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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역사 연대 추정을 위한 기준점이스라엘 역사 알기 ⑷
이성훈 목사(한신대 구약학 박사과정) | 승인 2020.10.08 16:42

조심스럽게 글을 쓰다보니 전제에 대한 설명이 길어졌습니다. 이후로는 글을 읽으실 때 편의를 더하기 위해 본문 중간에 성경구절이 나타날 경우 「」로 표기할 것이고, 참고할 성경구절은 마침표 앞에 괄호로 표기합니다. 인명은 ‘’로 표기합니다. 이제 본격적인 연대 추정을 해보려고 합니다. 지난 북왕국 연표에 이어 남왕국 연표를 보겠습니다.

남왕국과 주변국

▲ 남왕국 연표

이 연표를 보면 열왕기에 나타난 사건들 속에서 주변국과 연결되는 지점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열왕기상 14장 25-26절」은 ‘르호보암’ 시절에 이집트 왕 ‘시삭’이 침공했다고 말합니다. 「열왕기하 8-9장」이 다루는 긴 이야기 속에서 ‘아하시야’는 아람왕 ‘하사엘’과의 전투에서 부상을 당한 후 ‘예후’에 의해 살해당합니다. 북왕국의 왕 ‘요람’은 그보다 먼저 ‘예후’에게 살해당합니다. 아람왕 ‘하사엘’에 관한 언급은 이후에도 종종 언급됩니다(왕하 10:32-33; 12:17-18). 「열왕기하 13장」은 ‘하사엘’ 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 ‘벤하닷’까지 이스라엘을 침공했다고 기록합니다.

「열왕기하 17장 3절, 18장 9절」에 따르면 북왕국을 속국으로 만든 앗수르의 왕은 ‘살만에셀(살만에셀 5세, 주전 727-722년)’이며, 「열왕기하 18장 13절」은 ‘사르곤 2세(주전 721-705년)’의 뒤를 이은 ‘산헤립(주전 705-681년)’이 ‘히스기야’가 다스리는 남왕국을 침공했다고 전합니다. 이 침공은 최소 한 차례 더 일어납니다.

「열왕기하 23장 29절」에서 ‘요시야’는 이집트 왕 ‘느고’에 의해 죽었으며, 「같은 장 33-34절」에서 ‘느고’는 ‘여호아하스’를 폐위시키고 ‘여호야김’을 왕으로 세웁니다. 「열왕기하 24장 1-6절」을 보면 ‘여호야김’은 바벨론 ‘느부갓네살’의 침공 때에 죽습니다. 「열왕기하 24장 15절」에는 다음 왕인 ‘여호야긴’이 ‘느부갓네살’에 의해 바벨론으로 사로잡혀가는 이야기가 나타납니다.

우리는 성경에 나타난 주변국들과 충돌한 사건들을 통해 왕정시대의 대략적인 연대를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이 작업도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지만, 우선 성경과 주변국의 기록을 비교하여 왕정 시대 연대의 큰 틀부터 잡아 보려고 합니다.

바벨론 포로기 연대

먼저 연대를 가장 확실히 특정할 수 있는 시기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바로 바벨론에 의한 남왕국의 멸망과 그 연도입니다.

고고학적 발굴에 따르면 주전 7-6세기에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일어난 광범위한 파괴 흔적이 발견됩니다. 또 1900년대 바벨론 지역에서 출처가 불명확한 토판이 골동품 상인을 통해 습득되었는데, 이 토판에는 ‘나보폴라살(주전 626-605년)’과 ‘느부갓네살(주전 605-562년)’ 시대의 기록이 남겨져 있었습니다.

▲ 바벨론 연대기(느부갓네살)

‘바벨론 연대기’라 불리는 이 토판에는 ‘나보폴라살’과 ‘느부갓네살’ 치세하에 일어난 주요한 사건이 1년 단위로 짧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런 발견들과 성경을 비교해 봄으로 우리는 ‘느부갓네살’이 남왕국을 침략하고 멸망시킨 거의 정확한 시기를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벨론의 역법은 이후 다른 나라들에도 영향을 미쳤기에 거의 정확한 추정이 가능하고, 역법에 따른 계산에 의해 바벨론의 연대는 큰 이견 없이 확정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열왕기하 24장」에 나타난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함락시켜 속국으로 만들고, ‘여호야긴’을 비롯한 남왕국 백성을 사로잡아간 1차 포로기는 주전 597년이 됩니다. 그런데 종종 이스라엘 역사와 관련된 책들을 보면, 이때를 ‘주전 598/597년’이라고 적어놓은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대략 몇 년’이라는 표현도 있는데 왜 두 개의 연도를 함께 적고 있는 것일까요?

연도 두 개를 함께 적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지금의 서양력과 바벨론의 역법을 비교했을 때, 한 해의 첫 번째 달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바벨론 역법에서 한 해의 첫 달은 ‘니사누(Nisanu)’로 지금으로 치면 3월 중순에서 4월 중순까지입니다. 쉽게 봄부터 한 해가 시작된다고 보면 됩니다. 바벨론 포로기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 역법을 배워왔기 때문에 이와 거의 흡사한 월명을 사용합니다. 성경에서 종종 보게 되는 ‘니산월’이 ‘니사누’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 고대 히브리 달력과 바벨론 달력

이들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12개월을 사용했지만, 19년 주기의 월력을 사용했습니다. 19년 주기 중 3년마다 윤년인 해에는 ‘아다루 아르쿠(Addaru Arku)’라는 13월이 있었고, 17년째에는 이를 ‘울룰루(Ululu)’로 불렀습니다. ‘아다루 아르쿠’와 ‘울룰루’의 존재는 지금 우리의 달력과 차이를 만듭니다. ‘니사누 1일’이라고 해서 꼭 ‘3월 15일’인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성경이나 바벨론 연대기에 정확한 ‘월’이 표시되지 않고 왕의 연대만 기록된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3월이 첫 달로 시작되기 때문에 ‘~ 왕 몇 년’이라고만 나타나 있으면 2년을 동시에 추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앞서 살펴보았던 ‘여호야긴’이 포로로 잡혀간 때를 「열왕기하 24장 12절」의 기록만으로 살펴본다면, ‘느부갓네살’ 8년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느부갓네살’ 8년은 주전 597년 3월부터 596년 3월까지입니다. 열왕기하에는 정확한 월이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여호야긴’이 포로로 잡혀간 1차 포로기가 주전 597/596년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은 조금 더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대부분 학자는 1차 포로기를 주전 597/596년이 아닌 주전 598/597년이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바벨론 연대기에 의하면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공격한 때를 ‘느부갓네살 7년 키슬리무’라고 말합니다. ‘키슬리무(Kislimu)’는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서양력으로 대략 11월 중순부터 12월 중순까지입니다.

「열왕기하 24장 12절」은 ‘느부갓네살’ 8년에 성이 함락되고 ‘여호야긴’이 끌려갔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바벨론 연대기에 나타난 ‘느부갓네살’ 7년과 차이가 있습니다. 반면에 바벨론 연대기는 ‘키슬리무’에 침공이 시작되어 ‘아다르 제2일’에 성을 함락했다고 말하는데, ‘아다르(Adar)’는 2월 중순부터 3월 중순까지로 한 해의 마지막 달입니다. 이 기간은 약 세 달로 「열왕기하 24장 8절」에 나타난 ‘여호야긴’의 통치기간과 일치합니다.

「예레미야 52장」에는 「열왕기하 24장」과 완전히 동일한 본문이 나타나는데, 28-30절은 열왕기하와 다른 기록이 나타납니다. 느부갓네살의 연대와 포로 인원수가 다르게 나타납니다. 예레미야는 1차 포로기가 느부갓네살 7년에 이루어졌다고 기록합니다. 이는 바벨론 연대기와 맞닿아 있습니다.

이 1년이라는 기간의 차이로 열왕기가 잘못되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여호야김’은 ‘느부갓네살’ 7년인 주전 598년, 전쟁의 시작과 함께 죽습니다. 「열왕기하 24장 6절」에서 ‘여호야김’이 조상들과 함께 잔다고 표현한 점으로 봤을 때, 그가 전투 중에 목숨을 잃었거나 적군에게 사로잡혀 죽은 것은 아닌 듯 합니다.

전쟁은 석 달간 지속되었고, 전시(戰時)였기 때문에 급하게 왕위에 오른 ‘여호야긴’은 전쟁 종료와 함께 바벨론 포로로 끌려갑니다. ‘느부갓네살’이 ‘여호야긴’을 포로로 잡은 때는 전쟁이 끝난 ‘느부갓네살’ 7년의 마지막 달이었고 지금으로는 주전 597년 초가 됩니다. 만약 열왕기의 기자가 ‘느부갓네살’의 전후(戰後) 조치가 완료된 시점을 기준으로 시기를 적고 있다면 이때는 ‘느부갓네살’ 8년이 될 수도 있습니다.

1년이 아니라 한 달 차이로 ‘느부갓네살’ 7년이 될 수도, 8년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이 부분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봅니다. 분명한 점은 ‘여호야긴’이 포로로 끌려간 시점은 주전 597년이라는 점입니다.

바벨론 연대기가 ‘느부갓네살’ 7년까지만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남왕국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와 관련된 사건의 명확한 연도 파악에는 조금 애매한 점이 있지만, 「열왕기하 25장 2절」의 기록에 따라 남왕국이 완전히 멸망한 시기는 주전 586년입니다.

르호보암과 쇼생크 1세(시삭)의 침공

우리는 이스라엘 왕정 시대의 대략적인 연도 틀을 잡아놓고 그 안에서 수정 작업을 진행해 가려고 합니다. 나머지 이스라엘과 주변국의 상황과 그 정확한 연대는 이후 작업을 통해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왕정 시대에 관한 성경의 기록과 주변국의 기록을 완전히 비교할 수 있는 사건은 앞서 살펴본 바벨론에 의한 남왕국 함락 사건 밖에 없습니다. 그 이전의 기록들은 서로 조금씩의 오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명확한 비교와 연도 측정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나마 주변국의 기록에 자주 등장하는 왕은 북왕국의 ‘오므리’와 ‘아합’입니다.

만약 ‘사울’, ‘다윗’, ‘솔로몬’에 대한 기록이 이스라엘 주변국에서 발견된다면 왕정 시대의 연대를 추정하기 수월해졌을지는 모르지만, 이 왕들에 대한 기록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극단적인 해석을 하는 분들은 ‘다윗’은 그저 이상적인 왕으로 그려진 허상일 뿐이라고도 말합니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솔로몬’ 바로 다음 왕인 ‘르호보암’ 5년에 있었던 이집트의 침공이 「열왕기상 14장 25-26절」에 기록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또 우리는 당시 이집트의 파라오가 누구인지 유추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성경에는 ‘애굽의 왕 시삭’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주전 3000년 이후 밝혀져 있는 이집트 파라오 명단에 ‘시삭’이라는 이름은 없습니다. 하지만 히브리어가 본래 자음으로만 기록되어 있었음을 생각한다면 그와 유사한 이름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시삭’의 히브리어는 ‘שׁישׁק’입니다. 음역으로 표기한다면 ‘šyšq’가 됩니다. 이와 유사한 이름은 이집트 파라오 중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집트 제22왕조와 제23왕조의 ‘쇼생크(또는 세숑크)’입니다.

이집트 제22왕조와 제23왕조는 이집트 제3중간기에 속하는 왕조이고 ‘쇼생크’의 이름을 사용하는 왕은 모두 네 명입니다(1세, 3세, 4세, 5세). 이 네 명의 ‘쇼생크’ 중에서 팔레스타인 원정에 대한 기록을 남긴 왕이 있습니다. 제22왕조의 시조인 ‘쇼생크 1세(주전 945-924년)’입니다.

‘쇼생크 1세’는 ‘카르낙 신전(Karnak Temple Complex)’에 ‘부바스타이트 문(Bubastite Portal gate)’을 세우며 자신의 승전 기록을 남깁니다. 이 기록의 내용은 그의 재위 21년차에 있었던 팔레스타인 지역 침공에 관한 승전 기록인데, 팔레스타인의 광범위한 지역이 이 비문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 쇼생크 비문

위의 그림은 ‘부바스타이트 문’의 부조와 이를 스케치한 그림입니다. 가운데 그려진 인물은 태양신 ‘아문-레(Amun-re, 또는 Amun-ra)’이고 왼편에 붉은 박스로 표시된 부분이 ‘쇼셍크 1세’가 점령한 지역의 이름입니다. 보라색으로 칠해진 부분은 파손된 부분인데, 거의 한 줄이 다 파손되어 그 명칭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오른쪽에 박스로 표시된 부분은 포로로 잡은 이들의 부조입니다. 위의 그림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더 오른쪽에는 ‘쇼생크 1세’의 부조로 예상되는 파손 부분이 있습니다.

‘쇼생크 1세’가 「열왕기상 14장」의 ‘시삭’이고 ‘르호보암’ 5년에 이루어진 침공이 ‘쇼생크 1세’ 21년이라면 연대 추정은 간단해 보입니다. ‘르호보암’ 5년은 주전 925년이 됩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여전히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1) ‘쇼생크 1세’의 비문이 정확히 그의 재위 21년에 이루어진 사건인지 알 수 없고 재위 기간 내에 일어난 모든 전투를 한 번에 기록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 2) 비문에는 당시 남왕국의 영토였던 ‘네겝’을 침공했다고 나타나 있는데 열왕기상은 이에 대해 침묵한다는 점, 3) 파손되어 확인할 수 없는 지역이 있기는 하지만, 비문에 남왕국 지역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 4) 비문에 나타난 지역을 보면 남왕국 지역은 거의 지나치고 북왕국 지역을 중점적으로 침공했다는 점, 5) 비문에는 당시 이집트의 동맹국도 침략했다고 기록되어 있는 점, 6) 가장 중요한 ‘시삭’과 ‘쇼생크 1세’가 동일 인물이라고 확정할 결정적 증거가 없다는 점, 등등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열왕기상 14장 26절」에 나타난 ‘쇼생크 1세’의 탈취가 ‘르호보암’의 매수 또는 조공일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르호보암’이 이집트 군세에 맞서지 않고 조공을 바쳐 침략을 막았다는 해석입니다. 성경에도 ‘르호보암’이 어떤 군사적 행동을 취했다는 언급이 전혀 나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런 추정도 할 수 있습니다. 솔로몬이 이집트 공주와 결혼하며 이집트와 동맹 관계를 맺었다고 열왕기상은 기록합니다. 만약 ‘시삭’이 ‘쇼생크 1세’가 맞다면, 솔로몬이 동맹을 맺은 왕조는 아마도 제21왕조일 것입니다. 이집트 제22왕조가 세워진 후, 그 시조인 ‘쇼생크 1세’는 남왕국과 동맹 관계보다는 주종관계를 원했을 수도 있습니다. ‘쇼생크 1세’는 새로운 왕조를 세웠고 분열왕국이 된 이스라엘에 있어서 ‘르호보암’은 남왕국의 시조로 볼 수 있기 때문에, 두 나라의 왕조가 모두 바뀐 상태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열왕기에는 이에 대한 자세한 언급이 나타나지 않지만, ‘르호보암’은 이집트의 속국 체제를 선택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과 ‘쇼생크 1세’의 비문만으로 이를 밝혀내기란 쉽지 않습니다.

여전히 많은 문제가 있지만 그래도 우리가 ‘시삭’이 ‘쇼생크 1세’라는 가설을 선택하고, ‘부바스타이트 문’ 비문이 그의 재위 21년에 있었던 사실이라는 선택을 한다면, 그 시기는 주전 925년이 되며, 르호보암의 즉위는 주전 929년이 됩니다.

이번 작업을 통해 우리는 이스라엘 분열왕국이 주전 929년에 시작되었고, 남왕국의 멸망은 주전 586년이라는 결과를 얻었습니다. 이후로 우리는 총 344년의 기간 속에서 주변국들과 어떤 사건들이 일어났는지 살펴보며 세부적인 연대를 작성해보려고 합니다.

이성훈 목사(한신대 구약학 박사과정)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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