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크 미술은 르네상스의 균형과 조화와 통일성과는 달리 구도의 역동성과 강한 명암대비를 통한 극적인 장면을 묘사하는 꼴의 예술이다. 르네상스가 인간의 이성과 질서를 세웠다면 바로크는 그 질서를 무너뜨리고 감정과 에너지를 폭발시켰다. 감각적이며 화려하고 운동감과 감정 전달에 용이하였다.
이런 미술의 꼴이 등장한 배경으로 두어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우선 종교개혁을 통해 기존하는 로마가톨릭교회에 균열이 생겼다는 점이다. 로마가톨릭교회는 땅과 재산과 권위와 신도를 절반이나 잃었다. 기성교회로서는 더 이상 뺏기지 않고, 빼앗긴 것을 되찾기 위한 방안이 절실했다. 자기편을 결집시킬뿐만 아니라 상대편을 회유해야 했다.
그래서 성당은 더 화려하게 건축하였고, 미술품들은 자신의 교리를 설명하기에 적절해야 했고, 감동을 줄 만큼 격동적이어야 했다. 뿐만 아니라 바로크 미술은 절대 왕정의 확립과도 맞물려 있다. 교황권은 흔들렸고 국가 개념이 구체화되면서 왕의 권력이 절대화되기 시작하였다.
강력한 왕권을 강조하려는 군주들의 후원 아래 화려하고 웅장한 바로크 미술이 발전하게 되었다. 프랑스의 루이 14세의 베르샤유궁은 그 대표되는 건축물이다. 수공업과 상업에 기반을 두고 등장한 부르주아들이 귀족과 버금가는 부요를 누리며 군주를 지지한 것도 한 이유이다.
이렇듯 바로크 미술은 미술 자체의 목적보다 당시 사회적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끌려는 시도라고 본다면 이를 종교 문제에 대입하는 일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바로크 미술의 수단성과 종교의 도구화가 상이하거나 낯선 주제가 아니다.
종교가 종교 자체의 목적보다 다른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한 도구가 된다면 어떤 경우일까? 기독교 윤리학자 리처드 니버(1894~1962)가 《그리스도와 문화》에서 말한 다섯 가지 문화 유형에서(1) ‘문화의 변혁자로서의 그리스도’가 의미하는 바가 이에 해당하고, 독일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1926~2024)이 《희망의 신학》을 통하여 하나님은 단순히 하늘 위에 있는 존재가 아니라, 고통받는 자와 함께하고 역사 속에서 정의를 세우는 분이시며, 하나님의 다스림은 교회 안에만 있지 않고 사회와 정치에도 드러나야 한다는 생각과도 잇닿아 있다. 복음의 힘으로 사회 변화와 평화를 이르게 해야 한다는 미국 신학자 스탠리 하우어워스(1940~ )의 생각도 다르지 않다. 기독교가 사회 변혁의 주체여야 한다는 생각에는 사람을 존중히 여기는 기독교적 인간관과 인간의 권리를 중시하는 민주주의가 있다.
이즈음에 보수 신학과 진보 신학이 다툴 여지가 있다. 신학 입장에 따라 개인 구원과 사회 구원, 내세 구원과 현세 구원은 논쟁거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구원이란 단순히 영혼의 구원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신학과 신앙에서 말하는 구원이란 영혼과 육체를 모두 포함하는 전인적 구원이다.
성경의 구원론은 미래의 구원을 말하면서도 현세를 제외하지 않는다. 일방의 구원론은 무지의 소치이며 빈곤한 신학의 결과물에 불과하다. 물론 시대 상황이 내세와 개인 구원의 어느 한 면을 강조하는 경우는 있다. 기독교가 박해에 처했던 초대 교회 시대나 16세기 말 프랑스의 위그노 전쟁 때, 또는 우리나라의 일제 강탈기는 어쩔 수 없이 그랬다. 그때는 ‘천당 신앙’과 ‘영혼 구원’이 강조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박해 상황이 끝나고서도 내세와 영혼 구원만을 강조한다면 이는 성경을 읽는 방식이 틀렸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구원론은 취사선택, 또는 둘 가운데 답 하나를 고르는 문제가 아니다. 개인 없는 사회가 있을 수 없고 사회 없는 개인이 존재할 수 없다. 구속사 관점의 성경 읽기가 하나님 나라 관점의 성경 읽기로 확장되어야 한다.
구원의 원형으로 설명되는 출애굽 사건은 매우 정치적이고 사회적이며 공동체적 사건이다. 하나님은 이집트에서 인간적 굴욕을 느끼며 사는 히브리인들을 구원하셨다. 이집트적 가치와 질서를 못마땅히 여긴 하나님은 고통받던 히브리인들을 탈출시켜 가나안 땅에서 새로운 가치와 질서의 세상을 꾸리게 하셨다. 하나님 나라란 한 사람의 절대군주를 위하여 힘없는 다수가 굴욕을 당하지 않는 세상이고, 서로를 존중하며 더불어 사는 공생의 세상이다.
‘종교의 본질이 무엇인가’는 신학의 문제다. 교리와 예배가 신앙의 전부는 아니다. 삶이 수반되지 않는 종교 행위는 불 꺼진 등잔이며 맛 잃은 소금에 불과하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신앙의 근간으로 삼는 하나님 나라 신학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의 뜻을 ‘지금 여기서’ 이루는 것이야말로 신앙의 근간이다.
영혼이 누리는 자유와 내세에 누릴 평안을 믿음으로 고백한 신앙인이라면 하나님의 다스림을 지금 여기에서 실현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혼의 구주라는 고백과 그를 삶의 모범으로 삼아 그 길을 걷는 일은 서로 다르지 않다. 삶과 신앙을 구분 지으려는 이들이야말로 그리스도께서 경계하셨던 바리새인이 아니겠는가!
(1) 리처드 니버는 ‘문화와 대립하는 그리스도’, ‘문화에 속한 그리스도’, ‘문화 위의 그리스도’, ‘역설관계에 있는 그리스도와 문화’, ‘문화의 변혁자인 그리스도’를 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