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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죽기 위해 태어나셨는가그는 왜 죽어야 했을까?(마가복음 15:33-37, 로마서 5:8)
홍인식 목사(새길교회) | 승인 2023.06.17 02:00
▲ 예수 그리스도는 오직 죽기 위해 이땅에 태어났는가? 신학은 초지일관 이 물음에만 매달려 있다. ⓒGetty Images

마가복음 15:33-37
33 낮 열두 시가 되었을 때에, 어둠이 온 땅을 덮어서,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다. 34 세 시에 예수께서 큰소리로 부르짖으셨다.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다니?” 그것은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하는 뜻이다. 35 거기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몇이, 이 말을 듣고서 말하였다. “보시오, 그가 엘리야를 부르고 있소.” 36 어떤 사람이 달려가서, 해면을 신 포도주에 푹 적셔서 갈대에 꿰어, 그에게 마시게 하며 말하였다. “어디 엘리야가 와서, 그를 내려 주나 두고 봅시다.” 37 예수께서는 큰 소리를 지르시고서 숨지셨다.

로마서 5:8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실증하셨습니다.

기독교와 죽음, 예수의 죽음에 대한 이해

교회력으로 종려주일은 일반적으로 예수의 예루살렘 성 입성을 기념하는 주일로 기념하면서 그가 성으로 입성할 때 백성들이 마치 왕의 행차처럼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그를 환영했다는 것을 기억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종려주일을 승리의 입성, 왕의 입성이라고까지 부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실 생각해 보면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은 승리의 행진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며칠 후에 로마 제국과 또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잡혀 재판받고 십자가형을 받아 죽습니다. 종려주일은 사실 죽음을 향한 고난행진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부터 시작해서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전통적 기독교에서 고난주간은 매우 핵심적인 절기입니다. 기독교에서 고난을 빼면 아무 것도 남지 않을 정도로 고난의 주제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주제는 두말할 것 없이 예수의 십자가 죽음입니다.

그러면, 기독교는 이렇게 중요한 예수의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요? 그리고 그 이해는 우리가 갖고 있는 이해와 대동소이 할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예수의 죽음을 대속적 의미로 이해해 왔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의 죽음은 우리의 죄를 대신 속해 주는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대속(ransom, Redeem)이란?

대속(ransom, Redeem)이라는 단어는 노예나 죄인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 대신 지불한 값을 말합니다. (민 18:15, 그들이 나 주에게 바치면, 사람이거나 짐승이거나, 어떤 것이든지 살아 있는 것들의 태를 처음 열고 나온 것은, 모두 너의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맏이는 네가 속전을 받고 반드시 되돌려 주어야 한다. 부정한 짐승의 맏배도 속전을 받고 되돌려 주어야 한다.)

속[贖]한다는 말의 원래 의미는 포로나 노예가 된 사람을 그 주인에게 대가를 치르고 다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대속은 ‘몸 값’과 관계가 있고 그것은 ‘자유와 해방’과 연결됩니다. 대속은 영어로는 redemption이라고 하는데 ‘되찾는다. 다시 무른다. 다시 사들이다. 도로 찾는다. 회복한다,’의 의미를 가집니다. atonement란 단어도 있는데, 주로 ‘보상하다. 대가를 치르다. 배상하다.’라는 의미로 쓰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종합해 보면, 대속(代贖)은 죄를 지으면 반드시 값을 치러야 하는데 값을 치룰 능력이 없는 사람을 대신해서 몸값을 지불하고 속죄(구원, 죄용서, 해방)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행위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의 죽음은 대속의 죽음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예수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고 죄 값을 치룰 수 없는 인간들을 대신해서 자기의 목숨을 드려서 값을 치루고 우리를 속죄하기 위해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자신의 자리를 버리고 인간의 몸으로 오신 이유였습니다. 이것이 예수는 참 하나님이고 동시에 참 인간이어야만 했던 이유였습니다.

그의 이 땅 위에서의 모든 삶의 행위는 결국에는 인간의 죄 값을 치루고 인간의 죄를 용서받기 위한 전초적인 행위로 해석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죽기 위해 태어나셨고 죽기위해 살았고 결국 죽었습니다.

그의 부활도 대속의 효과를 실증하고 보장하기 위함입니다. 하늘로 올라가셔서 차후 심판을 위하여 다시 오는 것도 결국 대속을 완성하기 위함입니다. 이처럼 기독교에서 예수의 대속 죽음은 모든 신앙의 주제의 핵심이고 중심이 되었습니다.

사실 오늘 기독교인들의 예수 죽음의 이해는 대속의 의미가 유일합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는 우리를 대혹하기 위해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그 외의 다른 이해는 금기시 되고 이단시되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과연 예수의 죽음을 대속의 의미로 해석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요? 그리고 이러한 이해가 언제부터 기독교내에서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교리로 자리 잡았을까요?

분명한 것은 초창기 기독교인에서 예수의 죽음 대한 이해는 매우 다양했습니다. 이런 다양한 이해들이 점차 오직 하나의 의견, 절대적 교리로 자리 잡게 된 것은 1097년 이후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전까지 예수의 죽음이 희생적 죽음이었다는 것에는 신약성서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그 죽음이 우리를 “대신하여”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습니다.

1097년은 켄터베리의 안셀름 주교가 “왜 하나님은 인간이 되셨는가?(Cur Deus Homo?) 라는 책을 통하여 예수의 죽음을 ”대속의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교회의 공식적인 교리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이제 다른 이해는 용납되지 않습니다. 오늘도 기독교회에서 고난주간과 같은 절기를 보내면서 생각하는 예수의 죽음에 대한 이해는 ‘대속’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과연 예수의 죽음을 이런 방식으로만 이해하는 것이 적절한 것입니까?

예수의 죽음을 대속의 죽음으로 이해하는 것은 여러 가지 문제를 야기합니다.

첫째는 예수 죽음의 역사적 의미를 모호하게 만듭니다. 그의 죽음의 역사적 배경을 배제함으로써 십자가가 마 권력이 정치범에게 내리는 형벌이었다는 것을 망각하게 함으로써 우리를 세상의 역사로부터 분리하게 만듭니다.

두 번째. 예수가 우리 죄 값을 치루기 위해 죽었다는 것은 하나님을 “벌주는 공포의 하나님”으로 만듭니다. 하나님을 냉철한 채권자로 만듭니다. 자비롭고 사랑의 하나님으로 말한다고 해서 그 배경에 자리 잡고 있는 “반드시 죄 값을 받고야 마는 무서운 하나님”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세 번째 대속교리는 기독교 신앙을 왜곡합니다. 신앙을 오직 ‘사후 천국가기’(post-mortem/heaven-hell paradigm) 위한 도구로 축소합니다. 신앙이 오늘의 삶의 변화를 이루어 내지 못하는 참혹한 결과를 낳게 됩니다. (마커스 보그, 그리스도교 신앙을 말하다. 149-153쪽)

신학은 2000년 전부터 발전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 이해의 폭을 점차 늘려왔습니다. 여기에 맞춰 우리의 신학적 생각들을 재구성해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 교회의 금년도 주제가 말하는 전환이 필요합니다.

전환을 위해서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옛 세계를 벗어나는 것입니다. 버려아 할 것을 버리지 못하면 전환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버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면서 새로운 시작을 품어내야 합니다. 우리의 영적 전환의 순례의 길은 “몰라지기”와 “새로운 발견”의 연속적 교차를 통하여 이뤄집니다. 

에수 죽음에 대한 이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까지 가져왔던 생각들을 “몰라지기” 해 보면 어떨까요? 그리고 예수의 죽음을 대속의 의미로만 이해하는 것을 “몰라지기”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해 보면 어떨까요?

여정으로서의 죽음

1097년 안셀름 이후 거의 모든 신앙고백은 예수의 대속 죽음을 강조하였고 따라서 예수의 생애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과연 예수는 인간의 대속만을 위하여 죽으셨을까요? 과연 그는 죽기 위해 오셨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인류사에서 예수만큼 불행한 사람은 없을 지도 모릅니다. 예수의 생애의 목적은 인간의 구원(구원이 무엇인가에 대한 논란도 있습니다.)을 위한 죽음을 향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예수의 생애는 얼마나 비참한 것입니까? 이런 삶이 과연 복된 삷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과연 어느 누가 죽기 위해 태어나고 죽기위해 삽니까? 없습니다. 그런 삶은 인간의 삶이라고 살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 살기 위해 사는 것 아닙니까?

물론 우리는 필연적으로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죽기 위해 살지는 않습니다. 죽음은 이렇게 살기 위해 살아가는 여정에서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이 맞이하는 삶의 과정일 뿐입니다. 죽음이 인간 삶의 목표가 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이런 의미에서 예수의 죽음을 필연적이거나 의무 혹은 목적론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삶의 한 과정, 즉 삶의 여정에서 맞이한 것으로 보면서 그의 죽음을 이해 해 보면 어떨까요? 이러할 때 비로소 우리는 예수의 죽음이 우리에게 매우 친밀하게 다가오고 이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의 죽음이 우리를 향한 죽음이었고 또한 우리를 향하여 진정하게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준 의미 있는 죽음이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어찌 보면 나도 저런 죽음을 맞이하면 좋지 않을까 하는 일종의 동경의 감정도 우러러 나올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예수는 왜 죽어야 했을까요? 우리는 예수의 죽음을 대속죽음 외에 다른 의미로 이해할 수는 없을까요?

예언자의 죽음

이렇게 예수의 죽음을 삶의 여정의 한 과정으로 이해하려고 할 때, 우리에게 떠오르는 핵심적인 이미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구약의 예언자들의 죽음과 그들의 삶입니다.

예언자(預言者, 영어: prophet)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서 전하는 사람입니다. 예언자는 알 일을 미리 이야기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사람입니다. 예언자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Prophetes는 “누군가를 위해 앞에서서 말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언자라고 번역하기 보다는 대언자(代言자)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적적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종교가 고대근동에서 다른 이웃 종교들에 비해 비교적 높은 윤리성을 가졌고 후일 세계종교로서의 기독교로 발전하게 될 수 있었던 것은 예언자들의 역할로부터 비롯되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예언자들은 하나님과 강력하고 강력한 체험을 바탕으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합니다. 예언자들이 수 많은 고난과 박해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하나님 체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어떤 때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과의 중개인(仲介人)으로서 가능하였습니다. 그들은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신뢰할 것을 요구하였고 삶에서 정의를 추구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이들은 사람들이 저지르는 죄를 지적하고 비판하면서 참회를 촉구했습니다.

예언자들은 사회와 종교가 잘못된 방향으로 갈 때마다 나타나 직설적으로 지적하고 바로잡고자 했기 때문에 권력자들로부터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백성들로부터도 오해를 받아 박해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어찌 보면 예언자들은 양 쪽에서 고난과 박해를 받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언자들은 자신들의 삶의 형태와 메시지 선포가 그들에게 고난을 급기야는 죽음까지도 가져다 줄 수 있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고난과 죽음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삶의 소명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는 전통적 의미에서 예언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달했고 정의와 평화를 외쳤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예수의 삶을 보면서 그에게서 예언자를 보았습니다. 엘리야를 보았습니다.

예수 자체도 그런 의미에서 자신에게 늘 고난과 죽음의 그림자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고난을 받고 죽을 것임을 수차례 걸쳐 말하기도 했습니다.(마태 16:21, 마가 8:31-33, 9:30-32, 10:32-34, 누가 9:22)

예수는 예언자의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예언자로 죽은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예언자 예수의 삶을 본받아야 합니다. 정의와 평화의 하나님 말씀을 전한 예언자 예수의 삶을 따르고 그가 걸었던 길을 따라 걸어야 합니다. 그럴 때 예수의 죽음의 의미는 오늘 우리게게 실제적인 의미와 힘을 갖게 될 것입니다.

희생자의 죽음

예수의 죽음을 이해하고자 할 때 가장 많이 사용되는 단어는 아마도 “희생”이라는 단어일 것입니다. 예수의 죽음은 ‘희생의 죽음’이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희생이라는 단어가 희생양, 다시 말하면 무엇인가를 대체해서 희생당하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본래 희생이라는 단어는 라틴어 sacrificium에서 왔습니다. ‘성스럽다’는 의미의 sacri와 ‘만들다’라는 의미의 ficium이 이루는 합성어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어떤 것을 하나님께 바쳐서 그것을 성스럽게 만든다.”입니다. 희생이라는 단어에 “대체”라는 의미는 없습니다. 예수의 죽음은 분명 희생의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 값을 대체하여 치른다.’는 의미의 희생은 아닙니다. 그 분은 하나님나라를 위한 삶의 여정에서 불의한 세력에 의해 고난을 받습니다. 죽음의 위협까지 받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는 고난과 죽음의 위협을 피하지 않고 담담하게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하나님의 제단 위에 희생 제물로 바칩니다. 하나님나라의 실현이라는 거룩한 삶의 목적을 위하여 묵묵히 희생의 죽음을 경험합니다.

예수의 죽음을 희생자의 죽음으로 이해하는 것은 그가 로마제국과 불의한 종교권력에 의해서 고난 받고 사형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얘수가 태어난 당시의 세계는 유례가 없는 평화의 시대였습니다. 로마의 평화(paz romana)라고 불리는 태평성대, 번영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평화와 번영은 소수의 권력자들만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로마의 평화를 가짜 평화로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당시 어느 누구도 이러한 가짜 평화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거나 저항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체제를 거부하거나 저항하는 사람들은 “안정을 해치는 불순분다”로 취급받기 십상이었습니다. 로마의 평화는 모두에게 침묵을 강요했습니다.

예수는 이러한 체제의 허구를 드러냈습니다. 그는 로마제국이 아니라 하나님나라를 말했습니다. 작은 자가 큰 자가 됩니다. 섬기는 사람이 가장 큰 사람입니다. 작은 사람을 돌봐야 합니다. 승자독식의 세상이 아니라 모두 함께 나누는 세상을 말했습니다. 빚은 끝까지 갚지 않아도 됩니다. 빚은 탕감되어야 합니다. 노동자들에게 일용할 양식이 보장되어야 합니다. 세금 논쟁을 통하여 예수는 유대인들에게 하나님과 세사르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도록 만듭니다.

예수의 가르침은 로마제국의 삶의 방식과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그의 가르침은 전복적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로마 제국과 그에 동조하는 세력들에게는 예수는 불온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들에게 예수 같은 불온한 사람들이 증가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그러기에 이런 흐름을 막아야 합니다. 차단해야 합니다.

이런 가운데 예수는 로마권력과 유대 종교권력자들에 의해 선택됩니다. 본보기로 그는 죽어야 합니다. 그는 본보기로 희생되어야 합니다. 예수의 죽음은 로마체제를 거부하거나 저항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줍니다. 마침내 예수는 희생됩니다.

이러한 의미의 예수의 희생적 죽음은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예수 따르미’들에게 어떤 의미를 주고 있습니까? 예수는 당시 로마의 평화 시대에 모든 사람들이 당연시 여기던 삶의 원리를 거슬러 올라가다가 희생을 당하였습니다. 체제유지를 목적으로 하는 권력자들에 의해 희생되었습니다. 이런 예수의 죽음은 오늘의 믿는 이들에게 시류를 거슬러 올라가는 ‘대항적 문화’에 대한 비전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합니다.

시류에 휩쓸려서 당연하게 여기는 로마의 평화, 오늘날 미국 평화 시대의 원리를 그대로 따르는 사람들처럼 살아서는 안 됩니다. 희생함으로서 자신의 삶을 거룩하게 만들고 하나님나라의 거룩성을 드러냈던 예수처럼 시류를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힘을 발휘해야 합니다. 진정한 영성의 힘은 예수의 희생의 죽음을 기억하면서 시류를 거슬러 올라가는 시도와 노력을 할떼 향상되어 질 것입니다.

기독교는 로마제국과 불의한 종교권력에 저항하며 다른 세계를 보여주고자 했기 때문에 죽은 예수의 희생으로 출발한 종교입니다. 예수는 자신의 삶을 하나님나라의 전에 바침으로써 그의 삶을 거룩하게 만들었습니다.

순교자의 죽음

예수의 죽음을 이해하는 또 다른 접근은 순교자라는 호칭에서부터 비롯되는 이해입니다. 유대교에서 순교자 전통은 매우 중요합니다. 순교자는 대의를 위하여 초지일관 변함이 없는 삶을 산 사람입니다. 그 대의를 위하여 목숨을 버린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순교자의 죽음을 보면서 대의가 무엇인가를 발견하게 되고 또 그 대의를 지키기 위해 자신들도 죽음을 불사하기도 합니다.

순교자는 자신이 지키고자 했던 대의가 실현되는 것을 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 그는 못 봅니다. 그러나 그 실현에 대한 꿈을 꾸고 확신하기 때문에 대의를 위해 죽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의인이고 신실한 사람입니다. 그들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확신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임”을 확신하는 사람들입니다.

순교자의 죽음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힘을 가집니다. 그 죽음은 사람들로 하나님에게 신실하고 충성스러운 삶을 살게 합니다. 하나님나라의 실현이 눈앞에 보이지 않더라도 그에 대한 확신을 갖게 만들어서 그 길을 걷게 만듭니다. 순교자의 죽음은 사람들로 하나님나라의 좁은 길을 걸을 때 당할 수 있는 고난과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어 그들도 순교자의 삶을 살게 만듭니다.

예수는 하나님나라를 위한 순교자의 죽음을 맞이합니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예수의 순죠자적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나라의 모습을 봅니다. 예수의 말과 행동 그의 생애를 통하여 하나님나라의 구체적인 모습을 경험하게 되고 그를 위해 순교하겠다는 결의를 다지기도 합니다. 예수는 구체적인 하나님나라를 위해 죽었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죽음은 순교자의 죽음이엇습니다.

예수의 순교자로서의 죽음은 대속론과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 “다른 사람을 대신한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그의 죽음은 “우리를 위한 죽음”이 됩니다. 순교자의 죽음은 우리가 과감히 순교자처럼 살아가려고 할 때 그리고 위험을 감수하고 순교자처럼 죽을 준비가 되어 있을 때 바로 그때 그의 죽음은 “우리를 위해 우리를 대신한 죽음”이 됩니다.

예수는 순교자로 죽었습니다. 그는 죽기 위해 죽은 것이 아닙니다. 순교는 삶을 의미  게 사는 것, 자신이 확신하고 믿고 있는 것에  전적으로 헌신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죽음을 순교자의 죽음으로 이해하면 그 이해는 우리로 예수의 가르침과 그 분의 생애에 충실하도록 촉구합니다.

사랑의 죽음

바울은 예수의 죽음에 대해서 오늘의 본문에서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실증하셨습니다.”

예수의 죽음 이해는 이제 명확해 집니다. 예수는 죽음을 통하여 사랑의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그의 죽음의 자학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바지의 하나님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 값을 끝까지 받아내시는 차가운 채권자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그는 우리가 빚을 갚지 했을지라도 상관없이, 아니 회개하지 못했을지라도, 그리고 죄가 죄인 줄도 모를 만큼 어리석은 우리를 위해 죽을 수도 있는 분이십니다.

예수는 그런 하나님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분의 죽음은 사랑의 죽음입니다. 그 분의 죽음을 이겨내는 사람의 죽음입니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함”을 그의 사랑의 죽음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의 죽음은 무서운 하나님을 거부합니다. 그는 죄 값을 치루기 위하여 대속물로 죽지 않으셨습니다. 그 분은 예언자로서. 희생자로서. 순교자로서 사랑의 죽음을 경험하셨습니다. 오늘 예수가 죽었기에 오늘 우리가 살 수 있었습니다.

홍인식 목사(새길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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