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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는 사회가 만들어내는 것은 아닐까‘노라 엘렌 그로스’의 《마서즈 비니어드 섬 사람들은 수화로 말한다》 (한길사, 2003)가 이야기 하는 장애란
정리연 | 승인 2023.08.09 14:02
▲ 장애 개념은 신체적 손상과 함께 반드시 사회적 구조를 반영해야 한다. ⓒ정리연

마을의 주민 대부분이 청각장애인이라면?
그래서 청각장애인들과 비장애인들이 모두 수어를 사용해서 생활한다면?

보통 대다수 사람은 장애인을 신체적인 손상을 가진 사람, 업무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 지원이 필요한 사람 등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결국, 이러한 인식으로 장애인들은 사회적으로 편견과 배제를 받게 된다. 영화로도 만들어진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는 갑자기 사람들이 눈이 멀기 시작한다.

결국 도시 안에서 눈이 멀지 않은 사람은 주인공 여자밖에 없게 된다. 이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모두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반전으로 작용한다. 오히려 선천적 시각장애인들이 그 안에서 능력을 발휘하여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사람들에게 ‘정상 범주’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청각상의 문제 때문에 당신은 사람들과 의사소통하는 데 어려움이 있습니까?”
“사람들이 당신과 대화하는 능력을 지니지 못해 당신은 사람들과 의사소통하는 데 어려움이 있습니까?”

전자는 장애를 개인이 가진 의학적 기능적 문제라고 보는 개별적(의료적) 관점이고 후자는 장애인이 살고 있는 사회 환경의 문제를 중요하게 인식하는 사회적 관점이다. 차이를 느끼겠는가?

장애인? 이웃, 친구, 그냥 사람

마서즈 비니어드 섬은 매사추세츠의 남동쪽 끝인 코드 케이프에서 약 6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1640년대 청교도 운동으로 섬에 정착한 사람 대부분은 영국 켄트에 사는 사람들이었고, 유전적 난청에 대한 음성 유전자를 가지고 있었다. 차와 같은 이동 수단이 없는 사회에서는 친척들이 주변에 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더불어 새로운 이민자들이 없는 상황에서 결혼 상대를 공동체 안에서 선택하는 게 자연스러워지면서 유전적 고립이 발생했다.

그런 이유로 당시 섬에는 유전적 청각장애인이 많아지게 되었다. 이들은 소수가 아니었고, 가족은 물론 사회도 이에 완전히 적응했다. 마을 사람들은 청각장애인들을 ‘청각장애인’이 아니라, 그냥 ‘잡화점 주인’, ‘시장’, ‘누군가의 아버지’ 등 장애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다른 특징들로 기억했다. 80대의 한 할머니는 자신이 소녀였을 때 청각장애인이었던(handicapped by deafness) 사람들에 대해서 질문하자 “오, 그들은 장애인(handicapped)이 아니었어요. 그들은 단지 듣지 못하는 사람(deaf)이었지요”라고 한다.

듣지 못하거나 말하지 못하는 것은 장애 조건이 아닐 뿐만 아니라 남에게 주목받는 대상도 아니었다. 어떤 사람이 청각장애인인 경우에도 그 사람의 청각장애는 비장애인과 그 사람을 구별하는 것으로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에 대한 다른 모든 것을 기억해낸 다음에 떠오르는 그 무엇이었다.

청각장애인의 가장 큰 문제는 단순히 들을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청력의 부족이 사회적인 소외를 초래한다는 점이다. 청각장애인의 사회에 대한 지식과 상식은 제한되어 있다. 왜냐하면 건청인들이 그들과 의사소통하는 것을 어렵게 보거나 불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 의사소통할 때의 어려움과 건청 세계에 일반적으로 만연되어 있는 청각장애에 대한 무지와 잘못된 정보가 합해져 청각장애인의 교육, 고용, 지역 사회 참여 그리고 시민의 권리 등 생활의 모든 측면에서 어려움을 야기시킨다. 그러나 비니어드에 사는 건청인들은 영어와 이 섬에서 쓰는 수화, 두 가지 언어를 사용할 줄 알았다. 이러한 적응은 단순히 언어의 중요성 이상의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대부분의 청각장애인을 나머지 사회와 분리시키는 장벽을 제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자유롭게 소통하는 사회

영어가 기본 공통어이긴 했지만, 주민 대부분이 어릴 때부터 청각장애인들과 어울리다 보니 자연스럽게 수어를 익혔다. 또한 어릴 때부터 양육자에게 수어를 배웠다. 한평생 자연스럽게 이웃과 수어로 소통했다. 마치 제2외국어라고 할까?

그래서 청각장애인들도 어떠한 장벽이나 어려움 없이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갔다. 비장애인과 마찬가지로 학교에 갔고, 직업을 얻었으며, 결혼을 했다. 사회는 수어를 마치 각자의 언어인 것처럼 대했다. 이 사회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어려움 없이 소통하고 경제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확장된 가족처럼 기능하였다.

나의 정보제공자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수화를 정식으로 가르쳤다고 기억하는 사람은 없었다. “내가 당신에게 말해주겠습니다. 나의 추측으로는 그것은 일종의 본능 같은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 당신은 그것을 배우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당신은 그것에 언제나 노출 되었거든요. 정말로 섬의 위쪽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은, 수화에 대한 지식은 필수였습니다. 당신은 수화를 배워야만 했습니다. 누구나 그것을 알았고 (…) 그들은 여기서 잘 살아내려면 그것을 알아야만 했습니다.”

“나의 고모는 청각장애인처럼 수화로 말할 수 있었어요. 거의 모든 사람이 수화로 말했으니까요(섬의 위쪽 지역에서는). 왜냐하면 거기에는 아주 많은 청각장애인이 있었습니다. (…) 누구나 청각장애인과 어떻게 말하는지 안다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누군가가 마치 어떤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처럼, 청각장애인과 이야기하는 것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키지는 않았습니다.”

노라 그로스는 ‘장애’라는 것은 주변 지역 사회에 의해 조합될 수 있는 ‘사회적인 가공구조’라고 말한다. 개인의 제한된 능력은 생물학적 이상이나 질병 때문이 아니라 한 사회가 그 개인의 제한된 능력을 어느 정도로 잘 적응하게 하는지에 따라 이해될 수 있다는 관점은 장애에 대한 지평을 넓힌다.

마서즈 비니어드 섬의 이야기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완전히 통합된 사회의 모습은 어떠할지 실제적인 예를 보여준다. 한 개인이 지닌 ‘다름’이 완전히 수용되어서 그 다름을 가진 사람이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은 사람과 구별될 필요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그 다름이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이 얼마나 미미한지를 보여준다. 이 섬에서는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것은 처음부터 현재 우리가 의미하는 ‘장애’로 인식되지 않았고, 어떠한 편견도 채색되지 않은 ‘사실’만을 표현할 뿐이었다.

성인이 된 후에(일반적으로 섬의 위쪽 지역의 오래된 가정에 결혼한 후에) 이 지역으로 이사왔던 사람들까지도 수화를 배우기 위해서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1920년대 후반에 칠마크 출신의 한 남자와 결혼한, 지금은 70대 중반의 한 여인이 말했다. “나는 결혼한 후에 칠마크에서 수화를 배웠어요. 나의 남편이 나에게 수화를 가르쳤지요. 그는 칠마크에서 성장했고 모든 청각장애인들을 알았어요. 나는 그들과 함께 이야기할 수 있어서 우리는 대화를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언어 너머의 세계

청각장애가 ‘장애’가 아닌 그저 개인이 가진 특징 중 하나인 것이다. 한국 사회 역시 어린이집, 유치원 시절부터 수어를 하나의 언어로써 익히면 어떨까? 비단 수어에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라, 청각장애 등 다양한 신체 및 정신 장애가 있는 사람과 소통할 때 어떤 점을 유의해야 하고 어떤 도구와 방법을 사용해서 소통할 수 있는지를 자연스럽게 배우고 익힌다면? 모든 장애는 일상적인 삶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로 여긴다면…? 그렇게 되면 우리 사회도 장애를 하나의 특징 혹은 개성처럼 이해하는 정서가 보편적으로 되는 날이 되지 않을까. 마치 목소리의 톤이 높은 사람, 낮은 사람, 눈동자 색깔이 검은 사람, 갈색인 사람이 있듯이.

이 책은 현재 한국 사회에서 장애와 장애인의 문제에 접근하는 데 아직은 활성화되지 않은 사회학적·문화인류학적 접근을 새롭게 소개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흥미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아직까지 한국 사회에서는 장애의 개념을 개인 능력의 결손으로, 개인의 문제로 이해하는 게 일반적이다. 장애의 정의 규정에서도 여전히 의학적인 모델이 주요한 근간이 되고 있다. 장애는 개인 차원의 불행이라는 인식이 팽배한 한국 사회에서 사회가 개인의 제한된 능력에 어떠한 방식으로 구체적으로 반응해가며 그 과정에서 개인과 사회의 역동적인 관계는 어떠한 것인지에 대한 노라 그로스의 연구는 장애의 사회학, 나아가 장애수용의 사회학을 소개하고 정교화시킬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

장애인의 온전하고 긍정적인 정체성은 개인의 노력만으로 이뤄질 수 없다. 장애로 인한 불편은 어디까지나 사회가 정의한 ‘건강’이 정상으로 취급되기에 발생하는 차별이다. 장애인이 현대 사회를 살아가며 일상을 살아가고 도전할 때 장애가 무엇이라도 제한하는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차별 없이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라는 모범적인 사회는 절대적으로 비장애인이 먼저 적극적으로 장애를 이해하고 더불어 살아가기 위한 노력을 해야만 이룰 수 있는 것이며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대부분의 사람이 장애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마서즈 비니어드 섬 사람들과 같은 태도를 갖는다면, 수어를 아는 게 제2외국어를 하는 것처럼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것을 그 사람의 목소리가 다르다는 정도로만 생각하는, 그와 같은 사회도 먼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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