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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분수에 넘치는 소유욕을 버릴 때영원한 생명의 길
김명수 명예교수(경성대, 예함의집) | 승인 2019.02.13 15:22

무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내 형에게 명해서, 유산을 나와 나누라고 해주십시오.” 14.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재산분배자로 세웠느냐?” 15.그리고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조심하여, 온갖 탐욕을 멀리하여라. 재산이 차고 넘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소유에 달려 있지 않다.”(눅12:13-15; 새번역)

Someone in the crowd said to Him, “Teacher, tell my brother to divide the family inheritance with me.” 14.But He said to him, “Man, who appointed Me a judge or arbitrator over you?” 15.Then He said to them, “Beware, and be on your guard against every form of greed; for not even when one has an abundance does his life consist of his possessions.”(Luke12:13-15; NASB)

(1)

재벌회장이 죽을병에 걸려 임종의 날이 다가왔습니다. 저승사자가 찾아왔습니다. “이제 자네는 저승으로 떠나야할 시간이 되었네. 가져가고 싶은 것 있으면 말해보게.” 그가 말했습니다. “제가 평생 모은 돈을 몽땅 가져가도록 해주십시오.” 저승사자가 말했습니다. “그것은 안 되네.

그가 말했습니다. “그러면 제가 그동안 쌓아놓았던 권력과 명예와 지식을 가져가도록 해 주십시오.” 저승사자가 말했어요.“그것도 안 되네.” 재벌회장은 다시 사정했습니다. “정 그렇다면 내 손가락에 낀 보석반지라도 갖고 가게 해 주십시오.” 저승사자가 말했습니다. “그것도 안 되네.

그러자 재벌회장은 화를 내면서 항변했습니다. “도대체 내가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무엇이란 말입니까?” “딱 한 가지가 있네. 살아생전 자네가 불우한 사람들에게 베풀어 준 것만 가져갈 수 있지.

이 우화는 물질과 신자유주의 시장경제를 신으로 섬기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습니다.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는 인간을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존재(Sein zum Tode)’로 정의했는데요. 태어난 것은 무엇이든지 늙어가고 반드시 죽게 되어 있습니다. 생노사(生老死)는 불변의 자연이치이지요. 하이데거는 내가 죽을 존재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하루하루를 살 때, 보다 성실하고 진정성 있는 삶을 살게 된다는 뜻으로 이 말을 했을 것입니다.

바울도 “나는 날마다 죽음을 머리에 이고 산다(every day I face death)”는 고백했습니다만(고전15:31), 그러했기에 죽는 날까지 최선을 다해 복음전파에 전력투구를 했을 것입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주변의 가깝게 지내던 친구들이 이러저러한 이유로 하나둘씩 내 곁을 떠나고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인생의 무상함을 자주 느끼게 되는데요. 이제 머지않아 내 차례도 오겠구나 생각하면, 본래의 내 모습으로 돌아가는 죽음이 친근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실은 언제 죽을지도 모르며 하루하루 대책 없이 살아가고 있는 것이, 우리네 인생살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2)

살아가는 데는 두 가지 공부가 필요합니다. 사회공부가 필요하고요, 인생공부가 필요합니다. 사회공부가 무엇인가요? 세상 살아가는 방식이나 요령을 익히는 공부인데요, 사회공부가 잘 되어 있는 사람은, 일반적으로 사회에서 성공출세하게 되는데요, 그렇지 못한 사람에 비해 세상살이가 훨씬 용이할 것입니다.

▲ 어리석은 부자 ⓒWikipedia

특히 우리나라 같은 물질이 신으로 둔갑한 신자유주의와 시장경제 시스템에서는 모든 사회적 가치가 돈에 의해 결정되는데요. 돈으로 안 되는 것이 없는 무전유죄 유전무죄의 사회입니다. 이러한 강자(强者) 중심의 사회구조 속에서는 사회의 소수자(social minority)인 경제적 약자들이 설 자리가 없지요. 사회의 중심부에서 변방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습니다.

돈이 있어야 인간은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과유불급(過猶不及)일 때가 있는데 지나치면 사회악(社會惡)으로 변하지요. 권력은 그 자체가 국민에 의해서 위임된 공(公)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사적(私的)인 욕망이나 뜻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 사용된다면, 그것은 국민 모두를 고통으로 몰아넣는 사회의 재앙을 불러오지요. 사회공부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은 바로 이러한 돈, 권력, 명예들이지요.

사회적인 성공이 인생의 성공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내 주변에는 사회공부를 잘 해서 부와 명성을 얻은 사람들이 꽤 있는데요. 그들은 사회적으로 성공하여 남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는 있지만, 인생 관리에 실패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멀쩡하다가 갑자기 암과 같은 불치병에 걸려 시한부 선고를 받은 사람들, 그리고 불의의 사고를 당해 한계상황에 직면하게 된 사람들의 경우, 그들이 평생 동안 쌓아놓았던 물질, 권력, 명예가 자기 삶을 보장해주지 못하고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고 말지요. 그것들이 자기문제를 해결하는데 그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사회적으로는 성공했지만, 한계상황에 부딪혔을 때, 불안과 공포 속에서 인생을 비참하게 마감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되지요.

(3)

인생공부는 다른 게 아니지요. 밖으로 향하던 눈을 안으로 돌려 내면의 나를 성찰하는데서 시작됩니다. 인간이 무엇인가?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사람답게 사는 것인가?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을 묻는데서 인생공부는 출발합니다.

석가모니는 오랜 명상 끝에 깨닫게 된 진리가 있는데요,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가 그것입니다. 이를 통칭하여 삼법인(三法印)이라고 하는데요.

우리는 흔히 나의 생각이나 감정 그리고 오감(眼耳鼻舌身)을 ‘나’라고 생각하기 쉬운데요, 실상은 그러한 것들에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음을 깨닫게 되지요. 통칭 무아(無我)로 번역된 아나트만(anatman)은 비아(非我)의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내가 없다’라기보다는 나라고 생각했던 내 몸뚱이가 실은 ‘나라고 할 만 한 게 아니다’라는 뜻이지요. 에고의 세계에서‘나라고 할 만한 게 없다’면, ‘나의 것’ 그리고 ‘나의 생각’이라는 것도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인간이 겪는 모든 고통과 불행의 근저(根底)에는 집착이 있는데요. ‘고정된 나’가 있다는 생각이 집착을 일으킵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아집(我執)에 사로잡혀 에고 중심으로 살아가지요. 아나트만의 깨달음은 인간을 아집(我執)으로부터 해방시켜 줍니다. 에고의 집착으로부터 벗어날 때, 인간은 진리를 보게 되고, 진리를 통해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얻게 되지요.(요한8:32)

무상(無常)은 무엇인가요? 고정불변한 게(常) 없다는 말입니다. 무아의 또 다른 표현인데요. 만물은 바뀌고 변하는 것을 본질로 삼고 있습니다. 역변(易變)이야말로 거역할 수 없는 자연의 순리이지요.

인간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음양의 변화와 같은 궤(軌)를 달리지요. 고정된 게 없습니다. 좋은 일도 궂은일도 영구히 지속되지 않지요. 가난함도 부유함도 반드시 지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가난하다고 해서 기 죽을 것도 없고, 부유하다고 해서 희희낙락할 것도 못됩니다. 지나가기 때문이지요.

생활에 여유가 생기면 어찌하면 되나요? 삶의 여유를 즐길 줄 알기도 하고, 어려운 이웃에게 도움을 주기도 하면 되지요. 생활에 여유가 생기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좀 적게 쓰고, 불편하게 살면 됩니다. 주어진 형편에서 만족하면 됩니다. 부족함이란 없지요. 단지 부족하다는 생각이 있을 뿐입니다. 그 생각만 내려놓으면 언제 어디서든지 만족하면서 살 수 있지요. 상황에 구애받지 않고, 주어진 여건 자체를 영적 성숙의 계기로 삼으면 됩니다.

하루 세끼 먹고 사는데 별 지장이 없다면, 시선을 내면으로 돌려, 참나이신 성령과 소통하고 하나 되는 일에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물질적인 복을 구하는 삶과 영적 진리를 구하는 삶은 동시 사건이 돼야 합니다.

(4)

하루는 예수께서 군중 앞에서 설교를 하고 계셨습니다. 한 사람이 예수께 다가왔어요. 형제간에 재산 다툼이 있으니, 오셔서 해결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재산분배 요청을 받은 예수의 반응은 어떠했나요? “누가 나를 재판관(kriten)이나 재산분배자(meristen)로 세웠는가?” 재산분배자로 번역된 그리스어 메리스테스(meristes)는 ‘나누는 자(divider)’를 뜻합니다. 예수는 분리자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도마복음> Log.72절에도 이와 유사한 말씀이 등장합니다. 아버지 재산을 나누도록 도와달라는 사람의 요청에 대해 예수는 말하지요. “누가 나를 나누는 자(divider)로 만들었는가?” 제자들을 돌아보며 예수는 말합니다. “나는 분리하는 자가 아니다. 그렇지 아니한가?

이 말씀에서 예수는 자기 정체성(self identity)을 어디에서 찾는가요? 분리를 배격하는데서 찾고 있습니다. 통전(unifying)시키고 분리 이전의 모습을 회복하는 것이 예수의 일이라는 것이지요. 예수는 화해와 통전(統全)의 메신저로 오셨지, 결코 분리자로 오신 것이 아님을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의 근원에서 둘로 쪼개진 것이 분리라면, 갈라진 둘이 하나인 근원에로 돌아가는 것이 통전(統全)입니다. 하나 됨이지요.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남자와 여자 사이의 분리된 것에서, 그 이전의 하나 됨에로 통전(統全)시키는 것이 도마복음이 말하는 예수의 미션이지요. 구원을 도마복음은 본래 상태인 하나 됨을 회복하는  귀일(歸一)에서 찾고 있습니다.

지금 한국사회에서 진행되고 있는 모든 갈등의 근본원인이 어디에 있나요? 분리된 데 있습니다. 남과 북, 동과 서, 진보와 보수, 정규직과 비정규직, 기업과 노동, 남녀성차별이 여전하지요. 사회적 불평등, 양극단주의, 혐오와 차별, 사회적 양극화 현상은 한국사회의 현주소이자 동시에 지구촌의 민낯이기도 합니다.

(5)

중국불교의 3대 조사인 승찬이 쓴 <신심명>이 있습니다. 성경 다음으로 책상머리에 놓고 자주 읽으며 나를 성찰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경전인데요. 마음의 근본바탕이 무엇인지를 일깨워주고, 최상의 행복으로 가는 길을 가이드 해 주는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승찬은 문둥병자였어요. 그는 당대의 고승을 찾아가 간청합니다. “저는 문둥병을 앓고 있지요. 지은 죄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죄 용서함 받을 수 있는 길을 안내해 주십시오.” 고승이 말했어요. “그대의 병이 지은 죄 때문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그 죄업을 내 앞에 보여주게. 그러면 그대 소원을 풀어주겠네.” 승찬은 한참동안 생각하다가 말했습니다. “찾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대는 이미 죄 용서함을 받았네.

승찬은 평생 죄의식에 사로잡혀 살았습니다. 허나, 죄의식은 실체가 아니라 결국 마음이 지어낸 것임을 깨닫게 된 순간, 그는 죄로부터 자유와 해방을 얻게 되었지요. 자기인생의 주인으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신심명>의 첫머리는 “지도무난(至道無難) 유혐간택(有嫌揀擇)”으로 시작되는데요. 최상의 행복을 얻는 방법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인생은 간택입니다. 간택은 가려서 버리고 택하는 것인데요. 한 순간도 간택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 승찬이 이를 모르고 유혐간택을 말하지는 아니하였을 것입니다. 문제는 간택 자체가 아니지요. 무엇을 어떻게 간택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인간은 에고 중심으로 말하고 행동합니다. 에고는 내 몸뚱이를 나로 삼지요. 에고에게 이로운 것을 좋아하고 해로운 것을 피하게 되어 있지요. 설사 남이 불행하게 되더라도, 그 위에 내 행복을 쌓으려고 하는 것이 에고의 속성입니다. 사물의 간택 기준이 어디까지나 에고 중심입니다.

반면에 참나 중심의 간택이 있습니다. 참나는 확장된 나 의식입니다. 생각, 감정, 육신의 욕구를 넘어서 이웃, 사회, 세계, 나아가 우주를 나로 삼지 않지요. 참나는 선악(善惡)으로 간택의 기준을 삼습니다. 모두에게 이로운 것이 선(善)이라면, 모두에게 해로운 것이 악(惡)이지요.

호선오악(好善惡惡)이 간택의 기준이 됩니다. 공익(公益)을 좋아하고, 공해(公害)를 멀리하는 것입니다. 역지사지(易地思之)로 생각하고, 모두를 간택의 기준으로 삼는 것이지요.

이를 <대학>에서는 혈구지도(絜矩之道)라고 합니다. 나를 기준 삼아 남의 입장을 헤아리고 배려할 때, 모두에게 행복한 길이 열린다는 것이지요. 내가 당해서 싫은 것을 상대방에게 가하지 않고, 내가 원하는 것을 상대방에게 먼저 베풀어줄 때 모두에게 유익한 최상의 바람직한 사회(至道)가 이루어진다는 것이 <대학> 가르침의 요결입니다.

(6)

사람은 하나님을 본떠서 창조되었습니다.(창1:27) 하나님의 본(성)을 떠서 창조되었기에, 인간의 내면에는 우주마음인 신성(神性)이 깃들어 있습니다. 양심이 그것인데요, 양심 프로그램에 따라 하나님을 섬기도록 작동되어있는 것이 인간의 본모습임을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사도15:3)

남이 나에게 해 주기 바라는 것을 내가 남에게 해 주라’는 예수의 황금률이나(마태7:12), ‘내가 당해 싫은 것을 남에게 가하지 말라’는 공자의 황금률(『논어』)은 하늘아버지의 뜻이고, 우주 경영의 공식입니다. 인간 속에 각인되어 있는 양심 프로그램의 근본원리에 해당하지요.

이어서 본문은 말하고 있어요. “보라! 모든 탐욕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다.” 예수는 사회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의 근저에는 인간의 탐욕이 도사리고 있음을 꿰뚫어보았어요.

인간에게는 욕심과 양심이 있습니다. 예수는 욕심이 아니라, 탐욕(pleonexias)의 근절을 말하고 있지요. 탐욕은 무엇인가요? 자기 분수에 넘치는 소유욕입니다. 양심에 의해 탐욕이 제어되지 못할 때, 모든 갈등과 불화가 생기지요. 욕심은 반드시 양심에 의해 조절되어야 합니다. 양심이 욕심을 경영할 때, 모두가 바르고 행복하게 사는 인간다운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탐욕에 대칭되는 개념으로 생명(zoe)을 말하고 있습니다. ‘조에(zoe)’는 이원적 상대성의 세계를 초월한 곧 절대계의 가치를 상징하지요. 영생, 진리, 양심, 참나, 성령 등으로 치환(置換)될 수 있는 개념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재산(possessions)의 유무에 달려있지 않다고 예수는 선언합니다. 영생은 하늘아버지의 뜻인 양심의 법도에 따라 중도(中道)의 삶을 실천하는가에 달려있다는 것이지요.

<잠언>에 보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제시합니다. 야케의 아들 아굴이 하나님께 두 가지를 간청하지요. “이 간청을 제 생전에 이루어주십시오.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마시고, 먹고 살 만큼만 주십시오. 배부른 김에 ‘하나님이 다 뭐냐’고 하며 배은망덕하지 않게 해 주시고, 너무 가난한 탓에 도둑질하여 하나님 이름에 욕되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해 주십시오.”(잠언30:7-9)

김명수 명예교수(경성대, 예함의집)  kmsi120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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