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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민지역 아이들을 위해 해야 할 일을 찾았던 것이다정명기 목사, 『한국 감리교회 빛과 그림자』를 추적하다 ⑵
홍인식 대표(에큐메니안) | 승인 2022.01.16 16:21
▲ 정명기·정명순 목사 부부의 관심은 늘 빈민지역에 있었다. 특히 아내 고 강명순 목사는 빈민지역아동들에게 향하고 있었고 이들을 위해 해야 할을 진행하던 중 한나라당 비례대표 제의가 왔었다고 했다. 망설이는 아내를 독려한 것은 그 자신이었다고 하는 정명기 목사. ⓒ홍인식

구속과 석방이 계속되를 세 번이나 감당해야 했던 정명기 목사. 그런 어려움을 겪고 나서도 여전히 서슬퍼런 군사독재정권이 살아있음에도 그가 향한 곳은 도시빈민지역이었다. 그런 그에게 들려왔던 사당동이 철거된다는 소식. 그는 철거를 준비하며 더 장기적인 전략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런 시절이 지나며 아내인 고 강명순 목사를 만나 결혼도 하게 되었다. 둘의 지향점은 모두 빈민지역에 있었다. 특히 고 강명순 목사는 빈민지역의 아이들에로 향해 있었다. 고 강명순 목사는 지역아동센터 법제화를 이끌어낸 ‘빈곤아동의 대모’라고 불렸다.

고 강명순 목사는 IMF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에는 국내 지역아동센터 1호 격인 ‘안산 예은 신나는집’을 만들었다. 2000년에는 ‘신나는조합’을 설립해 저소득층 자립을 위한 무보증 소액대출 사업을 벌였다. 당시 국내 최초의 마이크로크레디트 사업이었다.

이후 2003년에는 아동복지법에 지역아동센터 설립의 법적 근거를 넣게 했다. 이 과정에서 그 당시 여당이었던 한나라당 비례대표 1번으로 영입돼 18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하지만 이게 독이 되었을까, 수많은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고 정명기 목사는 증언한다.

정명기ㆍ강명순 목사 부부의 성향과 비슷한 그 당시 야당이었던 민주당 국회의원들을 찾아가 문을 두드렸지만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는 정치권에게 실망이 가득해졌다고 한다. 그러던 차에 우연히 찾아온 기회라고 해야 할까, 한나라당 비례대표 제의에 고 강명순 목사는 주저했지만, 오히려 이를 독려했던 것이 자신이라고 하는 정명기 목사. 그에게는 법을 정비해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분명한 기회라고 본 것이었다.

하지만 그 덕이라는 말이 우습지만 강명순 목사가 별세한 후이지만 여전히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했다. 그럼에도 후회는 없으며 아내의 죽음 이후 시간을 보내며 거대한 책을 완성해낸 것이다.

▲ 세 번째 구속에서 1년 좀 넘게 감옥살이하시고 출소 후에 왜 다시 사당동 희망 교회로 가셨습니까?

정명기(이하 정): 사실 저는 졸업하고 나서 처음 목회한 곳이 산업선교 분야입니다. 구로공단에 사무실을 두고 있었던 독산동 산업선교회에서 실습도 했었습니다. 그렇게 나의 관심은 본래 노동 목회와 노동선교였습니다. 도시 빈민 지역에서 사역을 하면서 빈곤 지역 목회가 나의 목회주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출소한 이후 도시 개발로 인해서 사당동이 철거가 된다는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당시 그 지역에서 목회하면서 신용협동조합을 조직을 해 희망신용협동조합을 만들고 다시 말하면 철거를 대비해서 준비하는 행위를 한 것이죠. 그 뿐만 아니라 유치원, 야간 학교, 진료 활동 등을 해 왔습니다. 이런 중에 구체적인 철거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그래서 철거가 되면 지역에서의 활동 등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게 되니까 장기적으로 일할 수 있는 곳을 찾게 되었습니다.

당시 감리교는 인천산업선교회가 있었고 김동환 목사가 총무로 막 일하기 시작했던 시기였습니다. 인천산업선교회에서 부평 지역의 노동선교를 위해서 교회를 세웠는데 그 교회가 광약교회입니다. 산업 선교와 관련된 부평 지역에 있는 사람들이 중심이 돼서 예배를 시작하면서 또 새로 온 사람들과 주민들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광야교회가 활기를 띠게 되었습니다. 그 교회를 중심으로 유치원, 유아선교원도 시작하고 진료 봉사활동과 노동 상담도 하면서 3년을 목회했습니다. 그 후, 감리교 선교국의 총무로부터 선교국 사회정책 담당 간사 직을 제안 받고 광야교회를 사임하고 선교국으로 갔습니다.

▲ 목사님의 지난 세월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까 목사님이 노동 선교에 많이 집중을 하다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선교로 관심이 옮겨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어떤 계기 속에서 변화가 발생한 것인가요? 고 강명순 목사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정: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저의 학생 때 영향이 중요했어요. 학생 때 KSCF 활동을 했는데 당시 오재식 선생이 학생사회개발단을 조직해서 훈련을 시켰습니다. 당시에는 농촌 선교보다는 도시선교를 많이 했습니다. 노동 분야도 있지만 노동은 그 다음이고 도시화가 심해지면서 빈곤 지역이 막 늘어날 때이기에 도시빈민선교에 대한 관심이 더 많았습니다. 그래서 도시빈민선교에 대한 교육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 경험이 결국 저의 관심을 도시빈민사역으로 향하게 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고 강명순 목사의 부스러기 선교회 창립과 활동도 결국에는 정 목사님과 협력 하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보입니다. 부스러기 선교회는 어떻게 출발했습니까?

정: 강 목사와 나는 결혼할 당시 빈곤 지역에서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강 목사의 관심은 어린아이들을 향하고 있었고 그래서 희망유치원을 시작했습니다. 사당동에서 목회와 아동에 관한 일을 계속해서 하다보니까 빈곤, 특히 빈곤 아동에 대한 관심이 커져가고 구체화되는 과정의 결과로 부스러기 선교회가 만들어지게 됩니다, 부스러기 선교회는 강 목사가 빈곤아동에 선교사역을 시작한 한참 이후인 86년도에 만들어졌습니다.

▲ 부스러기 선교회가 창립되는 과정을 말씀 해주시겠습니까?

정: 어떤 사정이 발생해서 빈민아동 선교에 대한 지원들이 끊어졌습니다.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어려워졌습니다. 그래서 자구책을 구하기 위해서 실무자들이 모였습니다. 당시 광화문에 있었던 크라운 제과에서 모였습니다. 자구책을 모색하다가 강 목사가 제안을 합니다. 대외적으로 후원금을 모으자는 의견을 냅니다. 후원금을 모금하기 위해서는 선교회 조직의 필요성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선교회 이름까지도 생각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실무자 중의 한 분이 성경에 ‘부스러기’라는 표현이 있으니까 그 단어를 이름으로 하자는 의견을 내놓고 그것이 받아들여져서 부스러기 선교회가 탄생하게 됩니다. 모금을 하면서 ‘사랑의 편지’를 제작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1986년 12월 9일 부스러기 선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 약간 미묘한 질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정명기 목사는 옥고도 치루는 고난 속에서 진보 운동을 이끌어 오신 분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인 고 강명순 목사가 이명박 정권 시절 여당 한나라당 비례대표 1번으로 국회의원이 되셨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는 놀랐고 아니 ‘어떻게 한나라당에 갈 수 있느냐?’라는 비판적인 생각도 했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도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전후 사정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정: 그 당시의 이야기는 제가 가끔씩 조심스럽게 설명해 오기는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직접 그 이야기를 해야 할 본인이 돌아갔으니까 더 자유롭게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당시 야당이었던 민주당의 안산지역 모 국회의원이 있었습니다. 그가 후일 법무장관도 했고. 당시 우리들이 부스러기 선교회도 시작을 했었고 그것이 발전하면서 소액대출, 소위 마이크로 크레디트 사업을 막 시작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두 가지 문제가 있었어요. 무엇보다도 소액대출과 관련된 법이 제정되지 않으면 상당히 일하기가 힘들어지는 상황이었습니다. 일명 마이크로 크레디트 입법화의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래도 가까운 건 그 당시 민주당 안산지역 모 국회의원이었으니까 그분과 긴밀하게 의논했어요. 우리가 설명을 하면 의원이 알아듣고 또 입법화 필요성에 대하여 이해를 합니다. 그리고 “알았다”라고 말해요.

그러나 그다음에는 아무것도 없는 겁니다. 팔로 업이 있어야 되는데 아무런 게 없는 거예요. 아무런 변호가 없었어요. 응답이 없는 것이지요. 일이 진척이 안 되니까 우리로서는 가깝다고 생각한 민주당 의원들을 찾아다나면서 입법화를 위한 호소도 했습니다. 그러나 전혀 응답이 오지 않아요. 그런 면에서 정치권에 대하여 많이 속상해하고 실망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12월에 대통령 선거가 있었고 이명박 후보가 정동영 후보를 엄청난 표 차이로 이기고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이런 일로 인해 마음이 많이 상해 있었을 때였는데 마침 미국에서 평화회의 참석할 기회가 생겨서 아내인 고 강 목사와 함께 미국에 갔어요. 그리고 회의를 마치고 귀국하지 않고 그냥 미국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그리고 30~40일 만에 귀국을 했습니다. 집에 돌아와 보니 우리가 없는 사이에 한나라당이 우리를 찾았다는 거예요. 우리가 미국을 향해 출발한 것은 이명박 대통령 취임 전인 2월 초경이었습니다. 그리고 한 달 여 만에 귀국하니까 한나라당에서 강명순 목사를 찾았다고 해요.

당시 한나라당에서 비례대표 후보자를 찾는데 특히 이화여대 출신 중에서 가난한 사람을 위한 사역과 관련된 사람을 찾았습니다. 그때 강명순 목사가 후보 진에 포함되고 그래서 내부적으로 조사를 했나 봅니다. 강명순 목사에 대해서 알아보니까 나름 전문성도 있고 또 그 당시에 빈곤아동과 관련된 일을 꾸준히 해오고 있었으니까 비례대표로 추천이 되었습니다. 당시 한나라당 사무총장이 연락을 해왔습니다. 그래서 내가 농담 비슷하게 “비례대표로 추천을 하는데 이왕 할 것 1번을 주면 모를까?”라고 말했던 적이 있습니다.

당시 강 목사는 한나라당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살았어요. 그래서 내가 설득을 했어요. 사실은 본인이 적극적으로 가겠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 제가 설득을 했지요. “우리가 그동안 현장에서 일하면서 민주당 의원들을 찾아다니면서 뭔가를 해보려고 얼마나 애를 쓰지 않았냐. 그런데 아무것도 된 일이 없으니까 차라리 당신이 국회로 들어가서 두 가지 일만 해라. 하나는 빈곤아동과 관련된 법 그리고 또 하나는 마이크로 크레디트 관련법, 이렇게 두 법만 제정하고 그만두면 좋겠다.” 그렇게 제가 설득을 했어요.

그렇게 해서 비례대표 1번 후보로 명단에 올라갔는데 여기저기서 온갖 비난의 소리가 쏟아졌습니다. 그때 여기저기서 욕을 정말 많이 들었습니다. 에큐메니컬 진영과 진보 진영에서 수많은 비판과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강 목사를 향해서 목사 사표 내라는 소리도 많이 들려왔습니다. 감리교 목사로서 한나라당 국회의원 했다고 하는 것이 불명예스럽다는 비판의 소리도 있었습니다. 사실 감리교회는 정치 활동을 못하게 돼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임기가 시작되면 알아서 사표를 때가 되면 내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 사이에 빗발치는 사표 압력이 쏟아졌습니다.

우리는 나름대로 현장에서 필요한 일을 하기 위해서 국회로 들어갔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강 목사가 국회의원이 되어서 법을 2가지 제정하게 되는데 그것이 위에서 말한 빈곤아동에 관련 법과 마이크로 크레디트 관련법입니다. 두 법을 제정하는 등 나름대로 4년 동안 빈곤문제를 풀어보려고 애를 썼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몇 사람이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아쉬운 점이 많습니다.

▲ 강 목사님이 한나라당 들어가게 됨으로써 진보 진영이나 에큐메니컬 진영에서 비난이 많았잖아요. 그런데 정 목사님이 그때까지 쌓아왔던 것들이 상당히 타격을 입었을 텐데 그런 비판이나 비난을 들었을 때 어떤 심정이셨나요?

정: 많이 어려웠지요. 그리고 그 어려움은 지금까지도 계속됩니다. 그렇지만 나는 목회자로서 쭉 살아왔으니까 아내가 한나라당 국회의원에 있을 때나 그만둘 때나 변함없이 사람들과 관계는 계속 해왔어요. 그런데 아내는 좀 달랐습니다. 사실 아내는 한나라당으로 가기 전 한 10년 전부터 기독교 쪽 사람들 관계가 멀어져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현장에서 열심히 일을 해서 그 현장 문제를 가지고 가서 교회에서 좀 뭘 하려하면 들어주는 교회가 거의 없었습니다. 당시 빈곤 문제나 빈곤 아동 문제를 가지고 교회가 적극적으로 나서는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아내는 그때부터 마음을 닫았던 것 같습니다.

국회의원 되기 전에 한 10년 전부터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관계가 소원해졌지요. 아내와 나를 향한 반대와 비판은 교계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정치계에서도 마찬가지의 비난의 소리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 대표정치인 당시 안산 지역구 민주당 의원이었습니다. 하여간 한나라당 비례국회의원직을 감당함으로써 상당한 오해와 어려움을 겪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정명기 목사는 대담 내내 한국교회 특히 감리교회에 대한 그의 깊은 사랑과 관심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는 이번에 발간한 “한국감리교회, 빛과 그림자”(신앙과 지성사)를 통하여 감리교회의 갱신과 변혁의 문제의 해결을 위한 몇 가지 과제를 제시하기도 한다. 정 목사는 특히 장기적 과제로서 선교적 어젠다의 우선순위를 전제하면서 몇 가지 과제들을 제안하기도 한다.

영혼구원을 위한 복음 전도운동을 필두로 해서 다원화된 사회에 적합한 선교적 과제의 개발, 고령화 및 저출산 사회에 대한 대안 만들기, 사회복지 선교 및 특수선교 확충, 여성참여확대, 분단극복과 평화통일 운동에 참여하는 구체적인 실천프로그램개발과 적용, 훈련프로그램의 정규화, 에큐메니컬 정신 및 훈련, 연합운동에 참여, 감리교회 역사의 전산화, 자료화 및 출판, 홍보, 판매 활성화, 사회적 경제를 통한 공유문화의 활성화, 생명의 존엄, 인권의 존중, 생명나눔운동활성화와 자연환경 친화적 문화 창조를 주장한다. 자세한 내용은 『한국감리교회, 빛과 그림자』의 일독을 권한다.

홍인식 대표(에큐메니안)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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