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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무 선생과 함께한 여인들디아코니아 자매회 설립자 여성숙 선생 인터뷰
편집부 | 승인 2013.05.16 15:16

본지는 심원 안병무 기념사업회와 함께 안병무 선생이 1951년 창간했던 계간지 야성(野聲)을 웹진으로 복원하고자 합니다. 올해에는 본지에 ‘야성’란과 웹진을 통해 ‘나와 안병무’, ‘나와 민중신학’이라는 주제로 심원과 함께 했던 지인들의 글과 이야기를 게재합니다.

그 첫 번째 순서로 본지는 심원의 지근거리에서 한평생 그를 도왔고 심원이 추구했던 공동체를 현실화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 여성숙 선생을 만나 안병무 선생과의 인연과 삶의 회고를 듣는 시간을 갖고 인터뷰 기사로 옮깁니다.

   
▲ (왼쪽부터)여성숙 선생, 안규숙 원장, 조헌정 목사ⓒ에큐메니안

1918년 황해도 송화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외할머니와 어머니와 함께 교회를 다니며 기독교인이 된 여성숙 선생은 당시 전형적인 시골교회의 신앙을 이어온 평범한 신앙인이었다. 18세에 집을 나와 독학으로 일본유학을 다녀와 경성여의전(현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을 거쳐 한국전쟁 당시 전주예수병원에서 수련의를 지낸 여 선생은 당시 국내 유일한 여성 흉곽내과 전문의이자 결핵 전문의가 되었다. 1988년 ‘인도주의 실천 의사상’ 첫 수상자가 되었고 2009년에는 사단법인 오월어머니회가 선정하는 '오월어머니상'을 받기도 하는 등 수많은 결핵환자들을 돌보며 한 평생을 살아왔다.

청년 시절 한국전쟁 전까지 서울성남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한 여 선생은 그 곳에서 송창근, 문동환 목사를 만났고 교회학교 교사와 성가대원으로 봉사하며 기장을 접했고 기독학생회활동을 통해 안병무 선생을 만나 새로운 신앙인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본지는 지난 달 10일 목포 디아코니아 자매회에서 백세를 몇 해 남기지 않은 노구임에도 톨스토이 같은 고전과 안병무 선생의 책을 손에서 놓지 않고 있는 여성숙 선생을 만났다. 두 시간 남짓한 대화를 통해 안병무 선생에 대한 회고와 디아코니아 자매회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여 선생이 겪은 지난 세월에 대한 역사를 들을 수 있었다.

   
▲ 디아코니아 자매회의 예배당 풍경.ⓒ에큐메니안

한국전쟁이라는 격랑의 역사 속에서 의사로 살며 제2국민병들의 참혹한 죽음의 현장을 체험했고 그 와중에 한국기독교장로회의 태동의 현장을 눈으로 목격한 여 선생의 삶을 통해서 한국현대사의 단면을 엿볼 수 있었다. 또한 안병무 선생과의 인연을 통해 역사적 예수를 접하게 되고 그에 이끌려 공동체를 만드는데 직접 관여하지는 않았으나 물적 토대를 선뜻 내어준 여 선생의 신앙인으로서의 자세 또한 귀감으로 접하기도 했다.

개신교 수녀인 ‘언님’으로 살지는 않았지만 그녀들과 함께 독신으로 디아코니아 공동체를 일구고 목포 도서지역의 수 많은 결핵환자들을 돌보며 평생을 살아온 여 선생의 삶과 역사는 한국기독교장로회의 자산임에 틀림없고 한국기독교가 기억해야만 할 인물이라 여겨진다.

다음은 지난 달 본지 발행인인 조헌정 목사와 목포 디아코니아 자매회를 방문해 여성숙 선생과 진행한 인터뷰 전문이다. 인터뷰는 디아코니아 자매회 안규숙 원장과 함께 진행했다.

   
▲ 디아코니아자매회 예배당 안의 모습ⓒ에큐메니안

   
▲ 예배당 뒤에 있는 기도실ⓒ에큐메니안

- 선생님 근황과 건강은 어떠신지요.

여성숙 선생 : 귀가 잘 안 들리는 것과 다리가 아파 거동이 불편한 것 말고는 괜찮아요. 주일 예배를 드리는데 요즘은 참석하지 못할 때도 있어요. 요새는 거의 누워서 책만 읽고 있어요. 누워서 책 읽는 시간이 좋아요. 옛날에는 책 좀 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참 많이 했는데 80넘어서 내시간이 많아져 책을 많이 읽게 되어 참 좋아요. 옛날에는 책 읽고 싶어도 너무 바빠서 읽지 못했는데 지금은 아무 책이나 많이 읽어요. 안병무 선생님의 책은 많이 읽었어요. 같은 책을 몇 번씩 읽기도 해요.

안규숙 원장 : 선생님은 83세까지 환자 진료를 하셨어요. 이후 책을 읽으실 때에는 대학노트에 정리해가며 읽으십니다.

- 안병무 선생의 글이 어떤가요? 어렵지 않나요?

여성숙 선생 : 쉬워요. 내가 많이 읽었으니 쉬워요. 안 선생은 글을 어렵게 쓰지 않아요. 어떤 사람의 글은 무슨 말을 그렇게 어렵게 쓰는지 어렵지만 (오랜 세월 동안 저자와 관계를 맺어)안 선생의 글은 쉽게 다가와요.

 

안병무 선생과의 인연, 욕으로 시작되다?

- 안병무 선생과의 첫 만남과 첫 인상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여성숙 선생 : 사귄지는 오래됐어요. 아마 첫째로 꼽아도 될 거예요. 농담이에요. 안병무 선생은 대학시절에 만났어요. 친구가 서울대 기독학생회(일신회)에서 뭘 한다고 가보지 않겠냐고 해서 따라 나섰는데 마침 그날 안 선생이 강사로 나온 거예요. 나는 속으로 ‘왜 하필 저 사람일까.’ 싶었는데 그 사람 얘기를 들어보니 제법 잘 해요. 그래서 ‘얘기를 잘 하신다.’ 생각했던 게 안선생과의 처음 만남이자 첫 인상이었어요. 그 다음에는 가끔 만났어요. 내가 의학공부를 하느라 학교에 늦게 들어와 안선생보다 4살 위였죠.

- 기독학생회 활동을 같이 하신 건가요?

아니요. 따로 기독학생회 모임이 있었고 각자 활동을 했고 가끔 연합활동을 했어요. 내가 졸업하고 그분들(안병무 선생을 비롯한 일신회 회원들)은 전주에 가있었는데 마침 나도 인턴으로 전주예수병원에 있었어요. 그분들이 전주에 있다는 소식 듣고 반가운 마음이 들었죠. 안병무 선생과 친구들은 전주에서 주일마다 예배를 열어 돌아가면서 설교를 맡아 했고 거기에 참여하면서 자주 만나게 됐어요.

- 1951년 4월 선생님이 안병무 선생에게 ‘소록도로 가서 나환자 치료를 하거나 결핵 요양원으로 가 볼까?’라는 말에 안 선생이 호통을 쳤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호되게 혼났어요. 그때는 서로 졸업하고 사회인으로 만난 상황이었어요. 안 선생은 한번 얘기를 꺼내면 인정사정이 없었어요. 옛날에 알았던 몰랐던 상관없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다 해요. 그 때도 몇 번 만났던 사이였고 해서 친구와 함께 안 선생에게 ‘친구와 함께 소록도로 가서 나병환자 치료나 결핵 요양원으로 가볼까?’라고 말했죠. 그랬더니 안 선생이 퍼붓는데 아주 꼼짝 못하게 해요.

당시는 내가 학교 졸업 하고난 이후라 시간이 좀 한가했어요. 그래서 ‘마산요양소에 갈까? 소록도로 갈까?’ 의논을 한다고 물었던 것인데 막 퍼붓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렇게 당하고 나서 ‘안 갈래요’ 했어요.(웃음)

- 안병무 선생은 왜 못 가게 했을까요?
 
장난을 치러 가느냐고했어요. 가려면 거기서 죽는다는 각오로, 그곳에 뼈를 묻는다는 마음으로 가라고 했어요. 환자들 데리고 장난치지 말라고 했어요. 그러려면 가지 말라고 했고요. 그런 얘기를 듣고 어떻게 가겠어요.

- 그 이후 선생님은 어떤 삶을 사셨나요?

그 사건 이후 전주예수병원에서 2년 반 동안 수련의로 있었어요. 그 다음엔 광주 제중병원에 7년 반 있었고 그다음에 목포로 왔죠. 그렇게 차근차근 여기로 내려오게 되었어요. 여기로 왔을 때 ‘이 다음은 제주도로 갈래나’싶었어요.(웃음) 정말 제주도 가고 싶었는데 못 갔어요.

- 여기 결핵요양원은 어떻게 맡게 되었나요?

원래 여기에서 친구가 결핵요양원(목포의원)을 운영했는데 그것을 인계 받아 운영하게 된 거예요. 그 당시에는 목포와 섬 지역에 결핵 환자들이 많았어요. 병원에 결핵환자들이 참 많이 왔어요. 그 모습을 보면서 애초에 다른 곳으로 가려다가 ‘어디면 어떠냐. 기왕 결핵환자들 돌볼 거라면 많은 곳에서 보자’라는 심정으로 주저앉은 거예요.

-  안병무 선생이 선생님의 삶에 영향을 주었다고 봐도 될 까요?

전주 예수병원에서 인턴 생활 이후 결핵 의사가 되기로 마음먹었어요. 그래서 광주 제중병원이라는 결핵의료원에서 7년 넘게 일할 때 안 선생이 가끔 찾아왔어요. 가끔 만나 얘기하면서 친해졌어요. 그러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해요. 이후 여기로(목포) 내려오게 됐어요. 여기에 결핵요양원을 설립한 후 안 선생은 가끔 내려와 쉬어가기도 하고 집필활동을 했어요. 당시 여기 시설이 좋지는 않았지만 기거할 방이 많았어요. 역사와 증언(1972년 4월 출판)을 여기서 집필하기도 했어요. 가끔 만나 욕도 얻어먹으며 친분을 쌓았어요.(웃음)

- 안 선생님은 어떤 분이었나요?

여성숙 선생 : 욕 얻어먹던 생각이 먼저 앞서요.(웃음) 때로는 매우 심한 욕도 했던 것으로 기억나요. 그만큼 거침이 없었던 사람이었어요. 그러다 보니 무슨 얘기를 하기에 앞서 그 양반 앞에서는 떨렸어요. 말도 잘 못하고 그랬죠. 그래도 오래 사귀다 보니 그런 것도 익숙해지기도 했어요. 돌아가시기 전에 안 선생이 ‘나한테 욕 많이 얻어먹었지?’라고 했고 나는 ‘지금도 귀가 아프다.’고 대답했어요.(웃음) 그러니 안선생도 웃었어요.

욕 잘하고 그 다음에는 거짓 없는 사람, 욕할 때 웬만하면 생각도 하고 그럴 텐데 그런 것 없이 하고 싶은 대로 해요. 나중에는 그것이 자기 하고픈 대로가 아니라 듣는 사람을 위해서 한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꾸밈이 없고 거짓말 안하고 누구든 눈치 안보고. 정직한 사람이었어요.

- 안 선생님의 신학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렇게 깊이 있는 질문에는 대답하기 어려워요.(웃음) 하여간 그 양반은 뭐를 한다하면 꾸밈이 없어요. 온 마음을 다 바쳐서 하고. 그러니까 그 양반 하는 것이면 비평을 못하겠어요. 그냥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요.

전주 예수병원에서 인턴으로 있던 시절(한국전쟁)에는 그 친구 몇 사람이 같이 있었는데 홍창의 선생도 같이 있었어요.(1951년 11월, 이영환, 곽상수, 홍창의, 안병무 이렇게 넷이 모여 신흥교회에서 모임을 갖고 야성을 창간한다.―편집자 주) 주일이면 교회를 맡아 설교를 했는데 그때가 야성을 발간할 때에요. 야성을 출판하려고 하는데 돈이 없어서 사람들에게 모금을 해요. 인쇄를 하려면 전주에서 부산까지 가야했어요. 애를 무척 쓰는 것을 목격하기도 했어요. 지금은 그 책을 다 버려 참 아쉬워요. 어떤 것은 ‘참 좋은 말씀이다.’하며 읽었는데 그 때는 뭘 모르거든요. 학생 때라. ‘좋다’ 하구선 버려. 간직해야겠다는 게 없었어요. 야성 하면서 그렇게 애를 썼어요. 인쇄비도 없어 누구한테 빌려서하기도 했어요. 밥도 얻어먹어 가면서 그렇게 고생했어요. 

 

끔찍했던 경험 제2국민병 의무관 시절 

여성숙 선생은 한국전쟁 당시 제2국민병 이야기를 꺼냈다. 제2국민병의 정식명칭은 국민방위군으로 1950년 11월 중공군의 개입으로 정부는 국민방위군 설치법을 공포, 이에 따라 제2국민병역 해당자인 만 17세 이상 40세 미만의 장정 약 50만 명을 51개 교육연대에 분산 수용하여 국민방위군을 편성하고 우익단체인 대한청년단으로 하여금 그 통솔을 맡게 했다. 안병무 선생도 국민방위군 간부훈련생 징집에 응하고 여성숙 선생도 자원입대, 방위군 의무대 대위로 근무하게 된다. 그러나 국민방위군 지휘부가 착복한 금품이 현금 23억원, 쌀 5만 2천섬이 되었다. 그로인해 멀쩡한 장정들이 추위와 배고픔에 죽어갔다. 국회는 이듬해인 1951년 4월 30일 국민방위군 해체를 결의했고 이와 더불어 안병무 선생은 소집해제 된다. (안병무 평전 참조)

여성숙 선생 : 제2국민병 할 때 참 험한 꼴 많이 봤어요. 학교마다 제2국민병 훈련소였어요. 정말 지금 생각하면 그때 울지 않고 어떻게 견뎠는지 모르겠어요. 의사란 명목으로 갔지만 약은 한 톨도 없고 주사도 없고 왜 거기 갔다 놨는지 모르겠어요.

그 얘기를 하자면 참 길어요. 눈물 나고. 어떤 때는 방에 젊은이들이 울면서 따뜻하려고 서로 안고 잤는데 그 다음날 한사람이 죽어 끄집어 내가더라고요. 그 정도예요. 제2국민병이라는 곳이.

내가 간 곳은 대구 시골 초등학교였어요. 세상에 그런 곳이 지옥이라. 어떤 방에는 문 열고 들어가면 의무관 배지를 보았는지 너무나 말라있는 팔이 이렇게 올라오다 툭 떨어져. ‘살려 주세요’ 그런 젊은이들의 신음소리를 들었어요. 그런데 나는 치료할 아무것도 없어요. 약 한 톨도.

길바닥에서 아무나 끌어와 국민병으로 만들어 놨어요. 그 중에는 대학생들도 있었어요. 이북에서 넘어온 사람은 ‘내가 저놈들(빨갱이) 죽이려고 들어왔는데 내가 죽게 됐다.’고 울어. 젊은 사람들이. 얘기 다 못해요 보는 것만도 힘들었어요. 그래도 환자들을 돌봐야한다는 의무감에 들어가 보면 겨울에 가마니도 없이 지푸라기를 깔고 자는데 몸부림을 치느라 지푸라기가 위에 올라오고 땅바닥에 누워있어요.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대한민국이 그렇게 젊은이들을 죽여 버렸어요. 참... 어떤 젊은이들은 열이 40도 가까운데도 나가서 뛰어요. ‘이거라도 안 하면 한 줌 밥도 안준다.’며 그거라도 얻어먹으려고 뛴 데요. 얼마 안가 퍽퍽 쓰러져가고. 또 끄집어 내가고. 그런 거를 내가 눈뜨고 가만히 봤다는 것이 ‘나도 같은 사람이구나.’ 생각했어요. 안 선생은 사무실에 있어서 그런 꼴을 못 봤을 거예요. 만일 봤다면 쌈을 하든 뭐라도 했을 거예요.


안병무의 공동체를 따라서 : 디아코니아 자매회

- 1971년 당시 안병무 선생이 공동체를 제안하고 움직임이 있었다고 들었는데요. 당시 이야기를 해주시죠.

여기 한산촌에서 공동체를 시작하기 전 안병무 선생이 공동체 교육을 시작했는데 평소 공동체에 관심이 많던 나도 참석한 적이 있었어요. 공동체 구성원으로 들어가려는 것은 아니었으나 안 선생이 과연 어떤 공동체를 만들려고 하나 하는 생각에 참석했어요. 그 이후 양평에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기 시작했어요. 땅도 사고 집도 몇 채 지어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죠.

한산촌에 자리 잡기 전 문동환 목사와 김성재 교수가 시작한 새벽의 집에서도 제안이 있었지만 같이 하지는 않았어요.

여성숙 선생 : 1980년 디아코니아 자매회가 생기기 전 양평에서 공동체를 만들려는 과정이 있었어요. 그런데 정부와 정보기관에서 공동체 건설을 방해했어요. 정부뿐만 아니라 동네 주민들까지 방해하고 정보기관에 보고하고 급기야 한 사람이 구속되기도 하면서 양평에서의 공동체 생활은 무산됐어요.

안병무 선생님은 ‘여기서는 안 되겠다.’판단을 하셨어요. 그래도 안 선생은 공동체에 대한 여러 시도들이 실패하기도 했지만 그 관심과 열정은 없어지질 않았어요. 이후 안 선생이 독일 갔다 온 이후 여기 한산촌을 찾아오셨어요. 독일에서 많은 공동체를 접하고 온 거예요. 특히 디아코니아 수녀공동체에 관심을 두었다고 했죠. 당시 언님들이 서울에 모였을 때 안 선생이 목포 한산촌에 가보라고 제안했고 언님들이 직접 한산촌에 와보고는 매우 흡족해 했어요. 그래서 내가 제공한 땅에 독일 디아코니아회의 도움으로 여기에 자리 잡게 된 거예요.

안규숙 원장 : 양평에서 공동체를 시작했던 때가 1977년이었어요. 공동체 준비모임을 언님 7명 이외에 10명이 더 있었어요. 당시 산업선교회를 비롯한 운동권 출신들이 함께했어요. 그렇게 요주의 인물이 모이다보니 정부의 훼방으로 양평에서의 공동체 생활은 시작할 수 없었어요. 할 수 없이 이쪽으로 올 수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7명의 언님들이 1980년 디아코니아 자매회로 시작했어요.

여기로 옮긴 이후에도 여기에서 모일 때면 입구에 경찰과 형사들이 진을 치고 감시하기도 했어요. 제가 1987년부터 여기에서 언님 생활을 시작했는데 90년대 초까지 경찰들의 감시가 있었어요.

이후에도 여기에 황석영, 김지하, 홍성담 같은 당대 유명했던 작가들이 감시망을 피해 잠시 머물기도 했었어요.

여성숙 선생 : 그 사람들은 가끔 놀러와 하룻밤씩 자고 가고 그랬어요. 나하고는 친분이 있지는 않았어요.

하여튼, 그 양반(안병무)이 디아코니아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몰라요. 시장바닥에 닭을 내버려둔 것 같은, 시냇물 가에 어린애 놔둔 것 같은 심정이래요. ‘남자 녀석들은 괜찮은데 디아코니아 사람들은 내가 맘을 놓을 수가 없다.’고 그랬어요. 그렇게 사랑했어요. 진짜 사랑했어요. 한 사람 한 사람 사랑했고 한 사람 한 사람이 안 선생님께는 특별한 존재였어요.

   
▲ 심원 안병무 선생(1922년 6월 23일 - 1996년 10월 19일)

내 마음은 여러분에게 크게 예속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의 기쁨이 그리고 평화가 나의 기쁨이 되고 평화가 되기를 바랍니다. 내 기도가 날로 여러분을 생각하는 분량이 많아져 가고 있어요. - 안병무, 디아코니아 자매회에 쓴 편지中-

- 처음 공동체가 가진 목표가 있었나요?

나는 애초부터 공동체를 꼭 해야겠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안 선생이 하니까 그냥 괜찮겠다고 생각해서 따라다닌 것뿐이에요. 그래도 내 일이 있다 보니 공동체 회원으로 가입하는 것은 못하고 옆에서 땅과 집을 내어 주고 옆에서 도왔어요. 내가 한 것은 아니에요. 내가 이렇게 하자 저렇게 하자 일절하지 않았고 전적으로 안 선생의 의견을 따라서 진행됐어요.

- 1980년 공동체를 시작할 때 어려움을 없었나요?

결핵요양소가 하나의 울타리 역할을 했어요. 양평에서는 훼방을 놓았지만 여기에서는 조용히 들어와 환자들을 돌보는 활동만 했고 또 감염걱정에 있어서 경찰들이 여기까지 들어올 생각을 못했어요.

 

   
▲ ⓒ에큐메니안

새로운 언님이 없어요

- 디아코니아 자매회 초창기 멤버 중 아직까지 계신분이 있나요?

안규숙 원장  : 네 처음 7명 중 5명이 아직 있어요. 많이 들어왔다 많이 나갔어요. 지금은 8명이 있어요. 언님이 가장 많았을 때는 20명까지 있었어요. 87,8,9년 때 많았고 그 이후 7명 나가고 그랬어요. 나간 사람은 틀림없이 결혼해요. 여자들에게 결혼이라는 게 그렇게 큰가봐요. 나가서 결혼 안한 사람이 없어요.

디아코니아 언님 수련을 받고 나면 모든 면에서 성장하기 때문에 독신을 선택하는데 주저함이 없어져요. 그런데 수련 전 많은 언님들을 보면 (세상에 대한)미련들이 많아요. 아무래도 미련이 있겠죠. 미련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나가게 돼요. 여기 와서 ‘아, 아니구나.’라고 느낀 사람은 나가게 되더라고요. 뭔가 ‘수도생활은 아닌 것 같다.’하는 사람들도 나가게 되고...

여성숙 선생 : 결혼이라는 것이 남녀불문 큰 문제인 것 같아요. 넘지 못할 문제인 것 같아요. 나나 안원장이나 큰 문제는 아니었는데... 더구나 남자들은 어려운 모양이에요. 처음에는 남자디아코니아도 하려고 했어요. 몇 사람 지원도 했으나 세 사람이 채워지지 않아 못하고 말았어요. (남자 디아코니아)두 사람 보면서 ‘저 양반들이 뭘 얼마나 견디려고 저러나’ 했는데 같이 할 사람이 없어서 그만두고 말았어요.

여성숙 선생 : 남자들 어렵죠? 결혼안하고 산다는 것이.

조헌정 목사 : 공동체 생활을 잘 한다면 가능은 할 겁니다.

여성숙 선생 : 가톨릭 신부님이나 스님들 꽤 잘 해나가는 것 같은데.

안규숙 원장 : 가톨릭 신부는 줄어도 수사님들은 지원자가 계속 유지가 된다고 해요. 담양 수도원은 변함없이 유지된다고 하고요. 가톨릭 성요한 수사회나 정동 프란시스코도 서원하는 수사들이 계속 있어요. 가톨릭 수사님들이 저희한테 일대일 홍보를 해야 한다고 조언을 하기도 했어요.

여성숙 선생 : 그런데 디아코니아는 안와요. 이걸로 끝나려나 걱정이에요

안규숙 원장 : 저희들이 새로운 언님들을 잉태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조헌정 목사 : 제 생각에는 한국교회 문제인 것 같습니다. 교회의 영성운동 자체도 문제가 있고요. 잘 버티시면 10년 후에는 상황이 달라질 것입니다. 교회 자체에 변화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옵니다.

여성숙 선생 : 지금 한국교회로는 안 되요.

조헌정 목사 : 우리들 보다 훨씬 많은 대안운동, 종교운동, 영성운동, 기도운동을 하는 분들이 군데군데 많이 있습니다. 지금은 씨앗을 뿌리고 있는 단계입니다. 대형교회는 무너지고 있고요.

여성숙 선생 : 대형교회는 좀 무너져야한다. (언님이 되려는 사람이)어떤 목사에게 디아코니아 가겠다고 하니 ‘왜 인생의 정도를 안 밟으려 하냐.’며 반대해 그만 둔 사람도 많아요. 결혼, 출산, 육아를 정도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게 아닌데.

안규숙 원장은 디아코니아 노인요양원을 소개했다.

   
▲ ⓒ에큐메니안
안규숙 원장 : 현재 노인요양원에는 50분의 노인들이 계세요. 금년 4월부터 노인요양법이 바뀌면서 4인방에 3인이 들어가야 되서 결국 8분이 나가셔야 되는 상황이 생겼지만 증축하기로 결정해서 같이 있게 됐어요. 4월 말이 되면 60명까지 수용가능하게 돼요.

운동장위에 결핵 치료 받으신 분들 중 집으로 돌아갈 분이 없는 분들이 머물고 있는 집이 있는데 현재 6명 있어요. 그분들 모시고 카페리호를 타고 제주도에 나들이 다녀왔어요.

여성숙 선생님이 결핵요양원을 운영할 때 여기 머물렀던 결핵환자들은 대부분 가난했어요. 어느 날 가보면 병상에 환자가 없어 알아보니 가족들이 굶고 있고 아이들도 학교에도 못가는 상황이라 집에 간 거예요. 섬에 살고 있는 분이 있었는데 배가 끊겨 보름이고 한 달이고 약도 없이 그 집에 머물다가 결국 가족에게도 전염되는 사례도 있었어요. 그럴 때 여성숙 선생님이 그 가정에 생활비와 아이들 장학금도 지원하기도 했죠.

1980년 디아코니아가 설립되면서 선생님이 해 오신 장학사업과 결핵요양원을 이어받아 지금에 이르게 됐어요. 현재는 조손가정과 다문화가정, 탈북가정을 돌보고 있어요. 금년에도 3천만 원 지급 되요. 중학생 60만원, 고등학생 120-140만원 지원하고 있어요. 매년 1회, 3월에 만나 전달식을 갖고 있어요. 학생들을 대상으로 MBTI 검사도 진행하고 있어요.

 

   
▲ 디아코니아 노인요양원ⓒ에큐메니안
   
▲ 안규숙 원장이 조헌정 목사에게 노인요양원 시설을 둘러보며 설명하고 있다.ⓒ에큐메니안

기장역사의 한 복판에서

 - 선생님은 신앙생활을 어떻게 해오셨나요?

서울 대학시절에는 송창근 목사님이 계셨던 서울성남교회를 다녔어요. 그 다음에는 시골로 와서 여기저기 다녔죠. 어머니가 어렸을 때부터 교회를 다녔어요. 외할머니가 기독교인이었어요. 황해도가 고향이었고 어렸을 때부터 주일학교에 다녔어요. 덮어놓고 쫓아 다녔어요.

대학시절 성남교회를 다니면서 교회생활을 제대로 시작했다고 볼 수 있죠. 하루는 송창근 목사님이 대학생 때 나보고 집사하라고 하셨는데 나는 “집사 하라하시면 나 교회 안 나올래요.”라고 답했어요. 송 목사님은 “그럼 하지 말아”라고 하셨어요.(웃음) 그 때 성남교회에서 찬양대와 주일학교를 같이 했어요. 문동환 목사와 주일학교도 재미있게 했어요.

한 번은 재미난 경험을 했어요. 기장과 예장이 갈라지기 전 새문안교회에서 ‘총회에서 싸움이 났다.’는 얘기를 친구에게 듣고 새문안교회로 달려갔어요. 그때 마침 김재준 목사님를 앞에다 놓고 선서를 시키는 거예요. 그 양반은 ‘나는 이러이러한 믿음으로 이렇게 살고 있다.’고 선서했어요. 하나도 걸리는 것이 없이 명확하고 간결했어요. 근데 알고 보니 이 사람들(당시 총대들)이 짜고 하는 거예요. 마지막에는 김재준 목사보고 이단이라고 정죄했어요. 그러면서 갈라진다고, 쫓아낸다고 선언했어요. 이후 뒷문으로 김재준 목사는 빠져나갔고 앞문에 서있던 강원용 목사와 젊은이들이 지켜보다가 항의하며 확 밀려나오는데 다 나가버리고 싸움이 안 되고 말았어요. 그때부터 갈라진 거죠. 많이 경험하고 살았어요.

- 평신도로서 역사적 현장에 계셨군요.

많이 봤어요.

-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 ⓒ에큐메니안

인터뷰를 마치고 나니 제주에 다녀온 나머지 언님들을 볼 수 있었다. 그날따라 바람이 거셌는데 배 멀미로 고생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반갑게 맞아주었고 여성숙 선생도 오랜만에 나들이도 할 겸 식사를 제안해고 우리 일행을 목포대교가 보이는 식당으로 안내했다.

   
▲ 새로생긴 목포대교와 섬들이 보이는 식당에서 언님들과 함께 보리굴비 정식을 먹었다.ⓒ에큐메니안
그곳에서 맛난 보리굴비 정식을 먹으며 못 다한 언님들의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장학금을 주며 관계 맺은 아이들과의 사건, 사고들 그리고 그 인연으로 성인이 되어서도 잊지 못해 찾아온 이야기, 장학금 줄 재정이 모자라 노심초사하던 중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진 사연 등 많은 이야기가 오갔다.

개신교 수녀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디아코니아 자매회. 안병무 선생의 공동체에 대한 열정과 여성숙 선생의 헌신으로 만들어진 그곳에 새로운 기독교 영성의 바람이 일어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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