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2010년) 청소미화원 노동교실 심화과정 때 일이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로 시작하는 국민교육헌장은 첫 문장부터 거짓말 아닌가요,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무슨 사명을 띠고 나와요.”

▲ 국민교육헌장 발표식 ⓒ박준성 제공

국민교육헌장이 뭐가 문제인지 막 이야기를 꺼내려는 참이었다. 그때 한 분이 손을 들었다.

“저기요, 선생님, 우리는 그걸 노래가사 바꿔 부르듯 바꿔서 외웠어요.” 
“어떻게요. 기억나세요?” 
“다 잊어버렸는데 첫 째 줄은 생각나요”
“한번 외워보세요” 
“우리는 부모님들의 일시 흥분으로 이 땅에 태어났다.”

강의실이 한꺼번에 웃음바다가 되면서 모두들 뒤집어지는 줄 알았다. 국민교육헌장을 만드는데 앞장섰던 박정희 표정까지 상상하며 모두들 통쾌, 유쾌하게 웃었다.

“부모님에 따라 일시 흥분의 시간차는 있었겠지요.”

누가 또 툭 한 마디 던졌다. 사그라질 듯하던 웃음이 다시 파도처럼 일었다.

“그때가 언제였어요?”
“중 3때였으니까 따져 보면 정확하게 나올 텐데.....70년대 초였어요.”

노동교실에 참가한 여성 노동자들은 1943년생부터 1966년생까지 20여 명이었다. 평균으로 따지면 내 또래인데다 대부분이 시골출신들이었다. 수업은 해방후 현대사를 해방-1960년대, 1970-1980년대, 1990-현재까지로 끊고, 먼저 시대별로 슬라이드 사진을 보면서 역사의 흐름을 설명한 뒤 각자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는 식이었다.

어렸을 때 먹고 싶었던 고기, 쌀밥부터 시작해서 가난해서 못했던 공부에 이르기까지 이야기 보따리가 터져 나왔다. 전체 네 시간을 예정했는데 70년대도 못 들어가서 3시간 반이 훌쩍 넘었다. 나머지는 수련회 때 마저 하기로 하고 미루었다.

ⓒ박준성 제공

노동교실을 마치고 나서 우리 중학교 여자 동창들은 국민교육헌장을 어떻게 외웠는지 궁금했다. 1968년에 강원도 홍천 서석중학교에 입학해서 71년 2월에 졸업한 우리 학년은 106명이었다. 그 가운데 여학생은 28명이었다. 1반, 2반 두 반가운데 2반만 남녀 공학이었다. 여학생들과 함께 있는 반을 ‘여자반’이라고 했는데, 나는 1학년 때 여자반이어서 2.3학년 때는 남학생들만 있는 1반이었다.

1학년 때도 그랬지만 반이 달라진 2.3학년 때는 여학생들과 자연스레 이야기 나누기가 힘들었다. 몇 번 친하게 이야기 나누다보면 곧바로 누구누가 연애한다는 소문이 돌면서 놀림감이 되었기 때문이다. 악동들은 공부 잘하는 모범생이면서도 태권도에 운동도 제법 하는 나를 어떻게든 골려 먹으려고 이리저리 놀려댔다. 꾸며낸 소문을 퍼뜨리기도 하였다. 아이들 놀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잘 지내는 애들은 남학생이건 여학생이건 ‘연애대장’이라는 별명이 붙어 다녔다. 정말 연애하다 선생님들한테 걸리면 학교에서 곤욕을 치뤄야 했다.

학교를 졸업한 뒤 동창 모임하고는 담쌓고 지내다보니 아는 전화번호가 하나도 없었다. 물어물어 연락처를 많이 알고 있는 친구에게 전화번호를 얻어 전화를 했다. 학교 다닐 때는 이야기도 많이 못했던 여자 동창들과 추석연휴 마지막 날 번갈아 가며 전화기에 대고 온 종일 수다를 떨었다. 집이 같은 방향이라 자전거 뒤에 태우고 스스럼없이 이야기 나누어도 아무도 안 놀리던 동생 같은 친구도 있고, 다른 친구들보다 속으로 더 마음에 두었던 친구도 있고, ‘중학교 때 넌 우리들의 우상이었어’ 하는 친구도 있었다.

그런데 애틋하고 오붓하게 옛 추억을 오래 나눌 짬이 없었다. 안부를 묻고는 궁금한 것부터 물었다.

“여학생들이 남자애들 보다 좀 조숙했잖아. 혹시 너네도 국민교육헌장을 이상하게 바꿔서 외운적 있니?”

10-20년 만에 듣는 목소리도 있고, 40여 년 만에 처음 통화한 친구도 있었는데, 내 전화가 참 뜬금없다고 느꼈을 것 같다.

“뭔 얘기야?”

노동교실 이야기를 해주었다.

“야, 웃기다야. 그러다가 맞아 죽을라고, 우린 꿈도 못꿨다얘”

여학생들이나 나나 마찬가지였다. 중학교 1학년 때인 1968년 12월 5일 국민교육헌장이 제정 공포되었다. 3년 내내 국민교육헌장을 외워야 했다. 교과서마다 겉장 안쪽에는 국민교육헌장이 실려 있었다. 조회 때마다 전교생이 합창하듯이 낭송했다. 가지가지로 시험도 보았다.

전체 외우기는 기본이었다. 못 외우면 한 쪽에는 지휘봉을 든 군복 입은 교련 교관이 엎드려뻗쳐를 시키고 다른 손에 든 각진 각목으로 엉덩이를 때렸다. 상급생 ‘선도부’가 기합을 주기도 했다. 선배들이 선도부 완장을 차면 새끼 교관이 되어 후배들을 윽박질렀다.

다들 한 목소리로 교련 교관 무서웠던 기억들을 이야기 한다. 얼룩무늬 훈련복을 입고 군사교육을 받아야 했던 교련 과목은 고등학교와 대학생이 대상이었다. 우리는 중학생이었는데도 우리가 입학하던 해 고등학교가 신설되어 중고등학교가 되었기 때문에 교련 교관의 폭력에 떨어야 했다. 그런 분위기라 꿈에도 국민교육헌장을 비비꼬아 장난스럽게 외울 생각은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국민교육헌장 노래를 불렀다는 친구도 있었는데 같이 학교를 다녔어도 나는 그 노래를 부른 기억이 없다. 두 친구는 노래를 직접 불러서 들려주기까지 했다. 아무튼 그때는 국민교육헌장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어떠했는지, 1890년에 만들어진 일본 천황을 정당화하는 ‘교육칙어’를 본 딴 것인지, 국가와 권력에 복종하는 전체주의적 인간상,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기능적 인간상을 앞세우는 것인지도 모른 채 무조건 외워야 했다.

▲ 졸업 앨범에 실으려고 연출한 사진이라, 학생회라고 있어봐야 학생들의 민주적인 회의체도 아니었고, 중고등학교 학생회에서 중학교는 둘러리일 뿐이었다. 사진에서 칠판에 쓴 글씨를 보니 중학교 3학년 때나 지금이나 필체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박준성 제공

중학교 생활이 한편으로는 이렇듯 질식할 것 같았지만 탁구니 축구니 하는 운동과 널널한 공부 덕분에 중학교 생활을 별 탈 없이 마칠 번했다. 졸업이 가까운 3학년 2학기에 ‘졸업 앨범’ 사건이 일어났다.

3학년 졸업 예정 학생들 모두가 큰 종이에 한 마디씩 ‘하고 싶은 이야기’를 쓰면 줄여서 앨범에 싣기로 한 것이다. 내가 앞장서서 그 당시 보고 있던 <학원>이나 <진학생> 같은 잡지에 실린 ‘싸인지’들을 흉내 냈다. 졸업도 얼마 안 남은지라 학교에 쌓인 불만도 쓰고 선생님들 별명도 썼다. 몇 친구들이 따라했다.

학교에서는 난리가 났다. 1반, 2반 모두 한 교실에 모아 놓고 ‘범인’ 색출에 나섰다. “이거 누가 쓴 거야?” 몇 개를 “제가요” 하다가 어차피 앞장섰으니 내가 덮어쓰자고 작정했다. 문제가 되는 글을 다 내가 썼다고 나섰다. 한 여학생이 몇 개는 자기가 쓴 것이라고 나섰다.

운동장 한 귀퉁이에서 엉덩이를 맞으면서 온종일 엎드려 뻗쳐를 했다. 중고등학교 전교생이다 볼 수 있는 자리였다. 우리를 벌주는 일에 교련 교관이 앞장섰다. 그 때는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는 것이 오기 섞인 저항의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팔에 마비가 올 정도로 이를 악물고 버텼다. 그 교관 이름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옆에서 같이 벌을 받았던 그 여자 친구가 누구였는지 이름이 떠오르질 않는다. 그럴 만한 동창들한테 전화를 하면서 “혹시 너 아니었니?”하고 물어도 앨범 사건은 어렴풋이 기억나지만 자기가 벌을 같이 받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러면 내가 전화를 걸지 않았던 누구였을 것이다. 그때 나서지 않았어도 되는데, 왜 같이 벌을 받는 동무가 되었는지 궁금하다.

문제가 된 싸인지는 곧바로 폐기되고 완전 순화된 말들로 바뀌었다. 명언 모음집 같은 나의 다짐들이 지금도 앨범 한장을 채우고 있다. 교회도 안 다니던 내가 다시 쓴 글귀는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오.”였다. 내 인생에서 무언가 삐딱하게 앞장서 선동하다가 우스꽝스럽게 된 서리를 맞으며 불발된 첫 번째 사건이었다. 그때 내가 중학교 총학생회장이었던가.

▲ 1970년 중3 졸업을 앞두고 앨범에 실으려고 쓴 한마디 말들. 학교에 대한 비판과 선생님들 별명 따위를 자유분방하게 썼던 초본은 폐기되고 다시 길들여진 말들도 채워졌다. ⓒ박준성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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