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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없는 사회<김명수 칼럼>
김명수 (경성대 명예교수, 충주예함의집) | 승인 2016.06.13 14:51

그 때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 25.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찾을 것이다. 26.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 또 사람이 제 목숨을 되찾는 대가로 무엇을 내놓겠느냐?(마16:24-26; 새번역) 

Then Jesus said to His disciples, "If anyone wishes to come after Me, he must deny himself, and take up his cross and follow Me. 
25."For whoever wishes to save his life will lose it; but whoever loses his life for My sake will find it. 26."For what will it profit a man if he gains the whole world and forfeits his soul? Or what will a man give in exchange for his soul?(Matthew16:24-26; NASB) 

 

(1)
지난 5월은 우리 국민 모두에게 슬픈 달이었습니다. 5월 17일 새벽에 강남역 화장실에서 살인범죄 사건이 일어났어요. 한 남자가 주방용 식칼로 한 여성을 죽인 것인데요. 가해 남성은 불특정 다수의 여성들이 평소에 자기를 무시해왔다고 했습니다. 단지 그러한 이유로 보복하기 위해, 만나보지도 않았던 생면부지의 여성을 무참히 살해했다는 것이었습니다. 한 조현병자의 여성혐오증이 강남역 ‘묻지 마 살인사건’의 전말입니다. 강남역 살인사건은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공감·애도·분노하면서 여성들이 느끼는 일상적인 불안·공포를 드러냈다는 점에서 사회적 사건이기도 하지요. 

열흘 뒤였어요. 5월 28일에는 구의역 승강장에서 사망사고가 났습니다.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던 비정규직 작업공이 전동차와 스크린도어 사이에 끼어 사망하는 사건이었어요. 작업공은 금년 2월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19살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월 140만원을 받고 노선 하나를 관리하는 일을 맡았는데요. 정규직이 되는 꿈을 안고 일을 열심히 하다가 변을 당한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추모 행렬이 이어지는 데서 볼 수 있듯이 이번 사건들에 대해서는 사회적 분노와 슬픔이 아주 남다름을 볼 수 있습니다. 왜일까요? 살해당한 여성이나 목숨을 잃은 청년이 동년배의 사람들에게, 더 나아가 사회의 구성원인 우리 모두에게 나 자신일수도 있었겠기 때문이겠지요. 내가 이렇게 살아있는 것은 다만 운이 좋아서가 아닐까요? 추모하기 위해 강남역에 모여든 사람들 중 희생당한 사람과 같은 또래의 여성들이 많았다고 해요. 구의역을 찾아온 추모객들 상당 부분이 비정규직이었다고 합니다. 

물론 조현병자의 살인사건이나 지하철 스크린도어 작업 중 사망한 경우가 이번이 처음만은 아니지요. 세월호 사건 이후 우리 사회에서 유사한 사건들이 반복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헌데도 바뀐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소 잃고 나서 외양간을 고친다는 우리 말 속담이 있는데요. 어찌된 일인지, 소를 잃었으면서도 외양간을 고칠 생각도 하지 않고요. 책임지는 사람 하나 없이 그저 남 탓으로 돌리기에 급급합니다. 이것이 현재 우리가 몸담고 있는 한국사회의 민낯입니다. 국민 절대 다수들의 사회적 슬픔과 분노가 증가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지요.  

현재 우리 사회의 약자들은 누구인가요? 여성들입니다. 금번 여성 살해사건은 조현병자의 우발적인 행동만으로 치부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여성 혐오증은 양성불평등이 불평등이 구조화된 결과입니다. 현재 우리나라는 비정규직이 얼마인가요? 6백만입니다. 외국인 노동자 4백만 시대에 접어들었어요. 현 정부의 경제정책은 무엇인가요? 전체 노동자들의 비정규직화이지요.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통해서 재벌의 이익을 극대화시키는 것이지요. 낙수효과(trickle-down effect)가 실효성이 없다는 것은 경제학계에서 이미 입증된 지 오래입니다.   

금번 사건들을 계기로 국민 절대다수가 느끼는 분노와 절망감은 총체적인 안전 불감증에 걸려있는 국가권력의 존재 이유를 다시 한 번 묻게 합니다. 도대체 사회가 무엇인가? 필요하기는 한 것인가? 국가는 사회의 약자들에게 어떤 존재이고 무슨 의미가 있는가? 사회는 구성원 간의 계약 공동체입니다. 구성원 사이에 사회적 불평등이나 소득격차를 최소화해야 하지요. 이를 통하여 모든 구성원이 낙오되는 일 없이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휴머니즘 공동체를 세우기 위한 일종의 합의기구가 사회이지요. 

우리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헌법 제1조에 명시되어있듯이, 민주공화국이란 권력을 쥔 소수 특권층이 아니라, 국민 모두가 국가의 주인이 되는 사회시스템이지요. 모든 권력이 국민에게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국가이념으로 삼고 있는 사회를 말합니다. 사회의 구성원 가운데 약자들(social minorities)의 생존권보호를 최우선의 국가시책으로 삼는 것이 민주주의 국가이지요.  

정치인들이 무엇인가요? 투표를 통해 국민들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은 자들입니다. 위임받은 권력은 당연히 국민 다수를 위해 행사되어야 하지요. 의회민주주의에서 국회와 정부기관은 서로 견제하면서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을 공정무사(公正無私)하게 행사해야 하지요. 특히 약자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것이 최우선적인 과제여야 할 것입니다.    

헌데, 작금 우리사회는 어디로 가고 있나요? 거꾸로 가고 있습니다. 사회적 약자들은 생명과 재산을 보호받기는커녕 약육강식의 사냥터로 내 몰리고 있어요. 국가권력은 무슨 짓을 하고 있나요? 재벌특권층의 입장에서 그들의 호주머니를 부풀려주는 정책을 펴고 있어요. 현재 30대 재벌기업들이 회사에 쌓아놓고 있는 돈이 800조원에 이른다고 합니다. 한 마디로 한국은 재벌천국의 사회이지요. 국민 대다수가 힘들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구조이지요. 

(2)
본문은 예수께서 갈릴리 선교를 마치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시는 길목에서 일어난 사건보도입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 정권을 잡으면 한 자리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어요. 그런 제자들을 향하여 예수께서는 앞으로 당하게 될 당신의 운명을 소상히 밝히십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게 되면, 장로들, 대제사장들, 서기관들에게 고난을 당하게 된다는 것, 그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것,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을 예언하지요. 

그러자 베드로가 강하게 항변합니다. 그럴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선생님은 절대로 고난당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어요. 예수께서 베드로를 향하여 무어라고 책망하시나요?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합니다. 베드로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며 꾸짖고 있어요. 

일반적으로 기독교의 특성을 무엇으로 생각하나요? 영혼구원과 물질축복에서 찾는 사람들이 많지요. 구원과 복은 기독교의 전유물이라고 볼 수 없고요. 구복(求福)신앙은 일반적인 종교현상입니다. 결코 기독교의 특성으로 볼 수 없습니다.    

본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분명하지요. 예수께서 고난당하는 것은 필연이요 하나님의 일인데요. 그것을 저지하려는 것이 사람 생각이요. 사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돌아보며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 25.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찾을 것이다.”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입니다. 고(苦)의 종교이지요. 복음서들의 중심 줄거리는 예수의 고난사입니다. 본문의 예수말씀에 따르면, 우리에게는 각자 주어진 십자가가 있다는 것이고요. 그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고(苦)는 인생에서 필연이요 운명이라는 것이지요. 태어나고 죽는 것 자체가 고(苦)요. 병들어 늙는 것 역시 고(苦)이지요. 우리 모두는 고(苦)의 바다를 건너가고 있습니다. 제 몫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말씀 행간에는 바로 이런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3)
싯다르타의 어린 시절이었어요. 그는 어느 날 들에 나갔어요. 늙은 농부가 뙤약볕 아래서 땀을 뻘뻘 흘리며 밭을 갈고 있었어요. 나는 왕궁에서 호화롭게 생활하고 있는데, 왜 저 농부는 나와 같은 사람으로 태어났으면서도 왜 저렇게 고통스런 삶을 살아야 하나? 사회적 불평등에 대해 어린 싯다르타는 깊이 생각했습니다. 

그 농부가 소를 몰고 가는데, 쟁기에 뒤집힌 흙 속에서 지렁이들이 꿈틀거리며 나왔어요. 나무에 앉아 있던 새들이 그것을 보고 쏜 살같이 밭으로 내려가 지렁이를 놓고 서로 먹으려고 아귀다툼을 벌였어요. 이 장면을 보고 싯다르타는 약자들이 강자들에게 먹히고 먹는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자연세계 실상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어요.  

인생고의 문제를 안고 싯다르타는 29살에 출가를 하지요. 6년 동안 세상을 주유(周遊)하며 치열한 구도(求道)수행을 하다가 35살에 드디어 득도(得道)하게 되지요. 싯다르타는 고(苦)의 원인을 ‘나’라는 의식에서 찾았어요. 본래 고정된 ‘나(atman)’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데, ‘나’가 있다는 무지(無知)에서 일체의 괴로움이 일어난다고 보았습니다. 현재의 나는 일정조건 하에서 생멸하는 가합적(假合的) 조합일 뿐이라는 무아설(無我說)을 주창했어요. 

내 몸은 어떻게 생겼나요? 부모에게서 각각 반(半)씩 받은 것입니다. 어머니에게서 받은 반과 아버지에게서 받은 반을 빼어버린다면, 내 몸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지요. 또한 내 몸은 지수화풍의 가합적 조합물이기도 합니다. 지수화풍을 빼면 내 몸에서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지요. 조건 지어진 존재로써의 자기 이해가 무아설의 핵심이지요. 내가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와 같이 잠시 왔다가는 존재가 나인데, 마치 영구불변(永久不變)할 것이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집착하는데서 인생의 모든 고(dukkha)가 생긴다는 것이 싯다르타의 깨달음이었지요. 본래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음을 깨닫게 되면, 나와 내 몸에 대한 과도한 집착에서 벗어나게 되지요. 아마도 불교의 궁극적 목적은 나 없이 나로 사는 것이겠지요. 무아의 삶을 살 때, 나에 갇히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고(苦)의 반대는 구원도 복락(福樂)도 아니지요. 평화(shanty)이며 고요함(寂靜)입니다. 자유로움(解脫)이지요. 

(4)
본문에 보면 예수님도 인간이 고(십자가)에서 벗어나는 길을 제시하고 있어요. 고(苦)에서 벗어나는 길은 무엇인가요?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짊어지는 것입니다. 고(苦)가 닥칠 때, 피하게 해 달라고 기도할 것이 아니라, 지고 갈 수 있도록 힘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그러하셨듯이 고(苦)를 짊어짐으로써 고(苦)에서 자유하게 되지요.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고자 하면 잃게 되고요. ‘나를 위해(heneken emou)’ 자기 목숨을 버리면 찾을 것이라고 합니다. 목숨(푸쉬케)이란 억지로 얻으려고 하면 도리어 잃게 되고 무위에 맡겨버리면 찾게 된다는 말씀이지요. 유위(有爲)를 버리고 무위(無爲)를 따르는 것을 ‘나 때문에’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예수는 ‘개체적인 나(atman)’를 나로 삼지 않았어요. 이웃사랑하기를 네 자신처럼 하라고 하셨어요. 이웃과 내 몸을 불이(不二)관계로 본 것입니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셨어요. 원수와 나를 ‘한 몸’으로 본 것이지요. 예수에게 있어서 나와 관계 맺지 않은 타자(Others)는 없지요. 존재 일체를 나와 관계맺음 속에서 나의 연장(延長)으로 본 것이지요. 예수께서 ‘나를 위해’라고 했다면, 그것은 나 아닌 ‘모두를 위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 없이 나로 사신 분이지요. 모두를 나로 삼고 사신 분입니다. 최후 심판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자기를 무엇과 동일시했나요? ‘지극히 작은 자들’(elakiston)입니다.(마25:40) 사회의 소수자들(social minorities)은 예수의 현존양식이지요. 오늘 날 우리 주변에서 만나는 사회적 약자들의 부름에 어떤 형태로든지 응답하는 삶을 사는 것이야말로 예수를 따르는 길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김명수 (경성대 명예교수, 충주예함의집)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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