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길, 우리의 길
요한복음 12:1-8
정원진 목사 (서울제일교회)

본문이 던지는 화두(話頭) : 발

사순절 다섯째 주일인 오늘, 교회력에 따른 성경일과표가 제시한 복음서 본문은 요한복음 12장 1절로 8절입니다. 이본문은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드린 이야기입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마태복음(16:6-13)과 마가복음(14:3-9)에도 나옵니다. 그런데 몇 가지 차이점이 있습니다. 사건이 일어난 장소가 베다니 ‘나사로의 집’이 아니라 ‘시몬의 집’이라는 것, 향유를 부은 여인이 ‘마리아’가 아니라 ‘이름 없는 여인’이라는 것, 그리고 향유를 부은 곳이 ‘발’이 아니고 ‘머리’라는 것 등이 그것입니다. 성경학자들은 이 차이점들 중 마리아가 ‘발에 향유를 붓고 머리카락으로 닦아드린 행위’가 당시의 상식이나 관습에서 많이 벗어난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왜 머리가 아닌 ‘발’에 향유를 붓고 머리카락으로 닦아드렸다고 증언하고 있을까요? 이 행동에 담긴 뜻은 무엇일까요?

그러고 보면 요한은 마태, 마가, 누가 모두가 전하고 있는 최후의 만찬 이야기(마 26:26-29, 막 14:22-25, 눅22:15-20)를 빼버리고, 그 자리에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이야기를 싣고 있습니다(요 13:1-20). 여기서도 ‘발’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은 왜 다른 곳이 아닌 하필 발을 씻겨주셨을까요? 예수님의 이 행동에 담긴 깊은 뜻은 무엇일까요?

발은 우리 몸의 가장 밑바닥에 위치하면서 체중을 받치고 땅을 디디는 역할을 합니다. 또 그 발을 번갈아 옮기는 동작을 통해서 우리는 비로소 걸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걸음걸음은 결국 ‘길’이 됩니다. “눈 덮인 들판을 걸을 때 아무렇게나 걷지 마라. 오늘 남긴 내 발자국은 뒷사람의 길이 되리니”라는 서산대사의 선시(禪詩)가 이를 잘 나타냅니다. 따라서 저는 ‘길’이라는 단어를 묵상해 봄으로써, 여러분들과 함께 ‘발’에 향유를 붓고 ‘발’을 닦은 행위의 답을 찾고, 은혜를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무수한 발자국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길 복음서에 쓰인 ‘길’이라는 단어의 헬라어 원어는 대부분 ‘hodos’입니다. 이 ‘hodos’란 단어는 영어로는 way, path, road 등으로 번역됩니다. 우리말로는 각각 길, 통로, 도로 등으로 옮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셋 모두가 길을 뜻하기는 하지만 way나 path와 road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way나 path는 ‘밟아서’ 생긴 길을 가리키고, road는 ‘토목공사’를 통해 생긴 길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이 둘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성경구절이 마태복음 7장 13-14절의 말씀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거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그 길이 널찍하여서,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너무나도 좁고, 그 길이 비좁아서, 그것을 찾는 사람이 적다.” 이 말씀을 보면 ‘넓은 문’과 ‘넓은 길’ 그리고 ‘좁은 문’과 ‘좁은 길’을 같은 뜻으로 쓰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넓은 문, 넓은 길은 무엇이었을까요? 로마제국에는 유명한 것이 많았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길’이었습니다. 

그 길은 에그냐티아 대로라고 불린 ‘도로’였는데, 이 도로는 로마제국이 세계를 정복하고 지배하기 위해 건설한 ‘군사도로’였습니다. 사방팔방으로 뚫린 이 군사도로는 약소민족들의 고혈을 빨아들이는 착취의 통로 역할을 했습니다. 이런 뜻에서 당시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했던 것입니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삼킬 때도 제일 먼저 관심한 것이 바로 철로를 놓고, 길을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독일의 히틀러 역시 세계 정복을 전제로 광범한 아우토반을 만들었으며, 그 길을 타고 유럽을 침공했습니다. 이렇듯 역사적으로 볼 때 넓은 길, 즉 마차나 자동차가 이동하기 편하도록 토목공사를 통해 인위적으로 만든 도로, road는 약한 나라들을 갈취하려고 강자들이 만든 것이었습니다. 이에 비해 ‘도로’가 아닌 그냥 ‘길’, way나 path가 있습니다. ‘길’이란 것이 처음에 어떻게 생겨났을까요? 길은 토목공사가 아니라 사람들의 무수한 발자국들에 의해 생겨났습니다. 산에 난 조그만 오솔길이나, 여러분이 사는 아파트 화단에 나 있는 지름길을 연상하면, 제 말이 무슨 뜻인지 금방 아실 것입니다. 

제가 사는 아파트 화단에는 지름길이 나있습니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갈 때, 보도블록으로 만들어 놓은 길로 가는 것 보다, 잔디 위를 가로질러 가는 것이 가깝고 편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잔디가 심겨져있던 곳이었는데, 한 사람이 그리로 걷고, 다른 사람이 그리로 또 걷고, 그렇게 계속해서 여러 사람들이 그리로 걷고 또 걸으니까, 결국 그곳에 있던 잔디는 다 죽고, 땅이 다져지고 다져져서 길이 되었습니다. 그 길은 문자 그대로 footway, ‘발로 밟아서’ 생긴 길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렇듯 길은 사람들이 수없이 왕래함으로써 생긴 무수한 발자국들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길’(道)은 곧 ‘맥’(脈)입니다. 발자국들의 이어짐, 사람들의 이어짐이 길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나 혼자 만이 아니라, 내 뒤에 누군가가 내 발자국을 포개어 걸을 때, 그리고 그것이 끊임없이 계속될 때, 비로소 길이란 것이 탄생하고 유지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길’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도 아니고, 어떤 신비한 계시를 통해서 주어진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걸어간 발자국들에 의해 이룩된 것입니다. 구약의 믿음의 조상들과 사사 및 예언자들, 신약의 예수님과 사도들, 그리고 교회사의 이름 없는 수많은 순교자들과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역사의 매 순간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순종하며 걸어왔던 그 발자국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길은 다져지고 다져졌던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길은 명상의 대상이 아니라, 몸으로 가고 삶으로 살아내야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작별인사자신의 몸과 삶으로 이 길을 가장 철저하게 걸어간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길’을 설명하거나 개념화한 일이 전혀 없습니다. 복음서는 단지 길을 가는 예수님을 서술하고 있을 뿐입니다. “나는 진리의길이요 생명의 길이다”(요 14:6)라고 말씀하신 그분은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나는 내 길을 가야 한다”(눅13:33)고 하시면서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셨습니다. 

또 길 자체이신 그분은 앞장서 가시면서 자신이 간 그 길을 따라오라고 제자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명령하십니다. 공관복음서의 예수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마 16:25, 막 8:34, 눅 9:23)는 명령으로 당신께서 걷던 그 길을 우리도 따라서 걸어야 함을 힘주어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요한복음에는 이런 명령이 없습니다. 대신 상징적인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 줍니다. 그것은 앞서 말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이야기’(요 13:1-20)입니다. 공관복음서에는 예수님이 체포되기 전날 밤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나눈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는 이 이야기가 쏙 빠져 있습니다. 대신에 그 자리에 ‘예수님께서 마지막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른 수건으로 닦아주신’(요 13:5)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왜일까요? 예수님은 다른 데도 아니고 왜 하필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을까요?

저는 이런 상상을 해 보았습니다. “제자들과의 마지막 밤,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죽 둘러보았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떠난 후 그 제자들의 발이 밟아야 할 ‘길’을 생각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걸어온 길, 그리고 그 길을 뒤따라가야 할 제자들의 ‘발’을 생각했습니다. 제자들이 걸어갈 그 발자국들, 그리고 그 뒤를 이을 또 다른 무수한 발자국들, 그것들을 통해 하나님의 길이 다져지고 다져져서 마침내는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고야 말텐데…. 아마도 예수님은 새 하늘 새 땅을 일구어 낼 그 발들을 하나하나 어루만져 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극히 부드럽고, 지극히 온유하고, 남김없이 다 바치는 섬김으로 제자들과 작별인사를 나누었던 것입니다.”

마리아의 작별인사

이제 본문으로 돌아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며 저들과 작별인사를 나누시기 닷새 전에, 나사로의 누이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에 매우 값진 나드 향유를 한 근을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의 발을 닦아드렸습니다. 13장에서 예수님이 제자들과 작별인사를 나누기에 앞서, 12장에서 마리아가 먼저 예수님과 작별인사를 나누었던 것입니다. 이는7절의 “그대로 두어라. 그는 나의 장사 날에 쓰려고 간직한 것을 쓴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그렇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장례를 미리 준비한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권위자 브라운에 따르면 살아있는 사람에게는 발에 향유를 붓지 않습니다. 장례 때 죽은 사람의 몸에 향유를 바르기 전에 의례적 행위로 먼저 발에다 향유를 발랐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것은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애도하는 장례행위였습니다. 

나아가 유대 풍습에서 여인들은 애도할 때 머리를 풀었습니다. 마리아가 머리를 푼 것도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애도하는 행위입니다. 즉 마리아가 ‘발에 향유를 붓고 머리카락으로 닦아드린 행위’는 사랑하는 스승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하고, 그 장례를 미리 준비하려는 사랑의 행위였던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과 작별하면서 지금껏 뚜벅뚜벅 한 길을 걸어왔던 예수님의 길, 그리고 앞으로 며칠간 더 걸어가야 할 수난의 길, 십자가의 길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을 걷느라고 애쓰고 수고한 예수님의 발을 닦아드리며 장례를 준비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속으로 말했을 것입니다. “주님,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제 아버지 옆에서 편안히 쉬십시오. 주님이 걸었던 그 십자가의 길을 이제는 제가 뒤이어 걷겠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하늘에서와 같이땅에서 이루어지게 하는 일에 더욱 매진하고 헌신하겠습니다.”라고 다짐했을 것입니다. 

우리의 길

그런데 오늘 여기 우리는 어떻습니까? 오늘을 사는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은 마리아의 다짐한 그 길을 걷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어루만져 주고 닦아주신 그 발로 하나님의 길을 다지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남기고 가신 그 발자국위에, 사도들이 걸어간 그 발자국 위에 내 발자국을 포개며 걷고 있습니까? 혹시 예수 그리스도께서 앞장서 가신 그 길이 아니라 다른 엉뚱한 길－좁은 길이 아니라 넓은 길을 걷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순절에 우리는 스스로에게 이 질문을 던지고 진지하게 답해야 할 것입니다. 사순절은 갈릴리부터 예루살렘까지 예수님과 함께 여행하면서, 주님이 죽으시고 부활했듯이 우리도 옛 사람에 대해서 죽고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도록 준비하는 기간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다.” 하셨습니다. 달리 말하면 “예수님은 진리의 길이요, 생명의 길이기에 그 길을 따라 걷지 않으면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 십자가 길을 걸어야 진리와 생명에 도착할 수 있고, 우리도 부활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그 길을 함께 걷자”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 모두 이런 하나님의 초청에 ‘아멘’으로 화답하고, 오늘부터라도 예수님께서 남기고 가신 발자국 위에 우리의 발자국을 기꺼이 포개며 걷기를 소망합니다. 우리가 가는 그 길에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마 28:20)이라고 약속하신 주님께서 끝까지 동행해 주실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