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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노련만이 가능했다김상집 광주기노련의 산증인
권이민수 | 승인 2021.02.01 19:07
▲ 한국기독노동자총연맹 핵심 3인방이었던, 유동우, 신철영, 한명희 선생님들과의 인터뷰에서 빠짐없이 등장했던 광주 기노련. 그 산증인이었던 김상집 선생. ⓒ권이민수
80년대 민주화를 향한 치열한 투쟁 속에 함께했던 기독인 노동자들이 있었다. 바로 기독인 노동자들이 주체적으로 만든 단체인 한국기독노동자총연맹(이하 기노련)이다. 그러나 기노련은 다른 단체에 비해 많은 이들에게 낯설기만 한 이름이다. 그래서 에큐메니안은 기노련의 활동을 조명하고 당시의 상황을 독자들에게 전해보고자 기노련에서 활동했던 민주화 투쟁의 선배들을 찾았다. 먼저 만난 인물들은 전국 기노련 창립에 큰 역할을 했던 3인방 유동우 소장(관련 기사: 「유동우 한국기독노동자총연맹 초대 회장을 만나다」, 첫 번째 기사, 두 번째 기사), 신철영 선생(관련 기사: 「기노련 탄생의 산파, 신철영 선생」, 첫 번째 기사, 두 번째 기사), 한명희 선생(관련 기사: 「기노련 탄생의 산파, 신철영 선생」, 첫 번째 기사, 두 번째 기사)이었다. 이들은 기노련 탄생의 역사와 기노련 활동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이번 기사는 광주기노련에서 열심히 활동했던 김상집 선생과의 대화를 담았다. 광주기노련은 서울권이 아닌 지방에서 활동한 기노련의 한 지부로 앞서 인터뷰한 세 명 모두 ‘치열하게 활동했다’고 증언할 만큼 모두의 기억에 강렬하게 남은 단체다. 

지난 1월 26일 광주의 한 카페에서 김상집 선생을 만날 수 있었다. 멋진 중절모를 쓰고 나타난 김 선생은 잠깐의 대화에서도 에너지가 느껴질 만큼 활기가 넘쳤다. 그는 야학, 소모임을 중심으로 진행된 광주지역 노동운동의 역사와 고민, 광주기노련의 탄생과 결말 등을 열정적으로 이야기했다. 앞서 보도된 기사들을 본 독자라면 광주에서 있던 또 다른 치열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 먼저 독자님들께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김상집입니다. 저는 광주기노련과 그 시작부터 함께 하며 다양한 활동을 했었습니다.

▲ 기노련 활동 이전에는 어떤 활동을 하셨나요?

저는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 교회를 다녔었습니다. 광주에서 꽤 이름이 알려진 교회였죠. 목사님이 훌륭하신 분이었습니다 훌륭한 목사님 때문에 교회에 매력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교회를 다니면서 신학 분야에 관심을 가지게 됐고 해방신학, 민중신학 등 다양한 신학의 장르를 공부하게 됐습니다. 불트만, 몰트만같은 신학자의 글부터 평신도신학, 농민신학 등 다양한 신학서적도 탐독했었죠.

군대 가기 전에는 공장생활을 했었고 군대에 다녀와서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목격했습니다. 그 이후에 5.18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일지를 기록했었습니다. 그 기록 때문에 수배자가 되기도 했었죠. 수배 당시에는 서울 구로공단 쪽에서 머물렀습니다. 수배는 82년에 해제됐었어요. 그 후에 광주에 내려와서 들불야학, 백제야학, 샛별야학, 무등야학 등에서 활동했습니다. 야학이라는 것은 학생들에게 근로기준법, 노동조합법 들을 가르치고 노동운동에 대해 가르쳐 노동운동가를 키우던 공간입니다.

학생들이 방학을 하고 현장에 오는 경우가 많았는데 사실 노동운동에 대해 잘 모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렇게 한 1년 정도 활동하다가 가버리고요. 현장의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뭔지도 몰랐고요. 근로기준법, 노동조합법 등을 파악하고 있어야 노동운동이 가능한데요. 그런 파악은 단순히 책 펴고 공부해서 아는 것이 아니었죠. 그래서 야학에서 같이 막걸리도 한잔 하면서 회사의 근로기준법 위반 사항이 뭔지 등 대화를 나누곤 했습니다.

그렇게 공감을 얻어내고 임금체계에 대해 기본적으로 알아가고 통상임금, 각종 수당 등 기본 윤곽을 잡았습니다. 내가 몸담고 있는 현장의 문제가 무엇인지 알고 주위 동료로부터 공감을 얻어낼 수 있기도 했고요. 사람들에게 노동조합이 뭔지, 노동자를 보호하는 것이 뭔지 또 어떻게 보호하는 것인지 등 다양한 정보들을 공유했습니다. 동료를 모아내는 것도 학습할 수 있었고요. 야학은 그런 곳이었고 제가 맡아서 했었습니다.

현장에서 소모임도 만들었습니다. 공장이 어떻게 이뤄지고 어떻게 동료를 확보할 것인가를 사람들이 깨닫고 숙지하게 했습니다. 또 공장 내 문제점을 개선하도록 구축하기도 했고요. 그런 소모임은 이후에 노동조합을 만드는 밑거름이 됐습니다.

80년대에는 노조신고필증이 나오기 어려웠습니다. 노조가 설립되기 어려웠다는 뜻이죠. 그래서 노조창립총회와 동시에 농성 파업을 들어가곤 했어요. 그러면 밤을 새워가면서 동지가 흩어지지 않고 투쟁을 이어나갈 수 있도록 어떤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운영할 것인가를 다뤘어요. 짧게는 2~3일 길게는 보름, 한 달까지 파업을 지속해 가야하니까 실천이 중요했거든요. 그런 것도 제가 교육했습니다. 그렇게 조직운동가를 탄생시켰죠.

▲ 기노련 창립에는 어떻게 함께 하시게 된 건가요?

앞서 소모임 진행에 대해 이야기 했었는데요. 당시 광천동에 공단이 있었습니다. 그 노동자들과 학습했었죠. 그런데 야학 출신이 가지고 있는 문제가 있었어요. 그 문제가 뭐였냐면 관념론에 빠져있다는 것이었죠. 야학 출신들은 민중과 지식 논쟁에 빠져서 지식인처럼 행동하려고 했었어요. 자신도 공부해서 잘 안다고 자만에 빠진 거죠. 그래서 섣불리 노조를 만들고 그러다보면 노조가 깨지고 하는 일이 많았어요.

광주의 학생운동 출신 중에 공장에 들어간 사람이 많이 있었습니다. 당시 가톨릭노동청년회가 있었는데요. 철저히 성당 중심으로 진행해서 일반 노동자가 가톨릭노동청년회 활동에 참여하기 어려웠습니다. 물론 성당 중심으로 운영하다가 노조가 생기면 노조를 통해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전두환 시절 노조 만들기가 어려웠거든요. 그래서 가톨릭노동청년회가 노조를 통해 활동하는 경우가 흔치 않았죠. 결국 노동자에게는 공장 밖에 비빌 언덕이 필요한데 가톨릭노동청년회는 한계가 뚜렷한 거예요. 그렇다보니 야학에서 있던 학생들이 더욱 노조를 만들고 싶어 했던 거죠.

저는 그 친구들에게 “현장에서 소모임을 꾸려나가야 뭔가 일을 해낼 수 있지 아무런 역량도 없이 깃발만 든다고 사람들이 따라오겠느냐? 노동운동은 특히나 네가 열 걸음을 뗄 힘이 있으면 열 사람이 한 보 전진하도록 하는 것이고 이 것이 운동의 올바른 방향인데 너 혼자 앞서 나가면 한계가 뚜렷하다. 독재체재에서 너 혼자 해고되면 바로 끝이다”라고 이야기했었어요. 그런데 그런 이야기들은 공부를 좀 하는 학생들에게는 들어가지 않아서 설득이 안 돼요. 그 학생들은 무조건 노조 만드는 법 가르쳐달라 이거에요.

그러면 결국 제가 가르쳐주죠. “총회하고 참석자 회의록 신고필증 내면 되고 이후에 대여섯 가지 과정이 더 있는데 그건 나중에 접수하면 된다”라고요. 그렇게 일 저지르고 갑갑하면 나한테 도와달라고 하고 그때마다 도와주다보면 정보기관에서 날 또 잡으러 오고. 그러면 어쩌겠어요?(웃음) 도망쳐야지 뭐. 그러다보면 결국 다른 노동자 학습도 못하게 되는 거죠. 이런 식이 두세 번 반복되다보니 안되겠다 싶더라고요. 물론 노조 만들면 좋지만 그런 식으로 만들어봤자 금방 깨지게 돼있으니까요.

당시 제가 광주 EYC 회장을 맡고 있었는데 EYC내에 노동선교분과를 만들게 된 계기가 그거였어요. 그 분과에서 이런 문제가 터졌을 때 얘기를 하고, 풀고, 해결하는 것으로 정리했던 거죠. 그 외에 문화선교분과를 따로 만들기도 했고요.

그러다 저희도 가톨릭노동청년회처럼 기독교노동청년회 형식으로 새로운 단체를 발족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이와 관련해 목회자와 상의도 했었죠.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유동우 선배가 광주에 찾아왔어요. 동우 형이 와서 기독교노동단체를 만들겠다고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마침 우리도 기독교노동청년회를 만들려고 한다고 했더니 유동우 선배가 “무슨 노동청년조직이냐 노동자대중조직을 만들어야 한다”고 저한테 주장했어요. 그러면서 내가 노동자대중조직을 서울에서 만들려고 하니깐 같이 하자고 그러는 거죠. 유동우 선배는 저를 설득하려고 3일 정도 광주에서 머물렀습니다. 그렇게 있다 보니 동우형 의견이 논리적으로 맞다고 동의하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좋습니다” 이야기했죠. 그렇게 해서 기독교노동자연맹이라는 명칭까지 합의하게 됐죠. 이후 유동우 형님은 서울로 올라가셨어요. 광주기노련의 출범에 얽힌 이야기에요. 

광주기노련 초대 회장은 정봉희 씨가 맡았어요. 정봉희 씨는 저와 기본적 학습은 마친 상태였습니다. 그는 현장 사람을 만나면 막힘없이 지도하던 사람이었고 한명의 유능한 조직운동가였죠. 저는 기노련 지도위원으로 있었습니다.

▲ 기노련은 아직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은 단체인데요. 특히 광주지부는 더더욱 많이 알려지지 않은 거 같습니다. 광주기노련을 독자들에게 소개하신다면?

기노련은 노동계에서 대표적인 단체였었습니다. 85년, 86년, 87년, 6월 항쟁, 노동자대투쟁 그 이후 한 2년을 더한다면 88년, 89년까지도 포함될 텐데요. 당시 기노련이 아니면 노동운동에 대중동원이 거의 불가했었습니다. 기노련을 잘못 알고 계신 경우가 많은데, 6월 항쟁 당시에 노동계 대표가 유동우 씨였습니다. 광화문에 집회를 한다고 하면 그 집회에 인원 동원을 할 수 있는 단체가 없었어요. 당시 민통련도 얼마 안됐으니까요. 학생운동조직도 쉽지 않았었죠. 그런데 기노련은 가능했습니다. 당시 보통 800명은 동원할 수 있었습니다. 기노련이 그런 식으로 항상 상당수를 동원했기 때문에 노동계에서 두말할 필요 없이 대표성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85년부터 약 5년 동안 인원동원 가능한 단체는 오직 기노련뿐이었습니다.

그러다 이후에 기노련을 두고 기독교를 빼고 노동자조직으로 장악해야 한다는 주장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 때 EYC 같은 조직도 일반청년운동조직으로 다 빠져나가고 세가 약해지던 때였어요. 교회 안의 조직들이 학내조직으로 입장을 선회해버리니깐 자연스럽게 약해진 거거든요. 기노련도 비슷했던 때였죠. 그러니깐 신철영 선배나 목회자들이 의외로 기독교를 빼도 좋다고 찬성하더라고요. 완전 똥배짱이었죠.(웃음) 언제라도 자기들이 깃발을 들면 민중들이 깃발 아래로 모일 것이라고 착각했던 거요. 가톨릭은 가톨릭노동청년회에서 사람들이 나가도 그 조직을 유지했었거든요. 그래서 계속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개신교는 개교회중심이다보니 단체를 해체하고 썰물처럼 사람이 빠져나간 뒤에 다시 복원이 되지 못했어요. 그래서 기노련을 알지 못하는 분들이 많아진 거 같습니다.

지난 2015년에 기노련 창립 30주년 행사를 했었는데 제가 그때 단도직입적으로 신철영 선배한테 “왜 그때 형님은 기노련 해체하자고 그랬어?”라고 기노련 해체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기도 했었죠.(웃음)

▲ 광주기노련 활동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나눠주시겠어요?

광주기노련 창립 이후에 있던 일인데요. 당시 기노련 회원 가운데 여성 노동자가 꽤 많았는데 대부분 무등양말공장에 다니고 있었어요. 그런데 무등양말공장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간 거죠. 그래서 NCCK인권위원회랑 함께 지원 나갔다가 경찰에 붙잡혀서 하룻밤 형무소에서 자고 나오기도 했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기노련을 만들고 활동하는 과정에서 우여곡절이 많았었습니다.

기노련이 본격적으로 활동에 들어갔을 때가 85년, 86년, 87년이었죠. 기노련은 대우전자 등 여러 현장에 노조를 만들고, 현장에서 투쟁도 진행했었습니다. 특히 6월 항쟁 이후 7월, 8월, 9월에 노동자대투쟁이 있었어요. 그때 50개가 넘는 노조를 만들었죠. 그런데 그쯤 되니 기노련이 현장의 노동자 대중을 담아낼 수 없어지더라고요. 노조가 너무 많아져서요. 그래도 해야 할일이 많이 있다 보니 계속 이어가다 결국 기노련은 한계에 봉착했죠.

아까도 잠깐 언급했는데요. 그쯤 신철영 선배, 김문수 전 국회의원이 와서 종교를 떼고 기노련을 일반노동자조직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었어요. 이에 관해 몇 차례 이야기를 나눴었죠. 당시 저는 반대였습니다. 그런데 신철영, 유동우 선배는 이에 찬성하고 기노련을 해체하는 방향으로 나가더라고요. 결국 광주기노련은 전국기노련 해체와 상관없이 광주에 계속 있는 것으로 결정됐죠. 그런데 광주기노련에도 유사한 내부 고민이 있었습니다. 현장 노조 50개가 넘는데 광주기노련도 이들 중심으로 나가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거든요. 저 같은 경우는 좀 달랐어요.

80년 이전까지는 산업별노조체계(이하 산별체계)였어요. 산업별로 노조가 있었죠. 그런데 5.18 광주민주화운동이후에 국보위에서 법을 바꿔서 기업별 노조로 변화되게 됐어요. 그렇게 되니깐 산별체계에서 협조하고 싶어도 제3자 개입금지조항(노동자의 단결과 단체교섭, 노사협의, 쟁의행위에 관해 제3자의 개입을 금지하는 조항)에 걸리게 돼서 문제가 됐죠. 광주기노련에서 내부고민이 있던 당시는 제3자 개입금지 때문에 산별체계 협조가 어려운 상황이지만 6월 항쟁 이후였거든요. 그래서 저는 산별체계 네트워크를 형성해서 공동보조를 맞춰 가는 게 바람직할 거 같다고 주장했어요. 현장 노조 중심으로 가기보다는 산별체계로 나가자는 이야기였는데요. 사람들은 제 주장에 별로 관심을 안기울이더라고요. 결국 광주 지역에서는 기업별 노조의 한계 속에서 노조단위를 하나로 묶어 ‘광주지역노동조합협의회(이하 광노협)’가 생겨나게 됐죠. 그게 89년도였어요. 88년에서 89년 넘어가는 시기에 이와 관련된 치열한 논쟁이 있었던 거죠. 광주기노련은 무등교회에 사무실이 있었는데 이 바람에 사무실 자체가 공중분해 됐어요. 노동운동이 광노협으로 싹 이전되면서 교회가 텅텅 빈 거죠. 광노협 활동을 통해 전노협이 이후 만들어지게 됐어요. 전노협 만들어지기 이전에 광주는 이미 광노협을 만들었어요. 그리고 광노협 모델이 전노협으로 성장해 갔습니다. 광주기노련은 그 이후 그냥 자연스럽게 해산되었습니다.

김상집 선생은 쉼없이 많은 이야기를 쏟아내며 연신 마스크를 끌어 올렸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마스크를 착용한 채 인터뷰를 진행하는 탓도 있지만 그만큼 김 선생이 열성적으로 말했다는 뜻도 된다. 그의 이야기에는 기노련을 향한 애정과 자부심이 잔뜩 담겨 있었다. 기노련의 활동이 시대의 흐름으로 어쩔 수 없는 한계에 부닥친 내용을 말할 때는 아쉬움도 느껴졌다. 그가 얼마나 열정적으로 활동했는지 느낄 수 있는 대목이었다.

다음 기사에서 김상집 선생은 기노련 활동에 대한 생각과 의견, 기독교 신앙의 의미 등을 독자들에게 들려줄 예정이다.

권이민수  simin004@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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