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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에 의해 학살된 양민, 북한군에 의해 전사한 국군보도연맹 관련자로 학살될 뻔했던 아버지를 생각하며
허호익(전 대전신대 교수) | 승인 2023.07.03 14:35
▲ 미군 장교 에버트 소령이 촬영한 정치범 처형 장면.

십수 년 전 처음으로 우리 아버지가 보도연맹 관련자로 학살될 뻔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즈음 나보다 스무 살이나 맏이인 큰 누나가 우리가 살았던 옛집에 가보자고 해서 구룡포에 간 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관광 명소로 알려진 ‘일본인 가옥 거리’의 한 이 층 건물을 가리키며, 우리 식구들이 그곳에서 살았다고 했습니다. 구룡포에서 태어났으나 3살 이후 포항에서 쭉 자랐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태어난 집을 가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내가 태어난 집을 둘러보고 있을 때, 큰 누나는 6.25 전쟁 초반에 구룡포에서도 보도연맹 관련자의 대대적인 학살이 있었다는 얘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우리 아버지도 여러 사람들과 함께 군인 트럭에 실려 끌려가기 직전, 알고 지내던 구룡포 지서 순경이 아버지를 발견하고 “허 선생, 왜 거기 있어요. 내려오세요” 하여서 트럭에서 내려오게 되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끌려가서 학살되었다는 것을 처음으로 듣게 되었습니다.

이미 양친이 모두 돌아가셔서 보도연맹과 관련한 자세한 내막을 물어 볼 수 없었고, 아버지께서 다산 정약용이 유배를 산 적이 있는 경상북도 영일군 지행면에서 한 때 면서기로 일한 적도 있어 보도연맹에 가입하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일은 잊고 지냈습니다.

최근 언론을 통해 김광동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위원장이 지난 6월 9일 영락교회에서 행한 강연 이후 질의응답 과정에서 “침략자에 맞서서 전쟁상태를 평화 상태로 만들기 위해서 군인과 경찰이 초래시킨 피해에 대해서는 1인당 1억 3천2백만 원의 보상을 해주고 있고”, 따라서 이러한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희생자 보상은 부정의 한 것”이라며, “부역 혐의 희생자의 부역 여부를 살펴보겠다”고 발언하여 논란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맹억호 충남 아산 민간인 학살유족회 회장은 “침략자에 맞서서 전쟁상태를 평화상태로 만들기 위해 군과 경찰이 부녀자와 젖먹이 아이까지 적법한 절차 없이 집단학살 한 것이냐”고 되물었다고 합니다.(<한겨레> 2023.6.11.)

이 보도를 보고 우리 아버지가 보도연맹 관련자로 학살될 뻔했던 구룡포 지역 양민 학살에 관한 자료를 찾아보았습니다. 다행하게도 박기철 시민기자의 “[나의 학살 현장 답사기] 포항 구룡포 앞바다와 고디굴”(<오마이뉴스> 2022.01.31.)이라는 기사를 찾게 되었습니다. 기사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950년 2월, 포항에 보도연맹이 발족한다. 과거 좌익 관련자들이 가입 대상이었지만 할당된 회원 수를 강제로 채워야 했다. 그래서 엉뚱한 사람들까지 강제로 가입하게 된다.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가입한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인민군은 남쪽으로 단숨에 밀고 내려와 1950년 7월에 영덕에 도달한다. 계속되는 인민군의 공세에 결국 8월 11일 포항은 점령된다. 이 사이 7월부터 포항 경찰서는 관할 지역의 보도연맹원과 좌익 의심자에 대한 예비검속을 실시하며 대대적인 검거 작전을 시작했다.

포항 경비 사령관이었던 남상휘 전 해군 준장(당시 중령)의 증언에 따르면, 신성모 국방장관이 육군참모총장과 해군 참모총장에게 좌익 분자 처형을 명령했다. 그리고 이 명령은 1950년 7월 초, 손원일 해군 참모총장 명의로 포항 경비 사령부까지 하달됐다고 한다. 1950년 8월 9일부터 해군 헌병은 구금된 인원 중 일부를 트럭에 태워서 이동했으며, 이렇게 구금된 사람들은 1950년 8월 9일에서 12일 사이에 희생당한다. 영일만 앞바다에서는 수장이나 총살로 희생된 민간인이 무려 200여 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이 기사를 통해 우리 아버지가 학살될 뻔했던 시기를 추정해 보면 1950년 8월 9일에서 12일 사이이더군요. ‘그때 만일 우리 아버지가 학살되었다면,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지 못 했겠구나’라고 생각하니 온 몸에 소름이 돋았습니다. 만일 내가 태어난 후에 우리 아버지가 학살되었다면 김광동 위원장의 저 발언이 어떻게 들렸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아마도 김광동 위원장은 ‘북한군에 의해 전사한 국군이 국군이나 경찰에 의해 학살된 양민’ 보다 고귀한 죽임을 당한 것이니 더 큰 보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전사자와 학살자의 통계를 찾아보았습니다. 놀랍게도 한국전쟁 중에 전사한 군국은 137,899명이지만, 민간인 학살자는 128,000명이고, 민간인 사망자는 244,963명이고 행불자도 303,212명이라고 합니다(국가기록원 6.25전쟁 피해현황통계 참조). 이는 공식적인 통계이고 민간인 희생자는 수가 50만에서 100만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고 합니다. 북한군에 의해 전사한 국군의 수와 국군과 우리 경찰에 의해 학살된 양민의 수가 거의 비슷하다는 사실이 충격이었습니다.

맹억호 회장은 특히 김광동 위원장의 발언이 영락교회에서 이뤄진 ‘영락교회 망언’이라며 유감을 표명했습니다.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1902~2000)의 멸공 사상의 영향을 받은 이들이 서북청년단을 만들어 제주 4.3사건 등 민간인 학살에 적극 가담했다는 것이 잘 알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작년 겨울 가까운 후배들과 남한산성의 한경직 목사의 우거처를 방문한 일이 떠올랐습니다.  한경직 목사의 청빈한 삶에 큰 감명을 받았고, 한경직 목사가 1992년 템플턴 상 받은 후 “일제 때 신사참배를 했는데 그 죄를 제대로 참회하지 않았다. 일생의 짐이었는데 우상숭배의 죄를 이제야 참회한다.”고 한 것도 훌륭해 보였습니다.

김광동 위원장의 발언과 관련하여 북한군에 의해 전사한 국군과 우리 경찰과 국군에 의해 학살된 양민의 죽음 중 누구의 죽음이 더 억울할까 하는 생각하다가, 신사참배의 죄와 서북청년단으로 하여금 멸공이라는 미명하에 양민을 학살하게 한 잘 못 중 어느 것이 더 클까 하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한경직 목사가 “그때 ‘서북청년회’라고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중심되어 조직을 했시오. 그 청년들이 제주도 반란 사건을 평정하기도 하고 그랬시오. 그러니까니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미움도 많이 사게 됐지요”라고 회고한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만약 한경직 목사가 탬플턴 상을 받은 후 ‘영락교회 청년들이 미움을 받게 된 제주 4.3 사건 학살 가담에 대해서도 참회했더라면 어땠을까’하는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허호익(전 대전신대 교수)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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