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와 중국의 만남은 단순한 종교 전파의 결과가 아니다. 두 이질 문명이 가치 체계, 신앙 논리, 권력의 장에서 전개되는 복합적인 상호작용이다. ‘마테오 리치(利玛窦)’ 시기의 “유교식 선교”부터 식민지 확장으로 인한 근대의 격렬한 충돌, 그리고 이들 대화의 경로에 대한 현대 학계의 심층적 철학 탐구에 이르기까지, 양자는 항상 “대립-충돌-대화”라는 긴장 관계 속에서 맴돌아 왔다. 포스트모던 ‘타자이론’은 이러한 이원적 대립을 돌파하기 위한 새로운 사고를 제시해왔는데, 그것은 상대방을 정복하거나 배제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자기자신을 완성하고 의미를 확장하는 대화 파트너로 보는 것이다.
이 글은 역사적 맥락을 기반으로, 신학과 문화의 심층적 차이를 염두에 두면서, 현상학, 해석학, 그리고 ‘타자이론’을 활용해 양자가 대립에서 공생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그 가능한 경로를 탐구한다.
1. 역사적 맥락: 충돌의 발생과 ‘타자’에 대한 오해
기독교와 중국이 충돌해온 역사는 사실상 ‘타자’가 지속적으로 오해되어온 과정이다. 초기에는 서로 상대방을 동화시킬 수 있는 이질 문화로 간주했고, 근대에는 식민 권력과 결합시켰으며, 현대에는 현지화와 순수 신앙 사이에서 갈등하는 딜레마에 빠졌다. 이러한 오해의 핵심은 언제나 ‘자기’를 중심으로 ‘타자’를 정의하고, ‘타자’의 독립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은 데 있다.
(1) 초기의 만남: 문화 적응 속의 ‘타자 동화’
16세기 말, 마테오 리치가 시작한 “유교식 선교” 전략은 유가의 ‘하늘’, ‘상제’ 개념을 활용해 기독교의 ‘하느님’을 해석하려 했고(1), 《사서》를 번역 소개함으로써 중국 문화와 대화하는 가교도 마련했다. 표면적으로는 중국 문화를 존중했지만, 실제로는 중국 문화를 기독교로 동화시키려는 의도를 숨기고 있었다. 1628년 교리회의(嘉定会议)에서 드러난 “중국 예의 논쟁”은 사실상 선교사들이 ‘타자’에 대한 포용의 하한선을 놓고 벌인 논쟁이었다.
제사지내기, 공자 공경 등 중국의 핵심 예의가 기독교의 “우상 숭배 금지” 교의와 충돌했을 때, 선교사들은 마침내 자신들의 교의에 기초해 중국 문화를 부정하고, 중국 문화를 수정해야 할 이질적 존재로 간주했다.(2) 이런 식으로 ‘자기’를 기준으로 ‘타자’를 판단하는 사고 방식은 이후 갈등의 씨앗으로 남았다. 이때의 “대화”는 평등한 의미 교환이 아니라 ‘자기’가 ‘타자’를 일방적으로 동화시키는 것이었다.
(2) 근대의 전환: 정치적 결합에서의 ‘타자 적대’
19세기 이후, 기독교는 불평등 조약으로 특권을 얻은 뒤 서양 식민 권력의 부속품으로 전락했다. 선교사들은 조약을 이용해 사법에 간섭하고 토지를 강점했으며, 이로 인해 난창 교안(南昌教案), 의화단 운동(义和团运动) 등 교안 사건이 빈번히 발생했다.(3) 이는 “기독교”를 “서양의 침략”과 직접적으로 동일시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양측의 ‘타자’에 대한 인식은 완전히 적대 관계 속으로 들어갔다.
중국 사회는 기독교를 전통 문화를 파괴하고 민족 주권을 침해하는 “양교”(洋教)로 간주하면서 “청나라를 부흥시키고 외국인을 박멸하자”는 구호로 폭력적 배제 운동을 벌였고, 기독교는 중국 문화를 어리석고 뒤떨어진 이단의 토양으로 보며 식민 권력을 이용해 강압적으로 교리를 전파했다. 이런 식으로 ‘타자를 적으로 보는’ 인식은 문화적 차이를 민족 감정과 정치적 권력의 대립으로 업그레이드시켰으며, 대화의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했다.
(3) 현대 탐구: 현지화에 있어서의 ‘타자 불안’
민국(民国) 시기, 종영광(钟荣光)・장이경(张亦镜)은 《복음서》와 《도덕경》을 비교했고, 조자친(赵紫宸)은 “본색화 신학”(本色化神学, 토착화신학)을 제안하며 기독교가 “서양의 표지”를 벗고 중국 문화에 융합할 수 있도록 시도했다.(4) 하지만 조자친은 나중에 자신의 주장을 부정함으로써 심층적인 딜레마를 드러냈다. 즉, 중국 문화에 대한 적응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기독교의 핵심 신앙이 옅어질 수 있고, 신앙의 순도를 견지하면 중국 사회에 받아들여지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불안의 근원은 여전히 ‘타자’에 대한 불신에 있었다. ‘타자 문화’가 자신의 신앙을 삼키는 것을 걱정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신앙이 ‘타자 사회’에 배제되는 것도 두려워하면서, “타자를 동화시키고” “타자에게 동화당하는” 이원 대립 속에서 끊없이 고뇌하는 데 머물렀다. ‘타자를’ 동반성장하는 파트너로 진정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2. 신학과 문화: 대립의 근원과 ‘타자’에 대한 배제
기독교와 중국의 대립은 우연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자기 중심성’에 뿌리박은 진리관과 문화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기독교 신학의 배타성과 중국 문화의 포용성은 표면적으로는 본질적인 차이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양측 모두 ‘자기’를 기준으로 ‘타자’를 정의함으로써 형성된 인식 충돌이다.
(1) 기독교 신학의 ‘자기 패권’: 진리라는 이름의 타자 배제
기독교 근본주의(基督教基要主义)의 “성경만으로”와 “신앙만으로”의 원칙은 역사적 과정에서 점차 ‘자기 패권’으로 변질되어 ‘타자 문화’를 다음에서 보듯이 “비진리”의 존재로 간주했다.
① 진리관의 절대화: “성경만으로”는 성경을 유일한 절대적 권위로 숭배하며 유가의 ‘육경’, 도가의 《도덕경》 등 중국 고전의 진리적 가치를 부정한다. 이러한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진리관은 중국 문화의 “다원 공생”의 인식 논리와 정반대이다. 유가는 “화이부동(和而不同)”에 대해 말하고, 도가는 “만물제동(万物齐同)”에 대해 말한다. 어떤 사상도 유일한 진리로 보지 않고 다른 문화의 상호 보완성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② 구원론의 배타성: “신앙만으로”는 예수님을 믿는 자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며, 유가의 “덕을 세워 성인이 된다(立德成圣)”, 불교의 “수행하여 해탈한다(修行解脱)”는 삶의 경로를 직접적으로 부정하고, 중국 문화의 정신적 추구 행위를 이단으로 규정한다. 이러한 구원론의 배타성은 본질적으로 자신의 신앙을 인류의 유일한 길과 동일시하며, ‘타자’의 정신적 차원에 대한 독립적 가치를 무시하는 것이다.
③ 일신론의 경직된 해석: 기독교는 ‘일신론’을 경직적으로 해석하며 중국의 제사, 신앙 예절 등을 우상 숭배로 간주하고, 중국의 “다신적 공존” 뒤에 숨겨진 문화적 논리를 무시한다. 하지만 제사는 가족 윤리의 계승이며, 신앙은 자연과 선현에 대한 경외감이지, 어리석은 우상 숭배가 아니다.(5) 이러한 경직된 해석은 자신의 신학적 틀을 강압적으로 ‘타자 문화’에 적용하는 데서 벌어지는 일로서, ‘타자’에 대한 존중과 이해가 부족하다는 뜻이다.
(2) 중국 문화의 ‘자기 관성’: 포용이라는 이름의 타자 무시
중국 문화의 “포용성”은 세상에서 찬사를 받지만, 기독교와 만났을 때는 다음에서 보듯이 ‘자기 중심’의 관성도 존재한다.
① 문화 우월감에 따른 ‘타자 경시’: 유가 문화는 오랜 기간 중국 사회의 주류 사상으로 존재하며 “중화중심주의(华夏为中心)”의 관성적 인식을 형성했고, 기독교를 외래의 이질 문화로 간주하며 중국 문화 기준에 부합해야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예: 기독교의 “유교화” 요구).(6) 이는 본질적으로 자신의 문화를 '타자'에 대한 판단 기준으로 삼으며, 독립적인 정신 전통으로서 기독교의 내재적 논리를 무시하는 것이다.
② 역사적 트라우마 뒤의 ‘타자 경계’: 근대에 기독교가 식민 권력과 결합했던 경험으로 인해 중국 사회는 ‘기독교는 양교(洋教)’라는 고정관념을 형성했다. 현대에도 여전히 일부 사람들은 기독교를 서양 이데올로기의 침투와 연관시키고 있다.(7) 이러한 경계심에는 역사적 이유가 있지만, ‘타자’에 대한 인식을 고착화시키고 기독교 신앙을 정신적 본질의 차원이 아닌 정치적 기호로 단순화시켜 평등한 문화적 대화를 이끌어내기 어렵게 만든다.
(3) 해체와 성찰: ‘자기 중심’의 타파 가능성
현대의 학자들은 ‘배타성’에 대해 성찰하면서 ‘자기 중심’을 깨뜨리기 위한 방향을 제시했다. 하광후(何光沪)는 기독교 ‘일신론’의 핵심은 “배타성”이 아니라 “사랑”이라고 지적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은 보편성을 가지며, 모든 차이를 부정하기보다는 다른 문화에도 “하나님의 계시”가 있다고 인정한다.(8) 자크 마리땡은 루터의 “의지주의”가 신앙을 개인의 내적 확신으로 단순화시켜 “자기 신격화”를 초래하고 신앙과 공동체 및 이성 간의 연결을 끊었다고 비판한다.
이러한 극단적 개인주의는 “공동체를 우선”하는 중국의 윤리관과 충돌하기 때문에, “은혜와 이성이 병존하는” 신학적 전통으로 회귀해야 대화의 공간을 마련할 수 있다고 본다.(9) 이러한 성찰은 기독교로 하여금 ‘자기 패권’에서 벗어나 평등한 자세로 ‘타자’를 바라보게 하는 동시에, 중국 문화도 역사적 트라우마와 문화적 우월감을 버리고 기독교를 대화할 가치가 있는 정신적 파트너로 진정 인식하게 하는 데 핵심이 있다.
(다음에 계속)
| 미주 |
|
(1) 利玛窦,《天主实义》,何高济等译,商务印书馆,1983 年版,第45-48页. (2) 李天纲,《中国礼仪之争:历史、文献和意义》,上海古籍出版社,1998 年版,第78-85页. (3) 路遥、程歗,《义和团运动史研究》,齐鲁书社,1988年版,第120-130页. (4) 赵紫宸,《基督教哲学 18 讲》,宗教文化出版社,2001 年版,第150-155页. (5) 杨宽,《中国古代陵寝制度史研究》,上海古籍出版社,2003 年版,第35-40页. (6) 费孝通,《乡土中国 生育制度》,北京大学出版社,1998 年版,第120-125页. (7) 徐以骅主编,《宗教与美国社会 第1辑》,时事出版社,2004 年版,第180-185页 (8) 何光沪,《多元化的上帝观:20世纪西方宗教哲学概览》,贵州人民出版社,1991年版,第250-255页. (9) 雅克・马利坦,《完整的人道主义》,周伟驰译,三联书店,2002年版,第100-105页.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