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학술 칼럼
시대와 차별된 교사, 예수『천재 예수, 그의 생각을 탐하다』(김판임 지음, 동연출판사, 2022) 서평
편집부 | 승인 2022.08.18 23:12

한국기독교장로회 목회와 신학연구소 연구위원으로 오랜 기간 헌신해온 김판임 박사(전 세종대 교수)의 신간이다. <천재 예수>. 책 제목이 좀 도발적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예수에 관한 초기 증언인 신약성서도 예수님께 많은 칭호를 붙여주고 있다. 메시아, 하나님의 아들, 사람의 아들, 예언자, 선생, 구세주 등. 기독교를 국교로 삼았던 중세기독교에서 예수님은 “참하나님의 아들이며 동시에 참사람의 아들”이라는 교리로 굳어져 내려왔다. 

성서학자인 저자는 교리를 다루는 것이 아니다. 저자는 신약성서에서 예수를 칭하는 호칭 중에 “선생”이 가장 많이 사용되고, 예수의 활동 중에 “가르치셨다”는 동사가 매우 많이 쓰이고 있다는 사실에 착안한다. 20세기 기라성같은 독일의 신학자들도 예수를 선생으로 보기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선생보다는 예언자로 보려는 성향이 컸다. 그래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에 대해 “가르치셨다”는 표현보다는 “선포했다”는 표현을 선호했다.

저자는 예수를 유대교 문화 안에서 살핀다. 예수라는 인물은 유대인으로 태어나 유대 문화 안에서 살다 가셨다. 예수께서 사시던 시대, 그 이전이나 현재나 유대인들에게 목숨만큼 중요한 것은 성서이다. 성서는 곧 하나님의 말씀이고, 그들이 간절히 바라는 구원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때 가능하다고 여긴다. 유대인들의 가치관이다. 이러한 가치관 안에서 예수께서 사셨다는 것을 이 책은 전제로 한다. 기독교는 성경과 구원에 관한 한 유대교와 공유한다.

구원을 갈망하는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실천하고자 한다. 그런데 성서에 기록된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뜻이라기보다는 그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해석을 한다. 그 해석이 똑같지 않다. 그래서 예수 시대 이전부터 성서해석에 따라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가 분리되어 있었다. 다르게 해석하고 다르게 실천하면 구원 없다고 자기네처럼 이해해야 한다고 했다. 이 책에서 예수는 성서해석자이고 교사이다.

예수의 성서해석

제1부에서 저자는 예수의 성서해석을 다룬다.
십계명 중에서 유대인들이 중요하게 여겼던 안식일법에 관한 예수의 견해를 살핀다.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은 쉬는 날, 일하지 않는 날로 생각되었다. 안식일법에 특별히 예민했던 쿰란공동체는 법시행령처럼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의 목록을 상세히 작성했다면, 예수는 안식일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를 파악했다는 점에서 예수의 천재성을 말한다. 저자는 안식일법과 관련해서 당시 유대인들의 해석과 예수의 해석의 차이를 법시행과 법정신이라는 표현으로 구별했다.

그 외 이혼법과 관련해서도 예수가 당대 유대인들의 이해와 차별성을 보인다는 점을 지적한다.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그러하듯이 유대인들도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며 문자 그대로 적용하곤 한다. 많은 유대인들이 신명기 24장 1-4절에 이혼을 할 때인 이혼증서를 쓰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기고 이혼을 쉽게 생각했다. 말라기서에 의하면 사람들이 이혼을 너무 많이 한다고 지적할 정도이다. 모세오경에 기록된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기던 유대인들과는 달리, 모세오경에 기록되어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뜻이 아닐 수 있음을 지적한다. 

인간이 악해서 하나님이 정해주신 짝이 아닌 사람과 결혼을 하고 도 이혼도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아님에도 사람들이 이혼을 하기 때문에 모세가 적었다고 신명기 24장 1-4절을 해석한다. 그리하여 2장에서 저자는 이혼법에 대한 일반 유대인들의 이해와 예수의 이해의 차이를 문자주의와 성서 정신으로 표현하며 문자를 넘어 성서 정신을 찾아간 예수의 성서 이해를 현대인들에게도 성서해석법으로 추천한다. 즉, “성서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으니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이런 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성서에 왜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가?“를 묻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예수가 가르친 하나님의 정의

제3장에서는 하나님의 정의에 관한 예수의 천재적 이해를 다룬다.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의 특징은 사랑(헤세드)와 정의(체덱)으로 표현된다. 정의의 하나님은 법을 주시고 법대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이미지라면, 사랑의 하나님은 그 많은 죄에도 불구하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이다. 일반적으로 정의의 하나님은 무섭고, 사랑의 하나님은 자애로우신 분으로 생각한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모든 계명 중의 제일을 “사랑”으로 제안하신 예수님의 에피소드도 있고 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정의보다 더 강조되어온 점을 간과할 수는 없다.

하나님의 정의에 관한 예수의 이해를 저자는 예수의 비유 셋을 해석하면서 찾았다. 놀랍게도 세 비유 모두 경제정의에 관한 것이다.

저자는 마태복음 20장 1-15절에 나오는 포도원 주인의 비유에서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예수의 답변을 얻어낸다. 비유의 내용은 포도원 주인이 새벽부터 일한 사람이나 하루 일과를 마치기 한두 시간 전부터 일한 사람이나 똑같은 일당을 지불한다는 이야기이다. 하나님의 정의는 하나님 나라의 특징이기도 한데, 정의가 법에 근거를 둔다는 점은 이 비유에서도 유지되고 있다. 

동일한 임금에 불만을 제기하는 노동자에게 자신은 잘못한 것이 없고, 계약(법)대로 했다고 네 몫이나 가지고 가라는 엄한 포도원 주인의 말에서 알게 된다. 이 비유로써 하나님의 정의가 무엇인지는 분명하다. 예수가 이해한 하나님의 정의는 잘못한 일을 처벌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기 위해 작용하는 원리이고, 규정대로, 법대로 집행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18장 23-34절에 나오는 “탕감받았으나 탕감해주지 않은 악한 종의 비유”에서 저자는 “정의란 어떻게 실현하는가”라는 정의 실현 방법에 대한 예수의 답변을 읽는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겨야 하지 않겠느냐?”는 빚을 탕감해준 주인의 말에서 결정적인 단서를 본다. 즉, 하나님의 정의는 사람들이 하나님에게서 받은 그대로 베풀 때에 이루어진다. 즉, 하나님이 사람을 살 수 있도록 하시는 것처럼 사람도 다른 사람이 살 수 있도록 해줄 때에 실현된다는 결론에 이른다.

많은 해석가들이 이해하기 어렵다는 청지기비유(눅 6:1-8a)에서 저자는 하나님의 정의의 목적을 말해준다고 보았다. 비유에서 청지기는 자신의 실직 위기에서 살아갈 방도를 모색한 결과, 주인에게 빚진 자들의 빚을 삭감하는 일을 감행한다. 주인은 삭감해준 청지기를 칭찬한다. 왜냐하면 이는 결국 주인인 원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주인은 자신의 부를 축적하기 위해 사람들을 착취할 마음이 없다. 사람들에게 밀과 기름을 꾸어준 이유는 그들도 살고 자신도 살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정의는 사람을 살리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지, 사람을 괴롭히면서까지 자신의 재산을 축적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정의에 관한 예수의 이해를 알기 위해 선택한 세 비유가 공교롭게도 동일한 임금, 빚 탕감과 빚 삭감이라는 경제정의에 관한 것이다. 세상적인 가치관으로는 이러한 것을 정의라고 하지 않겠지만, 하나님 나라를 말하는 천재 예수에게 하나님의 정의란 사람을 살리는 방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 Paolo Veronese, 「Christ among the Doctors」 (c. 1560) ⓒWikipedia

소외된 자를 바라본 예수의 태도

제2부에서 저자는 여성에 대한 예수의 입장과 태도를 다루면서 “페미니스트 예수”라고 제목을 붙였다. 1960년대부터 미국을 중심으로 여성의 관점에서 성서를 읽는 여성신학자들이 생겨났지만, 예수를 페미니스트라고 명명한 것은 정작 남성학자였다(Leonard Swidler, Jesus was a Feminist/이성청 옮김, 예수는 페미니스트였다, 신앙과지성사, 2017). 최근 한국사회에는 ‘페미니스트“라는 표현에 대해 반감을 가진 분들이 상당수 있지만, 예수시대 여성은 그야말로 인간 이하의 존재이다. 창세기 1장 28절에 의하면 하나님이 그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했다고 절대적인 남녀평등을 말하지만, 유대 사회에서 이 구절은 별로 역할을 못했다. 여자는 남자의 돕는 배필이라는 창세기 2장 18절의 말씀이 더 유효하게 작용했다.

예수 당시 유대사회는 남자로 구성되고 여자는 남자의 딸, 아내, 어머니라는 연결고리로 살아가는 가부장적인 사회이다. 여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감사할 정도로 여자는 사람취급을 받지 못했다. 율법을 공부해서도 안 되었다. 제사장이 될 수도 없다. 직업을 가질 수도 없다. 남편이 없는 과부나 아버지가 없는 고아나 아들이 없는 여자는 사회에서 살기 어려운 사회에서 예수께서 여자를 종교적 담론의 파트너로 여기고 하나님 나라에 관해 가르치셨다.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에게 하신 말씀에서 여자도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할 수 있다고 선언하신 것은 지정한 페미니스트이다. 저자는 그 당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이러한 이해를 가질 수 있었다는 점에서 예수의 천재성을 보았다.

제3부는 예수와 그의 주변 사람들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예수의 활동 당시 사회적으로 지대한 영향력을 끼쳤던 세례요한에 대한 예수의 태도, 당시 사회적으로 업신여김을 받았던 사마리아인과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예수의 태도에서도 저자는 예수의 천재성을 본다.

세례요한은 종말이 가까이 왔다면서 회개를 촉구하고, 회개한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종말이 가까웠다는 것은 당시 시대 분위기였고, 예수도 이에 공감하고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예수는 세례요한의 말과 세례 행위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 정신을 뛰어넘어 예수만의 독창적인 사상을 전개한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이다. 

마태복음은 세례요한과 예수의 연속성을 나타내기 위해 세례요한도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말한 것처럼 표현했지만, 그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세례요한은 임박한 심판을 준비하기 위한 회개와 세례를 범국민적으로 선포하고 행한 분이고, 예수는 그것을 넘어 생명의 역사가 나타나는 하나님 나라를 전하고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초대하는 분이었다. 일반인들이 보지 못하는 것, 탁월한 시대정신을 읽고 대책을 제시하는 지도자조차도 보지 못하는 것을 예수는 보았다는 점에서 예수는 천재이다.

예수께서 지상 생활을 하던 당시 유대 사회는 유대인의 선민의식을 인해 유대인과 타종족의 피가 섞인 사마리아인을 무시했다. 이들뿐만 아니라 병든 자, 가난한 자, 장애인, 억울한 일을 당한 자 등 기존의 가치에 따라 사회적으로 낮은 지위의 사람이나 소외된 사람들을 돕기보다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로 여기고 더욱 천대하고 혐오하는 경향이 있었다. 반면 건강하고 부유하며 사회적 지위를 가진 사람들은 이를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기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과 사회적 격차를 두었다.

이러한 시대에 예수는 모든 아픈 자들과 가난한 자, 소외된 자들을 축복하며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선언한다. 이러한 태도는 그 사회의 일반적 가치를 뛰어넘어 진정한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천재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예수의 교수법

제4부는 천재 교사 예수가 가르친 내용과 가르친 방법, 그리고 그의 교육목표를 탐구한다.

지상의 예수는 과연 무엇을 가르쳤는가? 이에 대해서는 이미 120여년 많은 학자들이 연구해서 결론이 일치한다.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이다. 학자들 간에는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 그 나라가 왔는지 아직 안 왔는지 엄청나게 논의를 하고 견해도 달리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예수가 전한 하나님 나라에 관해 쉽게 풀이해준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통치자이신 나라이고, 그래서 그 나라는 인간이 통치하는 세상 나라, 세상 권력과 대비된다. 세상 나라에선 남보다 잘난 사람이 되라고 스트레스를 주지만, 하나님 나라에선 스트레스로 병들고 귀신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구원하여 온전한 인간의 삶을 영위하게 해준다. 예수에게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 가는 저승이 아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하데스의 나라가 아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예수의 말대로 가난한 사람들이다. 예수의 입장에서 부유한 사람이란 하나님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고 장담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는 사람들의 나라이다.

예수는 그 나라가 이미 왔다고 말한다. “볼 것을 보는 눈을 가진 자가 복이 있다. 들을 귀 있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한다. 예수의 눈에는 이미 하나님 나라가 왔다. 예수께서 병든 자들을 고치며 귀신 들린 자들에게서 귀신들을 쫓아냄으로써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음을 보여주었건만, 하나님 나라가 어디 있냐고 묻거나 아직 오지 않았다고 반박하는 사람은 이미 도래한 하나님 나라를 볼 눈이 없고, 생명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귀가 없는 자들이다.

예수는 자기가 누구라고 자랑하거나 자기를 믿으라고, 자기를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고 가르친 적이 없다. 예수의 지대한 관심은 오로지 하나님과 그의 구원에 있다. 예수가 일반 유대인들과 결정적인 차이를 보인 것은 하나님의 가까움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멀고먼 곳에 계신 분이다. 과거에 선조들에게 함께 하셨고, 미래에도 그들의 삶에 작용하실 것이지만, 현재는 먼 곳에서 가만히 바라만 보고 계신 분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예수는 하나님이 직접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활동하고 계심을 보았다. 병든 자가 치유를 받을 때, 귀신이 자신의 명령을 듣고 물러갈 때, 예수는 자신의 특별한 능력으로 보지 않았다. 예수의 눈에 그것은 병든 자들과 귀신 들린 자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역사였고, 예수는 그것을 하나님 나라가 왔다고 가르쳤던 것이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방법은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다양한 비유로 이야기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곧 사랑이었다. 이야기꾼 예수는 가르치는 자신이 배가 고플 때, 배움을 받는 사람들도 배고픔을 알고 음식을 베푼다. 배우는 자들과 함께 식사하는 스승. 먹는다는 것은 산다는 뜻이다. 함께 먹는다는 것은 함께 살아간다는 뜻이다. 

예수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제대로 충분히 알았다. 그래서 그는 천재인 것이다. 하나님의 연민은 그대로 예수에게도 적용된다. 하나님은 세상과 인간을 만드신 창조주이고, 그가 만든 세계를 회복하려는 의지를 발휘하고 계심을 깨달았다. 그것을 예수는 하나님 나라라고 명명하고, 가장 쉬운 방법으로 가장 구체적인 방법으로 가르쳤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에 관해 이야기하고 함께 식사하고 즐기는 일이었으며, 이 모든 것은 이웃을 향한 예수의 사랑의 행위였다.

예수의 목표

마지막 12장에서 저자는 예수가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가르친 목표가 무엇인가를 성찰해본다. 모든 가르치는 자는 교육 목표를 설정한다. 학계에선 이 문제에 관해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지만, 저자는 자신의 독특한 종교적 상상력으로 예수 당시 시대적 분위기에서 찾아본다. 수백년 식민지 민족으로서 살아가면서 삶의 기쁨과 의욕을 잃은 민족에게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알려줌으로써 삶의 기쁨을 회복시키고자 함이었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나라의 초청은 구원 잔치에 대한 초청이고, 이는 예수가 바라보는 하나님 나라를 함께 바라보고 예수가 듣는 하나님의 위로와 구원의 음성을 함께 듣자고 하는 초청이었다.

살기 힘들고 비참한 현실을 살면서 이를 초월할 수 있는 종교적 파워를 제공하는 예수는 진정한 종교적 천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편집부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편집부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김상옥로 30, 402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 홍인식  |  편집인 : 이정훈  |  청소년보호책임자 : 홍인식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23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