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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 생존기 <쥐><소소한 남자의 소소한 독서>
정주현 (예사랑교회) | 승인 2016.09.06 10:57
ⓒMAUS

주변 사람들 중 만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 또한 만화를 매우 좋아하기에 그들과 만나면 만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그 지인 중 한명에게 추천 받은 만화는 <쥐>(MAUS)1)였다. <쥐>는 폴란드계 유태인 “블라덱 슈피겔만”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생존한 이야기를 담은 내용이다. 작가는 주인공의 아들 “아트 슈피겔만”이며, 그는 자신의 작품에서 아버지의 생존기와 더불어 자신과 아버지 사이의 좁히기 어려운 간극도 보여준다. 이 작품을 처음 한 쪽만 읽어도 이걸 만화라 불러야 하는지 심각한 고민에 빠진다. 그만큼 이 작품은 놀라울 정도로 만화 같지 않다.

우리는 흔히 만화라 하면 그림을 통해 재미있는 이야기를 담아내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만화를 품위가 떨어지는 것으로 여기기도 한다. 나의 청소년기 시절도 그랬지만 지금도 많은 부모님들은 자녀들이 만화를 본다고 하면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쥐>는 바로 이런 통상적인 만화에 대한 인식을 거부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을 말할 때 우리는 만화를 볼 때 쓰는 보편적인 표현인 “본다”가 아니라 “읽는다”라고 표현해야 맞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쥐>는 굉장히 흡입력이 있는 문학작품으로 봐야 한다. 이에 대한 인식에는 서평에서도 드러난다. 우연치 않게도 서평을 쓴 이들은 올해 작고한 이들인데 바로 ‘신영복 선생’과 ‘움베르토 에코’는 이 책에 대한 서평에서 <쥐>를 뛰어난 문학작품으로 대한다. 그리고 그런 평가는 만화로서는 유일무이하게 퓰리처상을 수상한 것으로 다시 한 번 증명된다. 

슈피겔만은 작품에 등장하는 각 인종들을 동물로 묘사한다. 유태인은 "쥐"로 폴란드인은 “돼지”로 독일인은 “고양이” 그리고 미국인은 “개”, 프랑스인은 “개구리”로 표현한다. 사실 폴란드인을 돼지로 미국인을 개로 프랑스인을 개구리로 표현한 것에는 따로 설명이 필요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작품의 80퍼센트를 차지하는 쥐와 고양이의 컷은 왜 독일인을 “고양이”로 유태인을 “쥐”로 설정했는지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다. 학살자로서의 독일인과 피 학살자로서 유태인에 대해 “고양이”와 “쥐”의 관계보다 더 적절한 비유는 없을 것이다. 

<쥐>를 읽어가다 보면 독자는 당시 상황의 처참함에 빠져 들어가게 된다. 고양이가 쥐를 잡을 때, 당장 그 목숨을 끊어버리지 않고 가지고 노는 모습에서 나치가 유태인들을 다루는 모습이 연상되는 처참함 말이다. 그리고 이에 못지않게 쓰라린 모습들도 있다. 그것은 고양이의 편에선 쥐들에 의해 다른 쥐들이 핍박당하는 모습과 때론 생존을 위해 쥐들끼리 서로를 물어뜯는 상황이다.

ⓒMAUS

작가의 아버지 블라덱은 그런 지옥의 시간에서 살아남았다. 한 인간이 그런 아수라장에서 살아남았다면 그의 남은 생을 그 경험 이전처럼 살아갈 순 없을 것이다. 블라덱도 마찬가지 였다. 블라덱에게 각인된 전쟁과 수용소 생활의 트라우마는 결국 그의 가족에게 돌아갔다. 함께 고통의 시간을 지나온 아내는 자살했고, 전쟁 후에 얻은 아들이자 <쥐>의 작가 아트 슈피겔만은 스무 살에 정신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그리고 작가가 작품을 준비하면서 아버지와 만나는 시간들에 대한 컷들을 보면 일반적인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세대 차이에서 오는 감정의 갈등보다 훨씬 깊은 골이 있음을 보게 된다. <쥐>는 이렇게 아버지 ‘블라덱의 생존기’와 더불어 ‘아들과 아버지의 이야기’ 두 이야기가 교차로 편집되어 진행된다. 

슈피겔만은 작품에서 자신의 아버지를 “늙은 구두쇠 유태인이며 인종차별주의자로” 묘사한다. 세상에 내놓을 작품에서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아버지의 허물을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는 작품을 통해서 아버지를 비난하고자 하는 것일까? 또는 자신과 아버지 사이의 골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자 자신의 아버지를 그렇게 표현했을까? 아마도 그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 속에서 살아남은 블라덱이 학살과 배신의 현장에서 살아남았음에도 인간성이 무너지지 않은 모습과 생존자에게 남겨진 상흔을 그려내고 있다. 

지옥처럼 보이는 역사의 현장을 뚫고 온 블라덱이기에 잠을 자다가 비명을 지르는 일이 일상다반사였다고 한다. 그래서 아트 슈피겔만은 대학에 가기 전까지 모든 부모들은 그런 줄 알았다는 내용을 볼 때, 그가 표현한 “늙은 구두쇠 유태인이며 인종차별주의자”라는 표현은 애증어린 표현이긴 하지만 분명 자신의 아버지를 격하시키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작품을 통해 살아남은 아버지에 대한 존경을 표하고 있다. 물론 그것은 단순히 자신의 아버지에게 보내는 존경이 아니다. 지옥에서 살아남은 모든 생존자들을 위한 존경일 것이다.

슈피겔만이 세계 제 2차 대전의 한 복판에서 살아남은 유태인을 “쥐”로 설정한 것은 생태계에서 최약체에 해당하는 쥐의 운명과 당시 유태인의 운명이 같음을 집약적으로 말하기 위해서라고 보인다. 그러나 “쥐도 막다른 골목에선 고양이를 문다”라는 우리말이 있다. 그 점에서 생각해보면 분명 당시 유태인들은 막다른 골목에 몰린 쥐와 같은 모습이었다. ‘유태인 증명서’ 발급을 통한 통제에서 ‘게토’로 이동하고 ‘게토’에서 다시 ‘수용소’로 이동하면서 더 이상 빠져나갈 곳 없는 신세, 막다른 골목의 쥐와 같은 신세였던 그들은 고양이를 물려고 하지 않았을까? 작가도 아버지와의 대화중에 이와 같은 질문을 한다.  

ⓒMAUS

그에 대한 아버지 블라덱의 답은 이렇다. “그래 아우슈비츠는 ‘아무도’ 이해 못하지” 블라덱은 유태인들이 저항하지 못한 이유에 대해 이어서 말한다. ‘너무 굶었고, 겁에 질렸고, 힘들었고, 눈앞에 벌어지는 일조차 믿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또한 유태인들은 죽음이 이르기 전에 소련군이 올 것이라는 희망을 늘 가졌다고 한다.’ 그렇게 죽어나간 유태인이 600만 명이었다. 실로 엄청난 숫자다. 똑똑하고 능력 있기로 소문난 유태인들이 저항하지 못한 것은 아이러니다. 물론 작은 저항들은 있었지만 그 영향은 매우 미미했다.

유태인들의 이런 상황에 대해 블라덱은 회고 한다. “하지만 신은 거기 오지 않았단다. 믿을 건 오로지 우리뿐이었지.” 세상 어떤 민족도 유태인들과 같은 일방적인 대학살을 당했던 적은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태인이 아닌 사람들은 그들을 이해하지 못할 확률이 높다. 블라덱의 말처럼 말이다. 그러나 “아트 슈피겔만”은 “쥐”를 통해 당시 “쥐”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한 것은 아닐까? 그리고 본인 스스로가 아버지 블라덱을 이해하려고 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쥐”는 광기의 잔치를 벌인 나치의 만행과 자신의 아버지가 겪은 고통의 시간을 파헤친다. 

끝으로 “쥐”가 엮어나가는 이야기의 이 방식은 한국 사람들에게 익숙한 ‘안네의 일기’와 ‘뻐꾸기 둥지위로 날아간 새’, ‘쉰들러 리스트’와는 다르다. “쥐”는 과거와 현재를 엮어가면서 우리에게 익숙한 다른 작품이 가지지 못한 역사의 현재성을 더욱 생생하게 해줄 작품이다. 왜냐하면 살아남은 자가 짊어진 트라우마의 무게감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결코 잊힐 수 없는 역사를 짊어진 살아남은 사람들과 그들이 감당하고 있는 트라우마의 무게감에 대한 논의와 이해를 돕는 작품으로서 “쥐”는 우리에게 새롭게 다가와야 할 작품이다. 그러나 이미 출판 된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만화라는 틀로 얽매며 돌아보지 않았다면, 이제는 그 틀을 깨트리고 함께 탐독해야한다. “쥐”가 널리 읽히길 바란다.

*각주설명 1) 독일어로 쥐다.

<필자 소개>

 

정주현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졸업

예사랑교회 청소년부 전도사

아쉽게도 평범한 통찰력과 이해력을 가졌지만, 제 능력 이상의 성취를 원하는 욕심이 있다. 게다가 어렴풋이 느끼는 이상향, 옳은 삶, 행복한 삶에 대한 갈증 때문에 더듬거리며 갈 길을 찾으며 살고 있다. 그런 탓에 배움의 성취도 더디고, 삶의 여정도 매끈하지 않다. 그러나 다행이도 스트레스는 많이 받지 않아서 소박한 하루하루를 감사한 마음으로 살고 있다. 

이 지면은 카페에서 지인들과 읽은 책에 대해 수다 떠는 느낌으로 채우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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