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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파도를 타다하나님 나라를 살다 7(마태복음 14:26-27)
김현주 목사(한성교회) | 승인 2023.11.14 03:37
▲ 「In the story told in the Gospels, Jesus walks on the Sea of Galilee near Bethsaida」 ⓒClub/Getty Images
26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27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주일예배에 참여하신 한성교회 모든 성도 여러분을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나 자신보다 나에게 더 가까이 계신 우리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사랑과 평화를 가득 부어주시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살다’ 라는 주제로 말씀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마지막 시간으로 ‘고난의 파도를 타다’ 라는 제목으로 은혜 나누겠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실상과 그 나라의 삶의 방식을 비유로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일상을 배경으로 누구에게나 친숙한 소재들을 사용해 우리에게 놀랍고 경이로운 세계를 보이셨고 그 세계로 우리를 초대하셨습니다. 우리가 인식과 판단과 생각의 오류와 편향을 알아차리고 보류함으로 현실을 다시 보고, 행동을 달리하면 하나님 나라가 우리 가까이에 있음을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비유 이야기를 다룬 마태복음 13장에 이어 14장에서는 헤롯 왕의 생일잔치와 오병이어잔치가 대비되어 묘사되고 있습니다. 왕궁에서 열린 헤롯 왕의 생일잔치에는 산해진미, 귀족들의 화려한 옷차람, 웅장한 연주, 현란한 춤, 귀를 사로잡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잔치는 근본적으로 세례요한을 잔혹하게 살해한 죽음의 향연이었습니다. 반면에 빈들에서 열린 오병이어잔치는 텅 빈 공간을 그저 이름 없는 사람들, 병든 사람들, 배고픈 사람들이 채우고 있었고 그들이 가진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이 잔치는 궁극적으로 말씀과 감사와 나눔의 축제이자 생명의 향연이었습니다.

오병이어잔치를 통해 하나님 나라는 이렇게 왕궁이 아니라 빈들에 있음이 드러났습니다. 그 나라는 산해진미가 아니라 감사와 나눔에, 화려한 쇼가 아니라 말씀에, 교만한 자가 아니라 겸손한 자에게 있음이 드러났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하나님 나라의 이 실상을 보고 그 의미를 깨달은 것은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오병이어잔치에서 그저 기적, 곧 초자연적 현상만 취하고 그 기적에 자신의 욕망만 투사할 뿐, 그 기적의 상징적 의미를 제대로 성찰하지 않는다면 오병이어잔치에서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습니다. 그 나라를 부분적으로 맛볼 순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심층적 의미에 닿지 못한다면 하나님 나라를 자신의 일상에서 의도할 수도 없고, 다시 재현할 수도 없습니다.

마태복음 14장 22-33절, 물 위로 걸으신 예수님 이야기는 오병이어잔치의 맥락 속에서 보아야 합니다. 오병이어의 생명잔치 직후 예수님은 급하게 제자들을 갈리리 바다 건너편으로 보내셨습니다. 무리를 보내신 후에는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 혼자 계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제자들과 무리들의 시선과 그 태도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의 시선은 온통 예수님을 통해 나타난 기적을 향해 있었습니다. 당연한 일이었지요. 그러나 문제는 그 시선에 투영돼 있던 그들의 욕망이었습니다. 이 욕망 때문에 엄밀히 말하자면, 그들은 예수님을 주목해 본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서 나타난 기적을 볼 뿐이었습니다.

“이제 저분과 함께 라면 우리의 가난은 기적적인 방식으로 단번에 종식될 것 아닌가? 우리의 고생과 아픔도 이렇게 기적적인 방식으로 완전히 끝날 것 아닌가? 저분이라면 내 문제를 얼마든지 기적적으로 일소에 해결해 주실 수 있지 않을까?” 예수님의 기적을 향한 그들의 시선에는 이런 기대와 바람이 투영되어 있었을 것이 불보듯 뻔합니다. 예수님은 기적, 초자연적 현상, 마법적 소원성취을 향해 있던 그 시선을 돌려놓기 원하셨습니다. 그 시선이 멈추길 원하셨습니다. 그 시선으로부터 당신 자신을 떼어놓길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과 잠깐 분리되어 있기를 선택하셨던 것입니다.

욕망이 주도하는 그들의 시선과 달리 오병이어잔치에서 예수님의 시선은 어디를 향해 있었을까요? 예수님의 시선에는 무엇이 담겨 있었을까요? 예수님의 사역 전체를 살펴보십시오. 그분의 시선은 항상 하나님의 사랑의 통치를 향해 있었음에 틀림 없습니다. 그분의 시선은 늘상 하나님의 시선이 머무는 곳을 향해 있었습니다. 그분은 언제 어디서든 구원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 회복과 치유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향해 눈을 떴습니다. 예수님의 시선에는 열망이 담겨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람에게서 당신의 일을 행하시는지, 그 사람에게서 어떤 반응과 행동을 기대하시는지를 알아차리고 순응하고자하는 열망 말입니다. 동시에 그분의 시선에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담겨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시선은 당신 자신을 향해 있지 않았습니다. 오병이어 기적을 맛본 제자들과 무리들은 예수님을 마블의 액션 히어로처럼 바라보았습니다. 예수님은 그 시선에 도취해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다 하나님을 향한 시선을 잊거나 놓치는 법이 없으셨습니다. 그분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이미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사단의 시험을 말씀으로 극복하실 때 확인되었습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면 천사가 와서 받아줄 것이란 사단의 유혹에 예수님은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는 말씀으로 대항하셨습니다.

이 유혹의 핵심은 그 중심의 시선을 어디에 둘 것인지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사단은 예수님의 시선이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향하도록 그 방향을 틀어놓을 공산이었습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도 하나님께서 안전하게 받아주실 만큼 나는 정말 특별한 사람이야’ 이렇게 도취된 자기 자신에게로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럴 마음이 없으셨습니다. 그분은 오직 하나님께만 그 시선을 두고 계셨으니까요. 모든 순간, 하나님께 고정된 시선, 어떻게 가능합니까? 그 비결이 오늘 이야기 속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오르셨고, 저물매 거기 혼자 계셨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키워드가 기도와 산, 어둠, 그리고 홀로 있음입니다. 예수님에게 기도는 산에 오르시는 일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산에 오르는 일는 영혼의 상승, 의식의 고양, 영적 성장과 성숙을 상징합니다. 동시에 계시의 말씀, 진리의 말씀에 대한 수용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다양한 유형의 기도가 있지만, 특별히 산을 오르는 행위로 묘사되는 기도는 지향하는 바가 따로 있습니다. 일명 이 산 기도는 세속의 일들과 복잡하게 얽힌 갖가지 상념들에 더 이상 얽매이지 않고 그것들을 그냥 흘려보내는 내적 행위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 상념들로 인해 발생하는 변화무쌍하고 격정적인 감정들에 얽매이지 않고 그것들을 그냥 놓아버리는 내적 행위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가파른 산을 올라본 경험이 있는 분들은 잘 아실 것입니다. 산을 오르다보면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그저 호흡과 한발한발 그 발딪음에만 주의를 집중하게 되면서 머릿속이 비워지고 마음이 평정해지는 경험을 하게 되셨을 것입니다.

기도는 본질적으로 세속을 향한 욕망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갈망에 포커스를 맞추는 내적 행위입니다. 우리 영혼의 활동, 영적 기능이 더욱 돋아나게 하는 행위입니다. 기도의 궁극적인 목표는 욕망충족이나 소원성취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산으로 상징되는 하나님의 현존을 보다 직접적으로 직관하고 경험하는 데 있습니다. 그 하나님과 하나되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된다는 것은 우리가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지 않고 분리될 수도 없음을 직관하는 일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동시에 하나님과 마음과 뜻을 같이하는 일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에게 기도는 마치 어둠속에 머무르는 일과도 같습니다. 여기에서 어둠은 감각의 어둠을 상징합니다. 곧 세속적 욕망의 대상을 더 이상 감각할 수 없는 상태를 상징합니다. 기도할 때 우리는 보통 눈을 감습니다. 왜입니까? 본질적으로 바깥을 향해 있는 시각을 거두고 안을 향해 눈을 뜨기 위해서입니다. 기도는 이렇게 우리 육신의 감각은 어둡게 하고 하나님을 향해서는 불을 밝히는 일입니다. 그래야만 하나님께만 온전히 시선을 둘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게 기도는 홀로 있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에 관해 가르치실 때, 은밀한 중에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하셨습니다. 기도가 본질적으로 홀로 있어 하나님과 함께 있음을 아는 것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무도 보는 사람 없을 때, 우리는 본래 모습 그대로의 우리 자신이 되지 않습니까? 아무도 보는 이 없을 때, 우리의 모든 외투와 가면과 가식이 벗겨지지 않습니까? 아무도 보는 이 없는 순간에야 우리가 날 것 그대로 하나님과 대면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야 하나님과 온전히 만날 수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사람들과 함께 있던 만큼, 홀로 있기를 원하셨습니다. 당신을 향한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님의 시선을 가리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느라 하나님의 시선을 잊는 법이 없으셨습니다. 홀로 있기는 사람들의 시선에 투사된 이미지로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으로 있기를 의미합니다. 동시에 지금 여기 하나님과 함께 있음에 더 온전히 머물러 있기를 의미합니다. 본문은 예수님이 기도하시려고 산에 올라 홀로 계셨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런 방식의 홀로 있기가 바로 예수님의 영적 힘의 원천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홀로 있음으로 하나님 나라 운동과 사역을 추진하는 데 필요한 힘을 하나님에게서 직접 공급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홀로 있기를 자처하는 동안 제자들이 탄 배는 육지에서 멀리 떨어져 풍랑에 뒤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바람이 배가 이동하려는 방향을 거슬러 불어왔기 때문입니다. 순풍이 아니라 역풍이 찾아왔던 것입니다. 그때 갑작스럽게 예수님과 분리된 채로 이 상황을 맞이해야 했던 제자들은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풍랑으로 흔들리는 배는 그들 내면의 모습 그대로를 반영하고 있는 듯 합니다. 곧 그들 내면의 갈등과 혼란, 불안과 두려움을 반영하고 있는 듯 합니다. 예수님이 곁에 안 계시다 생각하니 그 내적 동요가 더 커졌을 것입니다. 역풍과 부재감이 만나면, 고난과 고립감이 만나면 우리도 이렇게 제자들처럼 흔들리고 동요하는 법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방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내적으로 동요하는 제자들 곁으로 돌아오셨습니다. 그것도 매우 극적인 방식으로 말입니다. 예수님은 바다 위를 걸어오셨습니다. 바다 위를 걸으셨다는 것은 그저 초자연적 능력을 보이시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바다 위를 걷는 행위는 바다의 풍랑에 휩쓸리지도 동요되지도 않는 내적 상태를 상징합니다. 서퍼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거대한 파도에 무질서하게 휩쓸려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능숙한 솜씨로 파도 위 물살을 가로지르며 서핑을 즐기는 그들의 모습 말입니다. 예수님이 풍랑 이는 바다 위를 걸으셨다는 것은 마치 파도를 타는 서퍼와 같이 내적 풍랑을 능숙하게 가로질러 흔들림없이 견고하게 사명의 길을 걸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실제 파도 타기에선 무엇보다 몸의 균형감각이 중요하겠지만, 내면의 파도 타기에선 내적 안정감과 고요함이 중요합니다. 제자들의 내면은 바다의 풍랑 때문에 흔들렸고 또 혼란스러웠지만, 예수님의 내면은 마치 바닷속 깊은 곳에 아주 커다란 닻을 하나 내린 듯 고요하셨습니다. 바다의 표면은 거칠게 출렁일지라도 바다 깊은 곳은 고요하지 않습니까? 고난의 바람은 거셀지라도 그 고난을 맞이하는 사람의 내면 깊은 곳은 고요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러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비결이 예수님의 기도에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예수님은 내면 깊은 곳에서 하나님과의 일체감으로 고요하고 평안하셨습니다.

풍랑 이는 바다를 서핑하듯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제자들은 처음에 유령으로 착각했습니다. 불안정하고 불안한 마음에 압도되어 있으니 그 인식과 판단이 굴절될 수 밖에 없었을 테지요.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제대로 알아보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들이 본 유령은 사실 자기 내면의 투사물이자 환영이었습니다. 제 마음을 예수님께 덧씌워 본 것이지 실재가 아니었습니다. 유령을 본 사람은 실은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잡힌 자기 마음을 본 것입니다. 고난에 붙들리고 절망에 사로잡힌 자기 마음을 본 것입니다.

불안정하고 불안한 제 마음을 덮어 씌워 보았기에 예수님을 유령으로 착각한 제자들을 향해 예수님은 말씀셨습니다. “안심하여라. 나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눈 앞의 허상에 붙들려 있던 그들의 주의와 관심을 당신의 음성으로 돌려 놓으셨습니다. 눈 앞이 캄캄하다 느끼면 주의 말씀을 듣는 일에 집중하는 게 중요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자기 목소리로 자기 귀에 들려주어 그 말씀이 가슴 깊은 곳에 파고 들게 하는 게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는 그들의 정서를 공감적으로 반영하고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내면의 불안정과 불안이 조금 가시고나자 제자들은 비로소 예수님을 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베드로는 그때, 예수님에게 대범하게 요청했습니다. “주님, 주님이시면, 나더러 물 위로 걸어서, 주님께로 오라고 명령하십시오.” 불안정한 마음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워지자 베드로는 예수님처럼 풍랑 이는 바다를 걷고 싶은 갈망이 일었던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고요하고 평정한 예수님의 그 영적 세계로 더 깊이 발을 들여놓기 원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다리셨다는 듯이 베드로에게 “오너라” 명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물 위로 걸어 예수님께로 나아갔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위안 삼아 부분적으로나마 내적 평화와 고요를 경험하였기에 이제는 바닷속 깊은 곳의 고요함과 같이 평정하신 예수님의 그 내면 세계를 향해 그 걸음을 떼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순식간에 불어닥친 거센 바람을 잠깐 의식하는 바람에 그만 겁을 집어 먹고, 물에 빠져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다시 예수님을 의지하여 살려달라 청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붙잡아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적은 사람아, 왜 의심하였느냐?” 무엇을 의미합니까? 베드로의 의심은 어디에서 기원하는 것입니까? 베드로는 왜 예수님과 같은 파도 타기가 불가능했던 것일까요? 베드로에게는 아직 내적 고요함과 평정함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본질적으로 그에게는 아직 모든 순간 함께 계시는 예수님과의 일체감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분과의 일체감이 없었기 때문에, 그분에게서 잠시만 눈을 돌려도 그 관계가 금새 끊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홀로 있는 동안 하나님과 함께 있음을 아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과의 일체감 때문에 역설적으로 하나님을 찾지 않으셨습니다. 찾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저 순간 순간 하나님의 현존과 활동을 알아차리셨을 뿐입니다. 바다 위에 아무리 거센 풍랑이 일어도 바닷 속 깊은 곳은 고요한 것처럼, 때로 의식의 표면이 아무리 격동적이라도 그분의 의식 깊은 곳은 언제나 하나님과의 일체감으로 고요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예수님처럼 홀로 있음으로 하나님과 함께 있음을 깨달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과의 일체감을 지향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과의 일체감이 내적 고요함과 평정함의 근원입니다. 예수님처럼 고난의 풍랑이 거세게 몰아치는 순간에도 그것에 휩쓸려가지 않고 그 고난의 파도를 탈 수 있으려면 내적 고요함과 평정함이 우리 중심에 자리잡고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사는 이 세상에는 분명 환난과 풍파가 많습니다. 환난 풍파 많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려면 우리에게도 예수님의 파도 타기 능력이 필요합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능숙한 서퍼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예수님이 드리셨던 영혼의 상승을 위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우리도 세속적 욕망의 대상에는 눈을 감고 내면을 향해 눈을 뜨는 감각의 어둠을 지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나님 앞에 날 것 그대로, 배경과 이미지라는 외피를 벗어던진 있는 그대로의 나로 홀로 있어야 합니다. 홀로 있음이 곧 하나님과 함께 있음임을 체감하고 실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이 영적 훈련을 반복함으로써 하나님과의 일체감이 깊어지고 하나님께 깊게 뿌리를 내려 내적 고요함과 평정함을 지속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김현주 목사(한성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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