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학술 칼럼
투쟁자로서의 라가츠라가츠의 생애 제2기(1903~1920)
류장현 | 승인 2018.07.12 22:37

1903년은 라가츠의 인생에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는 중요한 해이다.(미주 23) 이제 라가츠는 사회 문제를 하나님의 문제로 인식하게 되었고 사회 운동을 새로운 하나님의 시대를 알리는 ‘전령자’로 이해하게 되었다.(미주 24) 이와 같이 라가츠가 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이론적 숙고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의 직접적인 체험의 결과이다. 이것을 라가츠는 그의 일기에서 “결정적인 사건”이라고 말하였다.

두 가지 체험, 그리고 돌아섬

라가츠는 1903년 2월2일(정확히 오전 7~8시 사이)에 베른에서 강연을 마치고 귀향하는 열차 속에서 “음탕한(Schmutizig) 부르조아”의 속성을 체험했다.(미주 25) 이 체험은 라가츠에게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주었으며, 사회적·경제적·종교적으로 지배계층인 부르조아의 더러운 속성을 철저하게 깨닫게 했다. 또 그는 이 일이 있은 지 이틀 후에 노동계급을 위한 연합집회에 참석해 서 이들의 투쟁의 열기에 큰 충격을 받는 체험을 했다.

라가츠는 며칠 사이에 한편으로는 부르조아의 동물적 속성을,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계급의 해방을 위한 투쟁의 열기를 체험했던 것이다. 마트뮐러는 이 체험의 본질을 사회적 실천에 대한 이론과 의지의 전향이라고 하였으며, 이제 라가츠는 어떤 계층을 편드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민중을 편드는 당파성을 가지게 되었다고 말했다.(미주 26) 마침내 라가츠는 ‘학문적 이상’(Akademischen Ideal)에서 벗어나서 ‘투쟁’으로 나아가겠다고 하나님께 약속한다.(미주 27) 라가츠에게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모든 주지주의(Intellektualimus)는 마침내 마지막 흔적까지도 제거되었다. 나는 새로운 세계의 창조 속에서, 투쟁 속에서, 행동 속에서 하나님을 찾고 선포한다.”(미주 28)

라가츠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갑자기 떨어졌다.(미주 29) 라가츠는 “직접성”을 체험한 것이다. 이제 라가츠는 새로운 눈으로 하나님을 인식하고,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바라보게 되었다.

노동운동의 투쟁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이런 상태 속에서 라가츠는 벽돌공 파업을 만났다. 1903년 4월5일 벽돌공들은 노동시간 단축, 비오는 날에는 최저 임금을 보장하라고 요구하면서 바젤에 모여 파업투쟁을 전개했다. 바젤 정부는 군대를 동원하여 이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했고 파업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파업이 끝난 다음 날 라가츠는 이들 앞에서 마태복음 22장 34~40절을 가지고 설교를 했다.(미주 30)

여기서 라가츠는 기독교인은 가난한 자들의 편에 서야 하며, 사회 운동의 본질은 유물론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됨”(Gotteskindschaft)과 “형제됨”(Bruderschaft)의 실현에 있다고 주장했다.(미주 31) 또한 라가츠는 성서뿐만이 아니라 사회운동의 “파도와 폭풍우”, 그리고 노동운동의 투쟁 속에서도 말씀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언했다.(미주 32)

이 벽돌공 파업을 통해서 라가츠는 노동계급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했다. 이제  라가츠에게 노동계급은 사회적 불의의 산물도 아니며 기독교인들의 구제의 대상이 아니다. 이 타락한 부르조아 세계를 교란시키는 노동계급은 라가츠에게 새로운 세계를 위한 투쟁의 전위대(Vorhut)가 되었다.(미주 33) 이같은 라가츠의 노동계급에 대한 이해는 이전의 독일과 스위스의 그리스도교 사회주의자들이 인식하지 못했던 “노동운동의 구속사적 해석”이다.

라가츠는 1903년 Darmstadt에서 개최된 개신교 사회주의자 협의회(Evangelisch -Sozialen Kongreß)에 참석하기 위하여 독일로 갔다. 그는 이 회의를 통해서 독일의 신학 및 독일의 개신교 지도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특히 헤르만(Wilhelm Herrman)이 주제 강연에서 주장한 예수의 성향윤리(Gesinnungsethik)는 라가츠를 감동시켰고 그는 자신이 늘 고민해왔던 예수의 정신과 현대 정신 사이의 깊은 틈을 메울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미주 34)

부르조아 사회로부터 거부당한 라가츠

1905년에 라가츠는 교수로 임용될 두 번의 기회가 있었다. 한 번은 조직신학 교수인 볼리거(Bolliger)의 후임으로 라가츠가 추진되었다. 그러나 라가츠의 교수임용은 자유주의적인 교수들에 의해 거부되었다. 마트뮐러는 이 교수임용 거부의 배후에는 깊은 신학적 차이가 깔려 있다고 보았다.

자유주의적 신학 교수들은 노동 계급을 다른 계급 ‘가운데’ 있는 하나의 계급으로 보았고, 하나님을 역사와 자연 속에서 체험하며 세계 역사를 세계 심판으로 이해한 반면에, 라가츠는 노동계급을 다른 계급에 ‘대한’(gegen) 하나의 계급으로 이해했고, 이들을 일방적으로 편드는 당파성을 주장했으며 하나님을 역사와 자연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살아계시는 하나님으로, 세계 심판을 하나님의 역사개입으로 이해했다.(미주 35) 이런 신학적 차이 때문에 자유주의적 신학 교수들이 라가츠의 교수 임용을 거부했던 것이다.

1905년 가을에 또 다시 실천신학 교수직이 공석이 되었다. 이때, 라우테르부르크(Moritz Lauterburg)와 뮐러(Ernst Müller) 교수가 라가츠를 적극적으로 추천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라가츠가 이 제의를 거절했다. 그 이유는 학문적 이상을 버리고 실천적 활동에 전념하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사회적으로 종교적으로 격양된 시대에 내가 학문적 활동의 침묵 속으로 달아나는 것은, 나의 삶의 목표에 대한 헌신과 이상에 대한 불성실을 나타내는 것입니다.”(미주 36)

라가츠는 1906년 가을에 바젤에서 개최된 스위스 목사 대회에서 ‘복음과 오늘날의 사회적 투쟁’(Das Evangelium und Der soziable Kampf der Gegenwart)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는데, 여기서 그는 자본주의 사회의 본질을 날카롭게 분석하고 비판하면서 계급투쟁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노동운동의 세 가지 방향, 즉 노동조합적 노동운동, 정치적 노동운동, 협동조합적 노동운동을 구별하여 설명하였으며 사회운동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언급했다.(미주 37)

또한 노동문제에 대한 교회의 상이한 태도의 배후에 숨어 있는 신학적 근본문제를 주시하였는데, 그것은 ‘현실 안주적인’ 신학 방법과 ‘미래지향적’인 신학 방법의 차이이다. 이 ‘미래지향적’인 신학 방법은 종교로부터 안위를 찾는 개인주의적 경건을 지향하는 ‘현실안주적’ 방법과는 달리, “그리스도의 제자직”을 강조하며 교회 대신에 하나님의 나라를 요구한다.(미주 38) 

또한 이 강연에서 라가츠는 플뤼거의 종교와 윤리의 분리 및 기독교를 사회 윤리로 환원시키는 것을 비판하면서, 종교와 윤리의 상호 관계성과 ‘사회적 문제’가 ‘그리스도교적 희망’과 직결된다는 것을 주장했다. 이 강연은 사회과학과 신학, 그리고 예언자적 요소가 상호 결합된 복음의 새로운 이해, 즉 “새로운 신학”이었다.(미주 39)

1906년부터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1914년까지 라가츠에게는 “씨를 뿌리고 거두는 결실의 시대”였다. 1906년 10월에 종교사회주의적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처음으로 데게르스하임(Degersheim)에서 모임을 갖고, 1907년 종교-사회적 협의회(Religiös-Soziable-Konferenz)를 소집하기로 결의했다.(미주 40) 이런 과정 속에서 최초로 ‘종교-사회적’이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이 말은 신학적 의미를 내포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사회적’ 또는 ‘개신교-사회적’등의 명칭과의 혼동을 피하기 위하여 붙여진 이름일 뿐이다.(미주 41)

1907년 4월 취리히에서 '종교-사회적 집회‘가 있었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복음의 내면화 반대, 사회주의는 비그리스도교적이 아니며, 그리고 기독교인들의 사회적 행동은 사회적 윤리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서 나온다는 것을 확인했다.(미주 42) 이러한 종교사회주의자들은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여섯 차례의 대회를 가졌다.(미주 43) 이 대회에서는 신학적이고 사회주의적인 주제 이외에도 여성문제와 평화문제를 다루었으며, 사회민주주의와 노동조합 연맹에서 유명한 지도자를 강사로 초빙하기도 했다.(미주 44)

총파업, 자유의 투쟁이자 교회의 책임

1912년 라가츠는 두 가지 중요한 사건을 경험했다. 그것은 1912년 7월 12일 “피의 금요일”의 취리히 총파업과 바젤에서 개최된 사회주의 국제평화회의이다.(미주 45)

취리히 총파업은 라가츠에게 있어서 자유의 투쟁이요, 교회의 책임이었다. 만약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종교적 책임감이 있었다면 ··· 참으로 총파업은 일어나지 않았다.” 라고 라가츠는 교회의 사회적 무책임을 비판했다.(미주 46) 또한 이 총파업에서 라가츠가 가장 중요하게 인식한 것은 노동운동 속에서의 ‘윤리적 힘’이었다. 이 윤리적 힘은 그가 노동운동을 이해하고, 마르크스주의를 분석하고, 또한 평화운동을 전개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이 윤리적 힘은 위대한 기적을 만들어 낸다.

“우리는 ‘기적’을 체험하였다. 노동운동이 담고 있는 윤리적 사상의 힘 앞에서 모든 맘몬이 소멸된다. 그렇다. 이것은 최고의 기적이다. 자유와 결합된 윤리적 정신이 대중을 사로잡았다.(미주 47)

▲ 라가츠는 바젤에서 개최된 사회주의 국제평화회의에 참석해 천여 명이 훨씬 넘는 사회주의자들이 적기(Rote Fahne)를 들고 바젤 성당에 입장한 전대미문의 사건을 목격하게 된다. ⓒGetty Image

이 총파업에 대해 쿠터와 라가츠는 입장을 달리 했다. 이들은 지상 논쟁을 통하여 상대방을 비판했는데, 이 논쟁은 기독교인들이 사회적 관계를 수행할 때 교회 내적인 선포에 국한해야 하느냐, 아니면 교회 외적인 사회적 프로그램의 장에서 해야 하느냐의 ‘장소’(Wo)에 대한 것이었다.(미주 48) 라가츠는 살아계신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 뿐만 아니라 오히려 우선적으로 노동자들 속에 계신다는 것을 확신했고 노동자들의 편에 섰다. 이 총파업은 라가츠를 부르조아 계급으로부터 완전히 분리시켰다.(미주 49)

라가츠는 바젤에서 개최된 사회주의 국제평화회의에 참석했다. 이 회의는 천여 명이 훨씬 넘는 사회주의자들이 적기(Rote Fahne)를 들고 바젤 성당에 입장한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미주 50) 라가츠의 이 국제평화회의에의 참석은 중요한 경험이었고 동시에 강한 상징을 내포한 사건이었다.

“외적 사건은 아래와 같은 하나의 비유로 바뀌었다. 우리 모두 헤어졌던 이들, 적대시 하던 이들이 새로운 교회에서 우리가 희망하던 아버지의 위대한 집에서 만나고, 또 만나게 될 시간이 오고 있으며, 그리고 이미 와 있다.”(미주 51)

이 상징적 사건은 라가츠에게 노동운동과 복음의 일치, 사회주의자와 기독교인의 일치, 그리고 사회주의와 기독교의 일치를 의미했고, 또한 이 일치를 바탕으로 평화를 위한 공동의 투쟁의 장이 마련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미주 52)

노동자들 한 가운데로

그러나 라가츠의 이 감격과 평화에의 희망은 오래가지 못했다. 1914년 세계대전의 발발로 그의 희망은 산산히 부서지고 말았다. 그는 이 전쟁을 “경제 질서의 맘몬주의와 국제정치의 폭력성”이 지배하는 세계와 기독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해했다.(미주 53) 제1차 세계대전 중에 폭력의 문제는 라가츠의 신학적·윤리적·정치적 사상의 중심문제가 되었다.

또한 이 기간 중에 라가츠는 독일의 “전쟁신학”을 비판하고 스위스 민족문제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스위스의 정신은 인종과 언어에 있은 것이 아니라, 스위스인들이 역사적 체험에서 얻은 ‘자유’에 있다고 보았으며, 전쟁을 통하여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역사에 개입하시는 분이며 하나님 나라는 점진적인 발전을 통해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파멸적인 사건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미주 54)

라가츠는 1917년 이후 러시아 혁명, 볼세비키즘의 승리, 각국의 사회민주주의의 내적 동요를 겪으면서 새롭게 사회주의의 본질, 목표, 투쟁방법 등을 숙고했다. 라가츠는 러시아 혁명 이전에 이미 취리히에서 러시아의 정치적 망명자들을 알고 있었으며, 특히 트로츠키(Trorzki)의 책 ‘전쟁과 인터내셔널’(Krieg und Internationale)의 번역에 관여했다.(미주 55)

또한 라가츠는 러시아의 2월 혁명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했으나 레닌의 폭력적 방법은 사회주의를 커다란 위험에 빠뜨린다고 보고 단호하게 투쟁하였다.(미주 56) 라가츠는 전쟁과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부르조아화한 교회에 대하여 더욱 깊은 환멸을 느꼈다. 또한 노동자 와의 연대라는 자신의 신념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 하게 되었다.

마침내 라가츠는 교수직과 연금의 권리를 포기하고, 1921년 53세의 나이에 노동자들이 사는 ‘아우서실’(Aussersihl)로 이주했다. 그는 이곳에 노동자 훈련원인 ‘가르텐호프’(Gartenhoff)를 개설하고 여기서 그의 마지막 생애를 노동자들과 함께 보냈다.

미주

(미주 23) M.Mattmüller는 라가츠의 일기가 1903년 1월 1일부터 새롭게 시작하는 것은 어떤 새로운 것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보았다. 그는 1903년을 최초의 전환의 시기로 보았다.
(미주 24) A. Lindt, s.51.
(미주 25) 위의 책, s.53. 또는 TB. 1903. 2. 2.
(미주 26) M.Mattmüller, Bd.1., s.82.
(미주 27) TB. 1903. 2. 2.
(미주 28) A. Lindt, s.54. 재인용.
(미주 29) 위의 책. 또는 TB. 1903. 2. 21.
(미주 30) 이 설교는 ‘기독교와 사회운동에 대한 진술’이란 제목으로 개신교 신문에 실려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이 설교를 통해서 라가츠는 사회주의자로 알려졌다.(H. U. Jäger, 위의 책, s.45.)
(미주 31) E. 부에스/M. Mattmüller, 앞의 책, s.83. 마트뮐러는 이같은 인식은 라가츠가 블룸하르트를 만나기 이전에 오이그스터와 쿠터와는 달리 독자적 경험을 통해서 같은 관계에 도달하였다고 한다.
(미주 32) A. Lindt, s.55. A. Lindt는 라가츠의 사회운동을 하나님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에게로 가는 운동이라고 했다.(s.56)
(미주 33) 위의 책, s.55.
(미주 34) 위의 책, s.56ff. 라가츠는 이 회의에서 받은 인상과 느낌을 ‘개신교신문’에 보고했다. W. 헤르만의 영향을 라가츠의 ‘Du Sollst’에 나타난다.
(미주 35) M. Mattmüller, Bd.1., s.88~89. 이때 라가츠는 Crütlianer을 통해서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입수하여 읽었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중요한 책이다. ··· 나는 이것을 10년 전에 읽었어야만 했다.”(TB. 1904.9. 4)
(미주 36) A. Lindt. s. 72. 재인용.
(미주 37) 위의 책, s. 72ff.
(미주 38) E. 부에스/M. 마트뮐러, 앞의 책, s. 86.
(미주 39) 위의 책, s. 91.
(미주 40) 이 모임에는 쿠터, 라가츠, R. 리히텐한도 참석했다. (A, Lindt, s. 77)
(미주 41) 이 말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종교’라는 말이 ‘계시’와 상반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종교-사회적이란 말은 어떤 특정 사상을 나타내기 위하여 쓰여진 것이 보다는 그 당시 “그리스도교-사회적”이란 말이 스위스의 카톨릭 노동자 연맹이나 A. 스퇴거의 정당은, “개신교-사회적”이란 말이 스위스에서는 정통파(Positiver)의 기업주 및 노동자 연맹을 가리키기 때문에, 혼동을 피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라가츠도 종교사회주의라는 말이 본래의 자신들의 신앙과 뜻을 은폐한다고 생각하였다. (L. Ragaz, unser weg, s. 188)
(미주 42) E. 부에스/M. 마트뮐러, 앞의 책, s. 97.
(미주 43) M. Mattmüller, Bd.1., s. 143을 참조하라.
(미주 44) E. 부에스/M. 마트뮐러, 앞의 책, s. 98.
(미주 45) 1912년 이전에 라가츠에게 중요한 사건은 미국여행(1907), 교수취임(1908), 블룸하르트와의 만남(1909, 1911), 그리고 쿠터와 변증법적 신학자들과의 갈등이 있었다.
(미주 46) M. Mattmüller, Bd. 1., s. 186.
(미주 47) 위의 책, s. 185. 재인용.
(미주 48) 위의 책, s. 189.
(미주 49) 위의 책, s. 190. A. Pfeiffer도 같은 견해이다.
(미주 50) E. 부에스/M. 마트뮐러, 앞의 책, s. 116.
(미주 51) 위의 책, s. 116. 재인용.
(미주 52) 위의 책, s. 117. (A. Lindt, s. 82 이하도 참조하라.)
(미주 53) 위의 책, s. 118.
(미주 54) 위의 책, 같은 곳.
(미주 55) A. Lindt, s. 87. (각주 26을 참조하라.) 트로츠키는 그의 회고록에서 라가츠에게 존경을 표시했다.
(미주 56) 라가츠의 볼세비키즘에 대한 투쟁은 이후 글에서 자세히 논한다.

류장현  jena22@hanmail.net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김상옥로 30, 402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및 편집인 : 이해학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해학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19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