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구두의 추억 - 에큐메니안

빨간색에 대한 공포가 어처구니없는 사건들을 뒤덮으며, 근 며칠간 무수한 이야기들이 사람들을 불안하게 했었다. 허구이건 실제상황으로부터 나왔건 이야기가 지닌 힘은 지대하다. 사람을 움직이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사람들의 가슴에 울림을 준다. 이야기는 다른 삶을 기대하는 사람들에게 현실을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준다. 반면,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박탈감을 주기도 하고, 사람들을 위협하기도 한다. 이야기는 그 사람이 속한 사회나 종교공동체가 규정한 틀 속에 안주하기를 강요한다. 틀로부터 벗어나려는 이들을 가혹하게 응징하면서 말이다.

맨발로 혹독한 추위를 이겨내야 했던 카렌의 신분에 빨간 구두는 결코 신어서는 안되는 신발이었다. “부엌데기 카렌 따위가 가져서는 안되는”(이관표의 앞의 글, <빨강으로부터 나온 사생아, 종교적 근본주의>) 그것을 탐한 카렌의 잘려진 발목은 이야기를 넘어 사람들에게 공포를 조장하고, 그들의 행동을 통제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필자에게 흥미로웠던 것은 빨간 구두를 탐한 주인공이 여성이라는 점이었다.

‘빨간 구두’는 전통적으로 교황들의 전용신발이었다. 로마시대부터 빨간 구두는 교황을 포함하여 특정 소수만이 신을 수 있는 특정인을 위한 신발이었다고 한다. 교황만이 신을 수 있는 빨간 구두를 신고 견진성사를 받으러 교회에 들어가는 가난한 소녀 카렌. 전혀 위협적이지 않던 한 여자아이가 교회의 권위와 질서를 뒤흔드는 위협적인 인물이 된다. 빨간 구두가 문제가 아니라, 특정인만을 위한 신발을 평민이자 여자인 카렌이 신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카렌의 빨간 구두 이야기를 다시 읽으며, 작년 8월 우리나라를 방문한 프란체스코 교황이 문득 떠올랐다. 프란체스코 교황의 남다른 행보와 함께 그가 세간에 주목을 받았던 것은 전통적으로 교황의 권위를 상징할 수도 있는 교황이 신고 입어야 할 옷과 신발을 신지 않았다는 것이다. 프란체스코 교황은 빨간 구두 대신 검은 구두를 신고 다녔다. 우리나라를 방문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빨간 구두의 카렌과 프란체스코 교황을 생각하며, 여성안수 거부 문제를 비롯하여 안수를 받은 여성을 비하하는 교회 지도자들의 발언들이 떠올라 씁쓸하기만 하다. 지난 5월에도 모대학교에서 여성 목사를 불독으로 비유하여 논란이 불거지기도 했다. 막말파문을 단순히 막말을 하는 교회 지도자 개인의 자질문제로 치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여성에 대한 편견들이 여전히 교회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는 한국 교회의 수준을 그대로 보여주기도 한다.

특히 성서 문자주의를 고수하는 기독교 근본주의적 전통은 아직도 여성을 열등하고 불완전한 존재로 규정한다. 전통적으로 여성을 죄악과 연결시키는데 기여했던 선악과를 따먹은 하와의 이야기는 여전히 이야기의 차원이 간과된 채 실제 일어났던 사건으로 받아들여진다. 게다가 남편에 의해 몸이 열 두 조각이 난 채 버려진 여성의 이야기(사사기 19장)를 비롯한 성서의 수많은 폭력 이야기들도 이야기의 차원을 넘어 폭력을 옹호하는 현실에 적용되기도 한다. 그것이 언어적이건, 심리적 혹은 물리적 폭력이건 모든 폭력이 하나님 말씀의 권위로 정당화된다. 목회자 가정에서 벌어지는 가정폭력이나 여성목사를 비하하는 언어폭력, 이 모두 자신의 신분을 망각하고 빨간 구두를 신었다가 발목이 잘린 카렌의 이야기를 반향한다. 허구를 진실이라고 믿을 때 혹은 진실을 담지하지 않은 이야기들이 진실을 가장한 채 유포될 때, 이야기는 폭력의 도구로 전락한다.

안데르센의 빨간 구두 이야기가 다른 언어로 번역될 때 발목이 잘리고 심장이 터지는 잔혹한 결말이 어린이들을 위해 수정되어 출판된 곳도 있다고 한다. 시대가 변하고 의식이 변하면서 전통적으로 특정소수를 억압하고 폭력이 담겨진 많은 이야기들이 새롭게 씌어지고 재해석되고 있다.

“암탉이 울면 수탉은 애를 돌본다.”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면 맛있고 새로운 요리가 나온다.” 2005년 진주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가 ‘성폭력추방 캠페인’을 벌이며 함께 진행한 ‘평등속담 만들기’에 참여한 청소년/소녀들이 새롭게 만든 속담이다(김철호 기자, 인터넷 오마이뉴스 2005.07.16). 여성비하가 공공연했고 여성의 사회진출이 제한되었던 시대에 암탉은 묵묵히 집안일을 하면서 알이나 낳아야 했고, 부엌은 남자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장소였다. 그러나 요섹남(요리하는 섹시한 남자)이라는 신조어가 생길 정도로 부엌은 더 이상 여성들만의 전유공간이 아니며, 집안일을 하는 남성의 모습도 긍정적으로 해석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예수도 그러했다. 안식일에 배가 고파 밀밭에서 이삭을 잘라 먹었던 예수의 제자들(마가복음 2장, 마태복음 12장, 누가복음 6장)을 안식일 법을 어긴다며 비난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는 말한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막2:27) 가난하여 안식일에도 생존을 위해 일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을 위한 예수의 해방의 말씀. 빨간 구두대신 검은 구두를 신고 우리에게 다가왔던 프란체스코 교황. 우리가 들어야할, 한국 기독교가 들어야 할 울림의 이야기들이다.

추위로 부푼 맨 발등의 또다른 카렌의 발목을 자르는 대신, 상처 나고 언 발을 녹여주고 치유해주는 빨간 구두를 내어줄 수 있는 따뜻한 이야기들이다. 성서의 이야기로 자신들의 폭력을 정당화하고 말씀의 권위로 자신들의 배를 불리고 상처를 주는 모든 이들이 들어야 할 비움과 성찰의 이야기들이다. 문자주의에 갇혀 사람을 억압했던 성서를 해방시키는 살림의 이야기들이다.

안데르센의 빨간 구두 이야기에서 필자의 관심을 끌었던 인물이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카렌을 보살피던 나이 지긋한 여성이었다. 눈이 어두워 빨간 구두를 검은 구두로 착각하고 카렌에게 신발을 사주었던 그 여성. 필자는 이 여성을 새롭게 만나고 싶다. 그녀는 눈이 어둡다는 이유로 카렌에게 일부러 빨간 구두를 사주었다고 쓰고 싶다. 그리고 카렌에게 이 여성은 속닥인다. “카렌, 네가 신어도 좋은 신발이야. 너를 위한 신발이야. 당당히 신고 교회로 가렴.” 카렌이 빨간 구두를 신고 교회에 간 이후 그 동네 모든 여성들은 빨간 구두를 신고 일요일에 교회에 가는 새로운 전통이 생겨난다. 평생 검은 구두를 신었던 나이 지긋한 여성은 교회에 가득찬 빨간 구두를 보고 너무 기뻐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이런 결말을 가진 이야기는 어떨까? 그래서 우리 후손들이 추억하는 빨간 구두는 더 이상 발목을 잘리게 하는 무서운 구두가 아니라, ‘사람다움’을 되찾게 해주는 신비하나 평범한 신발이 되는 전통을 만들어 가는 것은 어떨까? 이번 주일엔 빨간 구두를 신고 새롭게 성서를 다시 만나고 싶다.

박지은 박사

이화여대 기독교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밴더빌트 대학(Vanderbilt University)에서 구약(히브리)성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이화여대 강사로, 여성 및 생태문제를 비롯하여 현 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에 응답할 수 있는 구약성서 읽기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박지은 jemondieu@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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