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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흐르듯이상선약수(上善若水, 창 45:7~8/ 마 20:25~28)
홍인식 목사(순천중앙교회) | 승인 2020.06.02 18:06

예수살기와 나의 투쟁

나이가 들어가면서 지나온 삶을 돌아보는 기회를 많이 갖게 됩니다. 특히 이번 미국 여행을 통하여 작은 아들의 아들, 저의 손자를 만나보면서 더욱 더 나의 삶을 돌아보았습니다. 나의 삶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아들을 통하여 또 나의 아들의 아들을 통하여 흘러간다는 것을 다시금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서 나의 개인적인 삶뿐만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사회 또 내가 몸담고 있는 교회의 역사들을 돌아볼 기회를 갖게 됩니다. 태어난 지 이제 50일도 채 되지 않은 어린 아이를 나의 품에 안아 보았습니다. 나의 삶의 연장으로서 아이는 저에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나는 어떻게 살아왔는가! 그러할 때 나의 머리에 떠오르는 여러 가지 단어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강하게 떠오르는 단어가 하나가 있었습니다. ‘투쟁’이라는 단어가 그것이었습니다.  치열한 투쟁! 아, 나는 그렇게 살아왔구나! 치열함과 투쟁! 그것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고 나를 지탱해 온 가장 중요한 단어였구나!

그렇습니다. 나 개인적인 삶에 있어서도 그리고 우리 사회와 교회의 삶에 있어서도 우리는 줄곧 투쟁해 왔습니다. 무엇인가를 성취하기 위하여 끝없이 앞만 보고 달려왔다는 것을 숨길 수 없습니다.

성취하기 위하여 그리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어떤 경우에는 무리한 일도 서슴지 않았고 또 어떤 때는 개인의 희생, 조그마한 것들의 희생은 마다하지 않았다는 것을 되돌아봅니다. 그런 과정에서 우리의 삶과 믿음의 모습은 많은 면에서 왜곡되어졌고 굴절되어 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왜곡현상과 굴절현상에서 기독교회도 자유로울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연유로 사회일반에서 바라보는 교회의 모습도 부정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투쟁적인 모습을 갖고 있는 교회가 이 시점에서 다시 한 번 믿음의 본래의 모습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믿음이 우리를 투쟁적인 모습으로 세상을 지배하려는 욕심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리하지 않고 세상을 섬기는 것이 되어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가지고 예수 살기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교회성장과 투쟁

한국교회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과제가 있다고 한다면 교회성장일 것입니다. 어쩌면 한국교회 내에서의 모든 활동과 사역은 교회를 성장 시키는 데에 집중되고 있으며 그것이 존재의 의미를 주고 있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대부분의 목회자와 교인들에게 교회성장은 모든 것을 정당케 해주는 절대 절명의 주제가 되어가고 있는 듯합니다. 교회가 성장하지 않으면 모든 문제가 거기서부터 발생한다고 믿고 있는 것 같습니다.그래서 우리는 소위 교회성장을 위해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실재로 그렇게 합니다. 어떤 분은 한 기독교 인터넷 신문에 이런 글을 썼습니다.

“이러한 수고가 10년 넘게 계속되고 있는데도 한국교회의 질적 부흥은 멈췄고, 목회자들은 세상에서 존경받기보다는 무시당하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처절할 정도로 생명을 걸고, 어떤 분은 교회부흥을 위해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까지, 또 어떤 분은 온당치 못한 수단 방법을 동원해도, 왜 교회부흥은 잡힐 듯이 잡힐 듯이 잡히지 않는 ‘따오기’가 되어 버렸을까요?”
- 김정명, 2004년 6월 29일

이렇듯 우리는 교회성장을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바칩니다. 교회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성공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다 바칩니다. 쉴 새 없이 달려가기만 했습니다.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많은 상처를 입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밀어붙이기, 달려가기, 투쟁하기 형태의 신앙이 우리에게 남겨준 것은 무엇입니까? ‘하면 된다.’의 적극적인 사고방식이 우리에게 남겨준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기독교가 무섭다는 반응입니다.

무서운 기독교?

일반 사회에서 종교를 바라보는 눈이 서로 다릅니다. 그런데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감정은 불교 혹은 가톨릭교회를 소극적인 종교로 보고 기독교를 적극적인 종교로 보는 것 같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기독교를 전투적인 종교로 보는 것이 보편적인 모습인 것 같습니다.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모습에서는 다른 종교를 압도하고 있지만 이상하게도 대중의 신뢰는 그렇지 않습니다.

최근 2020년 2월 초에 발표될 기윤실(기독교윤리실천운동)의 조사에 의하면 한국 사람들이 가장 신뢰하는 종교는 30%가 가톨릭교회, 26.2%가 불교 그리고 18.9%가 개신교를 꼽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돌아봐야 합니다.

전쟁과 평화

오늘 믿는다고 하는 우리들의 모습은 어떤 모습인가요? 대체적으로 교회는 이 사회를 향하여 전투적인 모습을 보여 왔습니다. 전도하는 것도 그렇고 마치 그러한 것들을 전쟁하는 것처럼 하고 있습니다.

영적전쟁이라는 단어만 해도 그렇습니다. 모든 것을 전쟁하듯이 그리고 죽자고 하는 것 같습니다. 죽자고 믿는 것 같은 모습이 오늘 한국 교회의 단면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세상 사람들은 기독교를 무섭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과연 이러한 모습, 전투적인 모습, 밀어 붙이는 모습, 죽자고 달려드는 모습의 신앙의 태도들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고 있는 가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모습의 뒤에는 “내가 무엇인가를 해 볼 수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깔려 있음을 보게 됩니다.

무엇인가를 내 힘으로 이루어보고자 하는 강력한 욕망이 자리 잡고 있음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규정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일(업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갖은 노력을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는데 전심을 다하고 전력을 다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성과라는 결과를 통하여 가치판단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공하기 위하여 공격적인 모습으로 점차 변해갑니다. 점차 무서운 모습으로 세상에 비쳐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과연 이것이 바람직한 삶과 신앙의 모습일까요? 우리는 이러한 삶과 신앙의 모습들을 반성해 보면서 어떤 삶과 신앙의 태도가 우리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가를 성경적으로 깊게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살기와 요셉

우리의 목회 주제인 예수 살기는 이러한 무서운 모습과 어떤 연관이 있을까요? 예수 살기가 죽자고 하는 것이 될 수 있을까요? 저는 예수 살기와 연관하여 오늘의 본문의 주인공인 요셉의 일생을 통하여 그 의미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 성서의 본문은 요셉이라고 하는 사람의 일생의 마지막 부분을 다루고 있습니다. 요셉은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간 사람의 표본이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요셉이 자신의 형들을 향해 하는 말을 통하여 요셉의 인생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형님들보다 앞서서 보내신 것은, 하나님이 크나큰 구원을 베푸셔서 형님들의 목숨을 지켜 주시려는 것이고, 또 형님들의 자손을 이 세상에 살아남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제로 나를 이리로 보낸 것은 형님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리로 보내셔서, 바로의 아버지가 되게 하시고, 바로의 온 집안의 최고의 어른이 되게 하시고, 이집트 온 땅의 통치자로 세우신 것입니다.”

요셉은 구약에서 예수님을 상징적으로 대변해 주는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는 사람입니다. 요셉은 기근에 마친 당시 중동 사람들을 구해 내기 위하여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이집트로 갔고 결국 그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역사를 이어나가셨습니다. 요셉은 예수님의 구약적 모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요셉의 일생을 우리는 어떤 말로 요약할 수 있을까요? 저는 요셉의 일생을 한마디로 물처럼 흐르는 모습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그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몸부림치지 않았습니다. 투쟁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고난들을 묵묵히 흐르는 물처럼 받아들였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발버둥치는 모습을 우리는 발견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는 흐르는 물처럼 삶의 굴곡에 몸을 맡기고 그렇게 흘러가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의 삶의 어떤 부분에서도 우리는 투쟁적이거나 전투적인 모습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는 물처럼 흘러가는 삶을 살았습니다.

물처럼 흐르는 삶이야 말로 요셉의 삶을 요약해 놓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삶이 고난이 없었던 그리고 굴곡이 없었던 삶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는 많은 삶의 굴곡을 겪었던 사람입니다. 아마 그처럼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사람도 구약에서 그렇게 많이 찾아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편안하게 그러한 고난의 시기들과 삶의 위기들을 극복해 나갔던 것입니다. 그가 이처럼 흐르는 물 같은 인생을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우리의 삶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신앙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무엇인가를 얻기 위하여 악착같이 덤비고 추구하고 전투적인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까? 미친 듯이 앞만 보고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그저 전쟁처럼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까? 삶을 너무 전투적인 것으로 보거나 혹은 신앙을 전쟁으로 보는 사람들에게는 여유를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이런 시각을 가진 사람들에게서는 늘 긴장감이 감돕니다. 긴장감속에서 경계심을 풀지 않고 살아갑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어찌 삶의 여유와 평안함, 평화 행복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요셉이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전투적인 삶의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자신의 삶을 완전히 맡긴 채 물처럼 흐르는 삶을 살아갔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자신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물론 그가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는 어렸을 때는 매우 공격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는 꿈을 꾸고 그것을 형제들에게 자랑하면서 자신이 장차 모든 형제들의 위에 서게 될 것이며 그의 형님들이 결국에는 동생인 자신 앞에 고개를 숙이게 될 것이라고 공공연하게 말하곤 하였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총애를 받으면서 자라났습니다. 늘 채색 옷을 입고 형님들 앞에 군림하면서 안하무인격으로 살아갔습니다. 그는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하여 매우 공격적이고 도발적인 모습으로 살아갔습니다. 그의 이러한 삶의 태도는 형들로부터 시기를 받게 되었고 결국 그것으로 인하여 요셉의 삶은 파멸하게 됩니다.

이처럼 요셉은 처음부터 물 흐르는 것 같은 삶을 살았던 것은 아닙니다. 그가 ‘물 흐름’이라는 인생의 진리를 깨달은 것은 수많은 인생의 고난의 길에서입니다. 그는 설명할 수 없이 당하는 고난을 통하여 삶의 진리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 이후의 그의 삶은 달라집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맡깁니다. 하나님의 역사의 섭리에 맡깁니다. 그의 이러한 인생관을 여지없이 소개하고 있는 것이 오늘 읽은 본문에 기록된 요셉의 고백입니다.

실제로 나를 이리로 보낸 것은 형님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리로 보내셨습니다.

상선약수(上善若水)

아시아에는 많은 좋은 지혜의 스승들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서양의 것을 지나치게 숭상하다보니 우리 아시아의 것들을 조금은 소홀히 하는 모습을 보이곤 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기독교 신앙도 늘 서양철학과 지혜에 의해서만 해석되고 연구되곤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꼭 서양에만 지혜를 주신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은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는 아시아 민족들에게 풍요로운 지혜와 은총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양철학 일변도에서 벗어나서 아시아의 오랜 전통의 지혜로부터 출발하여 성경을 해석하고 성찰해 보는 것은 우리의 기독교 신앙을 보다 더 폭 넓고 풍요롭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성경을 더 잘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아시아의 지혜 중에 도덕경(道德經)이 있습니다. 노자(老子)라는 사람이 썼다고 알려진 책입니다. 도덕경은 약 5,000자, 81장으로 되어 있으며, 상편 37장의 내용을 「도경(道經)」, 하편 44장의 내용을 「덕경(德經)」이라고 합니다.

노자가 지었다고 하나 많은 학자들은 한 사람이 쓴 것이라고는 볼 수 없고, 여러 차례에 걸쳐 편집된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오랜 기간 동안 많은 변형 과정을 거쳐 기원전 4세기경 지금과 같은 형태로 고정되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도덕경 8장은 이런 말로 시작됩니다. 

上善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 故幾於道  居善地 心善淵 與善仁 言善信 政善治 事善能 動善時 夫惟不爭 故無尤
상선약수 수선이만물이부쟁 처중인지소오 고기어도 거선지 심선연 여선인 언선신 정선치 사선능 동선시 부유부쟁 고무우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습니다. 물은 모든 것을 이롭게 하지만 다투지 않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있기 싫어하는 장소에 처할 줄 압니다. 그래서 물은 道에 가깝습니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그의 마음씀씀이는 매우 심오합니다. 이웃들에게 사랑을 베풉니다. 말을 할 때는 믿음직하게 합니다. 다스릴 때는 하늘의 원리를 따릅니다. 일을 할 때는 가장 적절하게 합니다. 그리고 때를 잘 구별합니다. 그는 다투지 않는 삶을 살기에 언제나 허물이 없습니다.

도덕경에서 노자는 진리를 깨닫고 살아가는 사람은 마치 물처럼 흘러가는 삶을 살아간다고 합니다. 물이라는 말에서 표현하는 것처럼 흐르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진리의 삶을 살아가는 삶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살기는 이 같은 삶을 의미합니다. 물처럼 흐르는 것이 없이는 예수 살기는 이루어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닮아가고 담고 따르고 살기를 원하는 예수님이 그 같은 흐르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온갖 힘을 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힘으로 무엇인가를 그리고 자신의 당대에 이루기 위하여 애를 쓰는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모습이 우리의 마음을 답답하게 만들기까지 하였지 않습니까?

한참 인기가 오를 때 사람들이 그를 왕으로 옹립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기회를 이용하지 않고 조용히 사람들의 눈에서 사라지십니다. 산으로 올라가십니다. 그리고 기도하십니다.

예수님의 삶을 여러 가지 상징으로 표현할 수 있겠지만 물이라는 상징만큼 그 분을 잘 나타낼 수 있는 것은 드뭅니다. 예수님의 삶은 흐르는 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러한 삶을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역사 섭리에 대한 철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분은 자신의 힘으로 그리고 억지로 무엇인가를 이룩하려고 아등바등 하지 않았습니다. 흐르는 물처럼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큰 물줄기에 자신의 삶을 맡기고 사셨습니다.

노자는 그의 도덕경에서 흐르는 물로 대변되는 상징을 대단히 중요시 여깁니다. 그런데 물(水)외에 그가 중요하게 여기는 생각 중에 무위(無爲)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지 않음’이라는 뜻일 것입니다. 이것은 ‘두손두발’을 놓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기력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이 무엇을 하겠다고 인위적으로 애쓰는 것(유위, 有爲)을 하지 않는 다는 의미입니다. 하늘의 뜻에 자신을 맡기고 묵묵히 그 뜻을 따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위무위(爲無爲) 즉무불치(卽無不治)(하지 않음으로 하면 다스려지지 않는 것이 없다)라고 합니다.

돌이켜 보면 내가 무엇인가를 위해 애를 쓰고 어떤 경우에는 갖은 무리수도 두고 있지만(유위, 有爲) 결국 이룬 것은 무엇입니까? 갈등과 불만만이 쌓여 온 것이 우리의 인생이 아니었던가요? 그렇게 다투고 상처를 두고 그리고 두 눈에 불을 켜고 열을 내고 살았는데 과연 우리가 이룬 것이 무엇이란 말입니까?

예수님은 그리 살지 않았습니다. 그 분은 자신의 생애의 마지막 부분에서 십자가의 죽음을 눈앞에 두고 기도합니다.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피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나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이루소서!’ 예수님은 흐르는 물처럼 사셨습니다.

예수살기와 흐르는 물

우리는 금년부터 예수살기를 시작합니다. 예수살기로부터 시작해서 우리의 신앙과 삶이 전투적인 모습이 극복되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전쟁과 같은 삶이 아닙니다. 투쟁적인 삶이 아닙니다.

오직 흐르는 물처럼 그렇게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살아가게 될 때 흠이 없는 행복한 삶이 우리에게 이루어 질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살기는 시작될 것입니다. 흐르는 물처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복이 여러분의 삶에 흘러넘치게 되기를 기원 드립니다.

흐르는 물 같은 모습의 신앙과 삶을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투쟁하는 것이 아니라 흐르면서 예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가득 채우는 물과 같은 신앙과 삶을 생각해 봅니다. 물 흐르듯이 흐르는 믿음이야 말로 우리의 삶을 진정으로 행복하게 해 줄 것입니다.

上善若水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습니다.

묵묵히 흐르라 한다

- 정인영

고요한 흐름
우주의 어둠 깨뜨리고
한 모금, 한 움큼 생명 나누며
길을 열었다

바위를 가르고
굽이져 휘어지는 시름에도
유연한 숨 쉬며 
진종일 보냈다

밤낮없이 낮게 엎드린 채
바람에 뒤척이고 
꽃향기 그리워하며
넘실거리는 계절 지냈다

가득 차올라도 움켜쥘 수 없어
가만가만 들어가면 
하늘의 뜻 찰랑거린다
나는 마침내 물결에 가닿아
뾰족한 산 부드럽게 타고
바위 돌아 낮은 들로 굽이져
만물 어루만지며 흐른다

홍인식 목사(순천중앙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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