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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관심 밖에 있던 것지옥이 아닌 지금(마가복음 9:43-48)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 승인 2022.01.16 16:14
▲ 「Hell」, Pieter Bruegel the Elder’s Dull Griet (1561) ⓒGetty Image
43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 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44 (없음) 45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46 (없음) 47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 하게 하거든 빼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48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이번 주일은 주현절 둘째 주일입니다. 올해에는 되도록 총회에서 제공하는 교회력에 나타난 성서일과의 본문으로 말씀을 전해드리려고 합니다. 오늘은 이번 주간 성서일과 중 복음서의 말씀을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본래는 마가복음 9장 38-50절의 말씀인데, 본문이 너무 길어지기 때문에 43-48절의 말씀만을 본문에 실었습니다.

마가복음 9장 38-50절의 말씀은 하나의 이야기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38-40절 말씀은 40절에 나타난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라는 말씀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고, 41절은 그리스도인을 대접하는 이들이 받을 복이 나타납니다.

42절은 오늘 저희가 읽은 본문과 연결되어 있어 보이지만, 43-48절의 본문은 정확한 형태를 갖춘 구성이 나타나기 때문에 42절과 별개의 이야기로 보이기도 합니다. 42절은 오히려 37절에 나타난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이야기와 연결되어 보이기도 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인 43-48절은 자신의 욕망, 욕심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리고 49-50절은 ‘불’이라는 소재에서 앞선 본문과 연결되기는 하지만 맛을 잃지 않는 소금을 서로 안에 둔 채로 화목하라는 말씀으로 끝납니다.

아무리 봐도 마가복음 9장 38-50절의 말씀은 일관성이나 통일성이 없어 보입니다. 이 본문의 말씀은 마태복음 5장이나 18장에 평행 본문으로 나타나는 말씀이 원래 형태에 더 가까워 보입니다. 그렇다면 마가복음을 기록한 공동체는 왜 예수님의 말씀을 이렇게 묶어 놓았을까요? 특히 오늘 본문에 나타난 지옥이란 무엇일까요?

마가복음에서 ‘지옥’을 뜻하는 ‘게헨나(γέεννα)’는 오늘 본문에만 등장합니다. 게헨나는 본래 구약성경에 나오는 ‘힌놈 아들의 골짜기’를 뜻합니다. 열왕기하 23장을 보면, 므낫세가 그곳에서 몰렉 제의를 지내며 자녀를 불 가운데 지나도록 했다고 말합니다. 또 예레미야는 이 지역에 대해 자주 언급하는데, 그곳은 자녀를 불태운 장소이며 자리가 모자랄 만큼 수많은 이들이 죽어간 장소라고 말합니다.

바벨론 포로기 전후 힌놈 아들의 골짜기는 죽음의 대명사로 불리는 장소가 됩니다. 오늘 본문 48절에 나타난 표현은 아마도 이사야 66장 24절에서 인용한 표현으로 보이는데, 이사야는 그곳이 패역한 자들의 시체가 쌓인 곳, 끝없이 불타는 곳이라고 말합니다. 아마 이사야가 말하는 장소도 예레미야와 마찬가지로 힌놈 아들의 골짜기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본래 구약성경 초기 본문으로 갈수록 지옥에 대한 개념은 없습니다. 물론 지옥이라는 글자 자체의 개념이라고 본다면, 같은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지옥이라는 단어 자체는 땅속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는 어떤 감옥 같은 공간이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죽은 사람의 영혼이 땅속에 내려가 그곳에서 갇혀 살게 된다는 의미로는 유사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구약성경 초기의 지옥, 스올(שׁאול)에는 형벌의 개념이 없습니다. 그냥 죽으면 영혼이 가게 되는 장소일 뿐입니다. 선한 사람도 악한 사람도 죽으면 다 그곳에 가게 됩니다.

만약 이사야가 힌놈 아들의 골짜기에서 이미지를 차용하여 영원히 불타는 장소를 말했다면, 그것은 스올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사야가 말한 장소는 죽어서 가는 장소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 살아 있는 사람이 형벌을 받는 장소입니다. 여기에 영원의 개념이 덧붙여졌기 때문에 결국 죽음 이후와도 연결될 수 있기는 합니다만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보내지는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 때에 악인은 그곳에 보내지게 되고, 의인은 예루살렘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게 됩니다.

예수님이 활동하셨던 시기에는 이런 개념들이 뒤섞여 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직계 제자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사후세계에 대한 신앙보다는 심판 신앙에 더 가깝게 생각하고 있었겠지만, 복음서를 기록한 이들은 예수님의 재림에 의한 심판보다는 사후세계에 더 가깝게 생각하고 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너무 지연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죽어서 가는 장소이건, 하나님의 심판 때에 가는 장소이건, 오늘 본문의 말씀은 상당히 무서운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손이든 발이든 눈이든 나를 범죄 하게 만든다면 그것을 찍어버리고 빼버리라는 끔찍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나를 범죄 하게 만든 그 지체를 가지고 지옥에 가는 것보다, 그것이 없는 채로 생명(ζωή)에 들어가는 편이 좋다고 말합니다. 이때의 생명은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생명을 의미합니다.

43, 45절에서는 생명이라고 말하고 47절에서는 이 단어가 ‘하나님 나라’로 대치되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와 생명은 같은 의미가 됩니다. 따라서 구원받은 이가 누리게 될 영원한 생명, 하나님 안에서 받게 될 영생으로 생각하셔도 됩니다.

과거 보수적인 교회에서 이 말씀이 잘못 전달되고 받아들여져서 실제로 자신의 신체를 훼손하는 일이 벌어지긴 했습니다.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 자신의 신체를 훼손하는 것이 옳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너희가 범죄 하면 지옥 간다’ 또는 ‘너희가 착하게 살면 천국 간다’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말씀을 전하셨을 때의 의도도 그러했겠지만, 이 말씀들은 사후세계 자체만을 강조하기 위해서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 자체는 자신의 욕망을 억제하는 삶을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내 신체를 훼손하라는 이야기도 아니고 죽으면 천국 또는 지옥에 간다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이 현실 속에서 최선을 다해 욕망을 억제하며 살아가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기에 처음에 조금 이상해 보인다고 말씀드렸던 마가복음 9장 38-50절 전체 말씀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자신들을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을 막지 말라는 말씀, 서로 반대되는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면 결국 서로를 위한 자라는 38-40절의 말씀으로 이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그리고 대접하는 이들을 기억하라는 말씀, 작은 자들을 시험에 들지 않게 하라는 말씀, 또 오늘 본문의 자신의 욕망을 억제하라는 말씀은 결국 49-50절에 나타난 말씀을 향해갑니다.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 하라”라는 말씀입니다.

마가복음을 기록한 공동체가 예수님의 원래 말씀을 몰랐거나 이해하지 못했기에 이런 구성을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 이해했기에 서로 어울려 보이지 않는 말씀들을 엮어 놓아서 말씀의 본질을 우리에게 전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이 ‘지옥 가지 말자’를 전하는 말씀이 아니라, 지금 이 땅에서 내 욕망에 따라 살아가지 말자는 말씀임을 더욱 드러내고 강조하기 위해 이러한 말씀 구성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흔히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합니다. 본래 대승불교의 경전인 능가경(楞伽經)에 나온 표현으로 ‘견월망지(見月忘指)’, ‘달을 보았다면 손가락은 잊어라’라는 뜻입니다. 본질적인 내용을 보았다면 그 외연에 집착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전하신 말씀, 마가복음이 전하는 말씀은 지옥에 관한 설명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선을 이루며 살아가고, 서로 화목하며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본질보다는 외연에 있는 지옥만 강조했기에 이 말씀은 너무나 무섭고 끔찍한 말씀이 되어버렸습니다.

2016년 강남역에서 한 여성이 살해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후 이 사건은 ‘여성혐오범죄’라고 불리기 시작했고, 일부 여성들은 남성들을 모두 ‘잠재적 가해자’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잠재적 가해자라는 말은 이전부터 있었지만, 이 시점에서 가장 폭발적으로 확산되었다고 봅니다.

2022년 현재, 성별 갈등은 거의 극에 달아 있습니다. 최근 언론에 나온 군부대 위문편지 문제만 봐도 이 갈등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있습니다. 이대남(20대 남성)이라는 표현이 자연스럽게 사용되고 있고, 일부 대권 주자들은 그들의 표심을 얻기 위해서 갈등을 더욱 조장하고 있기도 합니다.

저는 이런 문제들이 모두 본질보다는 외연에 집착하기 때문에 생겨난 문제라고 봅니다. 지금의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대부분의 사람은 고통 받으며 어렵게 살아갑니다. 이런 어려움에는 성별의 차이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도 범죄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여성을 향한 감춰져 왔던 범죄들이 분명 있었고, 사회가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용인했던 때도 있었습니다. 남성과 여성은 서로 다른 차원에서 다들 고통받아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봐야 할 점은 자본주의 구조 속에서 고통 받는 우리의 모습이고, 이 땅에서 누군가는 범죄를 저지르며, 자신보다 약해 보이는 이들에게 악한 폭력을 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본질적인 문제는 완전히 해결하기 어렵다고해서 우리가 본질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외연의 문제만을 가지고 갈등하며 다퉈서는 안 됩니다.

주현절 기간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활동하시며 무엇을 전하셨는지, 어떤 삶을 살아가셨는지 더욱 생각하는 기간입니다. 그 삶을 바라보실 때, 예수님께서 근본적으로 무엇을 말씀하려고 하셨는지, 무엇을 가르치셨는지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어딘지 모를 ‘지옥’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지금’ 실천하라 하셨음을 기억하시고, 이 땅에서 본질적인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고, 또한 화목을 실천하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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