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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는 성서에 의해 성서라는 사실이 확증된다성경과 성령 (3)
최영 소장(기독교장로회 목회와신학연구소) | 승인 2019.11.23 02:42

7장은 로마 가톨릭의 성경관에 대립되는 개혁교회의 특징적인 성경관이 제시됩니다. 칼빈은 먼저 “성경은 반드시 성령의 증거로 확증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칼빈은 9장에서 “말씀과 성령의 상관성”에 대해 말할 것입니다. 개혁교회 신학의 독특한 강조점이 여기서 또한 나타나는데, 곧 말씀은 성령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되고,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다른 영들과 구별되는 하나님의 영으로 입증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지금 여기 7장에서 이 말은 성경의 권위가 가톨릭교회가 말하는 것처럼 교회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졌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서의 권위는 누구에게

우리가 다 아는 사실이지만, 정경화의 과정에 대해서는, 먼저 서기 97년에 얌니야 회의에서 유대 랍비들에 의해 구약성경 39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택이 되었습니다. 그 뒤 약 300여년이 지나서 카르타고 회의에서 신약성경 27권이 결정되고 거기에 외경 7권이 추가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로마교회는 이러한 과정이 교회와 신학자들에 의해서 수행되었기 때문에, 성경의 권위가 교회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칼빈과 개혁교회는 성령이 그 전체과정을 주관했다고 말합니다. 성경이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임을 스스로 입증하였다고 주장합니다. 칼빈의 이러한 주장은 그의 특별한 체험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것에 대해 그가 뭐라고 말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현재 우리는 매일같이 하늘로부터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성경 안에서만 자기의 진리를 영원히 기억할 수 있도록 신성하게 보존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마치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을 하늘로부터 직접 듣는 것처럼, 성경의 기원이 하늘로부터 유래되었다고 생각될 때에만, 비로소 성경은 신자들로부터 완전한 권위를 얻게 되는 것이다(I.vii.1).

요즘 우리 주변의 이단들이 “새 계시”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그들은 성경에 자기들의 주장을 덧붙여서 성경의 목록이 마치 늘어난 것처럼 여기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성경은 단순한 참고문헌이 될 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성경이 66권으로 제한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답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지 않은 것을 유추하고 풀고 해석하고 주석해서 성경과 버금가는 인간의 전통으로 내세우는 그런 교회가 있습니다. 아무튼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에게 새로운 계시를 추가시켜 주지 않습니다. 이미 주신 진리를 영원히 신성하게 보존하기만을 원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옛날 선조들에게 말씀하셨던 동일한 방법으로

방금 우리는 성경이 66권으로 제한되었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칼빈은 이런 현실을 인정하면서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을 오늘 직접 듣는 것처럼 대할 때, 그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직접 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그 옛날, 2,000년 전, 3,000년전에 하나님께서 족장들과 예언자들,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오늘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해주신다는 것입니다.

▲ 성서는 성령을 통해 믿어지고 깨달아진다. ⓒGetty Image

칼빈은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 게 직접 주신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읽었기 때문에, 주변의 많은 인문주의자들과 달리 그 힘들고 어려운 교회개혁의 길에 뛰어들 수 있는 동력을 얻지 않았나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당대의 많은 인문주의자들은 성경연구자들이었고, 번역자들이었고, 탁월한 성경학자들이었습니다. 에라스무스, 르페브르, 토마스 모어 같은 유명한 인문주의 성서학자들이 이름을 날렸지만, 교회개혁에 뛰어들었던 자들은 일부 종교개혁자들에 국한되지 않았습니까?

정말 칼빈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듣는 이런 경험을 했기 때문에, 1권 1장 1-3절에서 확인했듯이, 하나님 말씀과 직접 대면하여 서 있는 경험,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귀로 듣고 마음으로 듣는 이러한 경험이 칼빈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위대한 개혁자가 되게 했던 것입니다.

성서는 논증을 통해 성서임을 증명할 수 없다

자, 그런데 16세기 당시에 널리 횡행하던 주장은 교회의 승인을 얻을 때만, 비로소 성경은 그 권위를 갖게 된다는 견해였습니다. 칼빈은 “이것은 마치 하나님의 영원하시며 침범할 수 없는 진리가 인간의 결정에 의해 좌우된다는 말과 같다.”고 비판합니다(I.vii.1). 그와 반대로 칼빈은, 교회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었다.”(엡2:20)는 말씀을 근거로 성경이 오히려 교회의 토대라고 논박합니다. 그러나 반대자들이 여전히 “교회의 법규에 의존하지 않는 한, 성경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확신할 수 있겠느냐”라고 질문하는 것에 대하여, 칼빈은 이것은 마치 “흑암에서 광명을, 검은 데서 흰 것을, 쓴 것에서 단 것을 가려내는 일”과 같이 자명한 문제일 뿐이라고 간단히 대답합니다(I.vii.2).

그리고 칼빈은 성경에 대한 최고의 증거를 “하나님이 인격적으로 성경 안에서 말씀하시는 사실”에서 끌어옵니다. 이와 같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분이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성경의 권위는 “인간의 이성이나 판단 그리고 억측이 아니라 이보다 훨씬 더 높은 근원, 곧 ‘성령의 은밀한 증거’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I.vii.4).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이 같이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시기 때문에, 어떤 이성적 논증들로써 성경을 증명한다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논쟁을 통해서 성경에 대한 견고한 신앙은 결코 세울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증거는 일체의 이론을 훨씬 능가하기 때문에, 이 성령의 내적 증거에 의해서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마음에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I.vii.4).

사실, 성경은 하나님을 증거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습니다. 그냥 선포하고 선언하고 고백할 뿐입니다. 성경에서는 어떤 이론을 가지고 하나님을 존재증명하려는 시도를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논쟁을 통해서 성경에 대한 견고한 신앙을 세워보려고 애쓰는 것을 칼빈은 어리석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성경 속에서 말씀하시는 성령과 지금 우리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성령은 같은 영이십니다. 그래서 칼빈은 이 성령의 증거가 어떠한 일체의 이론을 훨씬 능가한다고 말합니다. 동일하신 성령께서 증거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칼빈에게, “성령의 내적 증거”는 중요한 성경의 해석원리입니다. 이것을 이렇게 풀어 설명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바울 사도가 1차 독자인 로마 교회에 편지를 썼습니다. 우리는 그들과 시간적으로는 2,000년의 간격이 있고, 공간적으로도 엄청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의 내적 증거는, 바울을 감동시키고 바울의 편지를 통하여 1차 독자인 로마의 교인들을 감동시키신 동일한 성령께서 우리를 1차 독자들인 로마교인들 못지않게 똑같이 감동시켜서 동일한 목적지에 이르게 하는 사역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증거하시기 때문에, 다른 일체의 논증들이 불필요하다고 말한 것입니다.

성서는 스스로 성서임을 증명한다

칼빈은 5절에서 “성경은 자증한다”고 말합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내적으로 가르침을 받은 사람은 진심으로 성경을 신뢰한다는 것, 그리고 성경은 자증한다는 것이다”. 성경이 스스로 성령을 통해서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임을 입증한다는 것입니다. 칼 바르트는 플라톤의 저서들이 정경화 과정의 치열한 논쟁이 일어날 때 하마터면 정경 속에 포함될 뻔 했다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신약성경 일부 문서들 가운데는 거칠고 투박한 글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플라톤의 저서들은 얼마나 대단한 문장력을 자랑합니까? 문체는 또 얼마나 수려합니까? 플라톤의 탁월한 영의 세계, 플라톤의 이원론은 또 얼마나 유명합니까? 영혼불멸의 사상도 담고 있고, 이데아 세계도 그리고 있고, 그래서 플라톤의 문서들 몇 편이 정경 속에 포함될 뻔 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자증하기 때문에, 성령을 통해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스스로 입증했기 때문에, 플라톤의 문서들이 제외되고 야고보서, 베드로전후서, 유다서, 요한 1,2,3서 등이 정경 속에 포함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칼빈은 “성경을 증거나 이성에 종속시키는 것을 잘못이다. 그리고 성경이 마땅히 지녀야 할 확실성은 성령의 증거에 의해서 얻게 된다. 왜냐하면 성경이 그 자체의 위엄 때문에 존경을 받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속에서 확증되기 전에는, 진정으로 우리를 감동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I.vii.5)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칼빈의 성서 영감 이해

여기서 우리는 칼빈의 견해가 17, 8세기의 소위 칼빈주의 정통주의가 주장했던 것과 분명히 부딪히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7, 8세기 정통주의자들의 ‘축자영감설’은 칼빈이 여기서 말하는 것과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축자영감설은 문자 자체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되었기 때문에, 일점일획도 그름이 없고, 잘못된 것이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예컨대, 글자 하나하나가 성령과 동일성을 갖고 있습니다. 성령과 문자가 직접적 관련성을 갖고 있다고 본 것입니다. 마치 성령이 글자 하나하나에 고착되어 있는, 붙어있는 것 같은 그런 주장을 한 것입니다. 소위 문자주의적 오류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것이 가톨릭 측에 하나의 빌미를 제공해주었습니다. 개혁파 쪽에서 교황을 우상숭배라고 비난했는데, 반대로 그쪽에서는 성경 문자주의적 주장에 대해 “종이교황”을 섬기고 있다고 그렇게 조롱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칼빈은 여기서 이러한 성령과 문자 자체의 직접적 동일성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컨대,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 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자 그가 살아 움직이지 않았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문자 그 자체는 연약하고, 오류가 많고,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담아내기는 여러 가지로 부족하고, 한계가 너무나 명확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은혜로 인간의 문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드러내고 표현하게 하신 것입니다. 칼빈이 여기서 말하는 “성령의 내적 증거”는 바로 그 사실을 말합니다. “성경이 그 자체의 위엄 때문에 존경을 받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속에서 확증되기 전에는, 진정으로 우리를 감동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I.vii.5).

이 차이를 실감해야 합니다. 물론, 성경은 그 자체로 존경을 받아 마땅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담고 있고, 위대한 가르침, 생명과 복음의 빛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앞서 말했듯이, 시간적 간격, 공간적 거리를 넘어서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되기 위해서는 성령의 내적 증거, 곧 성령이 역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감화, 감동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칼빈의 말을 더 들어보겠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판단을 입증하는 어떤 논증이나 진정성의 표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판단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의 판단력과 기지를 성경에 예속시킨다. … 하나님의 확실한 신적 위엄의 능력이 성경 안에서 살아서 숨 쉬고 있음을 실감한다. 이 능력에 의해서 우리는 의식적으로 또는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한다. … 그러므로 이것은 아무 이론도 필요로 하지 않는 확신이다. 곧 이것은 최고 이성으로 말미암아 입증된 지식이며 실로 이 지식 안에서 우리의 마음은 어떤 이론에서 보다 더 안심하고 더 견고하게 쉴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것은 하늘나라의 계시가 아니면 만들어낼 수 없는 감정이기도 하다. …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우리 마음에 인치시 는 신앙만이 참된 신앙이라는 것은 여기서 알고 지나가자 … 하나님은 선민에게만, 곧 전체 인류 가운데서 그가 구별해내신 자들에게만 이 유일한 특권을 주신다. 실로 참된 교리의 시작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하는 민첩한 열망이 아니고 또 무엇이겠는가?(I.vii.5).

여기서 칼빈이 “택함을 받은 자들만이 이 성경을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구별해 낼 수 있다”는 것을 말할 때, 그는 성경의 교리에 대해 말하면서 예정의 교리를 넌지시 언급하고 있습니다. 제4권 교회론에서도 예정론이 교회론의 기초가 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고 마치기로 하겠습니다.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을 때 성서를 믿을 수 있다

칼빈이 여기서 성경의 권위를 입증하는 방식은 명백히 ‘순환논법’입니다. 순환논법은 이런 식으로 진행됩니다. 왜,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는가?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의 영에 의해서 우리에게 이 진리를 확신시키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어떻게 행하시는가? 성경을 통해서.

그렇다면, 이 순환논법을 피할 수 있겠는가, 하는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성령의 내적 증거, 성령께서 성경의 권위를 입증한다, 성령께서 성경이 다른 많은 문서들과 다른 많은 인류의 고전들과 구별되는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으로 입증한다는 사실, 이것을 소위 순환 논법 외에, 다른 방식으로, 현대인들이 이해하기 쉽게, 그럴듯한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는가?

오토 베버, 칼 바르트 같은 신학자들은 그런 방법은 없다고 대답합니다. 이점에서 바르트는 칼빈에 동의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성령을 통해서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임을 입증하는 이 순환논법적인 방식 외에 다른 방법들을 통해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입증하려고 한다면, 또 다시 어쩔 수 없이 어떤 외적인 권위를 끌어들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성경은 온갖 종류의 무신론적이고 합리주의적인 비판에 노출 되고 상처를 입는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한 가지 예로, 19세기 역사비평학이 발전할 때, 성경이 어떤 대우 를 받았습니까? 지금 우리는 역사비평학적 방법 이후 시대를 살아가 니까, 어쩔 수 없이 역사비평학을 받아들이고, 그 한계를 인정하면서 그 너머를 말할 수 있게 되었지만, 역사비평학이 한참 활발하게 전개될 때는 어떠했습니까? 성경이 난도질 당하고 분석 당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은 단지 우리와 똑같은 인간에 불과하고, 예수님의 기적들은 다 제외되고, 단지 그의 교훈들과 도덕적 가르침만 남아있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성경은 완전히 분해되고 깨지고 상처만 받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이 성령의 내적 증거의 교리는 단지 인정하고 고백을 할 뿐인 그것의 가장 약한 지점에서 파괴할 수 없는 강점을 갖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방법은 성경 자체를 따르는 방법이기도 합니다(요8:13이하; 요일5:6-7).

최영 소장(기독교장로회 목회와신학연구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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