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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 선교의 실패기독교 선교의 본질과 과제 ⑸
채수일(전 한신대 총장) | 승인 2022.08.16 02:39
▲ 개종만을 요구하는 선교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Getty Image

선교는 교회의 성숙한 성장과 개혁에 기여해야 한다. 그러나 오늘 한국교회의 선교가 교회의 성숙한 성장과 개혁에 도움이 되기보다 오히려 교회의 위기를 심화시키고 있는 것이 유감스럽게도 현실이다. 선교가 교회의 일치와 증언의 신실성을 뒷받침하기보다 교회를 분열시키고 증언을 불신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성장둔화 혹은 정체기를 맞은 한국 개신교의 선교는 더더욱 물량주의에 근거한 공격적인 교인쟁취에 빠져 들어가고 있는 것 같다. 선교가 교파간의 분열은 물론 ‘부자교회’와 ‘가난한 교회’로 교회를 양극화시키는 현실이 그것을 반영한다. 해외선교도 마찬가지다. 해외 교민교회의 끝없는 분열과 상호배타성은 물론 현지 선교지에서의 문화충돌, 공격적인 자본주의시장경제에 편승한 선교태도, 19세기 백인선교사들보다 더 강화된 선민의식, 아니 심지어는 ‘황색 인종주의’에 사로잡힌 선교사들, 선교사들 상호간의 불신, 파송 기관 혹은 후원교회와 선교사의 관계에서 제기되는 갈등과 선교비 문제 등은 선교가 교회를 개혁하기보다는 교회의 정체성을 도리어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이 아닌지 당혹스럽기 짝이 없다.

선교는 교회의 가시적 일치를 지향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일치는 ‘상하적 일치’가 아니라 ‘평등한 일치’여야 한다. ‘복음의 빚’을 갚기 위해 선교의 후발주자로 나선 한국교회의 선교는 19세기 백인중심의 근본주의적 선교와 무엇인가 달라야 하지 않을까?

선교는 존재론이다

그렇다면 어디에서부터 선교의 위기가 비롯된 것일까? 나는 이 위기가 선교신학의 부재에서 왔다고 생각한다. 선교신학의 부재는 선교를 좁은 의미에서의 전도, 다양한 성장 프로그램으로 이해하는데서 온다. 그러나 선교는 프로그램 개발의 문제가 아니다. 만일 선교가 프로그램이라면 인적 자원과 돈이 없는 교회는 선교를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선교는 사업을 통해서가 아니라 존재로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다’(마 5,13-14)라고 말씀하신 것은 선교를 사람이 할 수 있는 다양한 역할의 하나가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역할이나 프로그램으로 이해된 선교는 우리가 할 수 있으면 하고 할 수 없으면 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것이다. 그러나 ‘존재로서의 선교’는 선교하지 않는 교회를 생각할 수 없게 한다.

선교하지 않는 교회는 있을 수 없다. 아니 교회가 곧 선교이다. ‘존재로서의 선교’는 교회와 지도자와 신도의 존재론적 새로움, 곧 거듭남(회개)에서 시작된다. 교회의 정체성을 한꺼번에 위협하는 위기는 선교 프로그램의 부재에서가 아니라, 교회가 존재론적으로 선교적이지 않은데서 오는 것이다. 교회가 겉과 속이 다르지 않은 일관성을 가지고, 말씀 위에 선 믿음으로 연대적 사랑을 실천을 할 때에 교회의 존재 자체가 선교일 수 있을 것이다.

‘연대적 사랑의 실천’은 구체적으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와 ‘경제적 세계화’의 희생자들 편에 교회가 서는 것을 의미한다. 인류를 10대 90의 사회로 양극화시키는 세계화 이데올로기의 물신숭배적 성격을 폭로하고 희생자들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하여 교회가 투쟁해야 한다. 노숙자, 실직자, 어린이와 노인 등 직접적인 희생자들을 위한 디아코니아, 지역에서의 대안 경제운동, 국제통화기금, 세계은행 등 불의한 기구들의 개혁을 위한 연대투쟁을 전개하면서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와는 다른 새로운 ‘삶의 방식’을 교회가 보여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선교신학은 한편으로 오늘의 불의한 세계경제구조를 신학적으로 성화시키는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작업을 통하여, 다른 한편으로는 민중의 투쟁과 경험을 신학적으로 성찰하는 작업을 통하여 한국의 ‘경제신학’을 발전시켜야 한다.

폐쇄적 존재로는 선교할 수 없다

‘존재로서의 선교’는 다른 종교와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과의 사귐에 열려있다. 나는 21세기에 인류를 위협하는 가장 심각한 도전의 하나는 종교 간의 갈등이 폭력적으로 심화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슬람과 유대교(이스라엘), 이슬람과 기독교(유고, 인도네시아 등), 불교와 기독교(한국), 기독교 교파간의 갈등은 지역 간, 인종 간 갈등의 배경이 되고 있고 상황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 불교와 근본주의적 개신교 사이의 갈등은 위험수위를 이미 넘어서고 있다. 90년대 군부대와 대학 캠퍼스 내에서의 장승과 불상 파괴사건, 1998년 제주도 원명선원 불상훼손 사건, 2000년 6월 불교계 종립대학인 동국대학교 석가여래입상에 붉은 색 십자가를 그리고 그 밑 부분에 ‘오직 예수’라고 쓴 사건 등은 불교계에게만이 아니라 사회에도 큰 충격을 주었다.

선교가 회심과 개종, 전통문화와의 단절을 지향(강요)하는 한, 이런 갈등은 그치지 않을 것이다. 존재로서 이해된 선교는 다른 종교와 신앙, 신념을 가진 사람들과의 ‘함께 사는 삶’(Konvivenz)을 지향한다. ‘인간이 되신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얻어 진리를 알게 되기를 원하신다’(딤전 2,4-6).

어떤 이유로든지 그리스도교 안에 있지 않는 사람들을 배타적이고 공격적으로 대하는 교회는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을 위해서 자기를 대속물로 내주셨다’(딤전 2,6)는 말씀을 선포할 수 없을 것이다. 하느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이유는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하기 위해서였다’(창 12,3). 교회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민족들이 복을 받아야지, 오히려 갈등과 분열과 다툼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선교를 오히려 방해하는 것이 되지 않을까? 지금은 선교의 방법만이 아니라 선교의 궁극적 목적에 대한 신학적 패러다임의 변화를 진지하게 다시 숙고해야 할 때이다.

채수일(전 한신대 총장)  sooilcha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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