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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로부터 시작해 성서로 완성되다종교개혁과 성서 ⑷
최영 소장(기독교장로회 목회와신학연구소) | 승인 2021.09.11 17:19
▲ 루터가 번역한 독일어 성서 ⓒSean Gallup / Getty Images

개혁자들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만이 진리이며, 그 진리는 구·신약성서에만 담겨져 있고, 따라서 모든 교리는 성서의 표준에 따라 측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특히 개혁교회는 칼빈을 따라서 이 성서의 토대 위에 교회와 사회의 모든 제도와 법규를 근거시키려고 했다. 바로 이것을 개혁교회의 ‘성서원리’라고 일컫는데, 간략히 이 원리에 대해 살펴보자. 그것은 ‘성서원리’가 특히 성서와 전통과의 관계에서 개혁자들, 특히 개혁교회 개혁자들의 특징적 이해를 인식하는데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이다.

성서가 왜 하나님의 말씀인가

먼저 다음과 같은 물음에 답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어떻게 성서가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며, 유일한 진리이고, 따라서 “우리의 신앙의 확실한 규칙”과 “모든 진리의 척도”가 된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가? 인간적인 증거들은, 이 증거들이 아무리 인상 깊고 유용하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연약함을 받쳐주는 이차적인 보조물에 불과하다.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가 그에 대하여 설명하는 것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직접적인 하나님의 말씀, 곧 그 말씀을 발설하는 하나님 자신으로서의 하나님의 말씀, 사실상 하나님 자신인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다른 어떤 이차적인 증거들을 통해서는 결코 지지되기 힘들다.(1)

칼빈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하나님께서 인격적으로 성서에서 말씀하신다(Deus dixit)는 사실에서 발견한다”(Inst. Ⅰ.7.4). 이것은 하나님 자신은 진리일 뿐만 아니라 또한 그가 진리임을 나타낸는 계시이기도 하다는 사실에 대한 발견이다. 그래서 칼빈은 성서를 대할 때, 마치 하나님의 살아 있는 생생한 음성을 하늘로부터 직접 듣는 것처럼 생각하라고 하였다(Inst. Ⅰ.7.1). 바로 이 하나님만이 그 자신에 대하여 유일한 참된 증거가 되시기 때문이다(Inst. Ⅰ.11.1).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진술이 하나님 자신이 입증하는 자유로운 은혜의 행위를 통하지 않고서 어떻게 다른 방법으로 증명될 수 있겠는가? 만일 그 진술이 하나님 자신이 아닌 다른 어떤 것에 의해 증명될 수 있다면 또한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일 수 있겠는가?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그 놀라운 진술은 하나의 원리(성서 원리)로 일컬어져 왔다. 그러나 그것은 그 논리적 형식에서만 그러하다. 내용에 있어서 그 확실성은 수학적 공리들의 자명한 확실성과는 전적으로 다르다.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의 확실성은 하나님이 그의 성서적 증거들과 그 증거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동시적으로 부여하는 자기 증거의 계시에 있다.

또한 성서의 가르침의 신적인 기원에 대한 확신을 수반하는 신앙은 오로지 하나님만의 사역이다. 칼빈은 성령의 내적 증거라는 개념을 발전시켰는데, 그것은 성서 안에서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는 지금 이 순간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증거를 가리킨다. 성서 말씀의 의미는 오직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만 온전히 이해될 수 있다. 이와 같이 칼빈은 성서의 신적 권위의 증거를 인간의 이성의 판단 이외의 어떤 다른 장소, 즉 “성령의 내적 증거”에 근거시키고 있다(Inst. Ⅰ.7.4).

바꿔 말하면, 이 성령의 내적 증거는 성서의 저자와 독자를 공통의 목표에 인도하는 성령의 사역을 뜻한다: “그러므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해 말씀하신 바로 그 성령께서 선지자들이 신적으로 위탁받은 메시지를 충실하게 전달했다는 것을 우리에게 확신시키기 위하여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셔야 했다”(Inst. Ⅰ.7.4).

칼빈은 이 “성령의 증거와 내적 조명”에 의하여 우리는 성서를 교회의 다른 문서들과 구별할 수 있다고 「프랑스신앙고백서」 제4조에서 명백하게 진술하고 있다.(2) 그렇다면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그 진술의 진리는 하나님으로부터 기인하고 또 그에 의하여 권위를 얻게 되는 이 지고(至高)의 행위의 현실과 함께 서거나 넘어진다. 정확히 이 현실이 인간의 논리의 권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권위, 곧 개혁자들과 그들의 종교개혁과 그리고 그들이 세운 교회의 비밀이 되는 그 권위에 대하여 교리를 복종시킨 것이다.

개혁자들의 천재성은 어떤 특별한 통찰이나 경건의 유형이 아니라 이 기초적인 사실에 대한 명백한 이해에 있었다. 그들은 저 기초가 하나님이시며 단지 하나님뿐이라는 것을 알았던 자들이다. 프랑스와 네덜란드에서의 개혁교회의 발전사가 보여주듯이, 칼빈의 이러한 접근방식은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독자는 이제 개혁 신앙에 대한 완전한 이해를 얻기 위하여 단지 성서와 『기독교강요』 두 권의 책만 갖고 있으면 되었다. 『기독교강요』에서 칼빈이 성서를 다루는 방식은 대단히 설득력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은 이 책이 성서의 합당한 해석에 필요한 열쇠를 갖고 있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이 우아하고 명료하게 쓰여진 책이 있으면, 중세의 복잡한 해석학적 도구들은 없어도 되었던 것이다.

교회의 선포의 유일한 규칙으로서의 성서

가톨릭교회는 하나님께서 섭리 가운데 신뢰할 수 있는 성서의 해석자를 교회의 형태로 제시해주셨다고 가르쳤다. 그러므로 가톨릭교회는 성서를 권위 있게 해석할 수 있는 권위를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앞서 살펴 본 것처럼, 급진적 개혁자들은 이 주장을 전적으로 배척했다. 관 주도적 개혁자들은 성서가 어떤 점에서는 모호하기 때문에, 따라서 해석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했다.

개혁자들은 이를 위해서 우선 “신앙문답적” 접근을 채택했다. 루터의 「짧은 신앙문답」(1529)은 신자들에게 성서를 이해할 수 있는 유용한 틀이 되었다. 그러나 성서에 대한 가장 유명한 안내서는 칼빈의 『기독교강요』, 특히 1559년에 나온 최종판일 것이다. 칼빈은 원래 이 책을 루터의 신앙문답의 모델을 따라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1541년 불어판 서문에서 칼빈은 『기독교강요』가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참으로 성서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이들이 성서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열쇠나 입구와 같은 것”이라고 진술하고 있다. 달리 말하면, 칼빈은 독자들이 자신의 『기독교강요』를 성서를 해석하는 수단으로 사용해 주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성서 해석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두 번째 방법은 “정치적 해석학적” 접근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것은 특히 취리히의 츠빙글리의 개혁과 관계가 있다. 이 방식은 종교개혁의 정치사와 관련하여 특별히 중요하다. 1520년의 어느 시점에 취리히 의회는 시의 모든 사제들이 “인간적인 고안들이나 설명들”을 회피하고 오직 성서에 따라 설교할 것을 요구했다. 사실상 이 법령은 취리히를 “오직 성서만”으로의 원리에 위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522년, 이 법령은 별로 가치를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이제 어떻게 성서를 해석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부딪혔다. 1522년 사순절에 츠빙글리의 일부 추종자들이 이 절기에 전통적으로 지켜오던 단식의 관례를 깨뜨리면서 작은 위기가 발생했다. 단지 채소나 생선만을 먹는 것이 관례이던 이 절기 동안에, 츠빙글리의 일부 추종자들이 소시지를 먹는 쾌락에 굴복해 버린 것으로 일반인들에게 보였던 것이다. 시의회는 몇 주 후 4월 9일에 사순절의 단식 관례를 준수하기로 재확인하고, 프로샤우어라는 사람의 집에서 소시지를 먹은 책임을 물어 그에게 경미한 벌금을 부과했다.

만일 츠빙글리가 일주일 후에(프로샤우어의 출판소에서!) 한 논문을 출판하지 않았다면, 이 문제는 이것으로 끝났을 것이다. 이 논문에서 츠빙글리는 성서의 어떤 곳에서도 신자들이 사순절에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된다는 금지 조항이 없다고 주장했다. 같은 해에 성직자들의 결혼에 대해서 비슷한 논쟁이 재연되었다. 취리히에서 긴장이 증대됨에 따라, 이러한 모호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하다는 것이 명백해졌다.(3)

가장 큰 어려움은 성서가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1523년 1월 3일, 공적 설교를 통제할 권한을 갖고 있던 시의회는 츠빙글리의 “67개 주요 논제들”이 성서와 합치하는가를 결정하기 위해 그 달의 남은 기간 동안 공적 논쟁을 개최하겠다고 선언했다. 거기서 그들은 츠빙글리의 출현과 함께 쟁점이 되었던 복음의 “충실하고 완전한” 설교의 문제에 대한 토론에서 츠빙글리와 그의 논적들 모두가 “신성한 성서에 따라서” 그들의 주장을 펴야 한다고 진술하고 있다: “신성한 성서”대로 그의 주장을 논하는 자는 누구나 의회에 의해서 옹호될 것이며, “참되고 신성한 성서를 근거로 하지 않고 자기에게 좋은 것처럼 보이는 것을 강단에서 설교하는 자는” 더 이상 용납되지 않을 것이다.

이미 취리히 정부는 교회의 전통을 논쟁의 논거로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을 사전에 통보했던 것이다. 이 논쟁은 지금 “제1차 취리히 논쟁”으로 알려져 있다. 명백하게 학문적 토론의 모델을 따라 이루어진 이 논쟁은 1월 29일 취리히의 시청에서 개최되었다. 이 논쟁은 츠빙글리의 개인적 승리로 끝났다. 그렇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시의회를 위한 결과였다. 이 논쟁과 더불어 시의회는 무엇이 성서와 합치하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가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위임받게 되었던 것이다.

츠빙글리에게 취리히의 시와 교회는 사실상 하나였다. 이것은 그의 교회론과 성례론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하다. 시의회는 신학적, 종교적 문제들에 관여할 권리를 갖고 있었다. 취리히의 종교개혁은 더 이상 성서의 올바른 해석과 관련된 문제들 때문에 장애를 받지 않았다. 유사하게 1528년의 베른 논쟁의 초대장은 “이 토론에서 성서라고 일컬어지는 구약과 신약성서 이외의 다른 문서들은 지위와 권위를 갖지 못할 것이다... 성서만이 수준, 안내, 기초, 그리고 참된 기독교 신앙의 유일한 심판자가 될 것이다”라고 진술한다.

이와 같이 성서원리는 오로지 성서만을 교회의 가르침과 선포의 규칙으로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철저한 원리는 최초의 논쟁을 위해 수립된 규칙들에게서 당당하게 선언되었고, 이것은 차후 개혁교회에서 기본적인 것이 되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을 계시하신다면, 사람들은 그 말씀을 따라 행동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자신들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진술과 함께 츠빙글리는 개혁교회의 종교개혁의 기초적인 이론적 근거를 표현했다. 취리히의 모델에 근거하여 바젤과 베른에서 내려진 비슷한 결정들은 스위스에서의 종교개혁을 공고히 하였고, 또한 1530년대 중반에 제네바에 정치적 안정을 가져다줌으로써, 간접적으로 칼빈의 종교개혁의 성공에 기여했다.(4)

신앙과 삶의 규칙으로서의 성서

츠빙글리는 1519년 마태복음에 대한 일련의 설교들과 함께 그의 목회를 시작했고, 칼빈은 1536년 로마서에 대한 일련의 강의들과 함께 제네바에서 목회를 시작했다. 이러한 행위들은 가톨릭교회의 설교 질서를 깨뜨리는 것이었다. 원래 교회 규정에 따르면 매주일 설교가 일 년 단위로 미리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개혁교회는 처음부터 교회의 설교를 위해 지정된 성구집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츠빙글리와 칼빈은 거의 언제나 전체 책들을 통해 연속적으로 설교했고, 성서의 모든 책들을 통하여 설교하려고 시도했다. 이것은 성서전체(tota scriptura)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보려는 시도였고, 만약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듣게 된다면, 그때 그것은 고대교회, 고대교회의 교리와 예배, 새로운 교회의 생성, 어떻게 우리가 살아가야 할 것인가 하는 것과 관련된 과제와 가능성들, 그리고 신앙고백 등을 필수적으로 숙고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그것은 무엇보다도 성서, 신앙과 삶의 규칙으로서의 성서가 있고, 다른 모든 것은 이 규칙에 따라 수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와 같이 신앙과 삶 가운데서 성서의 권위를 확립하는 방법론적이고 혁명적이지만 소란스럽지는 않은 이 과정은 그들이 에라스무스는 물론이고 루터에게서도 배우지 못한 전혀 새로운 것이었다. 루터가 성서에서 발견했던 것은 하나의 특별한 주제, 곧 ‘칭의의 교리’였다. 그러나 츠빙글리와 칼빈은 루터와 달리 하나의 특정한 주제에 그렇게 얽매이지는 않았다. 그들은 보다 자유롭게 전체의 성서가 그 충만함에서 말하도록 하였고, 그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칭의의 교리’로 환원하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이것은 ‘교리’에 대한 매우 중요한 개혁교회의 이해를 보여주는데, 개혁교회에서 교리는 무엇보다도 단순히 성서의 해설을 의미했다. 물론, 개혁교회의 가르침은 그 자체를 ‘교의학’으로 강화하고, 칼빈 그 자신이 그 첫 번째 본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가 1541년의 『기독교강요』 불어판 서문에서 이 책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성서를 바르게 이해하도록 하는 열쇠나 입구와 같은 것”이라고 말했듯이, 근본적으로 개혁교회의 교리는 성서의 내용에 대한 설명 이회에 다른 어느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

성서를 신앙과 삶의 규칙으로 받아들였던 자들은 무엇보다도 제네바 사람들이었다. 1536년 칼빈이 파렐, 프로망, 비레 같은 사람들의 영향을 받고 제네바에 왔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자”는 총회의 결정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신조도 없었고, 별도의 규례도 없었다. 이어서 봇물처럼 터지는 개혁교회의 신앙고백들은 바로 이 “…에 따라” 속에 이미 포함되어 있었다.

이런 이유에서 칼 바르트는 개혁교회와 루터교회 종교개혁의 주된 차이점을 개혁교회가 지니고 있는 윤리 문제에 대한 관심이라고 파악한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수직적 관계가 시간 속에 있는 인간의 관계들의 수평적 지평에서 갖는 의미를 식별하는 문제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정확히 이 관심이 개혁교회로 하여금 루터에 의해 일어났던 첫 번째 전환과 구별되는 “종교개혁의 두 번째 전환”을 이루게 했다. 그러므로 여기서 개혁교회의 ‘성서원리’는 “불가피하게 영원을 시간과, 죄의 용서를 죄인의 삶과, 영을 육 가운데의 실존과, 비길 데 없는 사랑을 평범한 순종과 관련시키려는 시도와 연결되어 있다. … 개혁교회적 노력이 감행된다면, 그때에 성서의 특별한 중요성은 모든 관계들을 규제하는 규범의 추구, 신앙과 삶, 지식과 행동의 규칙을 추구하는 것에서 생겨난다.”(5)

성서와 신앙고백의 관계

앞서 살펴보았듯이, 개혁교회의 개혁자들은 성서를 제쳐놓고 성서 곁에, 그리고 성서와 대조하여 신앙을 위한 다른 권위를 고려하지 않았다. 츠빙글리는 1523년 초에, “그러므로 다른 교리를 복음과 동등하거나 더 높다고 간주하는 모든 사람은 잘못되고 복음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자들이다”라고 정력적으로 단언했다. 1528년의 베른 테제들은 “그리스도의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 없이는 법령이나 계명들을 만들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간의 모든 전통들은... 그것들이 단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를 두고 있고 지배되는 한에서만 우리에게 구속력이 있다”고 선언했다.

1536년의 「제네바 신앙고백서」에 따르면, 우리는 신앙의 규칙으로서 인간이 고안한 어떤 것을 성서에 추가하거나 어느 것을 제거해서는 안 된다. 계속해서, 그때부터 개혁교회의 신앙고백들은 ‘공의회들’, ‘교회의 교부들’, 그리고 ‘교회의 전통들’을 규범적인 것이 아닌 것으로, 즉 다소간에 존경을 하기는 하지만 주변적인 것으로 간주하였다. 1562년 헝가리 개혁교회는 “‘성서의 진리’를 드러내는 농부는 완전한 공의회보다 더 신용할만하다”라고 선언했다.

1559년의 「프랑스 신앙고백」은 “고전, 관습, 대중, 사람의 지혜, 판단, 선포, 칙령, 포고, 회의, 환상, 혹은 이적 등등의 어떠한 권위도 성서의 여러 책들을 반대할 수 없고, 모든 것은 성서에 따라 검토되고 규정되고 개혁되어야 한다”라고 단언한다. 1561년의 「벨기에 신앙고백」은 사도나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조차 성서에 있는 것과 다른 어떤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도록 해서는 안 된다고 선언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다 거짓말쟁이들이며, 공허 그 자체보다도 더 공허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단언들은 성서가 다른 모든 권위들의 가치와 진리 여부를 결정하는 심판자라는 것을 천명하고 있다. 그런데 성서에 따라 이런 저런 권위를 판단하는 노력이 실제로는 단순하고 명백한 과제가 아니라는 것이 츠빙글리의 『믿음을 위한 이성』(Fidei Ratio, 1530)에 있는 규칙에서 볼 수 있다. 그것에 의하면 성서와 교회라는 두 심판자가 있다. 그러나 후자는 단지 그것이 성서를 따라서 그리고 “성령에 의해서” 판단하는 정도까지만 그렇다.

이렇게 개혁교회는 교회, 교황, 공의회, 그리고 신학자들의 권위가 성서의 권위에 종속된다고 주장했다. 바르트는 단지 이 종속이 관측되고 실천에 옮겨지는 곳에서만 참으로 “올바른 교리”와 같은 것이 있을 수 있다고 본다: “교리는 성서에서 증거되는 하나님의 말씀에 접할 때 빚어지는 위기, 즉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가차 없는 순화와 정화를 통해서 일어나는 그리스도인의 말이다. 그것은 인간의 말로써 남아 있다. 그것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런 관련에서 그것은 하나의 합법적이고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의 설교가 된다.”(6) 바르트는 명백하게 개혁교회는 교회의 교리와 신앙고백에 성서에 대한 것과 같은 경외를 바치지 않는 것을 전통으로 삼았다고 단언한다. 실로, 궁극적이고 결정적인 합법성은 성서로부터 나오며, 성서의 증언에 교회는 그 자신의 증언으로 신앙을 고백하며 응답한다.

미주

(미주 1) 최영, 『개혁교회 신학의 주제』(서울: 지성과 실천서, 2005)를 참고.
(미주 2) 여기서 우리는 칼빈의 성서 영감론이 소위 17, 8세기 칼빈주의적 정통주의자들의 ‘축자영감설’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정통주의적 견해에 의하면, 성령이 성서 낱말 하나하나를 그 옛날의 거룩한 사람들에게 불어넣어주셨기 때문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문자로 기록된 성서 사이에는 직접적인 동일성이 있다. 칼빈이 성서의 증언자들을 성령의 기관과 도구로 보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성서의 확실성 또는 기록된 말씀의 신빙성을 문자에서 발견하지 않고 성령의 증거에서 발견하였다. 성서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되게 하는 것은 문자 자체가 갖고 있는 신적인 권위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을 감화․감동시키는 성령의 역사(役事)라고 본 것이다. 따라서 그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과 성서에 있는 문자로서의 인간의 말 사이에는 그 어떤 본질적인 일치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의 계시된 말씀을 성서의 기록된 말씀과 조화시키고, 그로써 그 기록된 형식을 신비롭고 은혜롭게 그의 자기 계시에 적응시키기 때문에, 우리는 인간의 말과 진술의 형식으로 성서 안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미주 3) 마르틴 하아스 저, 정미현 옮김, 『훌드리히 츠빙글리』(서울: 한국기독교장로회신학연구소, 1999), 113-120.
(미주 4) 『개혁교회 신학의 주제』, 40 이하.
(미주 5) Ibid., 42-43.
(미주 6) K. Barth, The Word of God and the Word of Man, 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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