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사회 칼럼
일제 간도참변의 학살 규모는 상상 이상이었다1920년 일본 간도대토벌과 한인참변 (2)
이이소 | 승인 2019.12.23 16:51

일제가 저지른 간도참변은 세 개의 단계로 진행되었다. 제1단계는 10월 14일부터 11월 20일까지로 이 기간에 제1차 토벌이 감행되었다. 이 단계에는 항일단체들과 무장독립운동기지로 지목된 마을, 학교, 교회당 등에 대한 대규모 소탕을 감행하였다.

제2단계는 11월 21일부터 12월 16일까지이다. 이 단계에는 일제가 ‘잔당숙청’이라는 명목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마을과 무장독립운동기지에 대하여 반복적인 수색을 함과 동시에 다른 한 편으로 비행대와 국경수비대를 동원하여 무력시위를 감행하였다.

제3단계는 12월 17일부터 1921년 5월 9일 일제가 철수하기까지이다. 이 단계에는 간도 파견대를 기반으로 경찰분서의 증설과 총독부 경찰력 증가 그리고 친일세력 육성 및 확대 등의 일련의 조치를 취하면서 이른바 간도지역에 일제경찰 무장력 강화와 친일세력을 구축하는데 진력하였다.

일제의 간도토벌과 한국인의 수난

간도참변이라 하면 주로 1단계인 10월 중순부터 11월 후반 사이에 일제가 저지른 악마적인 만행을 가리킨다. 이소바야시 부대, 기무라 부대, 회령 수비대, 종성 수비대, 제11사단, 제13사단, 아즈마 부대, 관동군은 연변각지에 주재하고 있는 일본총영사관과 분관, 경찰서에서 작성한 한인 무장독립단체의 동태, 주둔지점, 독립운동 지원 마을, 학교 등에 대한 정보를 제공받은 대로 거침없이 방화, 살상, 약탈, 강간을 자행하였다.

상해임정이 발표한 북간도지역 한인참변 조사통계표에 의하면 피살된 사람은 3,664명, 체포는 155명이고 불탄 가옥은 3,520동, 불탄 학교는 59개교, 불탄 교회당은 19개소, 불탄 곡물은 59,970섬에 달했다. 임시정부 간도파견원은 <독립신문> 87호에서 북간도 피해상황은 피살된 사람이 2,626명, 체포 46명, 강간 71명, 불탄 가옥이 3,208동, 불탄 학교는 39개교, 불탄 교회는 11개소, 불탄 양곡은 53,265섬으로 보도하였다.

박은식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10월 5일~11월 23일까지 북간도 피해 통계를 피살된 사람 3,138명, 체포 117명, 강간당한 여성 76명, 불탄 가옥 2,722동, 불탄 학교가 31개교, 불탄 교회당이 10개소, 불탄 양곡이 40,815석이라고 집계하였으며 서간도 피해상황은 피살된 사람 804명, 체포된 사람 125명이라고 집계하였다. 그러나 후에 피살자 350여 명, 불탄 학교 10개교, 불탄 교회당 9개소, 불탄 가옥 70여동을 추가 기록하였다.(1) 침략자인 일제의 통계는 인명 살해 494명, 체포 707명, 불탄 가옥 531동, 불탄 학교 25개교, 불탄 교회당 1개소로 피해상황을 은폐하며 최소화하였다. 이외에도 일제는 서간도 지역의 유하, 삼원포, 홍경, 왕청문, 관전, 삼도구, 철령 등지에서 1,323명을 사살하고 125명을 체포하였으며 장백현 일대에서도 한인 212명을 사살하고 4백여 명을 체포하였다.(2)

간도 통신원의 보도에 따라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마을을 살펴보면, 백운평(청산리)과 장암마을로 교회, 교회, 가옥전체가 불탔으며 각각 409명과 75명이 살해당하였다. 투도구는 175명이 죽었으며 293채의 가옥이 불탔다. 동구일대는 42명이 살해당하였고 57채의 가옥이 불탔다.

대전자는 40명이 살해당하였고 800채의 가옥이 불탔고 학교 3개, 교회당 2개가 불에 탔다. 송언동은 46명이 피살되었으며 115채의 가옥이 불탔다. 약수동은 271명이 피살당하였으며 57채의 가옥과 1개의 학교가 불탔다.

대모록은 117명이 피살당하였으며 56채의 가옥, 학교 1개, 교회당 1개가 불탔다. 소영자는 166명이 살해당하였으며 56채의 가옥, 학교 1개, 교회당 1개가 불탔다. 허문은 45명이 피살당하였으며 26채의 집, 학교 1개, 교회당 1개가 불탔다.

의란구는 162명이 죽임 당하였으며 154채의 가옥과 학교 3개가 불탔다. 옹성라자는 32명이 피살되었으며 40채의 가옥이 불탔다. 이도구는 40명이 죽임 당하였으며 57개의 가옥, 학교 1개, 교회 1개가 불탔다.

조양하는 19명이 피살되고, 120채의 가옥이 불탔고 학교 2개와 교회 2개가 불탔다. 육도구는 35명이 피살되었고 강간 2명, 기타 상황은 미상이었다. 대교동은 43명이 피살되었고 6강간 6명, 나머지는 미상이었다. 팔도구는 44명이 살해되었고 가옥 50채가 불탔다. 세린하는 6명이 피살되었고, 강간 4명, 가옥 70채가 불탔다.

일제는 토벌에서 살아남은 노약자, 여성, 어린이들이 동북의 긴 겨울의 추위에 얼어 죽고, 병들어 죽고, 굶어 죽도록 대부분의 마을에서 집과 곡물을 불태웠으며 물건들을 약탈하는 비열한 비적의 행위를 자행하였다. 

침략자 일제의 통계는 한국 측의 통계 그리고 중국의 통계와 차이가 크다. 일제는 살해당한 사람 494명, 체포 707명, 불탄 가옥 531동, 불탄 학교 25개교, 불탄 교회당 1개소로 피해상황을 자의로 은폐하고 최소로 축소하였다. 이외에도 일제는 서간도 지역의 유하, 삼원포, 홍경, 왕청문, 관전, 삼도구, 철령 등지에서 1,323명을 사살하고 125명을 체포하였으며 장백현 일대에서도 한인 212명을 사살하고 4백여 명을 체포하였다.(3)

우리는 일본의 거짓 통계를 믿지 않지만, 상해임정이 발표한 피살된 사람 3,664명, 체포 155명, 불탄 가옥 3,520동, 불탄 학교 59개교, 불탄 교회당은 19개소, 불탄  곡물 59,970섬이라는 통계는 비록 불완전하지만 사실에 가깝다고 믿는다. 그러나 훈춘과 화룡에서 발행된 지역사에 보면 한국인의 통계도 많은 오차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자면 임시정부 간도파견원은 <독립신문> 87호에서 화룡현의 피살자가 613명, 불탄 가옥 361채, 불탄 학교 8개, 불탄 교회 2개라고 했고,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는 화룡현의 피살자 583명, 불탄 학교 6개, 불탄 교회는 없다고 집계하였는데, 김동섭은 ⌜화룡인민의 항일투쟁⌟에서 피살된 수 1,362명, 불탄 가옥 866채, 불탄 학교 10개교, 불탄 교회 3개소로 집계하고 있다.

훈춘의 피해상황 또한 다시 연구, 정리되어야 할 것이다. 임시정부 간도파견원은 <독립신문> 87호에서 훈춘현의 피살자가 249명, 체포 없음, 불탄 가옥이 457채, 불탄 학교가 2개교, 불탄 교회는 없다고 집계하였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는 피살자 249명, 불탄 가옥 457채, 불탄 학교는 1개교로 정리하였으나, 양봉송이 편저한 『훈춘조선족발전사』에는 피살자 1,124명, 체포 110명, 불탄 가옥 1,094, 불탄 학교 19개, 불탄 교회 7개로 나온다.

이 숫자들을 비교해보면 화룡의 피살자는 749과 779명의 차이가 나고 훈춘의 피살자는 875명으로 더 큰 격차가 난다. 이는 상해 임정의 공식적인 통계 숫자인 3,664명 보다 대략 1,500여 명이 더 많은 숫자인데 우리는 간도참변의 피해자와 일본의 학살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이렇듯 간도참변, 대토벌과 학살에 대한 기록이 상해 임정,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 독립신문 간도 특파원의 보도, 중국 측 기록, 일제의 기록이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은 참변을 조사하고 기록한 시점, 광범위한 지역조사의 한계성, 접근이 어려운 궁벽한 마을의 누락, 기록자 고의적인 가감삭제 그리고 사건 후에 발생한 죽음에 대한 견해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간도참변의 역사적 정리는 우리가 끌어안고 풀어가야 할 숙제이다.

어쨌든 통계는 일제가 일본영사관에 막대한 피해를 준 왕사해와 진동, 만순 등의 토비들을 토벌하지 않고 총부리를 한인 무장독립단체에 겨누고 무고한 양민을 무차별 학살하고 체포한 사실을 보여준다. 그들의 간도침략과 토벌 과정에서 나타난 살인, 방화, 약탈, 강간 등의 만행은 너무 잔악무도해서 필설로 표현하기가 고통스럽다. 그들은 자신들이 ‘한인들을 살해하고 가옥을 불사르고 약탈한 것은 완벽한 토벌을 위해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중국 정부가 봉천회의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으므로 자신들이 직접 불령선인(독립군)들의 근거지를 뿌리 뽑아야 했다.’고 변명하였다. 이런 점을 미루어 볼 때 일제의 토벌은 살인과 방화, 약탈이었으며, 그 목적은 한인사회를 초토화시켜서 항일운동의 근거지를 뿌리 뽑는 것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제의 간도침략의 궁극적인 목적은 독립무장단체를 말살할 뿐 만 아니라 항일독립운동의 토대가 되는 한인사회를 철저히 파괴하는 것이었다.

간도참변에 관한 당시 기록

간도토벌, 대학살의 현장인 연변 땅을 밟은지 어언 3년 6개월이 되어 가고 있다. 그 사이에서 학살의 현장이라는 사실도 모르고 독립유적지를 따라서 정동, 석현, 수남촌, 봉오동, 연통라자, 대황구, 와룡촌, 장암동, 청산리, 걸만동, 소영자, 육도구, 옹성라자, 대교동 등등에 다녀왔다. 연변의 혹독한 겨울 추위를 알기에 일제의 겨울철(10월~ 4월) 7개월에 걸친 대토벌과 학살, 가옥 방화, 곡물 방화에 대한 분노와 증오가 이글거린다.

죄 없는 백성들이 겪은 고통과 가슴에 맺힌 한을 어떻게 풀 것인가! 간도참변에 대한 당시의 기록 몇 개를 소개하며 눈물을 그 분들의 전에 바친다. 함북노회 제7회록에는 교회의 피해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금당촌 교회 영수 1인, 전도사 2인, 교인 7인 피살, 남별리교인 50명 참살, 감옥에 갇힌 자, 징역선고를 받은 자, 떠난 자, 실종자 이루 헤아릴 수 없음.”(4)

▲ 간도 토벌 때 총살당한 대황구 북일학교 부교장 김남극 선생지묘. ⓒ이이소
▲ 간도 참변 때 죽은 창동학교 교사 정기선의 묘. 그는 간도국민회 지도부 일원이었다. ⓒ이이소
▲ 영신학교와 노루마을이라고도 하는 장암동 마을은 완전폐허가 되었다. 선교사 마틴이 방문기를 써서 세계에 알린곳이다. 그 아래 2킬로미터 쯤에 있는 지금의 동명촌. ⓒ이이소

다음은 박은식 선생의 탄식이다.

그들의 장교라는 것들이 많은 병사를 지휘하여 각 부락의 민가, 교회, 학교를 비롯하여 수만 석의 양곡을 불태워 버렸다. 그리고 우리 겨레라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총으로 쏴 죽이고, 칼로 찔러 죽이고, 몽둥이나 주먹으로 때려 죽였다. 산 채로 땅에 묻기도 하고 불로 태우고 가마솥에 넣어 삶기도 했다. 코를 뚫고 갈빗대를 꿰며 목을 자르고 눈을 도려내고, 껍질을 벗기고 허리를 자르며 사지에 못을 박고 손발을 끊었다. 사람의 눈으로 차마 볼 수 없는 짓을 그들은 무슨 재미나는 일이라도 하는 것처럼 했다. 할아버지와 손자가 동시에 죽음을 당하기도 하고, 혹은 부자가 한자리에서 참혹한 형벌을 당하기도 했다. 남편을 죽여 그의 아내에게 보이기도 하고, 아우를 죽여 형에게 보이기도 했다. 죽은 부모의 혼백상자를 가지고 도망가던 형제가 일시에 화를 당하기도 했으며, 산모가 포대기에 사인 갓난아기를 안은 채 숨지기도 했다.(5)

박은식은 북경과 천진에서 발간된 <태오사보>의 기사를 인용하였다.

간동이라는 곳에서는 일본군이 각 부락에서 14명의 양민을 붙잡아 넓은 들판으로 끌고 가 큰 구덩이를 팠다. 그러고는 다른 마을 사람들을 시켜 장작∙석유 등을 가져오게 했다. 잡아온 14명을 총살하고 화장한 뒤, 백골을 구덩이 속에 던져 버려 시체조차 구별해 찾을 수 없게 만들었다. … 용정촌에서 40리 떨어진 어떤 마을에서는 일본군이 밤 1시에 도착하여, 사람들에게 강제로 집을 나오게 했다. 사람들이 집을 나서자마자 곧 발포하여 한 집에서 2,3명씩의 희생자를 냈다. 그러고는 그 시체들을 한군데 모아 불태운 뒤, 다시 집을 불태우고 교회에 불을 질러 건물 19동이 불태웠다. 어느 외국인 선교사가 이 참상을 목도했는데, 새 무덤이 30군데나 되었으며, 고아와 과부들이 무덤을 둘러싸고 울고 있어, 차마 눈으로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이 사망자들은 모두 선량한 백성들이다. 혁명운동을 한다는 이들은 일본군이 마을로 들어오기 전에 이미 피신했으며, 피살된 사람들은 모두 불구자들이나 노약자들뿐이었다. 어떤 선교사는 말하기를 “나배교회가 불탈 때는 한국인 6명이 손발이 묶여 불 속으로 던져졌으며, 소왕교회에서는 먼저 교인들을 교회 안에 감금한 뒤 불을 질렀다”고 했다. 일본군의 만행은 주로 기독교 신자들을 상대로 했으니, 무릇 교회가 있는 부락이면 성한 데가 없었다.(6)

 

▲ 장암동참안유지 비석: 장암동 학살터에 36인의 뼈를 묻은 무덤. ⓒ이이소
▲ 참암동참안유지: 장암동 참변을 기억하기 위한 비석. ⓒ이이소
▲ 장안동참안유지 비석 옆면 ⓒ이이소

일제 측 자료는 장암동과 장암동 참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연길현 용지사 장암동은 화전사 허문동 과 함께 모두 불령선인의 소굴로 불리 우고 있는데 동지방의 영신학교 및 화전사의 배영학교 등을 불령행동의 획책장소로 삼고 있다. 그리고 이 지방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인 대부분은 예수교신자들이며 불령행동의 주모자들은 모두 예수교 신자들이고 불령행동의 음모는 이 불령자들로 부터 꾸며지고 있다. 우리 토벌대는 적도들의 음모 장소로 되는 집(소각된 가운데는 영신학교도 들어있다고 한다)들을 소각하고 적의 시체는 우리나라(일본) 풍속대로 화장하고 부락의 생존자들을 모아놓고 우리 군대의 토벌 취지를 말하고 장래에 있어서 불령행동을 하지 말 것을 경고하고 동 지방에서 철퇴하였다. 그 후 시체 화장이 충분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군대, 경찰 등 인원을 파견하여 협력하게 하여 완전히 타지 않은 시체 및 유골들을 유족, 친지들 혹은 부락대표자들에게 부탁하고 령수증을 받았다.(7)

간도토벌 당시 용정 캐나다장로교 산하의 제창병원 원장이었던 마틴은 장암동 참변에 대하여 <견문기>를 남겼다.

날이 밝자마자 무장한 일본보병들이 야소촌을 빈틈없이 포위하고 높이 쌓인 낟가리에 불을 질렀다. 그리고는 전체 촌민더러 밖으로 나오라고 호령하였다. 촌민들이 밖으로 나오자 아버지고 아들이고 헤아리지 않고 마구 사격하였다. 아직 숨이 채 떨어지지 않은 부상자도 관계치 않고 그저 총에 맞아 쓰러진 사람이면 마른 짚을 덮어놓고 식별할 수 없을 정도로 불태웠다. 이러는 사이 어머니와 처자들은 마을 청년 남자들이 살해당하는 것을 강제적으로 목격하게 하였다. 가옥은 전부 불태워 마을은 연기로 뒤덮였고 그 연기는 용정촌에서도 볼 수 있었다. … 마을에서 불은 36시간이 지났는데도 계속 타고 있었고 사람이 타는 냄새를 맡을 수 있고 집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 알몸의 젖먹이를 업은 여인이 새 무덤 앞에서 구슬프게 울고 있었고 … 큰 나무 아래 교회당은 재만 남고 두 채로 지은 학교도 같은 운명이 되었다. 새로 만든 무덤을 세어보니 31개 였다. … 다른 두 마을을 방문하였는데 우리들은 불탄 집 19채와 무덤 36개와 시체들을 목격하였다.이튿날 일본군 17명은 다시 장암동에 쳐들어와 유가족을 강박하여 무덤을 파헤치게 하고 채 타지 않은 시체를 다시 소각하였다. 사건 당일 현장을 조사한 연길현 경찰 제5분소 순경 “총진하”는 장암동참안에서 조선족주민 33명이 사망되고 2명이 부상당했다고 보고하였다.(8)

로이터 통신 27일 상해발신의 글의 일부이다.

동창태에 구금된 한국인 9명을 몇 리 밖으로 옮긴 후, 죄의 유무를 불문하고 그대로 죽여 버렸다. 머리를 찍히거나 가슴을 찔러, 피살된 사람 중에는 교회 간부가 3명, 교원이 2명이었다. 이날 경내에서 한국인 교회 하나가 소실되고, 며칠 후 또 교회 하나가 파괴당하였다. 처음에는 일본군들이 불을 지르려고 했는데, 다행히도 중국인들이 나서서 ‘만일 방화하면 온 마을의 무고한 중국인들에게 까지 재앙이 미친다.’고 강경히 항의했기 때문에 파괴당하기만 하였다. 11월 4일, 또 교회당 1채 성경 등 모든 종교서적이 불타버렸다. 8명을 체포해갔는데, 그 중에서 교원 1명, 교회 간부 2명은 벌써 교회당 안에서 죽었다. … 중국 경내에서 일본인들이 이렇게 행동하였으니, 중국의 주권을 전혀 무시한 셈이다. 그러니 중국인들의 일본인들에 대한 감정이 어떻겠는가는 더 말할 필요조차 없다.(9)

중국 동삼성 재경학생연합회가 왕청현으로 부터 받은 글의 일부이다.

또 진주한 일본군대는 모두 마을과 산골짜기 안으로 들어가서 한국의 독립군을 수색했다. 진짜 독립군은 벌써 모두 달아나고, 화는 무고한 백성들이 당하고 있다. 왕청 한 고을에도 각지의 보고에 의하면, 피살된 한국인이 1천명이 넘었으며, 그 밖에도 알려지지 않은 일이 얼마든지 있다고 한다. 일본군들은 한국인들의 가택을 수색할 때 마다 모든 세간을 뒤진다. 그리하여 글자 하나라도 독립운동과 관련이 있으면, 곧 온 집안 식구를 1명도 남김없이 모두 총살하고, 그 집과 양식을 불태운다고 한다. 왕청∙대감자∙대황구∙탁반구∙대왕청 등지의 한국인 피해가 더욱 심하며, 그 가혹한 수단과 참혹한 정경은 차마 들을 수 없다고 한다. 총살하고 생매장하기도 하며 여자는 흔히 칼로 찔러 죽인다고 한다. 어느 곳에서는 수백 호 되는 한국인 마을에서 도망한 사람이 겨우 10명이며, 한국인 학교와 교회도 일시에 불탔다고 한다. 11월 20일, 왕청 북쪽에서 한국인 10여 명을, 포승으로 손바닥을 꿰어 잡아끌고 왔다고 한다. 참으로 나라 없는 백성은 상갓집 개보다 못한 것이다. (10)

경신참변은 악마의 탈을 쓴 일제가 동북아를 식민지 삼으려는 탐욕으로 저지른 잔인무도한 조선인 민간학살이었다. 그러나 나라를 제대로 통치하지 못한 조선과 조선 양반이 힘없고 약한 상민들에게 유산으로 물려 준 준비된 재난이기도 하다.

“아베님, 용서해주십시오.”라는 구호를 외치던 엄마부대 집단과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뉴 라이트’ 지식인들과 함께 한 하늘아래에서 살아야 하는 현실이 서글프다. “나라 없는 백성은 상갓집 개보다 못한 것이다.” 라는 말이 청년들의 가슴에서 공명되기를 빌며 <간도참변>에 학살당한 조상들을 추모하며 그 분들이 꿈꾸었던 소박한 세상을 꿈꾼다.

미주

(미주 1) 박은식, 『독립운동지혈사』(서문당 출판), 446~453쪽.
(미주 2) 김춘선 저, 『북간도한인사회의 형성과 민족 운동』, 517쪽
(미주 3) 양봉송 편저, 『훈춘조선족발전사』, 75쪽 
(미주 4) 박은식, 『독립운동지혈사』(서문당 출판), 445~446쪽.
(미주 5) 박은식, 『독립운동지혈사』(서문당 출판), 454~455쪽.
(미주 6) 김철수 저, 『연변항일사적지 연구』, 437, 439, 441, 442쪽. 
(미주 7) 양소전 외 4인 공저, 『중국조선족혁명투쟁사』, 207쪽.
(미주 8) 동상서, 208쪽 
(미주 9) 박은식, 『독립운동지혈사』(서문당 출판), 467, 468쪽.
(미주 10)  동상서, 470, 471쪽.

 

참고서적

⑴ 박은식, 『독립운동지혈사』, 서문당, 2019.
⑵ 김춘선, 『북간도 한인사회의 형성과 민족운동』,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16.
⑶ 김광희 외 다수, 『연변문사자료 제8집 종교사료전집』, 연변정협문사자료위원회, 1997.
⑷ 김철수, 『연변항일사적지 연구』, 연변인민출판사, 2002.
⑸ 박환, 『만주지역 한인민족운동의 재발견』, 국학자료원, 2014.
⑹ 박창욱 외 다수, 『룡정3.13반일운동 80돐 기념문집』, 연변인민출판사, 1999.
⑺ 양소전 외 다수, 『중국조선족혁명투쟁사 』, 연변인민출판사, 2009.
⑻ 김기봉·방영춘·권립 편저, 『일본제국주의의동북침략사』, 연변인민출판사, 1987.
⑼ 김동섭, 『화룡인민의 항일투쟁』, 연변인민출판사, 2006.
⑽ 최석숭, 『훈춘조선족이민사』, 연변교육출판사, 2015.
⑾ 김춘선·안화춘·허영길, 『최진동장군』,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2006.
⑿ 양봉송 편저, 『훈춘조선족발전사』, 연변대학출판사, 2018.
⒀ 강룡권 외 다수, 『21세기로 매진하는 중국조선족발전방략연구』, 료녕민족출판사, 1997.
⒁ 김춘선 외 다수, 『항일전쟁과 중국조선족』, 연변인민출판사, 2015.
⒂ 안화춘·김철수 외 다수, 『연변조선족사 상』, 연변인민출판사, 2011.
⒃ 김춘선·김철수 외 다수, 『중국조선족통사상권』, 연변인민출판사, 2009.

이이소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이소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김상옥로 30, 402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 이해학  |  편집인 : 이정훈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해학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20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