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학술 칼럼
단군신화와 성서의 창세기는 서로 만나야 한다선맥전통론의 발원
이호재 원장(자하원) | 승인 2020.08.04 17:04

단군신화는 홍익인간, 재세이화의 신시(神市)공동체
신시공동체는 선맥(僊脈)의 발원지
선맥(僊脈)공동체는 새 시대의 문명공동체

단군신화는 복고담론이 아닌 현재적 미래담론이다

단군은 한민족이 지닌 기억공동체의 유산이다. 어느 민족이나 운명공동체의 생존이 도전받을 때 특정 사건은 창조적 기억으로 재발견되고 공동체에 의해 재해석되어 새로운 전통과 정통의 길을 걷게 된다.

이는 한민족의 거시적인 역사 흐름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고려시대 몽고의 침략으로 민족의 존망이 위기에 처했을 때 민족의 생존과 동질감을 형성하기 위해 역사적으로 전승된 단군신화가 일연에 의해 『삼국유사』에 채록된 사건이며, 동시대에 김부식은 신라를 중심으로 한 『삼국사기』를 기술하고 신라의 독창적인 문화적 요소를 ‘풍류’로 파악한 최치원의 「난랑비서」를 역사서에 남기고 있다. 둘째, 조선 말기, 중화의 세계관이 붕괴되고 서학(천주교)에 대한 위기의식으로 토착화된 종교적 영성이 폭발한다. 이는 민족종교 창시자가 궁극적 존재에 대한 다양한 체험, ‘개벽’을 통한 지상선경 구현이라는 망각된 한민족의 이상세계에 대한 근대적 언설로 나타난다. 셋째, 을사늑약으로 시작된 일제 강점기에 새롭게 한민족의 원형적 사유상징으로 ‘ᄒᆞᆫᄇᆞᆰ’사상이 정착되어가는 과정에 있다.

아직 대중에게 생소할 수도 있는 ‘한밝사상’은 1991년에 공개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대일광명(大日光明)을 뜻하는 우리 민족 고유의 종교사상”으로 정의하고 있다. 과연 현대에 회고된 한밝사상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변찬린은 현대적 관점에서 재구성된 ‘ᄒᆞᆫᄇᆞᆰ’이라는 한민족의 표징어를 32세인 1965년에 자신의 종교수상록인 『禪, 그 밭에서 주운 이삭들』에 호로 쓴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자세히 언급하기로 한다.

그럼 단군신화와 풍류, 한국 신종교의 종교세계와 ᄒᆞᆫᄇᆞᆰ을 관통하는 하나의 키워드는 무엇일까? 결론부터 말한다면 바로 선맥공동체이다. 선맥공동체는 홍익인간의 신시공동체이자 재세이화의 평화공동체이다. 또한 하늘과 땅과 인간이 조화를 이룬 생태공동체이자 토발적인 선맥의 계승공동체로서 외래사상을 창조적으로 수용하는 인식공동체이기도 하다.

이처럼 선맥공동체의 선맥(僊脈)’은 조화로운 평화세계와 영원한 생명세계를 나타내는 한민족의 문화적 상징어이지만 세계 사유지평에서 보편성을 가진 종교적 기호이기도 하다. 변찬린은 그의 주저인 『성경의 원리』 4부작에서 첫 권의 머리말에 “성경은 어느 특정종교의 전용문서가 아닌 대도(大道)의 문서이다.(중략) 성경 속에 뻗어 내린 대도의 정맥(正脈)은 선맥(僊, 仙脈)이었다. 성경은 선(僊)을 은장(隱藏)한 문서이다”(11쪽)라고 밝히고 있다.(1)

필자는 새 축 시대의 개벽세계로서의 중핵인 ‘선맥전통론, 풍류도통론과 ᄒᆞᆫᄇᆞᆰ정통론’이라는 학문적 가설을 가지고 몇 차례에 나누어 독자와 소통하려고 한다. 이 글은 변찬린의 종교사상을 이해하는데 상당한 배경지식을 제공할 것이다. ‘전통’을 회고하고 ‘정통’을 주장하는 것은 미래의 전망을 선취하고, 과거의 신화와 역사를 재구성하여 현재적 관점에서 역사적 추동력을 얻고자 하려는 학문적 작업이다.(2) 이번 회는 첫 작업으로 단군신화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그리스도교 신학과 단군신화와의 만남

단군신화는 토착화 신학자들이 피해갈 수 없는 주제이다. 유동식은 『한국종교와 기독교』(1965), 『한국 무교의 역사와 구조』(1975)에서 단군신화를 체계적으로 연구하였다. 윤성범은 1963년 10월에 『기독교 사상』에 발표한 글에서 ‘베스티기움 트리니타티스’(Vestigium Trinitatis)라고 하면서 환인-환웅-단군의  고려 중기 기록이 경교(景敎)의 영향을 받은 삼위일체론적 신관이라고 주장하여 큰 논쟁거리를 제공했다. 삼위일체라는 그리스도교 신관의 흔적을 한국의 시원신화에서 찾으려는 그의 신학적 상상력은 진위를 떠나 선교신학의 전범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또한 김경재의 『이름없는 하느님』(2002)과 허호익의 『단군신화와 기독교』(2003)와 방석종의 『신화와 역사』(2006), 옥성득의 『한국 기독교 형성사』(2020) 등도 단군신화와 한국인의 신관에 대해 선교신학자의 관점을 잘 보여주는 연구이다. 그러나 선교신학자의 단군과 관련되는 연구는 국내외의 풍부한 연구성과(3)가 그다지 반영되지 않고 ‘복음선교’와 ‘선교신학’의 목적을 가진 선교론적 성취론의 관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를 가짐으로 한국 종교문화 지평에서 융합하여야 하는 과제가 남아 있다.(4)

특히 삼위일체 신관은 소위 ‘이단’과 유대교와의 차별을 통해 그리스도교의 정통을 내세우기 위하여 325년 니케아공의회(公議會)에서 공인되고 451년 칼케돈공의회에서 추인된 교의이다. 따라서 서구신학의 틀 안에서 형성된 그리스도교식의 삼위일체의 흔적을 한국의 신관과 신화에서 찾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일부 선교신학자들은 우실하의 3수 분화의 세계관에 대한 연구성과, 삼태극의 기원, 『역』 사상과 『천부경』 등을 동원하여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 구조에 대한 선이해로 이해한다.

하지만 이는 고대로부터 전래된 3·1 구조의 세계관은 고조선 문명의 역사공간에서 나타나는 보편적인 종교현상이라는 점도 고려하여야 한다. 특정 종교적 신앙 관점을 표준으로 다른 종교문화를 재단하는 호교론적인 해석학은 성숙한 종교인이라면 자제해야 한다. 신앙적 신학과 학문적 지성은 늘 일정한 ‘거리두기’를 하고 열린 학문의 장에서 만나야 한다. 해석학적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대목이다.

▲ 단군 관련 참고 도서

단군신화라는 주제는 단군은 역사적 신화인가? 신화적 역사인가? 혹은 그리스도교의 하느(나)님과 환인은 동일한 하늘님인가? 하는 복고풍 주제를 재탕하려는 한가로운 담론이 아니다. 단군을 중심으로 한 고조선 문명은 중국대륙에서 홍산문화를 중심으로 요하문명에 대한 대대적인 유적발굴과 고고학적 연구성과가 속속 발표되고 있다. 한편 북한은 1993년 단군릉을 발견하였다고 하면서 성지화 작업을 하였다고 대내외에 공개하고 있다.(5) 한국에서도 1985년에 단군성전 건립과 1999년 촉발된 ‘단군상 논쟁’은 그리스도교계도 참여한 ‘소모적 담론’의 장이 형성된 적도 있었다. 필자는 특정 단체를 옹호하거나 변호해야 할 입장에 서 있지 않음을 밝힌다.

이처럼 단군을 포함한 고대사 연구는 몽고와 만주지역(현 중국의 동북 3성 지역), 북한 등에서 발굴된 유적의 역사화 작업으로 남북한, 중국, 일본 등 역사해석의 각축을 벌이고 있는 국제적인 담론현장이다. 더구나 남북통일의 시대가 온다면 ‘단군’은 통일시대의 구심점으로 작용할 것은 쉽게 추측할 수 있다.(6) 한민족의 역사가 존재하는 한 단군신화는 해석되어야 할 전통담론이자 정통담론의 핵심 가운데 하나이다.

단군신화와 성서의 창세기는 새로운 관점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단군신화와 성서의 창세기라는 텍스트는 상응하는 이해지평에서 새롭게 대화가 되어야 한다. 이는 한국의 그리스도교인이라면 그리스도교인으로서 신앙적 정체성과 단군의 후손인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이 배타적이지 않고 공존하는 성숙한 신앙인의 태도를 가질 수 있어야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일부 그리스도교인이 보이는 단군상이 우상숭배라면서 배척되어야 하고, 역사적 건축물이라면 수용할 수 있다는 선택적 판단은 그리 정당하지 못하다. 이는 한국 종교문화를 이해하지 못한 지극히 선교신학적인 배타적인 신앙의 한 단면에 불과하다.

만일 개신교 측이 유교의 제사를 조상숭배라든가, 단군성전과 단군상 등을 우상숭배라고 배타적이고 배척하는 것이 올바른 개혁 신앙의 종교적 주장이라면, 천주교의 성당에 있는 예수상과 마리아상과 성화에 대해서도 동일한 잣대를 가져야 최소한 그 신앙(학)적 주장의 순수성이라도 담보 받을 수 있지 않을까? 배타적인 신앙(학)적 주장은 교조적 신앙(학)의 협소함을 드러내는 종교적 편협성을 드러내는데 불과하다. 지구촌 합류시대에 종교인은 다른 종교문화에 포월적이고 포용적인 겸손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 독창적인 종교적 주장은 평화로운 공존과 조화가 전제되어야 한다. 한국의 종교지평은 이런 상황에서 형성되어온 평화의 전통이다.

▲ 태백산 천제단

이런 면을 고려하여 독자들은 단군신화와 성서의 창세기(특히, 1장에서 3장)를 차분히 읽어보자. 우리는 두 텍스트가 서로 공명하고 호응하는 지점과 차별되고 변별되는 지점을 읽어낼 수 있는 성숙한 지성을 가져야 한다. 공명과 호응하는 지점은 두 텍스트가 대화할 수 있는 공통분모이며 차별되고 분별되는 지점은 두 텍스트가 가지는 독창성이자 상호 보완할 수 있는 지점이다. 한민족 신화의 원형인 단군신화의 대강은 이렇다.

천신인 환인, 환웅, 그리고 천신인 환웅, 인간이 되기를 간절히 염원하는 호랑이와 곰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환인은 환웅이 천하에 뜻을 두고 인간 세상을 탐하기를 환인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할 만한(弘益人間)’ 태백산을 점지해 주며, 환웅에게 천부인과 3천 무리와 더불어 신단수 아래로 내려왔다. 그곳을 신시(神市)라 이른다.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식(穀)·생명(命)·질병(病)·형벌(刑)·선악(善惡) 등 무릇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여 인간 세상을 다스리고 교화하였다(在世理化). 그때 호랑이와 곰이 같은 동굴에 살았는데 환웅에게 인간이 되기를 간절히 원하므로 쑥과 마늘과 주어 백일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인간이 된다고 하였다. 곰은 21일 만에 여자로 변하고 호랑이는 금기를 지키지 못하였다. 웅녀가 신단수 아래서 임신하기를 원하니 환웅이 인간으로 변하여 단군을 낳았다. 단군은 도읍을 아사달로 옮겨 나라를 다스린 지 1,500년이 되고, 1,908세나 살다가 아사달에 들어가 산신이 되었다.

필자는 지면의 한계와 연재의 특성을 감안하여 두 텍스트에서 유사성과 차별성을 8가지로 정리해 보았다. 이외에도 다양한 관점에서 두 텍스트를 읽어내어 선별적인 내용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두 텍스트를 읽고 해석할 때 상응하는 비평적 관점을 가져야 한다는 점은 특별히 강조하고 싶다.

1. 신화와 역사 : 단군신화와 에덴설화의 역사성 여부
2. 신관의 문제 : 단군신화의 환인과 환웅과 창세기 1장의 엘로힘과 2장의 엘로힘 야훼
3. 구도의 상징 : 단군신화의 동굴과 에덴설화의 아담이 잠을 자는 것
4. 동물의 의인화 : 단군신화의 인간이 되기를 원하는 호랑이와 곰과 성서의 말하는 뱀
5. 구도의 식물 : 단군신화의 쑥과 마늘과 성서의 생명나무와 선악나무
6. 실재적 장소 : 단군신화의 태백산과 성서의 에덴동산의 위치
7. 장수의 의미 : 단군의 1,908살과 아담의 930세
8. 영생의 의미 : 단군의 산신과 아담의 죽음

단군신화는 그리스도교의 토착화라는 관점에서 피해갈 수 없는 주제임은 익히 알고 있다. 그럼 과연 변찬린은 ᄒᆞᆫᄇᆞᆰ이라는 자신의 호의 연원일 수도 있는 단군신화를 어떻게 해석하였을까? 변찬린은 성서텍스트는 물론 유교와 불교, 도교 등의 경전 텍스트를 문명과 역사, 종교와 과학, 신과 인간에 대한 하늘의 뜻이 담긴 구도의 문서로 음미한다. 그는 현대의 신단수(神檀樹)에 정좌하여 묵상하고 기도하며 역사의 장에서 구도자의 삶을 살았다. 간혹 텍스트 행간에서 읽힌 깨달음의 경지를 ‘번개와 피와 아픔과 고독’ 가운데 선지자의 목소리를 낸다. 변찬린의 시다.

다시, 신약(新約)을 읽으며

한 때 나는 난(蘭)을 가꾸면서
노자(老子)의 초입(初入), 말하자면
곡신불사(谷神不死) 시위현빈(是謂玄牝)의 골안
그 부근에서 쇄풍(曬風)하기도 했고

뜨락에 은행잎 지던 어느 날에는
구(丘)의 예(禮)다운 투정
굵게 썬 회(膾)를 나무래던
간지러운 잔말을 귀밥에 들으면서
천상지재(天上之載) 무성무취(無聲無臭)의 하늘
그 주변을 서성거리기도 했고

혹은 연꽃에 마음(馬陰)을 감추(藏)시고
사정삼매(射精三昧)에 드신
구운(瞿曇)(7)의 자부름을 흉내내어
색증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의 마당
그 층하(層下)에서 조올기도 했고

그러다가 자꾸만 낯설어지는 세상
답답하고 심심하여 쇠주(酒)를 마시다가
흐릿한 취중(醉中) 양잿물을 먹고
하루에도 너댓번은 실히
저승의 문턱을 들락거리기도 했다.

헌데, 참 별난 일은
그 전에도 풋풋하고 싱싱한
백합(百合)의 체취(體臭)가 향도(響導)하는
이 신작로(新作路)를 뻔질나게 지나쳤지만
그건 아마도 건성이였던가?

하늘이 도끼질하여 장작을 패듯
아둔한 내 머릿골 쪼개시고
요한 복음(福音)사장(四章) 이십사절(二十四節)에 지지(知止)케 하시니
이 또한 무슨 (道緣)일까?

아계(啞鷄) 홰쳐우는 이 아침
청수(淸水))에 눈 닦고 세이(洗耳)하고
천지(天地)사이 향(香)을 사른 후
신단수(神檀樹) 아래 고요히 남면(南面)하여
구름이 사라진
신약(新約)이 여백(餘白)을 의시하며
그 행간(行間)을 되씹어 고쳐 읽는다.(8)

우리는 다음 회에서 변찬린을 《에큐메니안》의 지면에 초대하여 ‘단군신화의 상징적 해석’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가상대담형식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미주

(미주 1) 일부에서 주장하는 한국의 종교적 중핵이 무교라는 것은 다시 재고되어야 한다. 선맥과 무맥은 다른 층위의 차별화된 종교적 현상에 불과하다. 이호재, 「한국의 재래종교의 ‘구원’관」, 『신학과 교회』 10, 2018, 111-116.
(미주 2) 이용주,  『세계관 전쟁』,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20, 427-438.
(미주 3) 단군과 관련하여 최소 530여 종의 연구서와 1,250여 편 이상의 다학제적으로 연구되어 있다. 김성환, 「단군 연구사의 정리와 방향」, 『단군학연구』, 2008, 133-184.
(미주 4) 종교학에서는 윤이흠(공저)의 『단군, 그 이해와 자료』,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4, 서울대학교 종교문제연구소, 『신화와 역사』,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3 등이 참고할 만하다.
(미주 5) 유홍준, 『나의 북한 문화유산답사기(상)』,  중앙M&B, 2000, 142-147.
(미주 6) 조남호, 「남북한의 단군연구」, 『선도문화』 26, 2019, 33-65.
(미주 7) 부처의 열 가지 이름 가운데 하나.
(미주 8) 한글세대를 위하여 한글과 한자를 병행하였다. 원문에는 한자 앞에 한글이 없다. 변찬린, 『禪房戀歌』, 思想社, 1972, 60-63.

이호재 원장(자하원)  injicheo@naver.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김상옥로 30, 402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 윤인중  |  편집인 : 이정훈  |  청소년보호책임자 : 윤인중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20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