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호에 이어)

▲ 오건호 교수는 자기라는 말 속에는 이미 타자가 포함되어 있다고 하며 타자와의 공생을 꿈꾸는 중국 기독교가 될 것을 주문했다.
▲ 오건호 교수는 자기라는 말 속에는 이미 타자가 포함되어 있다고 하며 타자와의 공생을 꿈꾸는 중국 기독교가 될 것을 주문했다.

3. 철학적 재구성: ‘타자이론’을 기반으로 한 대화의 경로

포스트모던 ‘타자이론’의 핵심은 ‘자기 중심’의 인식 논리를 전복하고, ‘타자’를 대립하는 적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완성하는 파트너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자크 라캉과 폴 리쾨르는 현상학 및 해석학의 이념과 결합한 '타자이론'으로 기독교와 중국의 대화에 심층적인 철학적 지원을 제공한다.

(1) 라캉의 ‘타자’: 자기와 타자의 공생 본질

라캉은 《정신분석의 네 가지 기본 개념》에서 “내가 생각하는 곳에 나는 없고, 따라서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 나는 존재한다”면서, ‘자기’와 ‘타자’의 공생의 관계를 드러냈다.(1)

① 타자는 ‘나’가 아니지만 ‘나’를 만든다: 라캉은 ‘타자’를 언어·문화·사회 구조 등 외재적 이질 질서로 보면서, ‘자기’의 정체성·욕망·표현 능력은 모두 이 '타자'에 의해 형성된다고 주장했다. ‘타자’가 없으면 ‘자기’도 존재할 수 없다. 기독교의 ‘자기 동일성 인식’은 타고난 진리 소유자가 아니라, 서양 문화·역사와의 상호작용에서 형성되었고, 마찬가지로 중국 문화의 ‘자기 인식’도 주변 문명과의 교류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양자는 자기자신을 이해하려면 ‘타자’의 형성적 역할을 인정해야 할 뿐만 아니라, 대립자로 보아서는 안 된다.

② ‘나’ 안에 타자가 있고 타자 안에 ‘나’가 있다: 라캉은 ‘자기’의 핵심이 폐쇄된 동일성이 아니라, ‘타자 관계’로 구성된 “빔(空無)”이라고 강조했다. 진정한 ‘자기’를 추구하다 보면, 결국 ‘자기’라는 것은 늘 ‘타자의 산물’임을 알게 된다. 이러한 사고를 기독교와 중국 관계에 적용해보면, 기독교가 중국 문화라는 ‘타자’에서 떨어져 나가면 그 “보편성”을 드러낼 수 없고, 중국 문화가 기독교라는 '타자'를 배제하면 그 “포용성”이라는 것도 헛된 이야기일 뿐이다. 양자 간의 차이는 대립의 격차가 아니라 상호 성장의 계기이다. 기독교는 중국 문화를 통해 ‘사랑’의 현실적 표현(예: 유가의 ‘인’)을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고, 중국 문화는 기독교를 통해 ‘정신적 신앙’의 차원(예: ‘초월성’에 대한 사색)을 확장할 수 있다.

(2) 폴 리쾨르의 ‘타자’: 대화 속에서 자기 생성

폴 리쾨르의 ‘타자이론’은 ‘타자’를 인지의 대상이 아니라 대화의 파트너로 보는 관점을 더 발전시켰다.

① 타자의 부름에 응답하며 자기 생성: 리쾨르는 ‘자기’가 폐쇄된 주체가 아니라 “타자의 부름에 응답하며” 점차 형성된다고 주장했다. 기독교에게 중국 문화는 현실적인 ‘타자’인데, 유가가 ‘효’를 강조하는 점은 기독교로 하여금 ‘가족 윤리’의 중요성을 성찰하게 하여 “신앙”과 “친족애”를 대립시키지 않도록 하고, 도가가 ‘무위’를 추구하는 점은 기독교로 하여금 “하느님께 순종한다”는 의미를 재이해하게 하여 “인간 행동”에 대한 과도한 강조를 벗어나도록 이끈다. 이러한 “타자의 부름에 응답함으로써” 기독교의 ‘자기 신앙’은 더 풍부하고 현실적인 의미를 갖게 된다.(2)

② 차이 속에서 ‘상호 해석’ 구축: 리쾨르는 공통점을 찾는 표면적인 대화에 반대하며, 진정한 대화는 ‘차이’ 속에서 일어난다고 주장했다. 기독교와 중국의 대화는 교의적 통일을 의도적으로 추구할 필요 없이, 차이 속에서 “상호 해석”을 진행해야 한다. 예를 들어, 유가의 “생생불식(生生不息)”으로 기독교의 “하느님의 창조”를 해석하면 ‘창조’를 일회성 행동이 아니라 모든 사물을 지속적으로 육성하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고, 기독교의 “사랑의 희생”으로 유가의 “목숨을 버리고 의를 행하다”를 해석하면 ‘의’의 윤리를 초월적으로 지지할 수 있다. 이러한 “상호 해석”은 상대방을 왜곡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시각’을 통해 양측의 의미를 확장하는 것이다.(3)

(3) 현상학과 해석학의 지원: 대화를 위한 방법 제공

‘타자이론’이 대화의 입장을 제공한다면, 현상학과 해석학은 대화의 방법을 제공한다. 장-뤽 마리옹의 ‘계시 현상학’은 “넘치는 현상”(surplus phenomenon) 개념을 제시한다. 즉, 계시의 의미는 너무 풍부하여 수용자의 인식 틀에 한 번에 담을 수 없고 반드시 “지연된 현현”(delayed manifestation)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4) 이는 기독교가 중국에 전래된 후 있었던 “예의 논쟁”과 “교안 충돌”이 대화의 실패가 아니라 ‘타자 의미의 지연된 현현’이라는 정상적인 단계임을 의미한다. 유가 및 도가를 인식 틀로 하는 중국 문화는 “삼위일체”와 “원죄” 등의 개념을 즉시 이해하지 못하고 상호작용 속에서 시간을 두고 점차 소화해야 하며, 마찬가지로 기독교도 중국 문화의 ‘인’과 ‘도’를 이해하기 위해 시간이 필요하다. 이러한 “지연”은 대립의 증거가 아니라 대화의 필요한 과정이며, 양측이 차이에 대해 인내심과 개방적인 자세를 가져야 함을 요구한다.

한스-게오르그 가다머의 “지평 융합”(Horizontverschmelzung) 이론은 ‘이해’가 자기의 지평으로 타자의 지평를 동화하는 것이 아니라, 양측의 지평이 서로 충돌·융합하여 새로운 지평을 형성하는 과정이라고 주장했다.(5) 기독교와 중국의 대화는 기독교가 중국 문화를 정복하거나 중국 문화가 기독교를 개조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의 지평(예: 초월성에 대한 신앙)과 중국 문화의 지평(예: 현실 윤리에 대한 중시)이 서로 충돌하면서 최종적으로 새로운 지평을 형성하는 것이다. 이때 기독교는 ‘중국적 특징을 갖는 기독교’가 되고, 중국 문화는 ‘초월적 신앙을 수용하는 문화’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융합”은 자기를 잃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통해 자기를 보다 완전하게 만드는 것’이다.

▲ 자기 자신을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는 타자를 만날 때이다. ⓒGetty Images
▲ 자기 자신을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는 타자를 만날 때이다. ⓒGetty Images

4. 급진적 실천: ‘적을 해체’하는 신학과 정치

‘타자이론’을 기반으로 한 대화는 결국 ‘적을 해체’(dissolving the enemy)하는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 즉, 신학·정치·윤리 차원에서 “기독교와 중국이 대립”하도록 구축된 정체성을 완전히 해체하는 것이다.

① 신학적 차원: ‘신앙의 패권’을 포기하고 ‘사랑의 본질’로의 회귀: 자크 마리탱의 ‘완전한 인본주의’는 기독교의 사명이 교의적 통일 왕국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효모”가 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공익 활동·빈곤 해소·교육 등 윤리적 실천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증언해야 할 뿐, 교의 논쟁을 통해 타자를 정복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6) 이는 기독교가 “오직 나만이 진리”라는 자세를 완전히 버리고 중국 문화의 내재적 가치를 인정해야 함을 의미한다.

② 정치적 차원: ‘이데올로기 결합’을 해제하고 ‘문화 본질’로의 회귀: 근대 충돌의 핵심은 “기독교=서양이데올로기”와 “중국=반서양”이라는 이중적 결합이었다. 하지만 ‘적을 해체’하기 위해서는 양측의 공동 노력이 필요하다. 중국 사회는 “양교”(洋敎)에 대한 고정관념을 넘어 독립적인 정신적 전통으로서의 기독교적 가치를 인식해야 하며, 기독교를 단순히 정치적 침투와 연관시키지 말아야 한다. 한편 기독교는 서양 정치 세력과의 연결을 끊고 “중국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사회 건설에 참여하며, 자신이 외부 세력의 대리인이 아니라 중국 사회의 일원임을 실제 행동으로 증명해야 한다.

③ 윤리적 차원: ‘인류 공동선’을 목표로 공생 실현: ‘적의 해체’의 최종 목표는 양측이 “인류 공동선”을 추구하는 목표 아래 협력하는 것이다. 빈부 격차의 문제에 직면했을 때, 기독교는 자선 분야의 기존 경험을 발휘할 수 있고, 유가는 “대동 사회”의 윤리적 틀을 제공할 수 있으며, 환경 위기의 문제에 직면했을 때, 도가의 “도에 따라 자연을 본받다”는 사상과 기독교의 “피조물을 사랑한다”는 교의는 서로 보완할 수 있다.(7) 이때 “기독교”와 “중국”은 대립적 정체성의 이름들이 아니라, 동일한 목표를 위해 함께 나아가는 파트너가 되며, 차이는 충돌의 근원이 아니라 협력의 자원이 되어, 인류가 공동으로 직면한 난제를 해결하기 위한 다원적 사고를 제공할 수 있다.

5. 결론: ‘타자’의 빛 속에서 공생으로 나아가기

기독교와 중국의 관계는 오랜 기간 “대립—충돌”의 순환에 갇혀 있었으며, 그 근원은 “자기 중심”의 인식 논리, 즉 상대방을 배제하거나 동화해야 할 ‘타자’로 보고 평등하게 대화할 만한 파트너로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던 ‘타자이론’의 가치는 바로 이러한 고착된 논리를 깨뜨리는 데 있다. 라캉은 “자기와 타자의 공생 본질”을 보여주며 ‘타자’ 없는 ‘자기’는 단편적 존재임을 알게 하고, 리쾨르는 “대화 속에서의 자기 성장” 방법을 가르쳐 ‘타자의 부름에 응답함으로써’ 자기의 의미를 풍부하게 한다. 현상학과 해석학은 구체적인 방법을 제공하고, 마리옹의 “계시 지연”은 차이를 인내심으로 받아들이게 하며, 가다머의 “지평 융합”은 충돌 속에서 공동 성장을 실현하게 한다.

미래의 대화는 “차이 없는 통일”을 추구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차이 자체가 문명의 풍부함을 드러내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중국 문화에 맞추기 위해 의도적으로 “유학화”할 필요는 없지만, 중국어의 맥락에서 ‘사랑’의 현실적 표현(예: “이웃을 네몸처럼 사랑하라”를 유가의 “인애” 윤리와 호응시키는 것)을 찾아 신앙을 중국 사회의 생활 실천에 뿌리내려야 한다. 중국 문화는 기독교를 수용하기 위해 자기의 핵심을 포기할 필요는 없지만, “초월적 신앙”에 대한 공간을 마련하고 기독교가 정신적 위로・윤리적 안내 분야에서 가지는 독특한 가치를 인정하여 “조화하되 같아지지 않는다”(和而不同)는 이념을 실제로 구현해야 한다.

기독교가 단순히 “서양의 종교”가 아니라 중국의 토양에 깊이 뿌리내려 중국 기독교인의 정신적 추구를 담는 “중국의 기독교”가 되고, 중국 문화가 “이질을 배제하는 폐쇄적 체계”가 아니라 다원적 신앙을 수용해 다른 문명과 평등하게 대화하는 “개방적 문화”가 될 때, 양자는 더 이상 대립하는 '타자'가 아니라 상호 성장하는 ‘공생체’가 된다. 이러한 공생은 역사에 잔존해있는 충돌을 해소할 뿐만 아니라, 인류 문명의 다원적 발전에 대한 본보기가 될 것이다. 즉, 서로 다른 신앙과 문화 사이에서 정복이나 타협을 통해 공존하는 것이 아니라, 존중을 기반으로 대화를 통해 차이 속에서 공감을 찾고 상호작용을 통해 함께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미주

(1) 雅克・拉康著,严和来译,商务印书馆,2018 年版,第156页.

(2) 保罗・利科著,《解释的冲突:解释学文集》,莫伟民译,商务印书馆,2008年版,第345-350页.

(3) 保罗・利科著,《解释的冲突:解释学文集》,第360-365页.

(4) 让-吕克・马利翁著,《还原与给予:胡塞尔、海德格尔与现象学研究》,吴增定、李猛译,上海译文出版社,2009 年版,第230-235页.

(5) 汉斯-格奥尔格・伽达默尔著,《真理与方法》,洪汉鼎译,上海译文出版社,2004年版,第420-425页.

(6) 雅克・马利坦著《完整的人道主义》,周伟驰译,三联书店,2002年版,第120-125页.

(7) 王治河、樊美筠,《第二次启蒙》,北京大学出版社,2011 年版,第180-185页.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