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애인의 의존성을 다시 사유해야 한다. ⓒGetty Images

민중신학은 일찍이 “강도 만난 사람이 그리스도의 역할을 했다”(1), “그리스도는 지금의 문제를 해결하는 이가 아니라 절규하는 이이며 그 절규가 우리 가슴에 사무쳐서 자기 영역에 안주해 있는 우리 자신의 상태와 우리가 구축해 놓은 논리를 깨뜨리는 이이다”(2)라고 주장한 바 있다.

이러한 입장에서 보면, 민중신학에서의 구원에 대한 질문은 민중의 고난이 극복되기 위해서 현재의 세상이 어떻게 바뀌어서 어떤 새로운 가능성이 실현되는 것이 필요한가라는 질문, 그리고 현재의 세상이 바뀌어야 한다면 그 바뀌는 과정에 우리 각자는 어떻게 관여할/될 것인가라는 질문과 동일하다. 이렇게 볼 때 민중신학에서의 민중은 사회적 고난의 자리에서 생성되는 장(場)이 존재함을 지시하는 언어가 되며,(3) 그 장의 작용에 주체들이 어떤 영향을 받게 될 것인가가 문제가 된다.

이러한 민중신학적 관점에서 장애에 대한 신학적 고찰의 시도를 한다면 장애라는 사회적 고난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세상이 어떻게 바뀌어야 하며 어떠한 새로운 가능성이 실현되는 것이 필요한가라는 질문을 묻게 된다. 이 질문에는 당연히 다음 질문들이 따라오게 마련이다. (1) 장애가 왜 사회적 고난이 되는가? (2) 장애를 사회적 고난으로 본다면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세상이 어떻게 바뀌어야 하며 어떤 가능성들이 제기되고 있는가? (3) 제기되고 있는 가능성들에 대한 신학적 고찰은 어떻게 가능한가?

우선 “장애가 왜 사회적 고난이 되는가?”라는 질문에는 앞에서 언급했던 장애에 대한 사회적 모델에 관한 논의가 참조점이 될 수 있다. 앞에서 보았듯이 장애에 대한 사회적 모델에서는 신체적 손상이 사회 구조적 영향과 패턴에 의해 사회적인 보완을 받지 못함으로써 사회적 장애가 된다고 본다. 즉 신체적 손상이 사회적 장애가 되도록 작용하는 사회 구조적 영향과 패턴이 장애가 사회적 고난이 되는 이유인 것이다.

다음으로 “장애를 사회적 고난으로 본다면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어떤 가능성들이 제기되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있다. 이 질문에 대해서 앞에서는 시민권과 평등권의 입장에서 바라본 장애학의 논의를 중심으로 고찰했다면, 여기서는 그 논의 과정에서 제안된 장애에 대한 존재론적 담론들을 살펴 보고자 한다. 앞에서 전개한 장애의 사회적 모델에 관한 논의와 비슷한 시각에서 본다면, 이 존재론적 담론들은 장애인이라는 특수 집단의 존재론을 넘어 인간 그 자체의 존재론을 다시 사유하게 하는 논의들이다.

삶의 서사의 저자성

김원영은 사람을 존엄하게 대우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자기 인생의 자율적인 형성 주체, 즉 자기 인생의 작가/저자로서 대우하는 것이라는 견해를 소개한다.(4) 이 때 ‘저자’의 의미는 자기 삶의 경로에 대한 자율적 선택만이 아니라 그 선택들에 대한 성찰적 반응까지 포함한다.(5) 이 저자성이라는 관점을 견지할 경우 각 사람의 삶의 경로의 선택과 성찰의 종합을 서사의 프레임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김원영의 관찰에 의하면 장애인들은 이 저자성을 의심받는 경우가 많다. 정신장애나 발달장애 등으로 지칭되는 장애를 겪고 있는 장애인들처럼 저자성을 통째로 의심받는 경우가 아니더라도, 장애인의 삶의 선택에 대해서 타인이 장애 조건에 대한 최소한의 보완 이외의 다른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많으며 그 ‘인정하지 않음’이 기본으로 생각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6)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 김원영은 장애인이든 아니든 자기 삶의 서사를 추상화, 복잡화하는 능력의 차이가 존재할 수는 있더라도 그것이 각자가 구성한 삶의 서사의 고유성과 유효함을 부정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일정한 흐름 속에서 각각의 사안들, 사물들을 특정한 의미를 중심으로 통합하는 능력은 다수의 중증 발달장애인도 가지고 있으며, 또한 정신장애인의 서사 역시 그 서사의 객관적 작용에 대한 분석이 그 서사의 유효성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질 근거는 없다는 것이다.(7)

장애인을 비롯한 소수자의 저자성이 의심을 받는 경우의 적절한 대안으로 김원영은 ‘논리적 근거를 강제하는 대화’를 소개한다. 즉 소수자의 저자성에 의심을 제기하고자 할 때는 그 의심에 대한 논리적 근거를 의심하는 사람이 대야 한다는 것이다.(8)

김원영이 이 ‘논리적 근거를 강제하는 대화’의 예로 든 것을 하나 소개하면, 어떤 장애인이 팔과 다리를 어느 정도 사용할 수 있어 밥을 먹거나 용변을 처리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넥타이에 수트를 입고 외출하고 싶은데 넥타이를 맬 정도의 작업을 하기에는 장애가 심해서 그 활동을 위해 활동지원인을 신청했다고 가정하는 경우이다. 이 경우 보통 국민연금공단의 입장은 넥타이와 수트를 위한 활동지원인 제공은 불가하다는 것일 텐데, ‘논리적 근거를 강제하는 대화’의 원칙에 따르면 그 제공이 불가한 이유를 국민연금공단이 대야지 제공을 해줘야 한다는 이유를 당사자가 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예에 대한 김원영의 해설에 따르면, 밥과 용변이라는 생명 유지의 기본이 달성된 후 어떤 활동을 해 나가는가에 따라서 인간의 고유성이 출현한다면 ‘넥타이와 수트’ 역시 그 고유성의 영역이며 바로 그 고유성의 영역이 저자성의 영역이라는 것이다.(9)

하지만 삶의 서사의 저자성에 대한 이러한 지적을 수용하더라도 중증장애의 정도가 심각한 경우 등 그 저자성을 단독으로는 행사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지 않느냐는 질문이 가능할 수 있다. 이런 경우에 대한 김원영의 대답은 당사자 단독으로 저자성을 행사하기 힘든 경우라도 당사자와 그 곁에 있는 사람들이 공동 저자가 되어 고유한 서사를 만들어 나간다는 관점은 가능하다는 것이다.(10) 이는 뒤에서 다룰 ‘연립으로서의 자립’의 문제와도 연결될 수 있다.

연립으로서의 자립

정상적인 존재가 스스로 할 수 있는 밥 먹고, 옷 입고, 용변을 보고, 이동하는 등의 자기돌봄 활동을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아야만 할 수 있으니 장애인은 의존적인 존재라는 시선에 맞서서(11) 장애인 운동은 자신의 삶에 대한 결정 과정에 타인의 개입/보호를 최소화하고 삶의 선택과 결정의 모든 과정에 당사자가 참여한다는 자기결정권 개념을 중심으로 한 자립의 개념을 정립했다.(12)

그러나 이 자기결정권 개념을 중심으로 한 자립 개념이 장애운동의 중요한 성과임에도 불구하고 자기결정권 개념은 소비자주권 개념을 중심으로 하는 자본주의적 개인주의의 영향에 취약하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으며, 또한 근대적인 이성중심주의의 한계에도 직면하게 된다.(13)

이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첫 번째 단계는 우선 자립개념과 상호 배타적인 것으로 흔히 여겨지는 의존 관계를 자립 개념의 기초 단계로 정립하는 것이다. 김도현이 소개하는 구마가야 신이치로의 견해에 따르면, 인간은 약함을 서로 보충하고 의존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면서 강해졌는데 장애인의 경우는 의존할 것이 부족하여 의존할 수 없기 때문에 자립이 어렵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자립은 의존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무엇에/누구에게 등등에 의존할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는 상태이다.(14)

자립이 의존을 선택할 수 있는 상태라면 그 의존은 상호의존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상호의존에 근거하는 자립은 고립된 개인으로서의 자립이 아니라 상호 연결된 주체들의 자립이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김도현은 연립(聯立, interdependence)(15)이라는 용어를 제안한다.

연립이 상호 연결되어 의존함으로서 성립하는 주체들의 자립이므로 그 상호 연결과 의존의 과정에서는 상호 관련된 주체들의 판단과 소통의 문제가 당연히 제기되게 마련이며 이 판단과 소통을 제대로 거쳐야만 성립할 수 있는 것이 자기결정권이다.(16) 앞에서 논의했던 삶의 저자성/공동 저자성은 이렇게 성립된 자기결정권에 의한 자기결정의 연속으로 이루어지는 서사의 저자성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연립이라는 문제의식으로 기존의 장애신학의 논의를 고찰할 경우 중요한 질문 하나가 가능하다. 기존의 장애신학에서도 장애인과 연관되는 의존의 특성을 인간 일반의 하느님에 대한 의존과 연관시켜 장애인이 하느님에게 의존할 때 그의 자립이 가능하다고 논의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이런 논의는 장애인에서 하느님으로 이어지는 일방적인 의존을 전제하기 때문에 상호의존을 전제하는 연립 개념과는 차이를 보이게 된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러한 질문이 가능하다. 상호의존에 근거한 연립은 인간 사이에서만 필요한 것이고 인간과 하느님의 관계는 일방적인 의존 관계라고 파악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상호의존에 근거한 연립이 이루어지는 자리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찾을 수 있는 것으로 파악되어야 하는가?

황용연(사회적 소수자 선교센터 무지개센터 대표)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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