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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과 하느님의 정의<김명수 칼럼>
김명수(경성대명예교수, 충주예함의집) | 승인 2016.03.29 11:40

그래서 여러분은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주님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우리는 이 일의 증인입니다.(사도3:15; 새번역)

but put to death the Prince of life, the one whom God raised from the dead, a fact to which we are witnesses.(Acts3:15; NASB)


봄은 해마다 찾아옵니다. 봄이 생명의 상징이라면, 겨울은 죽음의 상징입니다. 겨울은 대지를 얼어붙게 하고 생명을 땅 밑에 가두어놓지요. 겨울이 오래 지속된다면, 아마도 생명을 품고 있는 씨알들의 생명은 근절되고 말 것입니다. 허나, 봄은 어김없이 찾아옵니다. 봄이 되면 땅 속에 움츠리고 있던 씨알의 생명은 굳은 대지를 밀치고 땅위로 나온다. 봄은 생명의 계절입니다. 

지구생태의 역사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빙하기(氷河期)가 있었습니다. 그 기간은 5-6만년에 걸쳐 계속되었는데요. 지구의 빙하기에는 봄은 없었고, 추운 겨울만이 지속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빙하기가 거치면서 지구 표면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어요. 그 변화로 인해서 지구에는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이 생겨났고요, 정기적으로 봄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씨알의 생명이 다시 움트기 시작하였지요. 사시사철 돌아가는 자연의 성실함에는 쉼이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동아시아의 고전인『중용』에서는 지성무식(至誠無息)을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연의 성실함을 본받아 인간도 성실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빙하기는 지구생태계에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인류역사에도 오랜 빙하기가 있었지요. 물론 인류역사의 빙하기에도 태양은 있었습니다. 허나, 역사의 봄은 오지 아니하였지요. 인류역사의 빙하기는 언제였을까요? 물리적인 힘을 독점하고 있는 강자들이 사회의 소수자들을 지배하는 시기였습니다. 권력자들이 저항세력을 향하여 휘둘렀던 마지막 무기는 총과 칼이었는데요. 총칼로 사람의 목숨을 위협하면서 정권을 지탱해갔던 것입니다.   

죽음과 죽임은 다르지요. 모든 개체생명체는 태어나면서 죽음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한 생명으로 태어나는 순간 이미 죽음이 내재되어 있지요. 태어나서 잠시 머물다가 죽는 생주멸(生住滅)은 시공 속에 살아가는 개체 생명이 겪어야 하는 운명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죽음을 향해 가는 존재”(Sein zum Tode)로 인간을 정의한 하이데거의 명제는 타당성을 지닌다고 볼 수 있어요. 아마도 죽음이라는 사태가 없었다면, 생명의 진화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진화는 개체생명의 생멸(生滅) 과정에서 일어나는 것이지요. 죽음은 자연의 순리입니다. 거역하거나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순응하고 받아들여야 할 사태이지요.  

죽임은 이와 다른데요. 죽임은 사회적 모순의 결과입니다. 따라서 사회적 모순을 제거하고요. 정의로운 사회 시스템을 세움으로써 죽임의 문제는 해결할 수 있고요. 해결되어야 합니다. 죽임은 전적으로 인간의 책임 문제이지요.  

아무리 정의와 사랑을 외쳐도, 아무리 저항을 해도, 죽임 앞에서 모든 인간은 굴복하게 되어 있다는 것을 권력자들은 압니다. 진리는 반드시 이긴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이다. 인과응보(因果應報)다. 제아무리 떠들어대도 죽임의 공포 앞에서는 모두 수그러든다는 사실을 권력자들은 잘 알고 있기에 이를 권력유지에 이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인류역사의 빙하시대에 예수가 태어났어요. 그가 태어난 팔레스타인은 로마 식민지였습니다. 갈릴리에서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자란 예수는 청년기에 접어들게 되자, ‘사는 게 이게 아닌데’라는 회의를 느끼게 되었지요. 서른 살 쯤 되었을 때, 예수는 가정과 고향을 버리고 출가(出家)를 결행하게 되지요.

당대 이름을 떨치고 있던 예언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후, 예수는 갈릴리호수 주변의 저자거리에 나타나 가난하고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하여 하느님이 통치하실 새 세상이 다가왔다고 했어요. 이제 사탄이 지배하는 고통의 세상은 지나갔고, 하느님의 정의가 통치할 새 세상이 동터오고 있다고 설교했어요. 기나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고 있다고 설교했어요. 그러니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희망을 가지라고 했습니다. 마음을 바꾸고 새롭게 하여 임박한 하느님의 통치를 준비하는 삶을 살라고 설교했습니다.  

하느님의 정의로운 통치가 동터오고 있다는 예수의 복음 선포는 가난하고 힘들게 살아가는 갈릴리농촌의 소수자들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습니다. 예수는 유대사회의 변두리에서 죄인 취급당하며 살아가고 있는 소수자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며 그들과 동고동락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러한 예수의 새 세상 운동은 소외계층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희망이요 복음이었을 것입니다. 헌데,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기득권을 위협하는 정치적 반동세력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예수가 살던 시대에는 로마의 식민통치에 불만을 품고 독립운동을 벌인 집단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그 중에 엣세네파가 있었는데요. 이들은 항거의 표시로 사람들이 살지 않는 유대사막의 동굴로 들어가 은둔하며 수도생활을 했습니다. 

원래 엣세네파의 지도자들은 예루살렘 성전에 있던 제사장들이었는데요. 이들은  죄를 용서해 준다는 명목으로 동물의 피를 드리는 성전의 희생 제사를 거부했어요. 생명은 그 자체가 존귀한 것이기 때문에, 어떤 생명이든 결코 죽여서는 안 된다는 생명공경(生命恭敬) 사상을 신앙생활의 중심에 두었습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채식주의를 실행했습니다.  

젤롯파도 있습니다. 이들은 로마의 식민통치에 맞서 폭력으로 저항했던 테러집단이었는데요. 그들은 극우적인 민족주의 세력이었어요. 폭력으로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있는 로마군을 몰아내려고 했습니다. 기원후 70년 젤롯파는 몇 개월 동안 예루살렘에서 로마군을 몰아내고 독립을 쟁취했던 때도 있었습니다. 허나 로마 장군 티투스가 이끄는 로마병사들에 의해 성전을 불타 없어지고 예루살렘 도성은 초토화되고 말았지요. 당시 로마는 독립운동에 가담했던 유대인 7000명을 십자가에 처형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마가복음 3장 6절 이하에서는 예수께서 회당에서 손 비틀어진 사람을 고치는 장면이 나오지요. 그 날은 안식일이었는데요. 옆에서 이 장면을 보고 있던 바리새파는 회당에서 나가 헤롯관원과 함께 예수를 잡아 죽일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새 세상 운동 초기부터 죽음의 그림자가 예수를 따라 다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갈릴리농촌을 중심으로 펼쳤던 예수의 새 세상 운동은 대략 1년 정도 걸렸던 것으로 보입니다. 갈릴리 선교를 마치자 예수는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요. 선교현장을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에로 바꾼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자마자 예수께서 제일 먼저 하신 일 무엇인가요? 온갖 비리와 부정부패로 얼룩진 성전을 깨끗하게 청소하는 일이었습니다. 성전은 본래 어떤 장소인가요? 경건한 장소이지요. 모든 사람이 와서 조용히 기도하는 곳이어야 하지요. 헌데 희생 제사를 드리는데 필요한 비둘기, 염소, 송아지를 팔고 사는 사람들로 득실거렸습니다. 돈 바꾸는 환전상들로 정신이 없었어요. 거룩한 곳이어야 할 성전이 시장바닥이 된 것이지요. 

이러한 장면을 보고 예수는 분노했습니다. 채찍을 들고 장사하는 상인들을 성전 밖으로 내쫓았어요. 환전상들의 상을 뒤엎었습니다. 성전 안에서 소요가 일어난 것입니다. 경비병들이 오고, 성전 관리책임자들이 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체포했습니다. 예수를 잡아 죽이면 그를 따르던 민중도 뿔뿔이 흩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겠지요. 성전 관리자들은 예수를 로마총독 빌라도에게 고발했습니다. 유대인의 왕을 참칭(僭稱)하고 갈릴리 농민들을 선동한 반란죄로 걸었습니다. 예수는 결국 로마의 통치 질서를 어지럽히는 정치범에게 해당되는 최고형인 십자가형에 처해지지요.    

마태복음 16장 21절 이하를 보면, 예수께서 비장한 각오로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장면이 소개되고 있어요. 그는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수난을 당하고 죽게 될 것을 밝히십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이를 말립니다. "당신은 절대로 죽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자 예수는 베드로를 향하여 무어라고 답변하시나요?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 한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처형되는 순간에도 초자연적超自然的인 기적을 기대하였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하느님 아들의 전능성을 발휘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와 이스라엘의 왕으로 군림하실 것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바라보던 사람들은 "당신이 지금이라도 거기에서 내려오면 내가 믿겠다"고 말하지요. 하느님의 아들이니 네가 천군천사를 동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면 메시아임을 믿겠다는 것이지요. 허나, 예수께서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초자연적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 처형 현장에는 강자와 약자, 죽는 자와 죽이는 자의 비정한 현실이 전부였습니다.  

제자들은 도망갔고요. 십자가를 바라보던 구경꾼들은 예수의 무기력한 모습을 보고 실망한 나머지 그를 조롱하기도 했어요. 예수는 그렇게 힘없이 죽어갔고 무덤에 매장되었지요.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를 따라왔던 여인네들이 있었는데요. 처형된 지 사흘째 되던 날 새벽에 그들은 예수의 시신이 안치된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무덤의 돌문은 열려있었고요. 예수의 시신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때 천사가 나타나 여인들에게 나타났어요. "무서워 말라. 나는 그대들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찾는 줄 안다. 그는 여기에 있지 않고 말씀하신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그대들은 빨리 제자들에게 가서 전하라. 그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그들 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니 그들이 거기에서 그를 만날 것이다." 

예수의 부활 소식을 들은 막달라 마리아는 쏜 살같이 달려 제자들에게 갔습니다. 그리고 부활소식을 제자들에게 전했지요. 

예수께서 잡혀갈 때 베드로는 먼발치에서 끌려가는 스승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한 여인이 베드로에게 다그쳤습니다. “너도 저 예수와 한 패가 아니냐?” 그러자 예수는 손사래를 치며 부인했어요. “나는 저 인간이 누구인지 도대체 알지 못한다.” 이를 세 번씩이나 부인했어요. 베드로는 배반자였습니다. 

헌데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자 베드로는 망치로 뒤통수로 얻어맞은 것 같은 통증을 느꼈어요. 그는 트라우마를 극복했습니다. 비겁함을 극복하고 담대해졌습니다. 베드로는 회당으로 갔습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그는 유대 지도층을 향하여 예수의 부활소식을 증언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를 불법자의 손을 빌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내어 다시 살리셨습니다. 우리는 그 증인들입니다."(행3:15) 

예수는 죽은 것이 아니라 죽임 당했다고 선언하고 있어요. 예수는 자연사(自然死)한 분이 아니지요. 불의한 세력들에 의해 억울하게 살해당했어요. 사회적 모순의 결과였지요. 비명횡사한 예수를 하느님께서는 죽음의 사슬에서 풀어내셨다고 합니다.  다시 살려내셨다고 합니다.  

베드로 죽은 자의 부활을 말하고 있지 않아요. 죽임당한 자의 부활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부활소식은 사회적 모순에 대한 고발 성격이 있어요. 권력자들이 물리적인 힘을 동원하여 죽인다 해도, 그것으로 끝장나는 것이 아니라는 선언입니다. 죽임당한 사람을 다시 살려내는 것이 하느님의 정의(체덱카)이지요.    

알버트 슈바이처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어요. "예수라는 한 젊은이가 굴러오는 역사의 바퀴를 혈혈단신으로 가로막았다. 그러나 역사의 거대한 수레바퀴는 그대로 굴러서 이 젊은이를 깔아뭉갰다. 허나 이상한 일이 발생했다. 예수의 시체가 역사의 수레바퀴에 그대로 붙어 돌아갔다. 그것이 점점 커지고 커져서 마침내 굴러가던 역사의 수레바퀴를 멈추게 했다. 그리고 역사의 바퀴를 반대 방향으로 돌게 했다." 

다른 종교지도자들은 다 죽고, 예수만이 부활했으니, 기독교가 다른 종교보다 우월하다는 식으로 부활사건을 해석한다면, 예수의 부활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본 의미를 놓치게 되지요.  

부활사건의 의미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예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바른 이해가 요청되지요. 일반적으로 기독교는 예수죽음의 의미를 단지 목적론적으로(teleological) 한정시켜 해석하는데 그치지요. 우리의 사적(私的)인 죄를 없애주는  속죄(atonement) 사건이라는 해석이 보편적인데요. 십자가를 믿을 때 우리는 구원을 얻게 된다는 신앙고백이지요. 부활은 십자가 사건에 대한 하나의 해석 사건인데요. 인류구원을 위함이라는 신앙적 의미지평에서 부활이 해석되고 있습니다. 

헌데 예수의 부활사건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잊어서는 안 될 사태가 또 하나 있습니다. 예수의 죽임당한은 구원을 위한 십자가(Cross) 사건이기 전에 불법을 행한 사람들에 의한 십자가처형(Crucifixion)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부활사건은 예수와 같은 운명 하에 놓여있던 동시대의 민중에게는 하느님의 정의 와 심판 사건이었고요. 종말적 희망 사건이었습니다. 십자가처형과 부활사건은 시공을 초월하여 사회의 불의한 세력에 의해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는 피압박 민중에게 위로와 희망과 해방의 복음이지요. 반면에 불의한 기득권 세력에게는 심판과 징벌과 저주의 상징입니다. 십자가처형이 사회적 불의 사건이라면 부활은 하느님의 정의 사건입니다.   

한국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도 국민 간 소득격차의 심화로 사회적 양극화 현상이 구조화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청년 실업과 비정규직의 증가, 현 정권의 반(反) 노동 자본 친화정책, 보편복지제도의 후퇴와 남북 긴장상황의 고조 등으로 한반도 내외의 불안한 정세는 사회적 갈등의 중요한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암울한 상황에서 국민의 절대다수를 이루고 있는 사회의 소수계층은 구조화된 빈곤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그들의 모습에서 한국교회는 2천 년 전 예수 주위로 몰려들었던 민중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날 우리의 상황에서 십자가처형과 부활사건이 담고 있는 하느님의 정의를 세워나가야 할 것입니다.      

김명수(경성대명예교수, 충주예함의집)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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