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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마당과 길 사이에서 길찾기<이원돈 칼럼 - 예수와 마을 씨리즈 10>
이원돈 목사(부천 새롬교회) | 승인 2015.12.23 10:57

예루살렘 도상과 예루살렘 입성 사이에서!

마가복음은 길의 복음이다. 예수님과 함께 길에 나서고 예수와 함께 복음의 여행과 길을 따르고 심지어 십자가의 길까지 따르는 것이 바로 마가의 복음이다. 예수님은 마을선교를 하던  중 종종 갈릴리 호수길을 횡단하여 이방 땅으로 건너가는 횡단 여행을 감행하셨다. 갈릴리의 호수 저편은 저 이방인이 살고 있는 거라사 그리고 두로, 시돈 등 이방 땅으로 친숙한 유대인들이 사는 곳이 아닌 바로 낯선 이방인의 땅이었다.

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공포와 당황감을 주는 이러한 횡단 여행을 시도하셨을까? 예수와 제자들의 이 갈릴리 항해 이야기를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님의 이방 땅으로의 선교 여행은 제자들의 불안과 공포로 자주 좌초의 위기에 놓였던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예수님은 이방 땅에 복음과 선교의 문을 열라고 하지만 제자들은 불신과 편견에 사로잡혀서 치명적으로 외우내환을 일으켜 이 이방선교의 뱃길을 열지 못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바로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서 계속 부딪히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열린 항해와 그 배안에서의 제자들의 고립주의와 폐쇄성이 부딪히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 한다.

그러면 예수님의 이 이방을 향한 횡단 여행의 의미란 무엇일까? 예수님의 느닷없는 이방 땅으로의 항해 선언과 제자들의 당황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우리는 예수님의 이 선교 항해의 진정한 의미를 마을 안에 새로운 교통 공간 소통 공간, 개혁 공간을 확보하는 행위가 아니었는가를 생각해 보게 된다. 그것은 예수님의 당시 제자들과 마을 공동체의 정태성과 폐쇄성을 휘젓고 흔들기 위한 의도된 시도가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예수와 제자들이 마을 안으로 정태화 되거나 고립되는 것의 위험을 알고 계셨다. 그래서 이 정태적이고 고립된 마을을 역동화 시키시기 위하여 안으로는 외부의 에너지를 환대라는 행위를 통해 열린 마음으로 흡수하고 밖으로는 새로운 땅으로 모험을 떠나는 일을 끊임없이 일으키셔서 공동체가 정체되거나 부패되지 않도록 마을 공동체를 역동화 시키신 것이다. 그러므로 공동체를 안 밖으로 뒤집고 휘저어서 새롭게 하는 것에 예수의 이방 선교 여행과 항해의 핵심이 있는 것이다.
 
안으로 에너지 유입하고 밖으로 모험하여 이 두 흐름이 만나서 변화의 파도를 일으킬 때 공동체는 에너지를 유입. 분출 횡단하며 건강하게 공동체가 성장 하는 것이다. 그리기에 건강한 공동체는 늘 새로운 모험을 시도하거나 안으로 새로운 에너지를 흡수하여서 자기 해체와 재구성을 통해 교통 공간을 확보해야 한다. 길을 잃는 자 만이 진정 길을 찾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예수 공동체는 늘 다시 여행 짐을 싸고 새로운 횡단 여행의 준비를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을이라는 마당이 늘 새로운 자기 해체와 재구성의 새로운 교통 공간, 소통 공간. 개혁 공간이 되려면 이 마당을 늘 새로운 길을 떠나는 길과 연결이 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예수님이 이방 땅으로의 항해 이야기에 이어 새롭게 등장하는 예수님의 마지막 여행길인 예루살렘 길(도상)의 이야기가 바로 이러한 새로운 소통과 교통과 개혁의 공간의 의미로 등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마가복음은 이 예루살렘으로 오르는 길은 그 길의 앞과 뒤의 맹인 치유이야기를 배치하고 그 길 위를 예수님과 제자들이 걷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러면 왜 마가는 이 여행길 앞뒤에 맹인치유를 배치하였는가? 마을에서 나와서 데카폴리스로가서 이제 예루살렘으로 움직일 때 그 앞과 뒤로 맹인의 눈을 띄우게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이 예루살렘 여행길에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눈이 뜨이는데 정작 예수를 따르겠다고 나선 제자들이 눈이 감겨져 가고 있다는 것이다. 마을에서 나와서 이방 땅 데카폴라스로 가고 그곳에서 거라사의 광인들과 수로보니게 여인과 같은 이방인들이 새롭게 움직이고 있는데 지금 제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인 것이다.

이 예루살렘으로 오르는 길 위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그 결연한 의지와는 상관없이 살아가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인다. 그들은 누가 크냐, 누가 더 위대하냐, 누가 더 똑똑하냐, 누가 더 잘났냐를 따지면서 예수의 길을 따르는 그 길의 방향을 아랑곳하지 않고 자꾸만 자꾸만 예수를 빗나가기 시작 한다. (막10장 37) 발걸음은 예수와 함께 가이사랴 빌립보의 여러 마을과  갈릴리로 예루살렘으로 예수를 따라 가지만 그들의 마음은 자꾸만 자꾸만 예수의 길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의 눈에 제자들은 어떠한 제자들이었고 누구인가? 예수님은 지금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장님들의 눈을 띠우면서 한편으로는 점점 눈이 감겨져 가고 소금의 맛을 잃어가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고 계신 것이다. 왜 너희들은 하나님 나라의 여행길에 몰두하지 못하고 철없는 꿈을 꾸고 쓸데없는 일에만 몰입하고 있는가. 지금 너희들의 두 눈이 멀었다. 우리 모두 장님이다.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결국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오르는 그 길 내내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여 예수의 길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였고 도리어 예수의 길과 팽팽한 긴장을 높여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예수를 따르는 길 가운데 자신들의 욕망과 영광이 이루어지지 않자 예수의 제자들은 결국 예수님의 마지막 길인 예루살렘에 도달하면서부터 이윽고 예수를 배반하고, 예수를 팔고, 그리고 예수를 저주하며 예수를 부인하기 시작한다.

   
 
이처럼 마가복음에서 장소적으로 갈릴리와 대비되는 공간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예루살렘이다. 갈릴리란 예수님이 치유하시고 기적을 행하시고 밥상공동체를 펼치시면서 치유와 밥상의 잔치를 벌이시던 곳이다. 그런데 예루살렘은 어떤 곳 인가? 예루살렘은 예수님을 박해하는 곳이다. 예수님은 성전과 회당을 나와 마을에서 마당을 펴신 분이다. 그런데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오르시는 도상의 이야기 즉 길의 이야기를 접하면서 예수님이 각 마을과 마을을 다니시면서 회당을 넘어 마을의 마당을 만드시고 마당을 펼치시는데 그치신 것이 아니라 마당과 마당을 길로 연결하시고 계신 것을 볼 수가 있다.

오늘 우리는 예루살렘 도상에서의 길을 오르는 그 길이 끝나는 예루살렘 입성의 장면에서 예수님과 군중들이 예수살렘 길에서 펼치는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길을 찾는 길의 향연을 볼 수가 있다. 그것은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이여” (마가 11:9) 하는 당시 예루살렘의 길 위의 군중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한 예수와 그의 제자들을 맞이하며 외친 찬양과 “그들이 외치지 않으면 돌들이 외칠 것이다”(누가19:40)하는 예수님의 응답처럼 이 길 위에서 길 찾기라는 새로운 하나님 나라 여행길의 향연이다.
 
최근 인문학 쪽에서 로드 클래식이라는 고미숙 선생의 오늘 백수 시대를 여는 하나의 담론으로 길 위에 길이 있다는 아주 문명사적 새로운 길찿기의 로드맵을 제시한 책이 나왔다. 고미숙 선생은 지금은 백수의 시대이라고 이야기 하며 지금 3포 5포의 청년 백수뿐 아니라 로봇이 인간의 일자리를 빼앗아가기 시작하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백수가 되는 이 백수의 시대의 미래가 무엇이냐고 묻고 있다. 그러기에 이제 바야흐로 저출산 고령화와 백수의 시대 교회와 마을의 미래는 한편으로는 마을에서 마당을 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새롭게 새로운 거리와 길로 길을 떠나면서 그 길과 마을의 마당의 경계선에서서 새로운 길을 찿아 나서는 새로운 교회와 마을의 길 찾기가 시작되어야 될 줄로 믿는다.

이원돈 목사(부천 새롬교회)  wewinwi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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