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해리 시인께서 보내주신 시집 「치매행(致梅行)」에 실려 있는 “그믐달”이라는 시다. 치매에 든 아내를 보살피는 선생님의 애정 어린 노고가 너무도 생생하여 월간 「우리詩」에 연재되는 그분의 시들을 읽고 또 읽어온 터다. 시를 짓는 벗들과 어울려 약주 한잔 하고 밤늦게 귀가하더라도 선생님을 기다리던 아내의 간절하던 눈빛을 더 이상 볼 수 없어 당신 눈이 저절로 젖어가는 심경이 느껴진다. 가을타는 모든 남정들이 그렇겠지만 모든 것을 망각해 버린 아내를 보살피고 있는 한 노시인의 외로움이 가슴에 와 닿는다.

 

며칠 새에 연두색에서 황금색 강을 건너는 벌판을 보면서 머지않아 벼 베기와 탈곡이 끝나면 볏짚은 이삭을 돋우고 키우고 꽃피우고 영글어 익혀가던 찬란한 날들을 떠올리면서, 낟알이 익을 대로 익어 고개를 푸욱 숙이고 생각에 잠길만큼 듬직해진 이삭을 힘들어 떠받치던 고생을 추억하면서 차디찬 진흙 논에 누워 있으리....

 

오늘은 언덕 위의 풀을 뽑고서 호미질로 꽃밭을 만들어 꽃씨를 심을 작정이었으나 집안 청소 땜에 포기해야 했다. 아내가 지리산에 따라 내려오면 일주일에 두 번은 집안 청소를 해주겠다던 보스코. 두 번에서 한번으로, 그게 두 주에 한번으로, 그러다 이제는 한 달에 한번도 지켜지질 않는다.

 

“여봇, 일주일에 한두 번은 청소해준다더니?” “내가 그런 말을 했던가?” “오늘은 꼭 해줘야 해.” “나 공부할 게 많아.” 어떻든 그가 책상머리에 앉아버리면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내가 진공청소기를 든다. 나도 어렸을 적에도 엄마가 뭘 시키시면 “엄마, 나 공부해야 돼.” 한 마디로 모든 변명이 되고 남았으니까...

 

겨울이 문턱에 오면 심야전기 보일러와 한바탕 씨름을 벌여야 한다. 어제 밤에도 두 시간 간격으로 잠자리에서 일어나 보일러실로 내려가 떨어진 전기차단기를 다시 올리고 초기화시키며 휴천재를 덥혀보려 애를 썼다. 엔지니어가 오늘 중 고치러 온다더니 4시가 넘도록 전화에도 문자에도 대답이 없다. 아내가 밤새 보일러실을 오르내린 일도 모르는 채 보스코는 쿨쿨 잠만 잘 잤으니 팔자 하나 참 좋은 남자다.

 

선진강휴게소에서 바라본 섬진강 

 

4시에 집을 나왔다. 광양에 있는 광영성당에서 저녁 7시 반에 보스코의 강연이 있어서다. 생초로, 진주로, 그리고는 광양으로 고속도로를 달리는데 지는 해는 정면으로 눈을 따갑게 하지요, 간밤에 잠을 설친 눈은 감기기만 하지요... 하는 수 없이 섬진강 휴게소에서 차를 세우고 20여분 눈을 감아야 했다, 이럴 때 보스코가 딱 30분만운전대를 잡아줘도 좋겠는데....

 

6시 넘어 광영성당에 도착하니 “깔끄막 위에” 있는 사제관에서 내려오시는 씩씩한 신부님이 저녁식사를 마련해 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다. 젊었을 적에 「녹색평론」을 읽고서 자가용을 갖지 않기로 결심해 오늘에 이르렀다는, 아예 운전면허증도 없으시다는 말씀에 뜻으로 사는 사제임을 알 수 있었다. 

 

7시 30분에 시작한 저녁미사가 끝나자마자 보스코가 “순교자들에게 전수받은 사회복음”이라는 제목으로 한 시간 넘게 강연을 했다. 순교자의 후예라면 오늘날 사회복음(정의구현)을 실천하다 박해받는 예언자들을 알아보아야 한다는 줄거리였다. 행사가 끝나고 모든 교우가 성모회에서 직접 만든 도너츠와 따뜻한 차로 요기를 하면서 다정한 인사를 나누는 품이 소공동체가 활발하고 매주 16페이지짜리 주보를 펴낼 만큼 활기찬 본당임을 보여주었다.

 

프란치스코 교황 한 분 지도자가 힘겹게 가톨릭교회를 바꿔가고 있듯이, 사제 한분에 의해서 활기찬 본당의 모든 교우들이 신앙생활의 틀을 건실하게 다져가고 있음을 보는 일은 참 흐뭇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