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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가 아니라 ‘무엇인가’ 하고 묻자“성도가 받아야 할 복”(전도서 9:1-3, 11-12)
이상중 목사(초도제일교회) | 승인 2023.01.30 02:29
▲ 하나님께 왜 하고 묻기 전에 무엇일까 하고 묻자. ⓒGetty Image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나요? 옆 성도님, 앞뒤 성도님과 인사 나누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고 누리고 나누세요.”

설 명절이면 늘 ‘복’에 관한 덕담을 나눕니다. 그래서 오늘은 성도가 누려야 할 복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지난주와 이어지는 말씀이기에 먼저 지난주에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늘 아래에서 육신을 입고 살아가는 이 짧은 생에 동안 어떻게 살아야 할지 이야기 나누면서, 전도서의 말씀을 통해 세상의 가치관, 목적, 방식을 갖고 살아가는 한 삶은 헛되고 헛될 수밖에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관한 키워드를 늘 헛되다고 말하는 전도자와 어울리지 않는 ‘행복’이라는 단어로 풀어나갔고, 성경과 전도자가 말하는 ‘행복’에 관해 나누면서 성도가 누려야 할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말씀드렸습니다.

특별히 플라톤이 말한 동굴의 비유에서 오늘날 많은 성도가 말씀을 통해 진실을 들었음에도, 지향해야 할 삶이라는 진짜 세상을 외면한 채 지금까지 자신이 보고, 경험한 것에 의존하는 가짜 세상을 진짜라고 여기는 어리석은 죄수들과 같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회개가 필요하지만, 정작 말로만 회개로 그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의 가치관과 삶의 목적과 방식을 바꾸는 이는 아주 소수에 불과합니다. 전도자의 ‘덧없는 인생살이에 크게 마음 쓸 일이 없다.’는 말처럼 육신을 입고 살아가는 이 짧은 생에 대하여 크게 마음 쓰지 않는, 삶을 좀 더 가볍게 경험하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삶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어서, 욕망과 세속적 가치에서 벗어나면 오늘 하루의 진정한 행복을 발견하고 누릴 수 있습니다. 정해진 몫,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허락하신 오늘 하루에 주어지는 각 사람의 몫을 누릴 수 있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다시 한번 간절히 소망합니다.

성경에는 오염된 단어가 참 많습니다. 본래 의미로 사용되지 않고 다른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복이라는 단어가 그렇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복은 세상이 말하는 복과는 전혀 다른 개념입니다. 신약성서에는 복이라는 단어 자체가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산상수훈의 팔복에서 몇 번, 예수를 임신한 마리아에게 엘리사벳이 “그대는 여자들 가운데서 복을 받았고, 그대의 태중의 아이도 복을 받았습니다.”(누가복음1:42)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리고 로마서 4:6-8 “6 그래서 행한 것이 없어도,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여겨 주시는 사람이 받을 복을 다윗도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7 ‘하나님께서 잘못을 용서해 주시고 죄를 덮어 주신 사람은 복이 있다. 8 주님께서 죄 없다고 인정해 주실 사람은 복이 있다.’”

사도행전 3:25-26 “25 여러분은 예언자들의 자손이며,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조상들과 맺은 언약의 자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의 자손으로 말미암아 땅 위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26 하나님께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악에서 돌아서게 하셔서, 여러분에게 복을 내려 주시려고, 먼저 자기의 종을 일으켜 세우시고, 그를 여러분에게 보내셨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복은 ‘상태’를 말합니다. 세상이 말하는 복은 무엇을 받고, 누리는 소유와 상황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나의 뜻대로 결과가 움직이는 데에 있습니다. 이런 복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이방인들이나 얻으려 하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에서 전도자가 어떻게 말하는지 들어보겠습니다.

“1 나는 이 모든 것을 마음속으로 깊이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서 내가 깨달은 것은, 의로운 사람들과 지혜로운 사람들이 하는 일을 하나님이 조종하신다는 것, 그들의 사랑과 미움까지도 하나님이 조종하신다는 것이다. 사람은 아무도 자기 앞에 놓여 있는 일을 알지 못한다. 2 모두가 같은 운명을 타고 났다. 의인이나 악인이나, 착한 사람이나 나쁜 사람이나, 깨끗한 사람이나 더러운 사람이나,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나 드리지 않는 사람이나, 다 같은 운명을 타고 났다. 착한 사람이라고 해서 죄인보다 나을 것이 없고, 맹세한 사람이라고 해서 맹세하기를 두려워하는 사람보다 나을 것이 없다. 3 모두가 다 같은 운명을 타고 났다는 것, 이것이 바로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잘못된 일 가운데 하나다. 더욱이, 사람들은 마음에 사악과 광증을 품고 살다가 결국에는 죽고 만다.”

전도자는 ‘삶은 하나님이 조종하신다.’, ‘삶의 결과를 사람이 바꿀 수 없다.’, ‘모두가 다 같은 운명을 타고 난다.’고 말합니다. 이런 삶의 굴레 속에서 많은 이들이 마음에 사악과 광증을 품고 살아간다고 말합니다. 바꿀 수 없는 것을 바꾸려 하니 당연히 마음에 사악과 광증을 품고 삽니다. 바꿀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마음, 존재의 상태일 뿐입니다.

전도자는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11 나는 세상에서 또 다른 것을 보았다. 빠르다고 해서 달리기에서 이기는 것은 아니며, 용사라고 해서 전쟁에서 이기는 것도 아니더라. 지혜가 있다고 해서 먹을 것이 생기는 것도 아니며, 총명하다고 해서 재물을 모으는 것도 아니며, 배웠다고 해서 늘 잘되는 것도 아니더라. 불행한 때와 재난은 누구에게나 닥친다. 12 사람은, 그런 때가 언제 자기에게 닥칠지 알지 못한다. 물고기가 잔인한 그물에 걸리고, 새가 덫에 걸리는 것처럼, 사람들도 갑자기 덮치는 악한 때를 피하지 못한다.”

‘불행한 때와 재난은 누구에게나 닥친다.’, ‘갑자기 덮치는 악한 때를 피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삶의 결과는 하나님께 달려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시는지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능력, 힘 등 무엇으로라도 불행한 때와 악한 때를 피해 갈 수 없습니다. 복은 이런 불행한 때와 악한 때를 피하는 것이 복이 아닙니다. 무언가를 소유함이 복이 아닙니다.

복은 무엇입니까? 성도가 받고 누려야 할 복은 무엇입니까? 복은 하나님과 함께 존재하는 상태입니다. 간성제일교회 민돈후 목사님 다들 아시죠? 무엇이 복인지 민돈후 목사님이 겪은 이야기, 간증을 통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지금부터 말씀드리는 것은 민돈후 목사님 설교문의 일부입니다.

“지난 동지에 딸의 응급실 에피소드가 있었다. 이런 적이 처음이라 많이 놀랐다. 그리고 이때 경험한 것을 정리도 할 겸 여러분과 나누고 싶다.

이 위급한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기도했을 것 같은가? “딸이 낫게 해주시옵소서?” 마음은 당연히 그러했으나 입으로 그런 내용의 기도는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일부러 안 한 게 아니라 그런 생각 자체가 들지 않았다. 그럼 뭐했냐? 굉장히 높은 집중도로 상황을 보면서 사랑, 감사, 축복의 말을 계속 되풀이했다.

저녁 6:40에 일어난 일이고, 중환자실 가는 걸 보고 집에 돌아오니 새벽 3:30이었다. 그 시간 동안 사랑 감사 축복을 되풀이하는 기도를 아마도 몇만 번은 했을 거다. 내가 한 것은 그저 주파수를 맞추는 일이었다. 그리고 어느덧 이렇게 절박하고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자동으로 반응하게 될 정도로 이제는 익숙해진 것이다. 나 스스로 놀랐다.

장애물을 치우지 않고, 정신 줄을 놓고 있으면 불안과 불행한 상상으로 저절로 자석처럼 빠지게 되는 상황에서 저 단순하고 되풀이하는 기도의 말들로 계속 주파수를 하나님께 맞추는 거다. 사랑, 감사, 축복으로. 느껴지든 아니든 상관없다. 수시로 불안에서 눈을 돌려 지금 있는 것에 감사를 돌리거나, 축복을 맘으로라도 하는 거다. 그게 무슨 소용인가? 왜 이렇게 하는 건가?

작년에 기도 시리즈로 설교하면서 이미 한참을 말한 내용이다. 아이가 쓰러졌는데 그걸 하나님이 모르시겠는가? 아니다. 잘 아신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무언가 이루시려면 통로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통로가 잘 뚫려서 원활히 하나님의 영감이 흐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이 지금 무어라 말씀하시는지 알아차릴 수 있고, 이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그 뜻에 함께 감응할 수 있다.

그렇게 된다면 이미 무언가를 더 알아야 할 필요가 없는 상태이다. 모든 것은 자연스럽고, 이해되며, 온전하다. 그래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하라고 하셨다. 너희에게 필요한 것을 다 아시는 주님께서 이 모든 것은 채우신다고 하셨다. 그 상태에서 구하는 모든 것을 하나님이 이루신다고 하셨다.

아이가 구급차에 실려 가고, 산소포화도가 떨어져서 기도삽관을 하고, 중환자실에서 수면 상태로 몸을 뒤트는 것을 보면서 내가 한 것은 그저 불안을 뒤로 넘기고 하나님께 초점을 맞춘 것뿐이다. 사랑, 감사, 축복으로. 이러한 성경적 가치의 단어라면 뭐든 사용해도 된다. 마치 침묵, 듣는 기도와 비슷한 원리이다. 약간 다른 건 거룩한 단어를 정해서 그것 자체를 계속 반복한 거다. 특히나 불안과 부정적인 마음이 올라올 때마다 더 집중해서 반복했다.

나의 경우에는 아이가 잘못될까 불안한 것도 있지만, 더 크게 다가왔던 것은 죄책감이었다. ‘가까운 며칠 전에 나는 왜 무심하고 불친절하게 대했을까?’라는 죄책감이 대못이 되어 가슴 여기저기를 콱콱 쑤시는데, 이건 비유가 아니라 마치 물리적 통증처럼 느껴졌다. 이것은 나를 삼킬만한 크기의 고통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런 종류의 죄책감에 과거의 나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잠식당해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럼 그날은? 죄책감이 올라오는 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알아차리고, 곧바로 사랑, 감사, 축복을 말하면서 전환시켰다. 죄책감에 오래 머물지 않고 빠져나오기로 결정했다. 그 상황에서 죄책감에 머물러 있는 건 아무 도움이 안 된다. 좀 심하게 말하면 이기적인 거다. 자기중심적인 행동이기도 하다. ‘나의 고통’에만 집중하고 매몰되어서 그 상황을 책임 있게 대하길 놓칠 수도 있다.

병을 낫게 해달라는 기도는 할 수 있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을 수 있다는 것도 내 마음 한 켠에 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 손을 넘어서는 결정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일상에서 수시로, 혹은 극단적으로 갑자기 어려운이 일어났을 때 참 극성을 유지하는 것. 그것이 신앙의 태도이다. 이렇게 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게 아니다. 이렇게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안 그러면 불안해서 미치니깐. 도대체 하나님을 이 고통의 상황에서 이해할 수가 없으니깐.

이 방식이 쉽지는 않다! 하지만 복잡하지도 않다는 것을 기억하라! 단순하다! 진리는 단순하다! 하늘에만 응답하고, 세상이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려고 할 때는, 특히 불안의 진동으로 우리의 사고와 느낌을 장악하려고 할 때는 사랑/진리/축복만을 발산하는 것. 이것이 참극성이다. 이럴 때 하늘의 영감이 나에게 오고, 나를 통해서 세상으로 흐를 수 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향하신 하나님 뜻이니라. 물론 그 결과는 내가 기대한 그것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 순간 가장 적합한 것으로 채우신다는 것을 믿을 수 있으면 된다. 만약 건강을 회복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무시한 것인가? 나는 하나님 눈과 관심에 들지 못한 것인가? 무언가 헌금이라도 더 하거나 기도할 때 소리라도 질러서 하나님의 관심을 돌려야 하는 것인가? 아니다. 하나님은 나를 향해 한순간도 눈을 뗀 적이 없다.

오히려 이런 고통의 상황일 때 그것을 온전히 보지 못한 채 정신이 나가 있는 것은 대부분은 나 자신이다. 왜? 불안이 그것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 죄책감이 나를 잠식해서 자기를 상처입히고만 있다.

하나님은 저 뒤로 밀쳐낸 채. 그런 상태에서 하나님을 이해하는 내용 역시 제정신이 아닌 경우가 많다. 하나님 상이 내 불안을 투사한 만들어진 신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니다. 건강이 회복되든 아니든 이 모든 게 하나님 안에 있다. 하나님 안에 있다는 말은 평안할 수 있다는 말이다.

내 뜻대로 회복되지 않는다 해도 그것이 하나님 밖으로 떠밀려 나간 게 아니라는 말이다. 하나님에게는 바깥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도 이제는 생사를 넘어서 하나님을 이해할 때가 됐다. 살든 죽든 나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다고 고백할 때, 심지어 감사할 때 비로소 우리의 통로는 크게 청소되고 씻긴다.

육체를 입고 너 좀 더 할 일이 있다고 하시면 더 있는 거고,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말씀하시면 육체를 벗고 자유로워질 뿐이다.

딸이 의식이 없는 상황에서 나의 기도와 바람은 이것이었다. “세아야, 아빠야. 건강을 완전히 회복하든, 아니면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든, 아니면 이전과는 다른 건강상태로 만나든 그 무엇이 되었든 아빠는 너를 완전히 떠받치고 감싸고 있어. 이게 바로 아빠의 역할이야. 아빠는 그러기로 결정했어. 사랑한다, 세아야. 축복해. 고마워.”

그러다가도 불안이 대못이 되어 나를 찌를 때면 다시 사랑 감사 축복을 끝없이 되풀이했다. 내가 원하는 결과를 고집하지 않고, 사랑 감사 축복의 표현으로 하나님께 참극성을 유지하는 것. 나는 이번 기회에 더 분명하게 경험하며 적용하고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 과정에서 두세 명에게 똑같은 이야기를 들은 게 있다. “세아 아버님, 그런데 왜 이렇게 차분하세요?” 그 말을 듣고서야 나의 태도가 어떠한지를 나도 인식했다. 마음은 차분하지 않았다. 허리케인 한가운데 들어왔으니 휩쓸려 날아가지 않으려고 나는 사랑 감사 축복의 말로 붙잡고 있느라 엄청나게 집중하고 있는 상태였다. 다만 불안에 응답하지 않으려고 부단한 노력을 하다 보니 겉으로 보기에는 그렇게 보인 것 같다.

실컷 울어도 된다. 불안을 한껏 표현해도 된다. 이미 올라온 느낌은 누구에게 해를 입히지만 않는다면 안전하게 흐를 수 있게 하는 게 좋다. 중요한 것은 사랑 감사 축복의 반복이 나의 통로를 씻기면서 동시에 나를 바로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의 뜻에 뿌리를 단단히 내리게 해주었다는 거다. 

거듭 말한다. 쉽지는 않을 수 있지만 복잡하지 않다! 그냥 하면 된다. 불안에 밥을 주지 않는 것만으로도, 장애물을 치우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의 사랑과 당신의 역사는 저절로 드러난다.”

내 뜻을 관철시키지 않고, 하나님의 뜻이 나를 통해 이루어지며, 흐를 수 있도록 하는 삶의 태도가 바로 복입니다. 민돈후 목사님의 경험처럼 복은 하나님과 함께 존재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 자체가 복입니다. 헛된 세상의 가치와 욕망을 좇지 않고, 하나님과 함께함으로 그 어디에서나 하늘나라를 경험하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상중 목사(초도제일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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