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에서 우리는 노우 낫씽, 1920년대 KKK, 카플린 신부로 이어지는 역사적 사례를 통해, 신앙이 위기 앞에서 어떻게 ‘배제의 언어’로 전치되는지 살폈다. 그 과정에서 교회는 구원의 보편성보다 정체성의 성채를 선택했고, 복음은 보편 윤리보다 집단 결속의 표어로 축소됐다. 이번 글은 이 역사적 문법이 오늘 미국에서 어떤 방식으로 재가동되는지—즉, 극우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기독교 언어’로 번역·배포되는지를 해부한다.
‘유대-기독교 문명’이라는 방패
현대의 자국민 우선주의는 노골적 인종주의보다 ‘문명 수호’로 포장된다. 핵심은 “서구는 유대-기독교 가치 위에 세워졌고, 그것을 위협하는 외부가 있다”는 서사다. 이 외부의 표상은 주로 이슬람, 급진 세속주의, 다문화 정책으로 번갈아 등장한다. 이렇게 프레임이 잡히면, 이민·난민·종교다원주의 논쟁은 곧 ‘문명 방어’ 담론으로 치환된다.
이 프레임은 내부의 정치적 반대자도 ‘문명 위협’으로 재코딩한다. 반대자들은 더 이상 견해가 다른 시민이 아니라 ‘우리 가치를 허무는 세력’이 된다. 결과적으로 합의·절충의 정치가 아니라 ‘정체성 수호’의 동원 정치가 작동한다. 신앙의 어휘가 동원되면서, 정책 논쟁은 곧 신앙의 순결성 시험으로 격상된다.
여기서 종교어는 ‘경계 그어주기’에 최적화된다. “믿는 자/믿지 않는 자”, “신성/세속”, “진리/상대주의” 같은 이분법은 시민 다원주의의 회색 지대를 지워 버린다. 문명 수호 언어는 신앙의 공공성을 확장하기보다, 정치적 동원의 접착제로 쓰인다.
‘신정정치’의 유혹: 법 위의 계시
권위주의는 ‘질서’와 ‘안전’의 언어로 돌아온다. 여기에 “국가의 법보다 하나님의 법이 우위”라는 신정정치적 주장까지 결합하면, 민주공화국의 규범 질서는 쉽게 ‘상대화’된다. 특정 도덕률을 ‘성경적’으로 호명하고, 이를 공적 법과 제도에 직접 투사하려는 움직임이 그 전형이다.
이때 신앙의 ‘궁극성’은 곧 민주주의 절차에 대한 ‘인내의 결여’로 나타난다. 다수결, 사법 판단, 권력 분립의 제도는 신적 권위를 담보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무시되기 쉽다. 결과적으로 법치의 언어는 ‘신권(神權)의 대리’라는 수사 앞에 힘을 잃는다.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 나라의 거룩함을 세속 정권의 정당화에 전가하는 혼성(混成)이 일어난다.
교회가 그의 성육신적 겸손을 잃고 ‘율법의 철권’을 대변하기 시작할 때, 신앙의 언어는 곧 강제의 언어가 된다. 사랑과 양심의 설득이 아니라, 공권력의 동원으로 ‘거룩’을 확보하려는 길이다. 그러나 강제된 거룩은 거룩의 부정형일 뿐이다.
포퓰리즘의 세례: ‘순수한 민중’ = ‘신의 백성’
대중영합주의는 사회를 ‘순수한 민중’과 ‘부패한 엘리트’로 양분한다. 이 양분법이 신학적 어휘를 입는 순간, ‘순수한 민중’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백성’으로, ‘부패한 엘리트’는 ‘신을 모독하는 체제’로 치환된다. 선거는 신적 의지를 판별하는 준-성례가 되고, 패배는 ‘영적 전쟁’의 일시적 후퇴로 해석된다.
이 구조는 두 가지 효과를 낳는다. 첫째, 정치적 경쟁자는 곧 ‘영적 적대자’가 된다. 타협은 진리의 배신, 절충은 신앙의 변절로 낙인찍힌다. 둘째, 지도자는 ‘민중의 대리인’을 넘어 ‘역사적 사명’을 위임받은 준-구원자로 부상한다. “나만이 고칠 수 있다”는 독백은, 곧 ‘기름부음 받은 통치자’의 자기서사와 공명한다.
여기에 과거 회귀의 정서가 끼어든다. 신앙이 사회 중심에 있던 ‘황금시대’에 대한 향수는 현재의 갈등을 정화(淨化) 프로젝트로 오인하게 만든다. 복잡한 현실은 단순한 도덕극으로 축소되고, 공적 삶의 회색조는 흑백의 심판으로 대체된다.
플랫폼, 알고리즘, ‘영적 전쟁’
오늘의 ‘신정정치적 포퓰리즘’은 디지털 환경에서 가속한다. 폐쇄적 미디어 생태계는 서로의 확신을 강화하는 ‘종교적 에코챔버’를 만들고, 알고리즘은 분노를 증폭하는 콘텐츠를 우선 배달한다. 그 결과, 신앙의 해석 공동체는 곧 정치적 동원 공동체로 기능을 전환한다.
‘영적 전쟁’의 은유는 여기서 결정적이다. 현실의 정책 갈등이 선/악의 전투로 번역되면, 사실 검증과 절차적 합의는 영적 해이에 불과해진다. 선거·재판·행정은 ‘하나님의 뜻을 가리는 세속 권력’의 음모로 재구성되고, 폭력적 언행은 ‘의로운 분노’로 정당화된다. 신앙의 내면 성찰은 ‘적과의 전선’ 앞에서 사치가 된다.
교회가 공적 토론을 신앙검증의 과정으로 바꾸는 순간, 복음의 언어는 공공선을 위한 공명판이 아니라 내부 결속의 암호가 된다. 신앙은 ‘세상을 위한 생명’에서 ‘자기를 지키는 갑옷’으로 축소된다.
한국 교회를 위한 거울 질문
이 문법은 한국에서도 낯설지 않다. ‘교회의 자유’가 ‘배제의 자유’로 전치되지 않게 하려면, 우리는 신앙의 언어가 언제 정치의 언어로 번역되는지부터 자문해야 한다. 아래의 질문은 그 경계선을 가늠하기 위한 최소한의 나침반이다.
첫째, 나는 ‘문명 수호’ ‘국가 정체성’ 같은 거대 담론으로, 실제로는 소수자·이민·젠더 이슈를 배제하는 정책을 포장하고 있지 않은가.
둘째, 하나님의 주권을 말하면서, 민주공화국의 절차(다수결·법치·권력분립)를 ‘부차적’으로 격하하고 있지 않은가.
셋째, ‘순수한 성도’와 ‘타락한 엘리트’의 이분법을 신학적 언어로 신성화하며, 타협과 숙의를 배교로 낙인찍고 있지 않은가.
넷째, 교회의 강단·채널·플랫폼이 정보의 다양성을 차단하는 ‘신앙형 에코챔버’로 변해 있지는 않은가.
다섯째, ‘영적 전쟁’의 은유가 회개와 사랑의 언어를 압도해, 상대를 파괴하는 수사로 남용되고 있지 않은가.
다음 글에서는 이 문법이 어떻게 트럼프 현상과 맞물려 폭발적 정치 효과를 냈는지, 그리고 그 연합이 왜 공화당 내부 질서를 뒤흔들었는지 분석한다. 동시에, 한국 교회가 ‘정치적 구원자 서사’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어디서 브레이크를 밟아야 하는지도 짚어보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