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학술 칼럼
생각의 불꽃이 있어야 사람이다『다석 강의』 13강 풀이
이정배(顯藏 아카데미) | 승인 2019.11.19 18:51

이글은 1956년 12월 4일에 쓰여 진 『다석일지』의 내용이다. 이곳서 기독교와 불교 그리고 유교간의 소통이 맘껏 이뤄지고 있다.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基心)이란 불교적 용어와 성리학자 ‘정이천’의 언어 ‘주일무적’(主一無適) 등을 예수의 삶과 가르침에 잇대어 설명하고 다석 자신의 개념 ‘가온찍기’로 풀어낸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다석이 거듭 강조한 ‘생각‘이다. 생각을 근거로 동서양 종교를 회통시켜 이해한 것이다. 이는 사람이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한 본질적 물음과 깊이 연루되었다.

단순히 말하자면 말하고 싶은 사람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다. 생각하는 것을 말하지 못하고 사는 것만큼 힘든 일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 아무 말을 뜻하지 않는다. 참을 알고 그것을 생각하는 지를 묻는 것이다. 우리들 몸이 호흡을 통해 산화 작용하듯 영혼 역시 생각의 불꽃을 피워낸다.

아마도 생각의 불꽃은 사랑이겠다. 사랑을 이루는 것이 사람의 도리이자 목적인 까닭이다. 생각의 불꽃, 사랑이 사람을 사람답게 한다. 그런 점에서 ‘사람’의 완성은 ‘사랑’이라 해도 좋겠다. 한글 자음이 말하듯이 ‘ㅁ’이 ‘ㅇ’에서 완성되는 것도 동일 이치다.

고린도서에서 바울 역시 사랑을 으뜸으로 여겼다. 생각이 생명에 이로운 사랑을 품어 낸다고 믿은 것이다. 산소만 삼키고 이산화탄소를 내뱉는 삶이 전부가 아닌 것이다. 위(上), 꼭대기로 오르겠다는 생각의 불꽃을 피울 때 우리 몸에서 거룩한 사랑이 생겨날 수 있다.

독한 가스(이산화탄소)만 내뱉지 않고 참된 삶, 사랑을 품어내려면 생각의 불꽃을 위해 거듭 하느님 앞에 서서 그와 단둘이 말해야 한다. ‘염재신재’(念在神在)란 말에서 배웠듯이 하느님 그분이 높은 생각을 하도록 이끌며 ‘말’을 주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석은 사람을 ‘사ᄅᆞᆷ’, 곧 ‘사룀’과 같이 보았다. 사람은 누구든지 ‘사뢰는 존재’라는 것이다. 말씀을 사뢰는 자가 바로 사람이란 뜻이다. 이점에서 동서양 종교는 조금도 차이가 없다. 말씀을 사뢰는 존재, 그가 바로 생각의 불꽃을 지피는 자로서 세상에 유익한 사랑의 존재가 되는 까닭이다. 다석은 이것만을 참으로 여겼다.

< 1 >

이런 전제하에서 다석은 첫 한문시를 한 구절 씩 풀었다. ‘무거무래역무주’(無去無來亦無住), 세상 사람들은 어디 머물러야 잘 사는 줄 안다. 사는 곳, 주소가 없는 사람을 옳게 보지 않는다. 주소대신 거소(居所)라 해도 뜻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생각의 불꽃이 피는 사람은 한 곳에 머무를 수 없다(無住). 사뢰는 존재인 사람이 자기 주소를 우기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다.

세상에 자기 자리란 없다. 우주인의 자유를 소지한 사람에게 머물 자리란 가당치 않다. 우리들 거처가 우주라고 말하면 그뿐이다. 귀한 집 자식으로 태어나 편한 안방을 자기 처소로 안다면 그것만큼 부끄러운 일이 없다. 안방 떠나는 것을 죽은 줄 아는 인생이 참으로 가여울 뿐이다. 생각하는 사람에게 우주가 삶의 거처여야 한다.

우리 몸은 가만히 있는 듯 보이나 우주를 돌고 있으며 몸속 세포도 어제와 같은 것이 없다. 모든 것은 지나가고 없다. 머물 수 있는 것은 우주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영원한 과거와 영원한 미래 사이에서 ‘지금 여기’와 접촉하는 것이 인생이다. 지나가는 시공간 속에서 ‘여기 이제’라는 점을 찍고 살뿐이다. 이 역시 생각의 불꽃을 지필 때 가능할 수 있다. ‘여기 이제’밖에는 참이 없다. 아무리 넓어도 ‘여기’이고 아무리 길어도 ‘이제’뿐 인 것이다. 다석은 이를 ‘가온찍기(ᄀᆞᆫ)’라 했다.

그렇기에 ‘가온찍기’는 ‘머물지 말고 줄곧 나갈 것’을 명(命)한다. 결코 정지하지 말라는 것이다. 시간적, 공간적으로 거듭 나가는 것이 참세상의 모습이다. 원한다고 머물 수 없다. 이 글을 쓰고 읽는 순간에도 우리는 지구를 타고 어딘 가로 가고 있을 뿐이다. 머무는 것이 일체 없는(無住) 것이 진리(참)이다.

‘가는 것도 없고 오는 것도 없기에 머무는 것도 없다’는 것이 첫 구절의 풀이다. 이렇듯 우주는 움직이나 움직이지 않는 축(軸)이 있다. 그것이 바로 ‘나’라는 존재이다. 생각의 불꽃을 지피는 인간인 것이다. 오가는 시공간 속에서 자신이 인극(人極)이 될 수 있다. 영원한 ‘나’가 되란 말이다.

예수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말씀했다. 이것이 바로 오가는 시공간 속에서 자신을 ‘축’으로 세웠다는 선언이겠다. 생각의 끝자락에 이르러 나와 길이, 나와 참이 둘이 아니라 하나가 되었다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정신으로 산다는 말뜻이다. 예수가 말했듯 ‘머리 둘 곳 없는(無住)’ 인생만이 참 생명을 산다. 독소를 품어내는 몸으로는 견물생심(見物生心)의 세상을 만들 수밖에 없다. 어느 곳에 마음을 머물고자 기웃거리는 상태이다. 다석은 이를 우상과 같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이런 몸이 사라질 때 견물불가생(見物不可生)의 경지가 열린다. 나라는 것이 없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것이 바로 생각의 불꽃으로 이룬 궁신지화(窮神知化), 더 이상 머물 곳이 없는 무주(無住), 곧 사랑이라 할 것이다.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基心), 이는 불교 용어로서 대단히 유명한 말이다. 머물지 말고 마음을 거듭 앞으로 나가게 하란 뜻이다. 마음을 내는 주체가 나이기에 마음 내는 일(生心)이 없어질 때까지 말이다. 희노애락을 화절(和節), 곧 잘 조절하여 과불급 없는 중도(中道)를 가라는 의미일 것이다.

사는 동안 생심이 없을 수 없으나 그것을 담아두지 않고 즉시 비우는 것(空)이 바로 무주이다, ‘응무소주’란 말 역시 머무는 것이 없다는 뜻이겠다. 이를 위해 불교는 고운 것을 먹지도, 듣지도 취(取)하지도, 냄새 맡지도 말 것을 가르쳐왔다.

주일무적(主一無適)은 하나의 길을 정했으면 다른 길을 기웃거리지 말라는 뜻이다. 어느 서양학자는 이를 ‘purifying your mind’ , 즉 ‘마음을 정결(순수)하게 하라’고 풀었다. 다석은 이 말이 실상 불교가 말했던 ‘응부소주이생기심’과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동서양 경전 모두가 이를 목표삼아야 할 것을 역설한 것이다.

‘주일무적’에서의 주(主)는 머물 주(住)와 뜻이 반대이다. 나가겠다는 뜻을 담았기 때문이다. ‘나는 하나의 길을 향해 부단히 걷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우리 모두가 영원한 하나에서 왔기에 그 길을 따라 영원한 하나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이다. 자신 밖의 절대자가 이를 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의 주(主), 곧 내가 그렇게 할 뿐이다. 주(主)가 제 주장을 하며 나가는 것이 인생이다. 이 경우 주(主)는 참 나를 뜻하는 말이겠다.

예수, 부처를 찾는 주(主)는 바로 나이다.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라는 시간을 사는 주(主)가 바로 참 나란 말이다. 이것이 바로 주일(主一)의 참뜻이다. 번뇌하며 욕망하는 몸적 존재는 결코 주일(主一)의 존재일 수 없다. 몸으로 사는 것을 일컬어 다석은 거주(居住)사상이라 했다. 하지만 하나로부터 왔기에 그 하나를 ‘주’라 여기며 가는 것이 바로 무적(無適)이다. 매인 데가 없는 상태를 일컫는다.

이렇듯 주일하면 상대세계에서의 삶이 재미없다. 크게 매일 곳을 찾기에 상대세계가 주는 맛에 끌리지 않는 까닭이다. 결국 상대세계에 머물지 않겠다는 것이 ‘주일무적’이고 ‘응무소주’인 것이다.

< 2 >

지기일부지기이(知其一不知其二), 여기서 다석은 주일무적의 主一과 지기일의 하나를 구별한다. 전자는 사람이 알 수 없는 절대적 영원한 것인 반년 후자는 상대 세계에서 찾고 구하는 비교적 작은 열망(소망)이라 할 것이다. 사람은 누구든지 상대방이 모르는 다른 면을 감추고 있다. 그렇기에 그 일면만 보고 다른 면을 놓치면 인간관계에서 큰 일이 날 수 있다. ‘지기일부지기이’는 바로 이를 일컫는 말이다. 상대세계에서 저마다 작은 ‘하나’를 추구하며 살기에 인간에겐 양면성이 생겨나는 것이다. 주일(主一) 하려는 마음도 있으나 작은 하나, 상대적인 일에 매인 경우가 다반사인 탓이다.

하지만 주일무적의 주일(主一)은 상대세계의 작은 하나가 아니라 그의 원점을 말한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집 한 칸 마련하여 부모 편히 모시겠다는 꿈은 작은 하나이다. 자수성가를 하는 것이 상대세계에 있어 ‘하나’일 수 있다. 하지만 전체를 위해 나라와 겨레를 살리는 일에 자기 목숨 바치는 사람도 없지 않다.

목사의 경우에도 교회를 섬긴다하고 하늘을 예배한다 하지만 자신을 위해 치부하는 일이 다반사이다. 큰 뜻의 주일을 생각하는 목사가 적어진 것에 대한 다석의 염려가 크다. 이는 모두 어디 머물다 가겠다는 거주(居住)의 생각 때문이다. 사람으로 태어나 큰 하나에 헌신하겠다는 주일(主一)의식이 반드시 필요하다. 거듭 말하나 이는 머물겠다는 의식이 깨져야 가능한 일이다.

< 3 >

이어서 다석은 ‘소사행’(素砂行)이란 시 한편을 소개한다. 약상소사거래존(約上素砂去來存), 여기서 소사는 하얀 모래를 말한다. 본디 모래는 깨끗하다. 세상 속 인간은 모래처럼 깨끗하게 세상에 태어났다. 모래하나가 사람의 존재와 같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 모두 깨끗한 모래처럼 그렇게 되어야 마땅하다. 우리들 생각 속에는 정신이 들어가 있다. 생각이 내게 순종할 때 ‘소사’란 뜻이 내게 해당된다.

하지만 동시에 모래알 같은 자신 속에서 무수한 거래가 오간다. 장사꾼처럼 자신의 삶을 주판알 튕기며 계산하며 산다. 그럴수록 자신이 모래 알 하나인 것을 깊이 알아야만 한다. ‘가온찍기’가 필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무중한강수천몰’(霧中漢江水天沒), 안개 가득한 한강에서 볼 때 물도 하늘도 모두 없다는 뜻이다. 천지가 안개 속에 빠져버린 탓이다. 하늘도, 강 아래 위도 안보이니 수천몰(水天沒)인 것이다. 이처럼 소사로 태어났음에도 인간은 캄캄한 세상, 앞이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스스로를 욕망의 사슬로 묶어 장님처럼 만들고 있는 지도 모른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무엇을 찾는 일이 가능할지 모르겠다.

‘이신약사구약계 가서문수동문골’(以新約辭舊約繫 可西文髓同文骨), 사람들은 신약성서의 말씀으로 구약성서의 정신을 붙들어 매어왔다. 이를 주역에서는 괘사(卦辭)라 한다. 하지만 구약의 빛에서 신약을 해석하는 것이 옳다. 그래야 동서문명을 회통시킬 수 있는 까닭이다.

다석은 본래 현구동서(現舊東西)가 한 정신이라 믿어왔다. 생각에 있어서 새것, 옛것, 서쪽, 동쪽이 다를 이치가 없다는 것이다. 구약에 복음이 있고 동양 경전에도 복음이 가득 찼다는 뜻이다. 율법과 은혜의 시대란 구별도 무의미 하다. 동서양을 비롯하여 모든 것을 다 하나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다석의 ‘귀일’(歸一)사상이다. 이런 의미에서 다석은 예수는 무엇을 새롭게 보이고자 온 것이 아니라 자기완성을 위해 세상에 ‘나신이’라 했다.

지금 우리도 그 나신 바를 좆아 살고 있을 뿐이다. 그리스도를 완성하는 것이 우리들 삶의 목표인바 그것이 바로 주일(主一), 곧 참 하나의 말씀을 완성하는 일이겠다. 이는 기존 서구 신학에서 말하는 소위 로고스 기독론과 크게 다르다. 예수를 스승으로 고백하며 그 길을 따르는 수행적 기독론이라 불러도 좋겠다. ‘큰 하나’와 하나 되었던 예수를 좆아 그 길가다 우리 역시 길 되라는 것이 다석의 가르침이다.

< 4 >

본 장 결론으로 다석은 소풍(逍風)의 깊은 뜻을 소개했다. 고 천병상 시인의 말처럼 우리 인간은 이 세상에 소풍 왔다는 것이다. 세상에 거주할 목적이 아니라 잠시 다니러 왔다는 말이다. 그래서 다석은 세상을 ‘무주계’(無住界)라 했다. 소풍 다녀가듯 잠시 머물다 가는 곳이 바로 세상이다. 머물고자 하는 욕망을 버려야 우리는 주일(主一)할 수 잇고 그리스도를 자신 속에서 완성시킬 수 있다.

이정배(顯藏 아카데미)  ljbae@mtu.ac.kr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김상옥로 30, 402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 윤인중  |  편집인 : 이정훈  |  청소년보호책임자 : 윤인중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20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