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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착적 근대화”, 평화를 위한 방향전환기타지마 기신(北島義信) 명예교수, 평화를 말한다 (2)
이정훈 | 승인 2023.12.18 04:28
▲ 기타지마 기신(北島義信) 욧카이치대학 명예교수가 아시아종교평화학회 창립학술회의에서 주제 강연에서 나섰다. ⓒ이찬수 대표 제공

지난 인터뷰 기사에서 기타지마 기신(北島義信) 명예교수는 평화 구축을 실행할 수 있는 풍부한 이론적 체계화를 추구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특히 국가의 틀을 초월한 사람들이 서로 대화하면서, 아시아 지역에서 인간적 상호 이해의 심화와 연대, 상호관계성, 용서와 화해, 타자 이해·공생 등의 문제를 검토함으로써, 비폭력에 의한 평화 구축을 실행할 수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이번 기사에서는 기타지마 명예교수가 이야기하는 ‘평화’ 개념에 대해 집중적으로 소개된다. 특히 평화를 이루기 위한 이론적 토대가 되는 기타지마 명예교수의 “토착적 근대화”라는 개념에 대해서 언급된다.

한일 간의 거리만큼이나 먼 마음의 거리를 극복해주신 기타지마 명예교수와 기타지마 명예교수와의 인터뷰를 주선해 주시고 한국어 질문과 일본어 답신을 유려하게 번역해 주신 이찬수 레페스포럼 대표께 지면을 빌어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 평화란 무엇이고, 종교와 평화는 어떻게 연결되는지요? 이와 함께 한일 간의 평화는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지도 의견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종교에는 공통적으로 상호 관계성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이것은 인체 각 부분의 상호 관계적 연계성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슬람에서 예언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신자들이 마치 한 몸인 것처럼 서로 친절 애정 동정을 나누는 모습을 볼 것이다. 그리고 신체의 일부가 아프면 온몸이 불면과 열로 반응한다.” 기독교에서도 이와 비슷한 “한 몸, 여러 지체'('고린도전서12장)라는 말이 있습니다.

불교의 근본 개념인 ‘공(空), 연기(緣起)’도 만물의 상호 관계성을 나타내는데, 그 기저에는 인체 각 부분의 상호관계성을 보여주는 ‘박티(bhakti)’라는 가르침이 들어 있습니다. 이것들은 ‘적’도 자신과 연결되어 있고, ‘적’을 섬멸하는 것은 자신의 사멸과도 일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종교는 모든 존재와의 다툼이 없는 서로의 존경에 기초한 공생, 즉 평화를 최우선으로 내세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종교에서는 이러한 평화를 파괴하는 폭력행위에 대해서는 방관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붓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자는 폭력에 겁을 먹고 모든 자는 죽음을 두려워한다. 내 처지에 견주어서라도 죽여서는 안 된다. 「죽여서는 안 된다」”(「진리의 말씀(Dhammapada)」 제10장). 이 「죽여서는 안 된다」는 생각은 이찬수 교수가 말한 ‘감폭력(減暴力)’의 행동과 연결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평화란 적극적으로는 모든 존재가 자기 존재를 충분히 개화시켜 ‘세계 만물의 행복과 연결된 정의와 자비가 실현된 상태’(김용해 서강대 교수)이지만, 소극적으로는 폭력이 없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폭력적이라고 해도 한편에서는 자기중심적일 수도 있습니다. 평화 실현의 방법은 모든 자기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약자의 고통을 먼저 생각하고 피해자의 아픔을 치유하는 것’(이찬수 교수)을 기축으로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저에게 가장 친숙한 『불설무량수경』에는 법장보살이 중생구제를 위해 48개의 서원을 세웠고, 그것이 성취되어 아미타불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 첫 번째 서원은 ‘내가 부처가 될 때 내 나라에 지옥이나 아귀나 축생의 것이 있다면 나는 결코 깨달음을 열지 않겠습니다’입니다. ‘지옥’이란 사람들이 서로 미워하고 서로 죽이는 전쟁 상태를 의미하고, ‘아귀’란 기아에 시달리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상태를 일으키는 것이 ‘축생’으로 상징되는 자기중심주의입니다. 이것은 정토교의 근본적 바람이 ‘평화실현’이며, 이를 방해하는 것이 자기중심주의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법적 정비와 생활 속에서 그것을 부단히 혈육화(血肉化)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요구되는 것이 「육신통(六神通)」이라는 능력을 몸에 익히는 것입니다. 그 능력은 ① 자기나 타인의 과거 역사를 아는 것, ➁ 자기 외부에 있는 세상 모든 것을 내다보는 힘, ③ 자기도 그 일부를 형성하는 세상 일체의 고락의 말, 소리를 듣는 능력, ④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바를 아는 능력, ⑤ 자기 외부에 있는, 자기가 원하는 곳으로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 자유롭게 갈 수 있는 능력, ⑥ 그것들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자기중심주의로부터 해방되는 것, 그 여섯 가지입니다. 이것은 ‘자기중심주의의 어리석음을 깨달으라’는 부처님의 부르짖음을 듣고 받아들임으로써 가능합니다. 이 목소리는 제일 학대받는 자, 약자에게서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한일 평화를 생각할 때 일본 식민지 지배가 초래한 가해의 책임을 명확히 하고, 그 일을 참회하고, 피해자의 목소리에서 부처나 신의 부르짖음을 듣고, 평화를 방해하는 것을 함께 제거해 나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아파르트헤이트 체제를 철폐하고 새로운 민주적 남아프리카의 출발을 가능하게 한 ‘진실화해위원회’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일 시민이 함께 종교 간 대화를 통해 아래에서부터 평화구축을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한일 학자들이 참여해 아시아종교평화학회 창립학술회의가 진행되고 있다. ⓒ이찬수 대표 제공

▲ 선생님의 ‘토착적 근대화’ 개념이 한국의 언론에서도 일부 소개되었습니다. ‘토착적 근대’란 무엇이며, 이것이 어떻게 평화에 기여할 수 있는지요?

오늘날 세계를 석권하고 있는 것은 19세기 중반에 확고한 위치를 점하게 된 「구미형 근대」의 세계화입니다. 그 이데올로기는 「구미형 근대」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자아」, 「이성」을 기축으로 한 「사상·문화」를 유일한 「보편적 기준」으로 삼는 것으로서, 상호 관계성을 거부하고, 자기의 외부성으로서의 「타인」을 거부하며, “「뛰어난」 구미 세계 VS 「열등한」 비구미 세계”라는 이항 대립의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 「구미형 근대」가 정착된 것이 오늘날 세계를 석권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시장 원리주의」나 다름없습니다. 그 현실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 부유층과 빈곤층으로 양극화된 ‘격차사회’의 존재입니다. 이러한 사회를 차이와 평등이 병존하는 평화적 공생사회로 전환해야 합니다.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구미형 근대」와는 다른 「근대」의 자세가 마땅히 요구됩니다.

그 방향은 각 지역에 뿌리를 두고 있는 종교·문화·사상에 내재하는 보편성을 오늘날 해결해야 할 과제와 결합시키면서 생기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내고, 비폭력·공생·평화에 기반한 ‘근대’의 구축에 힘쓰는 쪽으로 잡아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그러한 대응을 「토착적 근대」화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대응의 사례는 1970년대 개발도상국 세계에 동시적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1970년대 이란에서 일어난 ‘이슬람 혁명’(알리 샤리아티),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신학’(구스타보 구티에레츠),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흑인 의식 운동’(스티브 비코) 등 각 지역에 뿌리내린 토착종교를 기축으로 한 사회변혁운동에는 상호관계성, 자유평등, 차이와 평등의 병존, 존엄성, 타자 존중, 서로 돕는 공공성, 사랑(자비), 일즉다·다즉일(一即多·多即一), 자연과 인간의 비분리성, 개체의 존중, 비폭력.평화, 회복적 정의, 용서와 화해, 타종교와의 공생 등 자기중심주의를 초월한 인간의 공생이나 인간·자연 부흥의 기본적 개념을 공통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타가키 유조 선생(도쿄대 명예교수)에 의하면, 이러한 개념들은 7세기에 화엄불교나 이슬람을 기반으로 서아시아와 동아시아에서 생겨났으며, 그 개념들이 사회 시스템이나 네트워크와 결합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을 선생은 ‘슈퍼근대(초근대)’라고 명명했는데, 제가 제안하는 토착적 근대는 이러한 ‘슈퍼근대’를 오늘에 어울리게 재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하수맥으로 흐르고 있는 ‘슈퍼근대’ 사상의 구체화는 토착성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13세기 일본의 가마쿠라 신불교, 1860년대 최제우의 동학사상과 이를 계승한 ‘한살림’ 사상, 우분투사상과 결합한 남아프리카의 상황신학, 알리 샤리아티의 이슬람 부흥사상, 반야스쿠니운동과 결합한 신란(親鸞)사상 등은 저마다 토착성을 지닌 것임과 동시에, 7세기 이래 보편적 개념들이 현대에 구체적으로 표현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것들은 완성된 것이 아니라 심화의 도상에 있습니다.

토착적 근대는 특정 지역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구미 근대」의 대항 개념이 아니라, 본래의 「근대」를 부흥시킴으로써 「구미형 근대」를 그 왜곡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토착적 근대 개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지역에 뿌리를 둔 토착 종교입니다. 그것은 기독교, 이슬람, 불교 등 역사적으로 광범위하게 퍼져 정착된 종교만이 아니라 샤머니즘 등도 포함합니다. 이미 말했듯이, 모든 종교의 핵심은 평화구축입니다. 이 평화구축에 특징적인 것은 비폭력, 참회와 화해이며, 그 구체적인 예를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아파르트헤이트를 비폭력적으로 철폐시킨 데서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대응이 토착적 근대의 사례이기도 합니다.

저는 아시아에서, 좁게는 동아시아에서 이러한 토착적 근대에 기반한 평화로운 지역공동체를 구축할 수 있는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 향후 학회의 운영방안, 방향, 전망에 대해, 그리고 한국 종교계에 바라는 제언이 있으시다면 말씀해주십시오.

‘아시아종교평화학회’는 이제 막 설립되었습니다. 학회의 내용 등에 대해서는 앞으로 상호 대화를 통해서 구체화시켜 나가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시점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지금까지 쌓아 온 상호 존중에 근거한 대화와 이를 통해서 얻은 우정과 신뢰를 소중히 해가고 싶습니다. 타자는 자기와는 다른 존재입니다. 학회의 회원은 기독교인, 불자 등 종교적으로도 다양하지만, 종교에는 '국가'라는 틀을 넘어설 수 있다는 용이한 이점이 있습니다.

또 종교는 달라도 평화구축을 원한다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이 서로 다른 존재야말로 자기를 풍요롭게 하고 평화구축의 내용을 풍부하게 합니다. 앞으로는 한일이라는 틀을 넘어, 중국이나 대만, 동남아시아로도 참가자를 확대해 나가고 싶습니다. 현재 회원 중에는 이들 지역에 가까운 연구자도 있기 때문에 회원을 새로 확대하는 것은 가능할 것으로 보입니다.

학회 운영과 관련해 2년 임기의 회장 1명, 부회장 1명을 두고 있습니다. 회장과 부회장이 한 국가에 집중되지 않도록 배려하고, 2년 후에는 부회장이 되도록 하며, 학회 운영 전반을 위해 국가별로 지부장(사무국장 역할)을 두기로 창립회의에서 결정되었습니다. 그 외 각 지역에서 담당자를 정하는 문제, 학회비의 금액도 정해졌습니다.

학회는 일년에 한 차례 국제학술회의로 개최하고, 2024년에는 8월 후반에는 한국에서 열기로 결정했습니다. 학술회의의 공통 주제는 ‘정치와 종교’ 등이 후보에 올랐는데, 앞으로 검토하고자 합니다.

한국 종교계에 바라는 바가 있다면, 우리 ‘아시아종교평화학회’와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고 여러 가지를 가르쳐 주셨으면 하는 것입니다. 또한 공통의 주제를 정해 심포지엄 등을 개최할 수 있다면 대단히 기쁘겠습니다.

이정훈  typolog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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