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말씀의 잔치 Junger Prediger
깨어났으니 깨어 있어야마음을 새롭게 하는 신앙 1(잠언 8:34-35)
김현주 목사(한성교회) | 승인 2023.08.01 01:23
▲ 깨어있다는 것은 민감함을 의미한다. ⓒGetty Images
34 누구든지 내게 들으며 날마다 내 문 곁에서 기다리며 문설주 옆에서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나니 35 대저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임이니라

주일예배에 참여하신 한성교회 모든 성도 여러분을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늘 함께 계시는 우리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하늘의 크신 은혜와 평화 내려주시길 빕니다. 저는 앞으로 7주간 마음을 새롭게 하는 신앙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전해 드리려 합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으로 “깨어났으니 깨어 있어야” 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 나누겠습니다.

자정이 지났다고 해서 하루가 시작되나요? 우리가 잠에서 깨어나야 하루가 시작되지요? 밤 꿈에서 깨어나야 참 꿈을 위해 일을 시작하는 법입니다. 사실 기독교 신앙은 깨어남을 수반합니다. 여기서 깨어남이란 한계를 인식하는 일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깨어남은 나의 한계, 내 지식과 경험의 한계, 내 생각의 한계, 내 노력의 한계, 나도 모르게 붙들리고 매어있던 모든 것들의 한계를 인식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밤 꿈은 그저 꿈일 뿐 현실이 아니라고 인식하는 게 깨어남이듯, 이 세상 나 홀로라는 생각은 그저 생각일 뿐 진실이 아니라고 인식하는 게 신앙적 깨어남입니다. 내 노력이 전부라는 생각은 그저 생각일 뿐 진실이 아니라고 인식하는 게 신앙적 깨어남입니다. 돈이 곧 행복이라는 생각은 그저 생각일 뿐 진실이 아니라고 인식하는 게 신앙에서의 깨어남입니다.

신앙의 깨어남이 있어야 신앙적 선택이 가능한 법입니다. 낡은 신화와 신념에서 깨어나야 참 진리를 배우고 익힐 기회가 찾아옵니다. 낡은 습관에서 깨어나야 새로운 삶의 방식을 터득하고 실현할 마음을 먹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 꾼 헛꿈에서 깨어나야 하나님과 함께 꾸는 새로운 비전을 보고 실현할 가능성이 생깁니다. 무엇보다 각종 우상에서 깨어나야 하나님을 바로 알고 예배할 길이 열립니다.

잠에서 깨어났다고 해서 모두가 다 주어진 하루를 온전하고 복되게 살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깨어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을 향해 깨어 있느냐도 중요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의 질을 결정짓는 것은 우리가 무엇에 깨어 있느냐입니다. 신앙은 깨어남에만 관심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에 깨어 있느냐에도 관심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시간의 질감을 바꾸는 힘과 같습니다.

그리스어로 시간은 ‘크로노스’와 ‘카이로스’로 구분됩니다. ‘크로노스’는 물리적 시간을 말합니다. 일정 간격으로 끊임없이 카운팅되는 연속적 시간을 말합니다. 과거에는 지구가 자전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86,400으로 나눈 값을 1초로 명명했습니다. 하지만 과학의 발전으로 지구 자전 시간이 불규칙적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조금 더 균질한 측정을 위해 현재 학계에서는 원자의 속성을 이용해 1초라는 시간의 간격을 확정했습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절대 영도 상에서 바닥 상태에 있는 세슘 133원자를 들뜨게 하는 데 필요한 특정 전파의 진동수를 기초로 1초 단위를 정했습니다. 이렇게 불변의 자연법칙을 기초로 1초를 확정했으니 시간은 균질한 간격으로 그저 계속 흐를 뿐입니다.

이에 반해 ‘카이로스’는 사람이 주관적으로 느끼는 시간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지루하면 “왜 이렇게 시간이 안가?” 이렇게 말합니다. 흥미진진하면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어?” 이렇게 말합니다. 물리적 시간의 길이는 사실 같지만, 그 시간에 대한 속도감은 우리 마음 상태에 따라 달라집니다. 어디 속도감만 다르던가요? 시간의 질감, 곧 만족감도 다르지요. 찰나지만 의미로 충만하여 가슴 벅찬 시간이 있고, 벗어나고 싶은 긴긴 시간이 있습니다. 어떤 때는 지난 세월이 찰나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어떤 때는 순간 순간이 너무 또렸해 마치 시간이 정지된 첫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뭔가 새로운 기회로 인식되는 시간이 있고, 잘 견뎌야 하는 과정으로서의 시간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저 물리적으로 재깍 재깍 흘러가는 시간 따라 기계적으로 사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때로 시간을 거슬러 살기도 하고, 시간을 앞질러 살기도 합니다. 되돌릴 수 없는 과거에 매여 살기도 하고, 개연성 없는 미래로 도피해 살기도 합니다. 과거의 향수에 젖어 살기도 하고, 미래의 공상 속에 빠져 살기도 합니다. 물리적 시간의 노예로 살기도 하고, 그 시간을 초월해 살기도 합니다. 흘러간 시간들을 허탈해하고 아쉬워하며 살기도 하고, 지금 이 순간의 은총과 신비를 알아차리고 향유하고 감사하며 살기도 합니다.

이렇게 물리적 시간을 초월해 사는 게 우리 삶의 근본 속성이라라면, 어떻게 사는 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가장 값지게 영위하는 방법입니까? 기독교 신앙은 이 질문에 매우 확신있게 답합니다. 시간의 창조주이신 주님, 처음과 나중되시는 주님, 시간을 초월해 계신 주님,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꿰뚫어 아시는 주님, 그 주님께 깨어 있어야 합니다. 주님과 접촉하고 주님께 접속되는 순간이 그저 의미없이 흘러가기만 하는 물리적 시간을 돌파하는 순간입니다. 그간 흘러간 세월이 얼마인지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 세월의 의미를 온전히 밝혀주시는 주님께 지금 깨어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앞으로 남은 세월이 얼마인지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남은 세월의 사명을 바로 깨닫게 하시는 주님께 지금 깨어 있으냐가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주님께 깨어 있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주님의 임재하심을 알아차릴 수 있도록 내적으로 준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너희에게 언제 어떤 방식으로 올지 모르니 늘 깨어 있으라 말씀하신 것이 바로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이와 관련해 예수님은 몇 가지 비유의 말씀을 들려주셨는데, 요지는 주님의 임재하심을 알아차리고 경험하는 데는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선 마태복음 25장에 기록된 열 처녀의 비유를 잠시 살펴 볼까요? 열 명의 처녀가 신랑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신랑이 오면 즉시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었냐겠지요? 미련한 다섯 처녀는 등은 준비했지만 그 등에 불을 붙일 기름은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왜 일까요? 신랑을 맞이할 때 등불을 쓸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겠지요. 이것은 신랑은 틀림없이 속히 올 것이고, 그래서 낮에 올 것이라 판단했다는 의미입니다. 신랑이 더디 오고 밤에 올 수도 있다는 생각은 왜 못한 것일까요? 반면에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등과 기름 모두를 준비했습니다. 신랑을 맞이할 때 등불을 밝힐 일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이것은 신랑이 더디 오고 밤에 올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는 의미이겠지요.

여기서 낮과 밤의 상징적 의미를 조금 더 깊이 묵상해 볼까요? 낮에 우리의 주의의 초점은 주로 바깥을 향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 귀에 들리는 것들, 곧 오감을 자극하는 것들 말입니다. 낮 동안에 우리가 사는 세계는 주로 감각적으로 지각한 현실을 기초로 구성된 세계입니다. 주로 물질중심적으로 편향되어 있는 세계입니다. 그 세계에서 우리가 주로 추구하는 것은 즐거움, 편리함, 이익, 소유, 소비, 욕망충족, 성공, 자기만족 등 입니다.

물론, 낮 동안 우리가 주로 관심하는 이 감각편향적이고 물질편향적 세계에 주님이 임재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주님께서 우리가 기대하는 바와는 다른 방식으로 임재하실 수도 있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즐거움 속에서 주님의 임재하심을 기대하는데, 주님은 고난 중에 임재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을 겪고 있는 현재에 임재해 계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고난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랄 수 있습니다. 우리는 편리함 속에서 주님의 임재하심을 기대하는데, 주님은 불편한 일들로 불편한 상황 속에 임재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불편함을 겪고 있는 현재에 임재해 계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이 불편함에서 빨리 벗어나기만을 바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물질적 부유함 속에서 주님의 임재하심을 기대하는데, 주님은 가난 속에 임재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현재에 임재해 계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가난을 저주하거나 원망하면서 한탄하기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공 속에서 주님의 임재하심을 기대하는데, 주님은 실패와 좌절 속에 임재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실패하고 낙담하는 현재에 임재해 계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성공한 사람들을 시기하거나 절망만 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감각적으로 지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오실 때가 많습니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주님은 감각편향적이고 물질편향적인 세계 한복판에 살고 있는 우리의 심령 속에 임재하실 때가 많습니다. 주님의 임재하심은 바깥을 향해 빼앗겼던 주의를 내면으로 살짝 돌리는 순간에 경험할 때가 많습니다. 주의를 내적으로 전환하고 마음의 눈을 떠서 우리의 내면을 바라보아야 주님 오심을 맞이할 수 있는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내면은 어둡습니다. 환히 보이는 곳이 아닙니다. 더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곳을 살펴야 즐거움을 넘어 선함으로, 편리함을 넘어 덕스러움으로, 소유를 넘어 나눔으로, 욕망을 넘어 사랑으로, 자기만족을 넘어 하나님의 뜻으로 우리를 이끄시는 주님을 영접할 기회가 생깁니다. 감각편향적이고 물질편향적인 세상 한복판에서 하나님 나라를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끊임없이 불러내시고 설득하시는 주님을 온전히 맞아들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심령으로 임재하시는 주님을 반갑게 맞이하려면 우리의 어둔 내면을 밝힐 등과 기름이 필요합니다. 등불을 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내면을 밝힐 등불로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유용한 도구가 바로 기도와 말씀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주의를 감각편향적이고 물질편향적인 세계에서 내면의 세계로 이끌고 견인해 주는 도구입니다. 기도할 때는 주로 눈을 감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눈을 감으면 낮은 밤이 되고, 마음의 눈이 밤을 뚫고 보는 것 아닙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가장 값지게 쓰시려거든 기도가 그 시간들을 가로지르게 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 너머의 세계, 오직 마음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세계로 들어가는 관문을 찾고 항시 곁에 두고 살아야 합니다. 기도하는 마음가짐이 깨어 있는 마음가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홀로 기도하실 때 제자들은 모두 잠들어 있었습니다. 그때 주님 하신 말씀이 깨어 있으라는 말씀이셨지요? 기도가 깨어 있음입니다. 기도가 삶의 중심에 있어야 합니다. 끼니를 거르지 않아야 하루를 힘있게 살 수 있듯 기도를 거르지 않아야 하루를 값지게 살 수 있습니다.

기도가 내면 세계로의 주의 전환이자 관문이라고 한다면, 말씀은 내면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갖가지 요소들을 보다 선명하게 인식하게 하고, 그것에 적합한 이름을 붙이고, 적절하게 질서지우고 자리매김 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합니다. 말씀을 통해 보면 즐거움이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됩니다. 즐거움만 추구하다가 헤어나올 수 없는 괴로움을 겪을 수도 있음을 알게 됩니다. 즐거움이라고 해서 다 같은 즐거움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됩니다. 남을 짓밟아 얻는 즐거움과 남을 살려내어 얻는 즐거움이 어떻게 같을 수 있습니까? 말씀은 우리 내면의 갖가지 즐거움에 적절한 이름을 붙여주고, 그 속성에 따라 적합한 가치를 부여해 줍니다.

어디 즐거움 뿐입니까? 우리가 낮 동안 관심하는 이 세상에서 추구하는 편리함, 이익, 소유, 소비, 욕망충족, 자기만족 등 이 모든 것의 성격과 질을 가늠해주고 정돈해주며 다르게 대응하도록 돕는 것이 바로 말씀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주님의 임재하심에 깨어 있다는 건, 삶의 한복판에서도 내적으로 주의깊게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는 자세를 취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다시 볼까요? 잠언의 기자는 주님의 임재하심을 기다리는 일과 주님의 음성을 듣는 일을 동일시합니다. 주님은 무엇보다 지혜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우리 중심에 모신다는 것은 언제라도 주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주님께 귀를 열어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걸 그저 성경 말씀을 읽고 기억하는 정도로 인식해선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잠언 8장 2,3절을 주목해 볼까요? 잠언의 기자는 주님의 지혜의 말씀이 길 가의 높은 곳, 네 거리, 성문 곁, 문 어귀에서 우리를 부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길 가의 높은 곳에서 우리를 부른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우리가 어딘가를 향해 한참 길을 걷고 있을 때, 그때가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때이고, 그러므로 그때가 바로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어야 할 때란 말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자주 찾고, 자주 걷는 길은 어떤 길입니까? 그 길은 어디를 향해 있는 길입니까? 그 길 끝에서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주님은 그 길 위에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그 길 위에서 주님의 뜻을 묻고, 주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할 때, 그때 주님은 우리에게 임재하십니다. 그리고 길을 걷는 우리의 태도를 바꿔주시고 길을 걷는 우리의 목적을 바꿔주십니다.

네 거리에서 우리를 부른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네 거리는 교차로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삶에서 내리는 중요한 선택의 순간이 곧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때이고, 그러므로 그때가 바로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어야 할 때란 말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내려야하는 중요한 선택이라는 게 무엇입니까? 그 선택을 위해 우리가 참고하는 것들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취한 선택의 기준들은 무엇입니까? 주님은 우리의 그 선택의 순간에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선택을 묻고, 주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할 때, 그때 주님은 우리에게 임재하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주님의 방식과 주님의 기준을 따라 현명하게 선택하도록 우리를 도우십니다.

성문 곁, 문 어귀에서 우리를 부른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이 세상에는 모두가 입성하길 원하는 세상의 중심, 성공의 핵심, 유행의 한복판, 주류 문화와 사회가 있습니다. 그곳으로 향한 문 주변에는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들로 항시 북적입니다. 그곳은 그들이 맞부딪혀 서로 경쟁하며 엉겨 붙어 있는 현장입니다. 우리도 그곳 주변 어딘가에 처해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가 곧 주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때이고, 그러므로 그때가 바로 우리가 주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란 말 아니겠습니까? 욕망이 꿈틀대는 그때 우리가 주님을 기억하고 찾을 수만 있다면, 주님은 우리에게 임재하셔서 우리로 넓지만 사망으로 가는 문이 아니라 좁지만 생명으로 가는 문을 통과하게 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값지게 쓰려면, 우리 삶의 현장에서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 구체적 삶의 현장에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성경의 말씀은 성경책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구체적 삶의 자리에서 가슴을 때리고 마음을 일깨우는 은총으로 되살아나는 말씀입니다. 우리 삶에 깃든 의미를 성경으로 해석하고 우리 삶의 문제를 성경으로 풀어내는 과정에서 우리는 주님의 살아있는 말씀을 듣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없이 사는 삶의 한계, 하나님과 분리된 자아의 한계에서 깨어났으니 이제는 기도와 말씀으로 주님께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깨어 있는 마음이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입니다. 깨어 있는 마음이어야 주님과 함께 이룰 새 삶을 제대로 꿈꾸고 소망할 수 있습니다. 깨어 있는 마음이어야 주님과 함께 그 소망을 제대로 이루어낼 수 있습니다. 깨어났으니 깨어 있어야 합니다.

김현주 목사(한성교회)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김현주 목사(한성교회)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대학로 19 한국기독교회관 503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 홍인식  |  편집인 : 이정훈  |  청소년보호책임자 : 홍인식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23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