던 것을 슬퍼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현실이야말로 가장 좋은 교사인 것이다. 그 현실의 가장 깊은 질곡 한가운데에서 몸부림치면서, 자기의 심장으로 느끼고 스스로의 머리로 생각할 수 있었던 사람이야말로, 교과서의 해설이나 권위자의 암시를 통하여 왜곡되는 일이 없이 현실의 벌거벗은 모습을 생생히 보지 않을 수 없었던 사람이야말로, 현실에서 가장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고 그리하여 자신의 인간성을 가장 열렬히 지킬 수 있는 것이다. (『전태일 평전』, 78-80쪽.)

예수는 아무런 공식교육을 받지 못했습니다. 무학(無學)인 셈입니다. 그러니 이것을 익히 알고 있는 예수의 고향 사람들이 예수의 말을 듣고 “저 사람이 어떤 지혜를 받았기에 저런 기적들을 행하는 것일까? 그런 모든 것이 어디서 생겨났을까? 저 사람은 목수가 아닌가?” 비아냥거리며 “좀처럼 예수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유식자만 무식자를 깔보는 게 아닙니다. 무식자가 다른 무식자를 얕보고 무시하는 경우가 어쩌면 더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너나 나나 똑같이 무식한데 네가 알긴 뭘 알아?’ 하는 식입니다. 예수의 고향 사람들이 예수를 대하는 태도가 바로 그렇습니다.

전태일 역시 찢어지게 가난한 민중의 아들로 태어나 공식교육 혜택을 거의 받지 못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중퇴가 전부였습니다. 중학교 진학은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나이 열다섯에 가정 사정 등으로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던 학생들이 다니는 야간학교인 청옥고등공민학교에서 일 년도 채 못 되는 학창 시절을 보낸 것이 학력의 전부입니다. 청옥에서 보낸 짧은 시절을 뒷날 전태일은 “내 생애에서 가장 행복하였던 시절”이라고 회상했습니다.

청옥 시절에 대한 전태일의 추억은 끝이 없는데 당시 일기에서 그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나는 기초지식이 없어 영어와 수학 과목은 이해하는 데 무척 힘이 들었다. 그렇지만 다른 과목은 다 재미있고, 50분 수업시간이 너무 짧은 것 같았다. 정말 하루하루가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 같았다.
(『전태일 평전』, 51-52쪽.)

이렇듯 향학열에 불타던 전태일은 후일 노동운동을 하면서도 “나한테도 대학생 친구 하나만 있으면 참 좋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습니다. 어려운 한문투성이인 근로기준법 책을 읽느라 진땀을 빼면서, 또 배우지 못한 자의 서러움을 이런 저런 모양으로 뼈저리게 체험하면서 “남들처럼 고등교육을 받을 수 없었던 것을” 못내 아쉬워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교과서’나 제도교육을 통해 배울 수 없었던 것을 전태일은 다른 통로를 통해 배울 수 있었습니다. 현실! “현실의 벌거벗은 모습”이 바로 그의 위대한 스승이었습니다. “자기를 거부하는 부한 환경”, 자기를 “인간쓰레기로 만들고 있는 부한 환경”, “그 현실의 가장 깊은 질곡 한가운데에서 몸부림치면서” 그는 “교과서의 해설이나 권위자의 암시를 통하여 왜곡되는 일이 없이” “현실에서 가장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고 그리하여 자신의 인간성을 가장 열렬히 지킬 수 있”었습니다.

“현실의 벌거벗은 모습”을 교재 삼은 그 배움. 그것은 머리의 배움이 아니라 온몸의 배움이었습니다. 현실 따로 배움 따로 있는 창백한 관념적 배움이 아니라 “자기를 거부하는 부한 환경에 대한 비판"과 ”그 현실과 싸워 이기려는 분명한 의지“로 이어지는 실천적 행동적 배움이었습니다. 자기만의 안락한 삶을 꾀하는 배타적이고 이기적인 배움이 아니라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을 ”인간쓰레기로 만들고 있는 부한 환경“을 무너뜨림으로써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의 ‘인간성’을 회복하려는 공동체적이고 이타적인 배움이었습니다.

전태일. 그는 무식했지만 “자기의 심장으로 느끼고 스스로의 머리로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아니! 그는 무식했기에, ‘부한 환경’에서 차갑게 거부당하였기에, “현실의 가장 깊은 질곡 한가운데에서 몸부림”칠 수밖에 없었기에 역설적으로 “현실에서 가장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는 가난해서 “남들처럼 고등교육을 받을 수 없었”지만 대신 “현실의 벌거벗은 모습”이 그의 위대한 스승이 되어 주었고, 그 언제인가부터 “그 현실과 싸워 이기려는 분명한 의지가 고개를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 의지, 이 내면의 양심의 소리를 따라 그는 세상의 그 어떤 지식으로도 흉내 낼 수 없는 노동하는 민중의 철학을 온몸으로 써내려가며 민중사랑 노동해방의 거친 들판을 힘차게 달려갔습니다. 자기 몸을 노동해방의 불꽃으로 피워내기까지 맨손 맨 몸뚱이로 거침없이 달려갔습니다. 민중사랑의 뜨거운 열정 하나를 밑천 삼아 노동운동의 가시밭길을 통과해 갔습니다. 그리하여 그의 만 22년의 짧은 생애는 마침내 이 땅의 노동운동의 “길과 진리와 생명”(요 14:6)이 되었습니다.

청년예수 역시 틀림없이 그랬을 겁니다. 하루하루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힘든 노동으로 버티면서 예수의 마음속에는 자기와 같은 사람들을 “거부하는 부한 환경에 대한 비판”의식이 서서히 싹텄습니다. 공식교육을 받지 못한 대신에 “자기의 심장으로 느끼고 스스로의 머리로 생각”하는 법을 조금씩 터득했습니다. 이런 비판의식과 주체적인 사고가 차츰 무르익어 “현실과 싸워 이기려는 분명한 의지”가 언제인가부터 파릇파릇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복음서의 곳곳에서 엿보이는 불의한 현실에 대한 예수의 송곳날 같은 비판의식과 그 철옹성의 현실에 맞서 끝내 이기고야 말리라는 확고부동한 해방실천 의지.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예수는 오랜 사색과 분노와 번민과 절망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뼈 빠지게 농사지어도 결국 수중에 들어오는 것이라고는 입에 풀칠하기도 부족한 한 움큼의 양식뿐인 갈릴리의 불쌍한 소작농들, 어부들, 일용직 노동자들, 실업자들, 값비싼 의료 혜택을 받을 길이 없는 병자들, 정신분열증 환자들, “고통으로 일그러진 그들의 야윈 얼굴에서, 비판으로 깊게 패인 그들의 주름살에서, 실의에 잠겨 빛을 잃은 지 오래인 그들의 힘없는 눈매 속에서” 예수는 현실의 기막힌 모순에 대한 인식과 그 모순을 척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투쟁 의지를 담금질해 갔습니다.

전태일이 그러하였듯이 예수 역시 현실, 민중들의 적나라한 삶의 현실을 통해 인생과 역사를 깨우치면서 명실상부한 민중의 아들로서 하느님 나라 운동의 늠름한 일꾼으로 우뚝 설 수 있었습니다. 예수는 몸소 민중의 일원으로서 민중을 통하여 민중적 ‘지혜’를 터득했습니다. 공허한 지식이 아니라 삶의 지혜, 역사의 진실을 배웠습니다. 이것은 예수가 모름지기 민중의 언어인 ‘이야기’를 적재적소에서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서 넉넉히 암시됩니다. 예나 지금이나 걸출한 이야기꾼은 거의 대부분 민중 출신이며 예수 역시 이 점에 있어서 예외가 아닐 겁니다.

현실이야말로 가장 좋은 교사이다! “현실의 벌거벗은 모습”을 통해 뭔가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제아무리 배움이 많아도 올바른 현실인식에 가닿지 못할 것입니다. 현실을 외면한 그런 배움, 그런 창백한 지식으로 감히 현실, 특히 민중적 삶의 현실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크나큰 죄악입니다. 민중을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민중을 논하는 것은 공염불이요 기막힌 교만입니다.

“밤이슬을 피하여 지하도 벽에 앉아 졸고 있는 사람들의 초라한 모습”을 그냥 스쳐 지나가는 자. 그런 인정이 메마른 자들을 하느님은 결코 용서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정연복 기자  pkom545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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