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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야 종교개혁의 심장, 율법책은 어디에 있었을까이스라엘 역사 알기 ⑾
이성훈 목사(한신대 구약학 박사과정) | 승인 2020.11.26 16:35

율법책은 어디에서 왔는가?

‘요시야’의 종교개혁은 성전에서 율법책이 발견되면서 시작됩니다. 「열왕기하 22장 8절」에 따르면 이 율법책은 성전에서 발견되어 ‘힐기야’를 통해 서기관 ‘사반’에게 전달되었고, 이는 ‘요시야’에게까지 전달됩니다.

「열왕기하 22장 3-10절」이 성전 수리를 위한 은을 회수하는 내용이기 때문에 율법책도 이런 상황 속에서 발견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역대하 34장 14절」은 제사장 ‘힐기야’가 헌금한 돈을 꺼낼 때 율법책을 발견했다고 기록합니다. 하지만 지난 글에서 성전 수리를 위한 은궤 규정을 보셨던 분들은 이 상황이 뭔가 잘못되어 있음을 감지하셨을 것입니다(이스라엘 역사 알기 8, ‘요시야 왕의 종교개혁과 대제사장 힐기야’ 참고).

▲ 모사이에프 오스트라콘 ⓒBASlibrary.org

위의 사진은 ‘요시야’ 시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도기 파편으로 ‘모사이에프 오스트라콘(moussaieff ostracon)’ 또는 ‘3세겔 오스트라콘(Three shekel ostracon)’으로 불립니다. 왕이 성전에 3세겔을 바쳤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이에 관해서는 1999년 『구약논단』 1호에 게재된 김영진의 “요시야의 서원 예물 값 납부에 대한 기록”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열왕기하 12장 4-15절」에는 ‘요아스’가 성전 보수를 위한 은에 관해 규정을 만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요아스’는 제사장들이 백성들에게 임의로 은을 받지 못하게 하였고 제사장들도 이에 동의합니다. 백성들이 성전에 바친 은은 오직 성전을 수리하는 일에만 사용하도록 만듭니다. 이 규정이 만들어진 후에 제사장 ‘여호야다’는 궤를 하나 만들고 뚜껑에 구멍을 뚫어 은을 넣을 수 있도록 만듭니다(왕하12:9). 궤에 은이 가득 차면 서기관과 대제사장이 은을 셈한 후 봉인하여 건축자에게 넘기도록 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역대하」의 기록대로 은궤 안에서 율법책이 발견될 수는 있습니다. 제사장과 서기관이 은궤에 들어있는 은을 셈할 때 그 안에서 무언가 발견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은궤 안에서 율법책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요아스’ 이후에 누군가가 그곳에 율법책을 넣어놨다는 뜻이 됩니다. 은궤를 처음 만들어 놓은 사람이 ‘요아스’ 시절의 제사장 ‘여호야다’였기 때문입니다. 「역대하 24장 8절」에 따르면 ‘요아스’가 이 궤를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시야’가 만들었는지, ‘여호야다’가 만들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열왕기」와 「역대기」 모두 이 은궤가 ‘요아스’ 시절에 만들어졌다고 기록합니다.

구약성경은 이 율법책이 출애굽 때부터 존재했고, 이를 왕실이 보존해 온 것으로 읽어가도록 만듭니다. 율법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히브리어로 ‘토라(תורה)’입니다. 율법책도 똑같이 ‘토라’로 적는데, 율법책의 경우에는 ‘편지’, ‘책’, ‘기록’이라는 의미의 ‘세페르(ספר)’가 붙어서 나옵니다. 또 때로는 ‘기록하다’라는 뜻의 ‘카타브(כתב)’가 함께 붙어 있습니다. 예언자의 선포와 같이 그저 하나님께서 들려주신 말씀이 아니라 어떤 ‘기록물’임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이 기록된 율법, 율법책이 신명기 이후 구약성경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흐름에 따라 몇 부분만 살펴보려고 합니다. 신명기는 모세가 율법책을 기록하였고 이를 레위인들, 특히 언약궤를 메는 레위인들에게 이를 맡겼다고 말합니다(신31:9, 24ff). 특히 「신명기 31장 26절」은 언약궤 안에 있는 돌판(십계명 돌판)과 율법책은 서로 다른 것처럼 말합니다.

이 율법책은 이후 여호수아에 의해 에발산에서 낭독됩니다(수8:30-35). 성경은 독자들로 하여금 여호수아가 스스로 했던지, 혹은 레위인을 시켜서 했던지 이 율법책을 보관했다고 생각하도록 만듭니다. 이후 사사들의 시대로 넘어가면서 율법책의 존재는 사라집니다. 「사사기」와 「사무엘」에 언약궤에 대한 언급은 있어도 율법책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갑자기 사라져버렸던 이 율법책은 「열왕기상 2장 3절」에서 다윗의 입을 통해 언급됩니다. 다윗은 솔로몬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모세가 기록한 율법(כתוב בתורה משׁה)’을 지키라고 말합니다. 이 율법책이 어디에서 누구에 의해 보관되고 지켜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를 지키라는 말만 등장합니다.

하지만 이후 「열왕기상」에서 율법책은 언급되지 않습니다. 율법책이 다시 언급되는 곳은 「열왕기하 14장 6절」인데, 남왕국의 왕 ‘요아스’의 아들 ‘아마샤’가 아버지 ‘요아스’에게 반란을 일으키고 왕인 ‘요아스’를 죽였던 신하들을 숙청하는 장면에서 나옵니다.

‘요아스’의 아들 ‘아마샤’ 때에 언급된 율법책은 「열왕기하 21장 8절」에서 남왕국 ‘므낫세’를 비판하면서 언급되고, 「열왕기하 22-23장」에 ‘요시야’ 종교개혁 사건 때에 등장합니다. 종합해보면, 「열왕기」에서 율법책은 ‘다윗’, ‘아마샤’, ‘므낫세’, ‘요시야’ 때에 언급되는데, 이 중 율법책이라는 기록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는 구절은 ‘다윗’과 ‘요시야’ 밖에 없습니다. ‘아마샤’와 ‘므낫세’의 경우는 율법의 말씀을 따랐거나 따르지 않았다는 역사가의 평가로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록된 율법책이 왕정 시대에는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의아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명기」나 「여호수아」에서 이 책은 상당히 중요하게 다뤄야 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실제 왕정 시대에 이 책은 존재 유무조차 알 수 없습니다. 만약 ‘다윗’이 이 책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다면, 우리나라 고려나 조선과 마찬가지로 사고(史庫, 실록 보관고)를 만들어 지켰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그런 조치를 취하지 않습니다.

「열왕기」는 다윗과 솔로몬의 관료 중에 ‘서기관’이 있었음을 명시하면서 이들이 율법책을 관리했을 것만 같은 인상을 줍니다(삼하8:17; 20:25; 왕상4:3). 하지만 지난 글에서 초기 서기관의 업무는 율법과 관련이 없었다는 점을 살펴보았습니다(이스라엘 역사 9, ‘서기관 사반, 성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하다’ 참고). 물론 서기관 중에 국가 법률과 관련된 업무를 맡았던 사람들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이는 지금과 같은 형태의 율법이 아닙니다. 서기관들이 지금 우리가 구약성경이라고 부르는 율법과 연결된 때는 ‘요시야’ 이후라고 판단됩니다.

「열왕기하 22-23장」에 나타난 율법책에 관한 언급에서도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힐기야’에 의해 성전에서 발견된 이 책에는 분명 우상숭배와 그에 따른 하나님의 심판이 담겨 있었을 것입니다. 당시 아시리아와 이집트의 속국인 상황에서 ‘요시야’가 이 말씀을 듣고 옷을 찢으며 참담하게 느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모세’와 연결시킨 이유는 무엇일까요? 「열왕기하 23장 25절」은 ‘요시야’와 같이 ‘모세의 모든 율법’을 지킨 왕이 없다고 말합니다. ‘솔로몬’ 이후 최소 300년 동안 존재 자체도 몰랐던 말씀 기록을 ‘모세’가 썼다고 확신할 이유는 없습니다. 물론 ‘훌다’를 통해 이 말씀의 진위를 확인했지만, ‘훌다’가 공인한 것은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 맞다는 것이었지, ‘모세’가 쓴 글임을 확인해주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이 표현은 후대 역사가의 기록일 수도 있습니다. ‘요시야’는 이 율법책이 누가 기록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 내용에 따라 종교개혁을 일으켰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 마찬가지의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후대 역사가들은 이 율법책이 ‘모세’가 기록한 것임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었을까요?

이에 대한 한 가지 단서는 있습니다. 「열왕기하 22장」은 ‘힐기야’가 발견한 것을 ‘율법책’이라고 표현합니다. 하지만 「열왕기하 23장」에서는 이를 ‘언약책’이라고 부릅니다. 히브리어로 보자면, 율법책은 ‘세페르 하토라(ספר התורה)’이고 언약책은 ‘세페르 하베리트(ספר הברית)’입니다. 의미상으로는 별로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앞서 「신명기 31장 26절」이 이 둘을 구분하고 있다는 점을 말씀드렸습니다. 기록된 언약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것 하나 밖에 없습니다. 바로 십계명입니다.

‘요아스’ 시절에 만들어진 ‘은궤’ 안에서 ‘기록된 언약’이 발견되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혹시 ‘요아스’ 시절에 성전 구석에 뒹굴고 있던 언약궤를 은궤로 사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품게 되지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봅니다.

▲ 복원된 언약궤 ⓒ위키피디아

위의 사진은 죠지 워싱턴 기념관(George Washington Masonic National Memorial)에 복원되어있는 언약궤의 사진입니다. 만약 「출애굽기 25장 10-22절」에 나타난 언약궤가 실제로 존재했다면, 왕정 시대에 이를 방치하다가 은을 바치는 궤로 사용하지는 않았으리라 봅니다.

「열왕기하 22-23」장의 기록에 따라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요시야’가 우상숭배를 금지와 지방 산당 제거와 성전 중심 제의를 강조하는 어떤 기록물을 발견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열왕기의 역사가는 이를 ‘모세’의 율법과 연결시켰습니다. ‘모세가 기록한 모든 율법’이라는 표현뿐만 아니라 ‘언약책’이라는 표현까지 사용하면서 당시 발견된 율법책을 ‘모세’의 기록물과 연결시키며 구약성경의 독자들이 이를 「신명기」에 나타난 그 기록물로 읽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율법책에 담긴 내용

‘드 베테(W. M. de Wette, 1780-1849)’의 신명기 연구 이래로 ‘요시야’ 시절 발견된 율법책은 신명기의 일부였다고 봅니다. ‘요시야’의 개혁 내용이 신명기와 일치하는 점이 많기 때문입니다(신12:13ff, 17f; 18:6-8 참고). 특히 「신명기 12-26장」을 ‘원신명기’라고 부르면서 ‘요시야’가 사용한 율법책은 ‘원신명기’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후 ‘노트(Martin Noth, 1902–1968)’의 연구에 따라 ‘신명기 역사 이론’이 등장하면서 신명기-여호수아-사사기-사무엘-열왕기는 ‘신명기 역사가’라고 불리는 집단에 의해 편집 작성되었다고 봅니다. 이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논문 한 편으로도 부족하기 때문에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신명기 역사에 관해서는 2008년 「구약논단」 14호에 게재된 이은우의 “소위 신명기 역사 연구의 최근 동향”을 보시면 좋을 듯 합니다.

‘신명기 역사가’ 집단에 의해 역사서뿐만 아니라 「신명기」 자체도 편집되었다는 이야기는 우리가 읽고 있는 구약성경 역사의 신뢰도를 떨어뜨립니다. 실제 벌어진 일들이 아니라 바벨론 포로 초기 ‘신명기 역사가’ 집단의 필요에 의해 창작된 사건일 가능성도 있다는 말입니다.

최근 연구는 ‘요시야’가 율법책을 발견한 사실, 그가 종교개혁을 일으켰다는 사실도 ‘신명기 역사가’ 집단의 창작일 수 있다고 봅니다. ‘요시야’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예레미야’가 그의 종교개혁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는 점, 특히나 ‘요시야’ 종교개혁의 핵심은 성전 중심의 중앙 제의 집중이었는데, 「예레미야 7장」은 성전 제의를 비판하고 있다는 점을 보았을 때, 그 진위를 의심하게 됩니다. ‘그래비(Lester L. Grabbe)’는 『고대 이스라엘 역사』에서 “요시야의 종교개혁이 신명기 사가의 창작은 아니었는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고 말하며 이 율법책에 대해 큰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요시야’ 시대에 「열왕기하 22-23장」과 일치하는 형태의 개혁은 아닐지라도 어떤 형태의 종교 변화는 있었으리라고 봅니다. 이를 위해 앞서 제사장, 서기관, 난민 출신 예언자에 대해 살펴보았던 것입니다. 이들의 역할은 분명 ‘요시야’ 시기를 기점으로 변화됩니다.

또 「예레미야 37장 12절」을 보면, ‘예레미야’가 자신의 분깃을 받기 위해 자신이 속한 베냐민 땅으로 가려고 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이 규정은 ‘요시야’ 종교개혁의 내용 중 하나였습니다(왕하23:9). 만약 이런 규정이 없었다면, 아나돗 제사장 집안 출신인 ‘예레미야’도 성전에서 자신의 분깃을 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요시야’ 이전에 원신명기가 존재했고, ‘요아스’ 이후 누군가가 그것을 은궤 안에 넣어두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열왕기」의 기록만으로 보자면, 이 율법책은 성전 어딘가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솔로몬’ 이후 누군가가 감춰두었다고 볼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았던 왕들이 이를 버렸으면 버렸지, 감춰둘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저는 율법책을 발견한 사건은 ‘요시야’가 종교개혁을 일으키기 위해 만든 하나의 이벤트이거나 ‘요시야’ 시절에 작성되고 편집된 율법책의 기원을 ‘모세’에게로 돌리기 위한 신명기 역사가 집단의 과장된 서술이라고 봅니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명기」에는 최소 세 개의 층이 있습니다. 원신명기라 불리는 12-26장, ‘에살핫돈 종주권 조약’의 내용을 변경하여 작성된 4-11장과 28장, 그리고 나머지 부분들입니다.

‘산헤립(주전 705-681년)’의 뒤를 이어 아시리아의 왕이 된 ‘에살핫돈(주전 680-669년)’은 자신의 아들 ‘앗수르바니팔(주전 668-626년)’의 왕위 계승에 상당히 신경을 썼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자신의 신하들과 속국의 왕들에게 ‘앗수르바니팔’에게도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하도록 명하기 위한 서약을 행합니다(주전 672년). 이 서약문이 ‘에살핫돈 종주권 조약(Esarhaddon's Treaty)’입니다.

▲ 에살핫돈 종주권 조약 ⓒ대영박물관 britishmuseum.org

위의 사진은 현재 대영박물관(The British Museum)에 소장 중인 ‘에살핫돈 종주권 조약’의 일부입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이 조약의 내용과 「신명기」의 연관성입니다.

▲ 에살핫돈 종주권 조약 비교

위의 표는 밀러(J. Maxwell Miller)/헤이스(John H. Hayes)의 『고대 이스라엘 역사』 499-500페이지에 번역되어 나타난 내용 중에서 일부만 발췌한 것입니다. 「신명기」의 구절은 개역개정 성경의 번역에 따라 바꿨습니다. 표의 내용을 슬쩍 보기만 해도 「신명기 5-6장, 28장」의 내용과 ‘에살핫돈 종주권 조약’의 내용은 유사합니다. 이 조약에서 충성을 다할 존재는 ‘에살핫돈’과 그의 아들 ‘앗수르바니팔’이지만, 「신명기」는 이를 ‘하나님’으로 바꿔놓습니다.

간혹 목회자나 성도님들 중에 이런 이야기를 불편해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성경이 고대 세계의 어떤 다른 글을 베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오히려 당시 「신명기」를 기록한 이들의 놀라운 신앙을 느낍니다. 아시리아에 충성을 다하라고 속국에 보낸 조약문의 내용을 바꿔서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을 섬긴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속국의 입장에서는 목숨을 걸어야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일이 실제 주전 672년 직후에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당시 남왕국의 왕이었던 ‘므낫세’는 아시리아에 충성을 다했습니다. 물론 「역대하 33장 11절」에 나타난 상황을 따져보면,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독립운동을 위한 국가 연합이 존재했기 때문에, ‘므낫세’가 이에 동참했다가 아시리아에 끌려갔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하지만 「열왕기하 21장」에는 그런 언급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므낫세’에 관해서는 이후에 다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찬가지로 ‘므낫세’의 아들 ‘아몬’도 독립이나 개혁에 대한 의지를 보이지 않았고, 신하들에 의해 왕위에 오른지 2년 만에 죽임당했습니다. 「열왕기」의 기록 속에서 이런 작업이 가능한 왕은 ‘요시야’입니다. 지난 글에서 잠시 살펴보았지만, ‘요시야’가 종교개혁을 수행했다고 말하는 ‘요시야’ 18년은 주전 623년이고, 이 시기는 아시리아의 내전이 끝나고 바벨론과 패권 다툼을 시작하던 때입니다.

어쩌면 「역대하 34장 3절」의 기록처럼 재위 8년과 12년에 이미 종교개혁을 위한 걸음을 떼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요시야가 분명하게 반아시리아 운동을 펼치고 국내의 정치와 종교의 개혁을 일으킨 것은 주전 623년, ‘요시야’ 18년이 맞다고 생각됩니다. 그의 재위 8년과 12년에는 아직 ‘앗수르바니팔’의 힘이 약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요시야’의 재위 기간은 주전 639-609년이 됩니다.

「신명기」에 대한 연구는 지금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학자들의 연구를 더 살펴볼 필요가 있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신명기」는 요시야 시대에 정치, 종교개혁을 위해 기록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핵심적인 규정은 구전으로 전해 내려온 것일 수도 있지만, 그런 규정을 제사장 집단과 함께 하나의 문서로 묶어낸 후에 종교개혁을 일으켰고, 이를 서기관 집단과 함께 더욱 확장시켜서 반아시리아 정신을 담은 문서를 만들어 냈다고 봅니다. 더 나아가 북왕국 난민 출신 예언자 집단을 통해 출애굽 전통을 융합하지 않았을까 판단합니다. 물론 바벨론 포로기 이후 신명기 역사가 집단에 의해 다시 수정, 편집되었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구약성경의 많은 책은 바벨론 포로 시절에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과 신앙 유지를 위해 기록되었고 보존된 것으로 봅니다. 하지만 ‘요시야’ 때에 발견 혹은 기록된 율법책의 존재는 남왕국이 멸망하기 이전, 어쩌면 독립의 희망이 보이던 시기에 문서화 작업에 관심을 보였다는 증거가 됩니다. 또 이 문서를 국가 운영의 중심, 외세로부터의 독립과 내부 안정에 사용하였다는 점도 주의 깊게 볼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시야’에 관해 여러 가지로 더 살펴보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만, 이 시기에 대해 너무나 길게 볼 수가 없으므로 다음에는 ‘요시야’의 아버지 ‘아몬’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성훈 목사(한신대 구약학 박사과정)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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