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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남의 보은기(報恩記) Ⅱ-1<제3부 당신들이 계셔서 나는 행복했습니다>
김경남 목사 | 승인 2015.06.11 06:21

‘신·구교 사회운동 협의체’~<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상)

1. 들어가며

1979년 10월 26일 독재자 박정희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피살당한 후 (‘10·26 사태’), 전두환을 우두머리로 한 신군부가 계엄령을 발포하고 쿠데타를 일으켜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해 대통령을 선출하고 정권을 장악하려 하려 한다는 음모가 알려지자, <한국민주청년협의회> (이하 <민청협> 당시 회장, 이우회)는 <한국기독학생총연맹>(이하 <KSCF>)와 공동으로 재야 세력을 결집하여 신군부출현을 저지하기 위해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해 대통령을 선출을 반대하는 집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하였다.

당시는 계엄령이 발포되어 있었기 때문에 모든 집회가 금지된 상황이어서 계엄군의 눈을 속이기 위해 결혼식을 가장(假裝)하여 서울 중구 명동 YWCA 강당에서 집회를 열기로 하였다. 11월 24일 이 위장 결혼식에는 계엄군의 삼엄(森嚴)한 경계(警戒)를 뚫고 윤보선 전 대통령을 위시하여, 함석헌, 박형규, 백기완, 등 재야 원로들과 <동아투위>, <조선투위> 등 민주언론계, <민족작가회의>, 종교단체 등 각계 민주인사 300여명이 속속들이 이 결혼식에 참석하였다.

   
▲ 1979년 YWCA 위장결혼 사건과 함석헌(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아키브)
함석헌 선생의 주례 하에 신랑 홍성협 군(당시 <민청협> 총무)이 입장하는 순간 뒤 늦게 정보를 입수한 계엄군이 식장에 난입(亂入)하여, 백기완, 신랑 홍성협 군, 최민화(전 <환경공단>이사, 당시 <민청협> 부회장), 박종렬(목사, 당시 <KSCF> 총무), 김정택(목사, 당시 <KSCF> 회장) 등 하객(賀客)으로 위장(僞裝)한 참석자 140여명을 연행하였다 (이상 ‘YWCA 위장결혼사건’). 한편 일부 참석자들은 식장을 빠져나와 <YWCA> 주변에 대기 하고 있던 청년·학생들을 규합(糾合)하여 명동 일대를 거쳐 종각까지 시위를 전개하였다.

‘결혼식장’을 빠져 나온 나는, 예정된 대로 양관수(<오사카정법대>교수, 당시 <민청협> 홍보위원장)가 주도(主導)하는 명동시위대를 먼발치에서 따라다니며 청년·학생들의 가열(苛烈) 찬 ‘민주화에의 열망’을 목도(目睹)하였다. 경찰에 의해 시위대가 해산된 후, 집으로 돌아 갈 수 없는데다가 그렇다고. 여관에 들어 갈 수도 없는 처지(處地)의 나는, 그날 밤의 거처(居處)를 찾는 것이 우선이었다. 고심(苦心) 끝에 나는 친구 박원표(전< 주식회사 LG> 부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와는 1970년도 <후진국사회문제연구회>회원으로 만난이래의 막역(莫逆)한 친구사이였다. 밤 11시가 넘은 시간임에도 망설임 없이 나온 그는 이미 뉴스를 통해 나의 사정을 짐작(斟酌)하고 있었다고 하며 당연하다는 듯이 나를 데리고 넓지 않은 자신의 아파트로 안내했다.

그날 밤으로부터 도피생활로 들어 간 나에게는 고교동창의 모친 댁에 위장 하숙생으로, 대학선배들 집의 위장 고시준비생으로, 마지막에는 <민정당> 지역구 여성위원장이 주인인 하숙집의 대기업의 사원인 착실한 하숙생으로 위장생활을 하게 되었다.

고교동창 박사명(현<강원대 교수> 당시 <중앙일보> 기자)은 또 다른 고교동창 손재순(현재 귀농, 당시 <주식회사 진양양행> 프랑스 주재원)의 모친과 누이동생만 사는 강남의 고급아파트를 소개해주고, 당시로는 적은 액수가 아닌 월 10만원의 하숙비를 몇 개월 동안 대신 내어주었다.

당시 사법연수원생 신분인 고교 선배 박성귀(변호사)는 밤늦게 찾아간 나를 박대하지 않고 몇 개월의 도피처를 제공해 주었다. 그리고 길에서 우연히 만난 대학 선배, 윤순성(자영업, 당시 <대림건설> 과장)은 “경남이! 자네 참 섭섭하네. 도피생활하면서 갈 곳이 없을 덴데 왜 나한테 연락하지 않았느냐?”고 도리어 화를 내며 나를 데리고, 방 두 칸짜리 부천 소재의 연립주택의 방 한 칸을 몇 개월 동안 할애(割愛)해 주었다.

성해용(목사, 현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원장, 당시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간사)은 정기적으로 나를 만나 영양보충을 시켜주고 모금한 도피자금을 전달해 주었다. 그 자금(資金) 속에는 나와는 생면부지(生面不知)의 캐나다 선교사, 메리 콜린스 양의 반지(斑指) 판값도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사선> 총무였던 권호경 목사는 성해용을 통하여, 이런 말도 전해주었다. “<서울제일교회> 담당 J 모 형사가 '버스에서 김경남씨를 봤지만 나의 담당이 아니라 모른 척 했다. 너무 삘삘거리며 돌아다니지 말고 꼭꼭 숨어 있으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신대> 학사편입동기 박재순(목사, 신학박사, 현<씨알사상연구소장>, 당시 <한신대> 강사)은 나를 대형 기독교 출판사인 <기독교교문사>(이하 <교문사>)의 ‘기독교대백화사전’ 번역위원으로 취직시켜주어 도피생활 마지막 몇 개월 그리고 자진출두 후에까지, 남의 신세만 져야했던 빈궁(貧窮)한 나를 자립시켜주었다.

이와 같이 나의 이 도피생활은 육신의 노곤(勞困)함과 체포의 걱정에서 오는 정신적 피곤(疲困)을 능가(凌駕)하는 감사와 기쁨으로 충만(充滿)한 기간이었다. 그리고 감옥에서 고문당하고 고생하는 사람들이나, 우리처럼 도피생활을 했던 사람들만이 아니라, 우리를 마음으로 지지하며 이 땅의 민주화를 염원하는 많은 우리의 이웃들이 있어, 우리는 곧 승리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여러분들이 계셔서 나는 정말 행복했었습니다.”

생활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 나는 구속되지 않은 동지들의 소식이 궁금해졌다. 이리저리 생각해 보다가 이 사건의 주동자의 1인인 정문화(사망, 당시 <민청협>초대회장)가 스포츠 광이라는 사실이 머리에 문득 떠올라, 마침 그 시기에 시작된 ‘ 1980년 전국농구대잔치’가 열리고 있는 장충체육관을 가면 관람 온 그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장충체육관 행 155번 버스 안에서 나는 정문화를 만났다.

이렇게 해서 사건 발생 후 3개월 만에 다시 만나게 된 우리는 이명준(<환경재단> 자문역, 당시 <민청협>부회장), 김경남(전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원장, 당시, 부외장 겸 교육위원장), 이석표 (<문화유통 북스> 사장, 당시<민청협> 섭외위원장) 조성우 (전 <민화협> 공동대표, 당시<민청협>직전 회장), 문국주(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상임이사, 당시<민청협>직전 총무), 등 6명이었다. 우리는 안전한 곳을 수소문하여 찾아다니며 월 1회 정도 만나 정보를 교환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우리는 서울역 앞의 ‘1980년 민주화 봄’의 뉴스를 함께 나누며 감격해 하였다. 그 봄의 문을 여는데 앞장 선, 나의 고교 후배 심재철(현<새누리당> 국회의원, 당시 <서울대> 학생회장), 유시민(전<보건복지부>장관, 당시 서울대 복학생회장), 김부겸(전 <민주당> 국회의원), 등 자랑스러운 대학 후배들을 보며 감동과 흥분의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비록 지금 그들의 가는 길은 다르지만, 그때 그들은 그렇게 한 길에 서 있었다.)
광주를 빠져 나온 ‘광주사건 배후주동자’, 윤한봉씨(사망)를 통해 ‘광주대학살’의 소식을 전해 듣고 분노(憤怒)하고 전의(戰意)를 다지기도 했다. 그리고 언론보도 통제로 “북괴간첩의 선동에 의한 폭동”이라고만 알려져 있는 ‘광주 5·18 민주화운동’의 실상을 알리는 유인물 살포작업을 시도하기도 했다.

<교문사>의 번역위원으로 일하기 시작한 지 2개월 쯤 지난 1981년 4월 어느 날, 나는 아들이 위독하다는 전언(傳言)을 들었다. 내가 1979년 11월 20일경 집을 나올 때 마지막으로 본 그 아이는 6개월이 채 감기에 걸려있었다. 그 감기가 폐렴으로 악화되었으나, 의료보험이 확립되지 못한 당시에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해 결국 위독 상태에 빠져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문득 어린 생명의 애비 역할도, 가장 없는 집안을 부양(扶養)하느라고 동분서주(東奔西走)하는 아내의 지아비 역할도, 아들·며느리 대신에 첫손자를 애지중지(愛之重之) 돌보느라 고생하고 계시는 어머니의 장남 역할도 방기(放棄)하여 온 내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그리고 혼자 안일한 삶을 보내고 있는 것에 대한 죄책감에 견딜 수가 없었다.

나의 첫 아이 기정(基正)이를 가슴에 묻고 나는 박성귀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 경찰에 자진출두(自進出頭)를 하였다. 나의 행방을 몰라 불안해하는 가족들에게 일정한 안도감(安堵感)을 주는 감옥을 선택하기로 마음먹은 것이었다.

기소(起訴)된 죄목은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위반죄’, ‘계엄법 위반죄’(이상 ‘YWCA위장결혼사건’), ‘유언비어 유포죄’(‘5·18광주민주화운동’에 관한 유인물 배포) 등이었다. 나의 도피생활에 관해서는 묻지도 않았다. 그것을 물었을 경우, ‘범인은익죄’ 혹은 ‘범인도피방조죄’ 등으로 얽혀 들어 갈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었을 텐데도 그러했다. 그리고 선고된 형량도 1년 징역, 1년 6월의 집행유예(執行猶豫)였다.

이런 예상외의 솜방망이 판결의 배경은 무엇이었던가? 12·12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掌握)하고, ‘광주 5·18 민주화 운동’을 성공적(?)으로 진압한 전두환 정권의 자신감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비합법적인 정권의 정통성 획득을 위해 국민들을 무마(撫摩)하기 위한 유화정책(宥和政策) 때문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나의 법정대리인 박성귀 변호사의 유능한 수완(手腕)의 덕분이었을까?(그는 사법연수원을 졸업한지 얼마 되지 않은 변호사 초년병이었다.) 아무튼 구속을 면한 나에게는 고액(?)의 급료를 받고 있는 <교문사> 번역위원은 버릴 수 없는 달콤한 유혹(誘惑)이었다.

그러던 나에게 1982년 5월 경, <사선> 총무, 권 호경 목사로부터 <사선>의 간사로 일해 달라는 요청이 왔다. 꿀맛 같은 1년을 보내고 있던 나를 ‘현장’이 부른 것이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대학생인 막내 여동생의 납부금 걱정을 면하여 한 숨을 놓았을 아내는 아무 불평 없이 나의 선택을 따라 주었다. 나를 현장으로 다시 불러 준 권 목사님이, 그리고 말없이 나의 선택을 따라 준 아내가 고마웠다.

나의 처지를 알면서도 눈감아 주신, <교문사> 사장 고(故) 한 영재 장로님(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과 편집주간(編輯主幹), 이 기문 목사님(감리교). 한 장로님은 종로5가 기독교회관 901호 <사선> 사무실 구석에 앉아 소식지를 번역하고 있는 나를 찾아 와 <교문사>의 3분의 1도 안 되는 나의 급료를 걱정하시며, 봉투를 내 놓곤 하셨다.

일 년 가까이 나를 동료로 받아주고 따듯한 위로를 해 준, 소 창길 목사( 성결교회,현 캐나다 한인교회 시무), 이 영재 목사,(기장, <전주화평교회> 시무), 안 석모 목사(감리교, <감리교신학대학> 교수), 김 문호 전도사(감리교, 현 사진작가), 등 번역위원들, 편집부의 신 동일 목사(기장, 현 <서울신당교회> 시무) 등에게도 감사한다.

“당신들이 계셔서 나는 행복했습니다.”

2.‘신·구교 사회운동 협의체’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

1) 1970년대
당시 CCA-URM 총무 고(故) 오 재식 선생의 노력으로 <라운드 테이블>의 재정 지원을 받은, <NCC> 총무, 고(故) 김 관석 목사는, <수도권특수지역선교위원회>(이하 <수도권>) 회장, 박 형규 목사, 총무 권 호경 목사, <영등포도시산업선교회>(이하 <영등포산선>) 조 지송 목사, 가톨릭 원주교구 고(故) 지 학순 주교와 이 창복 씨(전 국회의원) 등과 협의 하에 신·구교 사회선교단체(노동자, 농민, 빈민, 청년, 학생)를 아우르는 협의체인 <한국교회사회운동협의회>(이하 <사선>)를 결성하였다.

노동자 선교 단체로는 개신교에서는, 예장, 감리교, 등 각 교단의 산선, 가톨릭은, <가톨릭노동청년회>(JOC), 빈민선교단체로는, 개신교의 <수도권>, 가톨릭은 1975년 이후의 <가톨릭빈민사목>, 농촌선교는 가톨릭의 <가톨릭 농민회>, 개신교는 1980년 이후의 <한국기독교농민회총연맹>, 학생선교단체로는, 개신교의 <한국기독학생총연맹>(<KSCF>), 가톨릭은 <가톨릭학생회총연합회>( <팍스로마나>) 등이었다.

초대 회장에는 가톨릭의 박 홍 신부(전 <서강대학교> 총장), 총무에는 김 경락 목사( 미국 거주, 당시<감리교 산업선교회> 총무)를 선임하였다.  잠시 <한국기독교에큐메니행동협의체>로 명칭이 바뀐, 제 2대 회장은 박 홍 신부, 총무는 고(故) 조승혁 목사(전<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원장)가 맡았다. 제 3대는, 다시 명칭이 환원된 <사선>의 회장에 박 홍 신부, 총무에 서경석 목사(전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초대 사무총장)가 맡았다,

<사선>은 1970년대 중반까지는 단순히 신·구교 사회선교 단체를 아우르는 협의체 역할을 해 오다가, 1970년 후반, 군사독재가 막바지에 치닫는 상황에서 전체 민주·민중 운동의 중심에 서게 된다. 그 계기가 되는 사건은 소위 1979년의 ‘YH사건’이다.

가발수출업체인 <YH 무역>의 폐업조치에 항의하여 신민당사에서 농성하는 이 회사 여공들을 경찰이 강제해산하는 과정에서 여공 중 한 사람인 김경숙 양(당시 22세)이 농성장에서 건물 아래로 추락하여 사망하였다. 그리고 이들의 투쟁을 지원하던 <사선> 총무 서경석 목사는 구속된 여성 노동자들과 함께 구속되었다. 이 사건으로, 노동자들에게 농성장소를 빌려주었다는 이유로<신민당> 총재, 김영삼 의원이 국회의원직에서 제명되었고, 이에 항의한 부산·마산 시민들에 의한 ‘부마항쟁’이 발발(勃發)하였고, 이는 ‘10·26 사건’을 초래(招來)하게 되었다.

<필자 소개>

   
 
김경남 목사

1949년 (66세) 전남 완도 생

광주제일고등학교, 서울법대, 한국신학대학 졸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 총무, <한국민주화기독교민주동지회> 동경자료센터 관장,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사무국장, 무주<푸른꿈고등학교> 교장, <한국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업본부장,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원장
 

김경남 목사  gisoo93@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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