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교계·교회 칼럼 연재
무엇이 수재민을 구호하는가<이옥희 선교사 칼럼>
이옥희 선교사 | 승인 2016.02.29 11:26
2015년 첸나이 홍수 (사진 제공 : 뉴스한국)

1997년, 선교사로 첫발을 디딘 그 해 11월에 첸나이에 집중폭우가 내렸다. 처음 폭우가 쏟아지고 하늘이 개었을 때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지만 폭우로 인해 피해를 입었을 강변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집에서 가까운 강 쪽으로 갔다. 

사람들이 물에 잠기고 있는 코코넛 집에서 크고 작은 보따리를 꺼내들고 줄줄이 피난을 나오고 있었다. 나는 도로 변에 있는 큰 힌두사원이 마땅히 마당에 텐트를 치고 수재민들을 받아 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웬걸 서둘러서 사원의 문을 닫아 버리는 것이 아닌가! 나는 서투른 영어로 문을 닫는 사람에게 “왜 문을 닫느냐?” 고 물었다. 그러자 한 사람이 손으로 떼 지어 올라오는 수재민들을 가리켰다. 나는 그의 손짓을 이해하지 못해서 옆에 있는 똑똑해 보이는 청년에게 다시 질문을 던졌다.  

“왜 문을 닫아요. 이 인근에서 수재민들을 받아서 보호할 수 있는  가장 큰 터는 이 템플 밖에 없는데요.”  청년이 대답을 했다.

“저 사람들은 전생에 죄를 많이 지은 죄인이라 부정 타는 계급에 속해요. 부정 타는 사람들이라서 저들이 템플에 들어가면 템플이 부정을 타요. 그래서 문을 닫는 거지요.” 
나는 청년의 대답 한 마디로 힌두이즘의 정체를 깨달았다. 

2009년 9월 말과 10월 초에 안드라푸라데쉬주 내륙에 위치한 데칸고원 일대가 폭우로 인하여 바다로 변했다. 우리 구호 팀은 물속에 고립된 마을들을 찾아다니며 구호를 했고 나는 쿤드강을 건너다 하마터면 도도하게 흐르는 강물에 휩쓸릴 번도 했다. 구호가 끝나고 한 참 뒤에 그 마을을 다시 찾았을 때 어느 노인이 나를 가리키면서 “그 때 저 사람이 와서 우리를 살려주었다.”는 말을 하며 내 발에 입을 맞추었다. 

2009년 10월은 미국 경제 불황의 여파로 한국 돈의 가치가 형편없이 떨어져 환율 차로 인한 손실이 너무 커서 선교를 사역을 계속해야 하는지 그 여부를 놓고 고민을 하고 있을 때라서 발등의 불을 먼저 꺼야 해서 남의 문제를 돌아볼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마을과 집들이 물에 잠겨서 달릿 교우들이 열흘째, 보름째 굶고 있다는 말을 재차 들었을 때 굶주림으로 고통당하는 형제자매들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결국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을 모아서 수해현장으로 떠났고 나눔을 시작하면서 더 많은 나눔을 위해서 내 여권과 카드를 잡히기로 결심을 했다. 카드를 사용한다는 것은 빚을 지는 것인데 나로서는 참으로 두려운 일이었다.

내 비장한 결심이 성령님의 감동감화를 통해서 한국 교우들에게 전달되었는지 둘째 날 현장으로 가는 차 안에서 한국에서 온 전화를 받았다. 대구에 사시는 어느 집사님께서 새벽기도회에 가서 기도하시다가 환상 속에서 나를 보았는데 내가 너무 간절하게 기도하고 있어서 문제가 있다는 직감을 하셨고 그 문제가 무엇인지를 확인하고 싶어서 전화를 거셨던 것이다. 
집사님은 전화 후에 성령님의 감동으로 1000만원을 구호헌금으로 바로 송금해 주셨다.

1차 구호를 마치고 돌아와서 사진과 함께 나눔에 대한 소식을 전했다. 생각 밖에 나눔의 손길이 폭발적으로 답지해서 우리는 2차 구호를 하러 다시 들어가야 했고, 이어서 3차 구호를 마친 뒤에는 남은 헌금을 뉴델리 고아원과 네팔교회에 보내기 까지 했다. 

수재민들을 구호하면서 고통을 당하는 생명을 구하는 것이 참으로 보람 있고 가치 있는 일이며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일이라는 것을 구구절절 체험을 했기 때문에 나는 구호하고 나누며 섬기는 일에 겁 없이 뛰어들었다. 처음에 비록 작은 것으로 시작할 지라도 항상 풍족하게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을 한 나는 모금활동에 늘 자신만만했다. 

그러나 작년 12월, 첸나이 수재민 구호를 위해서 모금을 시작할 때는 나의 선 자리와 나의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는 의식 때문에 위축이 되었고 나의 내면에 갈등과 의심이 생겼다. 수재민들을 위해서 긴급모금을 해야 하는데  불안하고 불편했다.

아프리카로 떠나기 전 첸나이 희망발전소에서 온 연락을 받았다. 폭우로 인해서 탐바람 일대의 많은 집들이 물에 잠겨서 수재민들이 우리 센터로 몰려오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팔을 벌려서 홍수로 고난당하고 있는 인근의 모든 사람들에게 쉼터를 제공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주시오’ 라는 메시지를 남기고 아프리카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동부 아프리카 지역에 속하는 르완다의 루씨지에 있는 위클리프신학교에서 강의를 마친 후에 콩고 부냐끼리, 치고마에서 부카뷰를 거쳐서 키브호수의 다리를 넘어서 힘겹게 다시 르완다로 돌아왔다. 12월 7일 오후 늦게 르완다신학교에 도착했는데 와이파이가 터져서 카톡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카톡방을 열어보니 첸나이 수해소식이 홍수처럼 밀려들어왔다. 

수해 사진을 보는 순간 무디츄르 주민들과 시장 사람들, 아가페교회 성도들, 아뿌르교회 교우들 그리고 라마찬드라야 뿌람과 수남부꿀람 마을도 떠올랐다. 시장과 길거리에서 마주쳤던 사람들, 마을과 교회를 방문하여 만났던 사람들, 함께 기도하고 예배를 드렸던 사람들, 교회 건축 중에 만났던 사람들이 집중 호우로 한 달 정도를 집에 갇혀서 배고프고 목마르며 헐벗고 지냈다는 글을 읽는 순간 눈물이 펑펑 샘솟았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 고통과 고난 속에 있는데 나 혼자 멀리 아프리카에 있다는 사실이 원망스러워 졌다. 

홍수로 집이 물에 잠기고 헐벗고 굶주리고 있는 달릿 교우들의 고통이 가슴으로 오르르 밀려들어 왔다. 절박한 마음으로 모금을 하기로 결심하고 카톡에 사진을 올리고 글을 쓰려는 순간 마음 한 편에서 의심하는 소리가 들렸다. 두 명의 내가 치열하게 싸웠다. 

“이옥희 너는 인도 현장을 떠난 지 1년이 지났다. 너는 지금 수해 현장에 있지 않고 아프리카에 있어. 누가 네 말을 듣고 수해헌금을 하겠니? 아무리 너의 마음이 긴절하여도 너를 둘러싸고 있는 외부 상황은 이미 달라졌어. 너의 지금 인도 선교사로서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수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돼. 괜히 안타까운 마음으로 시작했다가 모금이 되지 않으면 네가 얼마나 주눅 들고 실망하겠니? 만약에 안 될 경우에는 망신스러우니 그만 두어라.”

나는 나를 염려하는 소리 앞에서 조용히 침묵했다. 자의든 타의든 간에 선교현장에서 1년 이상을 떠나 있는 내가 무능하고 초라한 것이 사실이었고 수해현장에 있지도 않으면서 수해헌금을 모금하려고 하는 내가 무식하고 어리석음이 분명했다.

“하나님, 맞습니다. 현장을 떠난 지 1년이 지난 선교사의 이야기를 누가 듣겠습니까? 수해현장에 없으면서 수해헌금을 모금을 하려고 하는 제가 세상 물정을 모르는 순진한 바보지요.” 
나는 눈물을 훔치면서 카톡을 접었다. 

“100만원도 모금이 어려울 거야. 연말연시에, 경제 불황에, 더구나 내가 현장에 없으니 누가 관심을 가지겠어.” 

나는 모금을 하지 않는 쪽으로 마음을 정했다. 그러자 갑자기 마음이 너무 불편하고 불안해져서 집안에 가만히 앉아 있기가 어려웠다. 나는 길거리를 배회했다.

“사랑하는 딸아! 나는 네가 구하는 것을 공급하는 하나님이다. 너의 능력이나 상황을 보고 공급하는 것이 아니라 너를 내 일꾼으로 쓰기 때문에 공급하는 것이다. 너의 위치나 현실을 보면 모금이 불가능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너 자신을 보고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고통에 빠진 나의 자녀들을 외면해서 너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는 나의 뜻을 방해하지 말아라. 나는 고난 중에 있는 내 자녀들을 너의 눈물을 통해서 위로하려고 한다.”

할렐루야!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두려움이 변하여 감사가 되었고 의심이 변하여 확신이 되었다. 나는 르완다 루씨지 신학교 기숙사 방에서 울며 기도하며 20여명의 사람들에게 카톡으로 사진과 구호 물품에 대한 안내를 했다. 그러나 내가 수해 현장에 있지 않다는 사실 때문에 여간 조심스럽지가 않았다. 자칫 잘못하면 남의 일에 끼어서 생색을 낸다는 말을 들을 수도 있어서 많은 절제와 지혜가 필요했다. 수재민 구호는 시간을 다투는 것이기 때문에 모금을 기다릴 수가 없어서 사무실에 내 개인 후원금 게좌에서 우선 송금해달라는 요청을 했다. 많은 수재민이 발생한 상황에서 아무리 돈이 있어도 생필품을 바로 구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이미 몇 차례 체험을 했기 때문에 모금의 여부와 상관없이 먼저 송금을 하게 했다. 

2009년 수재민과의 나눔 때는 하늘에서 맛나가 펑펑 쏟아지는 느낌을 받았는데 금번 12월에는 작은 샘에서 샘물이 조금씩 솟는 느낌이어서 조바심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 물이 꾸준히 솟아올라서 하나님께서 한 달 만에 2500여 만 원을 채워주셨다. 

첸나이 수재민과의 나눔 헌금에 개인 70명과 10개 교회, 1개 여신도회, 1개 구역회가 참여를 해서 그 귀한 헌금으로 1518세대에게 2주일 동안의 식사할 수 있는 쌀, 식용유, 밀가루, 빵, 비스켓, 설탕 등의 주식과 부식을 나누어 주었으며 담요와 비누, 노트, 일회용 그릇들을 나누며 가옥 수리도 조금씩 할 수 있도록 배려를 했다. 1월부터는 물속에 사라진 성경책과 교과서, 노트 등의 학용품과 홍수 후에 발생하는 질병들에 대비하기 위하여 의약품을 나누는 일에 주력하고자 하며 새로운 후원을 기다린다. 

하나님은 무엇으로 수재민들을 구호하시는가?
만 18년 선교사로 지내면서 크고 작은 많은 구호활동에 참여를 했다. 지금까지 내가 조건 없이 나눔과 섬김의 장으로 뛰어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써주셨기 때문이다. 내 경험으로 보면 사람을 구호하는 것은 사람의 능력도 아니고 지위도 아니고 특수 상황도 아니었다. 사람들의 가지고 있는 부도 아니고 지식도 아니었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네트워크도 사람들의 도덕성과 윤리의식도 아니었다. 고난당하는 자들을 진정으로 구호하는 것은 사람들의 가슴으로 넘쳐흐르는 하나님의 눈물이었다. 하나님의 눈물이 사람들의 심장으로 뚝뚝 떨어질 때 비로소 사람들은 견딜 수 없는 감동과 아픔으로 자기 마음을 열고 지갑을 연다. 

콩고에서 돌아와서 카톡을 열고 첸나이 수해 소식과 사진을 보면서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떨고 있는 형제자매들을 위해 흘린 나의 눈물은 하나님의 눈물이었다. 

 

<필자 소개>

필자 이옥희 선교사

영주중앙교회, 군산한일교회, 베다니집 등에서 시무.한신대학교, 동대학원 졸업

1997년 전북서노회 파송 인도 선교사로 출발.

1999년 기장총회 파송 남인도 교단 선교동역자로 데칸고원 라열라씨마 일대에서 달리트 선교에 동참해 오늘에 이름.

2007년 7월 13일 전 인도 신학 협회로부터 명예신학박사 학쉬를 수여.

비전아시아미션 창립 이사(2005년 11월 30일)이자, 비전아카데미(지도자훈련원) 설립 이사(2006년 6월)

인도선교 10주년 기념시집 <비아돌로로사>, 선교 17주년 기념에세이 <선교사는 거지다>의 저자

<후원계좌>

국민은행 520702-01-176813 이옥희

이옥희 선교사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김상옥로 30, 402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 홍인식  |  편집인 : 이정훈  |  청소년보호책임자 : 홍인식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23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