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스칼레 카티(1550-1620), ⟪트렌트공의회⟫ (1588, 프레스코, 223.5×138.4cm) ⓒ산타마리아 인 트라스테베레 성당, 로마. 화면 앞에 교황의 의복을 갖춘 여성은 교리적 명료함과 전통을 상징하는 교회의 승리를 담고 있다.
▲ 파스칼레 카티(1550-1620), ⟪트렌트공의회⟫ (1588, 프레스코, 223.5×138.4cm) ⓒ산타마리아 인 트라스테베레 성당, 로마. 화면 앞에 교황의 의복을 갖춘 여성은 교리적 명료함과 전통을 상징하는 교회의 승리를 담고 있다.

야구는 인생과 매우 흡사한 경기다. 마지막 순간까지 결과를 예측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렇고, 잘하는 팀이라고 늘 이기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오늘 이겼다고 다음 경기에서도 이긴다는 보장이 없다. 순위는 있어도 꼴찌팀이 우승 팀을 이기는 경우도 많다. 공격만 잘한다고 이기지 않는다. 수비도 잘해야 한다. 환희와 기쁨이 좌절과 한숨과 섞여 있다. 오르막이 있지만 내리막도 길다.

야구의 묘미는 타이밍이다. 인생 역시 타이밍이 중요하다. 아무리 좋은 투수도 타이밍이 맞지 않으면 안타나 홈런을 칠 수 없다. 스트라이크 존에 들어오는 좋은 공도 헛스윙이 된다. 혹 공을 잘 골라서 절묘하게 방망이를 휘둘렀더라도 범타가 되거나 플라이 아웃이 되기도 한다. 인생에 찾아오는 기회도 타이밍과 만나지 못하면 허사가 된다.

로마가톨릭교회가 종교개혁이라는 엄청난 규모의 태풍을 만났다. 지난 천 년 동안 자처한 일이니 누굴 탓할 일도 아니다. 당시 교회로서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그때 혜성처럼 등장한 인물이 이냐시오 로욜라다. 그는 에스파냐 군인 출신으로 전쟁에서 중상을 입고 병상에서 치료하는 동안 묵상과 독서를 통하여 회심하고 성 프란시스코의 모범을 쫓아 하나님께 헌신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는 파리대학에서 유학하는 동안 몽마르트르에서 뜻을 같이 하는 여섯 명의 동지를 만나 ‘예수의 동반자’를 구성하였다.

이들은 로마 교황에게 수도회 승인을 요청하였고 마침내 바오로 3세(1468-1549)는 1540년에 예수회의 설립을 허가하였다. 로욜라는 예수회를 통하여 학교를 세우고 학생들에게 고전과 신학을 엄격히 가르쳤고, 선교사를 양성하여 파견했으며, 프로테스탄트의 확산을 저지하는 반동종교개혁의 선두에 서는 등 세 가지 면에 주력하였다. 예수회의 설립은 절치부심하던 교황청의 의지와 맞물렸다. 절묘한 타이밍이다.

로마가톨릭교회의 반동종교개혁은 트렌트공의회(1545~1563)가 주도하였다(1). 트렌트공의회는 당시 로마가톨릭교회가 안고 있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시도로 교황 바오로 3세에 의하여 이탈리아 북부 트렌트에서 소집되었다. 종교개혁의 열풍에 휘말려 있던 유럽에서 로마가톨릭교회의 교리를 정비하고 교인을 보호하며 교회 안의 부패를 근절하여 열풍처럼 일고 있는 종교개혁 기운을 저지하여 재카톨릭화하려는 목적을 가졌다. 이는 종교의 범주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정치 ․ 군사 ․ 외교 등에 영향을 미쳐 전 유럽을 폭력의 홍수에 이르게 하였다.

로마가톨릭교회의 신학과 제도를 재정비한 트렌트공의회의 원칙은 이냐시오 로욜라의 예수회가 앞장서서 실천하였다. 트렌트공의회가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를 규정했다면, 예수회는 ‘그 믿음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보여주었다. 예수회는 교리의 내면화와 실천을 위한 영성훈련과 신학 훈련에 전념했고, 그 정신을 세계에 확장하는 선교 활동에 몰두하였다.

이 물결을 타고 프란시스코 하비에르(1506-1552)가 인도를 거쳐 일본에 왔고(1549), 마테오 리치(1552~1610)가 중국에 왔다(1582). 만일 트렌트공의회가 소집되지 않았다면 로마가톨릭교회의 붕괴 가속도는 훨씬 빨랐을 것이다. 만일 이냐시오 로욜라와 예수회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반동종교개혁은 공염불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절묘한 타이밍이다.

미주

(1) 트렌트공의회는 신성로마제국에 속한 트렌트에서 소집되었다. 1547년에는 볼로냐에서 모였다. 모두 25차 회의를 하였는데 1-8차(1545-1547)는 바오로 3세가 주재했고, 12-16차(1551~1552)는 율리오 3세, 17-25차(1562-1563)는 비오 4세가 주재했다. 제1차 바티칸공의회(1869)가 소집되기까지 300년 넘도록 트렌트공의회는 로마가톨릭교회의 근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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