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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일에서 큰 일을 보다하나님 나라를 살다 6(마태복음 13:31-32)
김현주 목사(한성교회) | 승인 2023.11.07 02:20
▲ 우리 삶의 소소한 변화는 겨자씨의 자람일 수도 있다. ⓒGetty Images
31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32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주일예배에 참여하신 한성교회 모든 성도 여러분을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나 자신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한없는 은혜와 평강을 가득 부어주시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살다’ 라는 주제로 말씀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여섯 번째 시간으로 ‘작은 일에서 큰 일을 보다’ 이런 제목으로 은혜 나누겠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온전한 사람됨에 있음을 우리에게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랑의 법을 지키는 데 있음을 일깨워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고 살도록 죄, 곧 영적 기능 장애를 치유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세상 한복판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며 살도록 우리를 당신의 제자로 부르시고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아무리 큰 죄가 우리의 안팎을 에워싸고 있고 그것이 우리가 지향하는 하나님 나라의 삶을 위협하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살도록 보냄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리가 득실되는 곳에 순한 양으로 보내진 우리에게 뱀같이 지혜롭게 하나님을 향한 영적 감각을 곧추세우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안의 죄와 우리 밖의 죄를 경계하면서 동시에 우리 안에 내주하셔서 우리를 죄로부터 자유케하시는 하나님의 내주하심의 은총을 바라보고 기다리고 의지하라 하셨습니다. 우리의 편협한 판단과 선입견을 거두고 비둘기같이 순결하게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의 시선으로 우리 안팎의 죄를 다시 보고 그 죄로부터 자유로워지라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 한복판에서 하나님 나라를 살도록 보냄받았지만, 하나님 나라는 분명히 이 세상과 구별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실상과 그 나라의 삶의 방식은 이 세상의 것과 엄연히 다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이 세상 너머의 것을 볼 수 있어야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삶이 가능해집니다. 이 세상을 살되 이 세상을 초월하는 삶의 방식을 터득하고 훈련해야 비로소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삶이 가능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은 마태복음 13장에서 하나님 나라 비유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하나님 나라 비유 이야기는 우리가 이 세상의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하나님 나라의 실상에 눈을 뜰 것을 촉구하고, 이 세상의 삶의 방식보다 더 절실한 그 나라의 삶의 방식에 기꺼이 참여할 것을 촉구합니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비유법은 이미 알고 있는 친숙한 것들을 빗대어 그걸 넘어서는 의미와 가치를 내포하고 있는 낯설고 초월적인 것들을 표현하는 문학적 표현 양식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친숙한 삶의 영역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소재들을 비유적으로 사용하시어 하나님 나라의 실상과 그 나라의 삶의 방식을 설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나님 나라를 비유로 설명하신 이유 그 자체가 하나의 메시지입니다.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이미 알고 있다 생각하는 그것들을 다시 보고, 다르게 보고, 새롭게 보고, 주의 깊게 보면 하나님 나라의 실상이 보인다는 메시지입니다. 노아 벤샤는 “빵장수 야곱”에서 기적은 일상적인 것을 비범하게 바라보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신비는 일상적인 것이 비범하게 보이는 순간에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과학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라 시인의 마음과 감수성으로 인식하고 단순히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직관해야 하는 세계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의 내적 시선이 익숙함에서 놀라움으로, 친숙함에서 경이로움으로 전환되는 데 있습니다. 놀라움과 경이로움에 사로잡혔던 때를 떠올려 볼까요? 예를 들면, 노을의 찬란함에 매료되었던 때, 광활하고 웅장한 산세에 압도되었던 때, 그리웠던 사람을 예기치 않게 만나게 되었던 때를 떠올려 보십시오. 그때 노을은 그저 노을이 아니라 형용할 수 없는 신비가 됩니다. 산은 그저 산이 아니라 지각을 넘어 전율이 됩니다. 사람과의 만남은 그저 우연이 아니라 기적이 됩니다. 이런 경험은 우리의 삶이 눈에 보이는 세계 이상의 것, 익숙하고 평이하고 반복적인 일상 이상의 것임을 환기시켜줍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일상을 사는 우리를 이런 놀라움과 경이로움의 세계, 곧 하나님 나라로 초대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이렇게 비유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심은 겨자씨 한 알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형이상학적 개념이나 천상의 언어로 기술하지 않으셨습니다. 누구나 다 알아들을 수 있는 일상의 언어로 표현하셨습니다. 예수님에게 하나님 나라는 지금 여기, 우리 사는 세상, 우리의 일상에 가까이 있으니까요. 당시나 지금이나 밭에 씨를 뿌리는 풍경은 친숙하고 익숙한 풍경입니다. 대수로울 것 하나 없는 일입니다. 밭도, 겨자씨도 낯설지 않은 소재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놀라게 하고 의아하게 만드는 특이점이 한 가지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비유에는 기이한 장면 하나가 의도적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자기 밭에 겨자씨를 심는 행위는 매우 어색하고 낯선 행동입니다. 겨자씨는 야생식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야생식물을 밭에 함부로 심었다가는 괜히 다른 작물이 자라는 데 피해만 입힐 수 있다는 건 당시에는 일반적 상식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 비유 이야기를 듣는 순간 사람들은 크게 두 가지 반응을 보였을 것입니다. “이 사람 제정신인가? 농사에 대해 뭘 안다고 이렇게 무식한 소리를 늘어놓고 있는 거야?” 틀림없이 이렇게 반응하는 사람들이 있었겠지요. 하지만 다른 반응을 보인 이들도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의 인격과 가르침의 비범함에 감탄하고 그분을 신뢰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런 일이 가능한가? 그동안 내가 뭘 잘못 알고 있었나? 예수님이 뭘 모르고 하신 소리는 아닐텐데, 내가 놓치고 있었던 특별한 진실이 있나? 진정 무슨 의미일까?” 예수님의 이 비유는 한마디로 우리의 익숙한 생각에 균열을 일으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기계적이고 반사적인 인식과 생각을 멈추고 다르게 보고 다르게 생각해 볼 것을 촉구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시각과 판단을 보류하고 다른 관점을 취해볼 것을 촉구하십니다.

우리의 판단, 인식, 생각에는 얼마나 많은 오류와 편향이 있습니까? 우리 솔직히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믿고 싶은 대로 믿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 확대 또는 축소 의미 해석의 오류, 흑백논리적 사고, 이분법적 사고, 확증 편향, 선호 평향 등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오류와 편향들이 우리 안에서 작동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진짜 문제는 이렇게 자기 인식과 판단에 오류도 많고 매우 편향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는 전혀 자각하지 못할 때가 많다는 데 있습니다. 이런 상태를 우리는 편향 맹점 상태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겨자씨를 자기 밭에 심는 이 낯설고 이질적인 이야기를 통해 우리의 인지 오류와 편향을 직시하도록 이끄십니다.

사실 하나님 나라에서는 겨자씨를 자기 밭에 심는 일보다 더 기이하고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겨자씨를 하나님 나라의 진리에 대한 믿음으로 가정해 볼까요? 곰곰히 생각해보면, 밭에 겨자씨를 심는 행위보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의 진리가, 그 진리를 믿고 이행하는 행위가 훨씬 더 이질적이고 충격적입니다. 예수님은 가난을 저주로 확신하고 낙담해 있던 사람들에게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다고 가르치십니다. 의를 위해 박해받는 이에게 복이 있다 하십니다.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있다 선포하십니다. 형제자매를 조롱하고 모독하는 게 곧 살인이라고 가르치십니다. 오른뺨을 때리는 이에게 왼뺨도 돌려대라 하십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하십니다.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하십니다. 내일 일 염려하지 말고 의식주 걱정보다 하나님 나라를 먼저 구하라 하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하십니다. 죄인은 정죄의 대상이 아니라 치유의 대상이라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들 속에는 우리 현실에는 전혀 들어맞지 않을 것 같은 이질적인 가르침들, 비현실적인 가르침들이 숱하게 많습니다. 예수님의 이 가르침들, 우리 현실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믿으십니까? 정말 곧이곧대로 지킬 자신 있으십니까? 솔직히 비현실적으로 들리지 않으십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우리가 보는 현실이 정말 실상이냐고 물으십니다. 우리가 보는 현실이 가짜이고 당신이 보는 현실이 진짜라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인식한 세계가 가짜이고 당신이 인식한 세계가 진짜라 말씀하십니다.

정직하게 성찰해보면, 우리는 그저 무신론적이고 신체감각적이고 물질편향적이고 욕망주도적인 세상만 볼 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다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보되 창조주 하나님께서 지금도 여전히 쉬임없이 또한 빈틈없이 정의와 공의와 사랑으로 통치하시는 세상을 보고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이게 말이 돼?’ 하는 우리에게 ‘그게 진짜야’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어떻게 지키고 살아’ 하는 우리에게 ‘그 말씀이 너희를 지키고 그 말씀이 너희를 하나님 나라로 이끄는 거야’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우리 눈에 비현실적인만 것 같이 보이는 주님의 말씀에 대해서, 주님의 그 현실감각 없어 보이는 행보에 대해서 놀라움과 경이로움으로 반응하는 작은 믿음이 곧 겨자씨만한 믿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겨자씨는 그 크기가 매우 작습니다. 하지만 작고 큰 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크고 작음은 우리의 관심사지 겨자씨의 관심사도 아니고 겨자씨를 비유로 말씀하신 예수님의 관심사도 아닙니다. 작고 큰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작든 크든 그것이 자란다는 게 중요합니다. 작든 크든 그것을 자라게 하는 힘이 그 안에 내재해 있다는 게 중요합니다. 하나님 나라 진리의 말씀에 관한 우리의 믿음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때 믿음의 크기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 믿음이 가리키는 대상, 곧 그 믿음이 지향하는 대상이신 하나님, 그 하나님의 신비스럽고 자애롭고 위대한 통치 그 자체가 중요합니다. 그 믿음을 통해 우리를 다스리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통치가 중요합니다.

믿음은 결코 그 크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구를 대상으로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무엇을 겨냥한 것이냐가 중요합니다. 이 세상에서 나도 모르게 받아들인 헛된 믿음, 세속적 가치와 물질적 부에 편중되어 있는 그 믿음이 아무리 크다 한들 과연 그 믿음이 우리를 구원해 줍니까? 과연 그 믿음이 우리를 자유케 하고 우리를 온전케 해줍니까? 오히려 그게 우리를 더 큰 괴로움과 결핍 속으로 밀어넣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로 향한 믿음은 그 크기가 아무리 작다 하더라도, 그 믿음이 하나님을 향해 있고, 하나님께 닿아 있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의 통로가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은 겨자씨 한 알을 자기 밭에 심으면 그것이 후에는 풀보다 커지고 나무가 되어 공중에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일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도 놀라운 인식의 전환을 의도합니다. 겨자씨는 실제로는 다 자라더라도 1미터 남짓의 풀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겨자풀을 레바논의 백향목과 같이 크고 웅장한 나무에 비유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또 시각을 달리하고 생각을 바꾸라 촉구하십니다. 예수님은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너희는 겨자씨에서 겨우 겨자풀을 보겠지만, 나는 겨자씨에서 레바논의 백향목과 같은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와 섭리를 본다.”

우리는 과연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우리 삶에 나타난 변화에 대한 민감한 인식이 있습니까? 그 변화가 비록 작더라도 그 작은 변화가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크고 놀라운 은혜라는 확신이 있습니까? 우리가 믿음으로 행한 그 작은 행위가 낳은 결실이 비록 작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크신 역사의 일부라는 인식과 확신이 있습니까? 혹시 우리에게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이 그저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무의미하게만 보이고, 무료하게만 느껴지십니까? 그 모든 게 그저 우연에 지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겨자씨 비유를 통해서 분명히 확고하게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크고 작음과 상관없이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우리가 행하는 모든 행위는 하나님의 행하심의 통로가 되며, 그 결과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일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 나라 진리에 대한 믿음에 기초해 우리의 내면의 인식의 오류를 수정하고 생각의 방향을 바꾸며 행동을 달리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겨자씨 비유에 연이어 주신 누룩 비유를 보십시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는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다고 비유하십니다. 이 비유 역시 한편으로는 친숙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낯섭니다. 여자가 누룩을 넣어 빵을 굽는 행위는 늘상 보는 풍경입니다. 대수로울 것 하나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 장면을 하나님 나라와 연결시키는 순간 이 장면은 매우 낯설고 심지어는 불쾌하게 보입니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 나라 비유에 여자를 끼워 넣는 게 못마땅을 했을 게 분명합니다. 그건 눈살을 찌뿌릴 일이었을 것입니다. 여자는 남자에 비해 열등한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었으니까요. 하나님 나라를 여자에 비유하신 것도 충격인데, 그 여자가 밀가루 서 말로 빵을 만드는 행위도 충격입니다. 이 정도의 밀가루 양이면 족히 100인분의 빵을 만들 수 있다는 말인데, 그건 곧 여자가 잔치를 베풀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왜 하필 여자가 잔치를 베푸는 이야기로 설명하시는지 의아했을 것입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특히 유대인들에게 누룩은 부정함의 상징입니다. 그들은 주요 절기에 반드시 누룩을 넣지 않을 빵, 곧 무교병을 먹습니다. 그러므로 누룩을 넣은 빵으로 하나님 나라를 비유하시는 예수님의 의도가 미심쩍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누룩 비유를 통해 너희 생각의 방향을 바꾸라 말씀하십니다. 진짜 충격적인 것은 따로 있다 말씀하십니다. 우리 내면의 편협한 생각과 무자비한 판단이 더 충격적인 것 아니냐고 문제제기 하십니다. 밀가루가 거짓에 기초한 파편적이고 파괴적인 생각들과 탐욕스럽고 무질서한 우리 내면의 충동들을 상징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누룩의 비유를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비록 당장은 너희 눈에 충격적이고 비현실적인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누룩과 같이 밀가루의 형질을 바꿔버리는 이 진리의 말씀이 너희 속에 있어야 한다. 그래야 너희가 자아내는 행위가, 너희가 빚어내는 삶이 하나님 나라의 잔치와 같을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중요한 것은 우리 삶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가 있느냐입니다. 우리의 행위 속에 하나님 나라 진리에 대한 확신이 담겨 있느냐입니다. 그 신뢰와 확신이 비록 작더라도 그 말씀을 우리에게 부여하신 하나님은 위대하십니다. 그게 비록 우리 눈에 별 일 아닌 것처럼 보이더라도 그 일을 통해 역사하실 하나님은 크고 놀랍고 은혜로우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인식을 바꾸고 생각을 바꾸고 행동을 바꾸는 일을 당장 시작하는 게 중요합니다.

그 규모와 노력의 크기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가 실제로 담여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기억하고 바라고 기다리는 과정에서 출현하는 생각 한 가지, 말 한 문장, 행동 하나가 하나님이 우리를 다스리는 매개체입니다. 그 한 생각, 그 한 말, 그 한 행동이 초래한 결실이 곧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나라 가치에 부합된다고 확신하는 생각과 말과 행동을 이행할 때에는 크든 작든 상관없이 진심과 전심을 다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행위가 초래하는 결실에 대해서는 충분히 알아차리고 향유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 나라가 우리의 현실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3장 44절에서 들려주신 밭에 감추인 보화 비유를 보십시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마치 어떤 사람이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는 행위로 비유하셨습니다. 그게 작든 크든 상관없이 하나님 나라에 부합된 행위, 하나님 나라 진리에 대한 믿음에 기초한 행위를 최상의 가치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전념할 수 있어야 하나님 나라가 성취되고 경험된다는 의미 아니겠습니까?

하나님 나라에 관한 한 생각, 한 마디 말, 한 행동만으로도 우리에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이미 우리 곁에 가까이 계시는데, 정작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의 마음을 빼앗고 있는 것들, 우리의 시간과 에너지를 빼앗고 있는 것들, 그것들은 과연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입니까? 과연 우리가 전심 전력할 만한 것들입니까? 그것들이 과연 우리를 어떤 존재가 되게 합니까? 우리를 어떤 삶으로 인도합니까? 우리는 무엇 때문에, 무슨 이유로 그것들에 그런 가치를 부여하게 되었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비유를 들으면서 밭에 감추인 보화가 도대체 뭐 그리 대단한 것이길래 자기 전 재산을 처분해서 그 밭을 산다는 말인가?’ 의문을 갖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밭에 감추인 보화 비유를 통해 오히려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아닐까요? “너희는 도대체 무엇에 그렇게 목을 매어 살길래 몸을 망가뜨리면서까지 정신없이 영혼은 무시한채 그렇게 바쁘게 사느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나라는 우리 가까이에 있습니다. 우리 일상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나라가 가상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 우리의 실제가 되려면 우리의 시선이 아니라 예수님의 시선을 따라가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에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예수님이 가리키는 하나님의 은혜롭고 자비로우신 통치를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신뢰하고 그 신뢰를 기초로 선택한 우리의 작은 행위가 초래한 결실이 하나님의 은총의 결과임을 확신해야 합니다. 우리의 작은 실천에서 하나님의 크신 임재와 역사하심을 기다리고 기대해야 합니다.

김현주 목사(한성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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