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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배신한 것일까채수일 목사의 성경 인물 탐구 33
채수일 목사(경동교회) | 승인 2020.12.01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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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6년, 「내셔널 지오그래픽」 (The National Geographic Society)에 의해 복원된 이른바 『유다 복음서』가 처음 공개되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1976년 이집트의 한 골동품 시장에서 발견되었다는 이 『유다 복음서』는 2세기 무렵(130-170CE) ‘영지주의’ 한 분파인 ‘카인파(Caintes)’가 쓴 것으로 추측됩니다. 원래 본문은 그리스어로 기록되었으나 4세기 무렵 이집트에서 사용하던 콥트어로 번역되어 파피루스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모두 26쪽 정도의 분량인 이 짧은 ‘유다 복음서’가 발견됨으로써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은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널리 있었다는 것과, 지금까지 복음서를 통해 알려진 것과는 다른 모습의 이스카리옷 유다를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유다’라는 이름은 서구 기독교 세계에서 ‘배신자’, ‘저주받은 자’의 집단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본래 ‘유다’(judas)라는 이름은 히브리어 이름 ‘Judah’를 그리스어로 표기한 것으로, ‘찬양받은’, ‘칭송받은’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유다’라는 이름은 모든 유대교 전통 안에서 널리 알려진 대중적인 이름일 뿐만 아니라, 유대교라는 명칭 자체도 바로 ‘유다’에서 온 것이지요.

유다는 야곱과 레아의 넷째 아들이면서 이스라엘 12지파의 한 이름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갔을 때, 유다 지파는 남부지역을 할당받았습니다. 솔로몬이 죽은 후, 이스라엘이 두 왕국으로 분열되었을 때, ‘북왕국’은 ‘이스라엘’, ‘남왕국’은 ‘유다’로 불렸습니다. 그 후, 북왕국 이스라엘은 ‘앗시리아’에, 남왕국 유다는 ‘바빌론’ 제국에 의해 멸망당했는데,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사람들에 의해 유다는 복원되었습니다. 로마 제국의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그 지역을 ‘유대아’(Judaea)로 불렀고, 거주민들을 ‘유대인’이라고 칭했습니다.

지역명만이 아니라 사람 이름으로도 ‘유다’는 대중적인 이름입니다. 시리아 군대에 저항했던 마카비 반란을 이끌었던 지도자는 ‘유다 마카비’(Judas Maccabee 167-160 BCE)였습니다. 유대 역사학자였던 요세푸스도 당시의 테러리스트들인 ‘젤롯’(Zealots)을 ‘시카리’(Sicarii)로 불렀는데 이들의 지도자들을 유다로 칭했습니다. 신약성서에도 6명의 인물이 유다로 불리는데, 예수님의 12 제자들 가운데서도 2명이 유다라는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눅 6,16).

▲ 『유다 복음서(The Gospel of Judas)』의 첫 번째 페이지. ⓒWikipedia

그렇다면 ‘이스카리옷’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 단어에 대한 학설이 분분한데, 아마도 ‘카리옷 출신 사람’(이스 = 사람, 카리옷 = 지역이름 혹은 단순히 도시를 뜻하기도 함)을 뜻하거나, 아니면 요세푸스가 주장하는 것처럼 당시의 ‘젤롯 당’을 뜻하는 ‘시카리’(Sicarii)를 의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카리옷 유다가 테러리스트였고, 테러리스트를 가까운 제자로 삼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도 정치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카리옷 유다는 왜 예수님을 대제사장들에게 넘겼을까요? 유다의 배신의 이유를 정치적 기대의 좌절에서 찾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의 삶의 마지막 40년을 예수에 관한 영화를 만드는 계획에 바쳤던 덴마크 출신의 영화감독 ‘드라이어’(Carl Theodor Dreyer, 1889-1968)가 그런 사람입니다. 드라이어는 세금납부에 저항한 혁명론자들과 예수에게서 메시아를 본 모든 애국적 유대인으로부터 예수께서 등을 돌렸기 때문에 유다가 배신했다고 봅니다.

자신의 동성애를 숨긴 적이 없는 이탈리아 영화감독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Pier Paolo Pasolini, 1922-1975)는 유다가 배신한 이유를 예수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 배신당한데서 찾습니다. 예수님의 발에 비싼 향유를 붓고 긴 머리털로 발을 닦은 여인에 대한 질투라는 것이지요. 연정을 품은 동성애자인 유다의 격렬한 증오가 이유라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에서는 돈에 대한 욕심이 배신의 이유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값비싼 향유를 낭비한 여인을 두고 분개한 제자가 바로 유다였다는 요한복음의 보도에 근거한 것입니다(요한 12,4-5). 또 대제사장이 은 서른 개를 내놓자 “그 때부터 유다가 예수를 넘겨줄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는 마태의 보도(마태 26,16)도 이런 주장을 뒷받침해줍니다. 그러나 “은 서른 개”는 우스울 정도로 적은 액수입니다. 출애굽기 21장 32절에 의하면 황소가 남의 노예를 죽였을 때는 은 삼십 세겔을 물도록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그 액수가 대략 십분의 일의 가치가 있었는데, 그렇다면 “은 서른 개”는 결코 스승을 넘겨주고 그 대가로 받을만한 큰돈은 아닙니다.

1969년 “어떤 행렬”이라는 소설로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목사이자 소설가인 ‘백도기’(1939- )는 1979년 작, “가롯 유다에 대한 증언”이라는 작품에서 다른 해석을 시도합니다. 유다의 동향 친구이자 성전 판매소 상인인 시므온은 교활한 소시민입니다. 대제사장 안나스의 밀명을 받고 예수님의 행적을 감시하는 역할을 한 인물이지요. 그의 눈에 비친 유다는 엄준한 도덕주의자이자 혁명적 민족주의자입니다. 그런 유다이기 때문에 창녀가 된 그의 누이 라헬에게 자살을 요구하면서 칼을 보내기도 합니다. 유다는 처음 예수님에게서 정치적 메시아를 보았지만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이 자신의 기대에 부응하지 않은 배신감에 예수님을 넘겨주었다는 것입니다. 백도기는 유다의 정의의 윤리와 예수의 사랑의 윤리의 충돌에서 배신의 이유를 찾습니다.

정치적 기대의 좌절, 애증관계, 돈에 대한 욕망, 그 어느 한가지만으로 배신의 이유를 말할 수 없을 만큼 유다라는 인물에 대한 보도들은 매우 복잡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배신의 진정한 이유였을까요? 이 해결하기 어려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그리고 이스카리옷 유다를 변론하기 위해서 『유다복음서』가 등장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유다복음서는 예수님의 사건을 성경에 나타난 약속의 성취로 해석했던 초대교회공동체들처럼 하나님의 구원사의 조역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구원의 드라마, 감독 및 연출은 하나님, 주연은 예수님, 그리고 조연이 이스카리옷 유다라는 것이지요.

< 2 >

교회의 역사 속에서 이스카리옷 유다는 한 편으로 저주받은 악마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역설적으로 유다는 예언자이며 고통 받는 의인인 예수님의 분신으로도 해석되었습니다.

영화감독 ‘파솔리니’는 유다를 배신하는 친구이자, 동시에 배신당한 친구로, 심판자이자 동시에 희생자로 묘사합니다. ‘드라이어’는 유다를 회의주의자이자 우유부단한 인물로, 의심과 믿음 사이에서 동요하는 사람으로 봅니다. 그리스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Nikos Kazantzakis, 1883-1957)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을 1988년에 영화로 만든 미국 영화감독 ‘마틴 챨스 스콜세지’(Martin Charles Scorsese, 1942- )는 유다를 은총과 배신을 동시에 역설적으로 상징하는 인물로 그리고 있습니다.

어떤 시각에서 유다를 해석하든지 공통된 결론은 이스카리옷 유다는 배신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서는 유다의 행위를 배신으로 서술하지 않고, 단지 그가 예수님을 ‘넘겨주었다’고 표현합니다. ‘배신’으로 번역된 원래의 단어는 본래 ‘넘겨주다’라는 단어로서 배신보다는 훨씬 더 약한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유다의 행동을 정확히 살펴보면 ‘배신’이라는 단어는 사건의 본질을 정확하게 설명하기 어렵게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은밀하게 숨어 지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의 은신처를 발견하기 위해 배신자가 필요했던 것은 아닙니다. 대제사장이 필요로 했던 것은 가급적 눈에 띄지 않게 예수님을 체포할 기회를 포착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유다는 다만 적당한 기회를 알려주는 역할만을 담당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다만 넘겨주었을 따름입니다. 유다는 대제사장에게 넘겨진 예수께서 다시 빌라도에게 넘겨지고, 마침내 십자가 처형을 당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 유다는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겨주는 일에 가담할 의도가 전혀 없었습니다. 사태가 그렇게까지 전개될 것을 몰랐기 때문에 유다는 그 후 크게 자책하여 자살했는지 모릅니다.

유다는 예수님에게 입을 맞춤으로써 체포자들에게 예수님을 알려주었다고 공관복음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어느 제자와도 입을 맞추었다는 기록이 없는 반면, 유난히 유다와 입을 맞추었다는 것을 보도하는 것으로 보아 우리는 유다가 예수님과 아주 가까운 관계였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예수님은 자신을 넘겨주려고 다가와 입을 맞추는 유다에게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마태 26,50).

주목할 것은 예수께서 어쩌면 가장 가까웠을지도 모를 사도들 중 한 사람, 그가 ‘친구’라고 호칭한 제자를 통해 넘겨졌다는 점입니다. 오늘도 예수님을 넘겨주는 일은 그 어디도 아닌 가장 가까운 곳, 바로 제자들 한 가운데서, 교회 한 복판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스카리옷 유다는 이제 한 개인이 아닙니다. 유다는 사도들 가운데 ‘유다 지파’를 대표합니다. 유다가 예수께 행한 일은 이스라엘이 야훼께 행한 일이었습니다. 유다는 하나님을 버리고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모든 인간, 모든 신앙 공동체의 원형입니다.

유다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자책으로 받은 돈 ‘은 삼십’을 되돌려주고 자살합니다. 유다의 이와 같은 행동에는 진정한 회개의 본질이라고 할 모든 요소가 들어 있습니다. 어쩌면 유다의 회개는 본질적으로 베드로의 회개보다 더 완전하고 영웅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베드로가 한 일이라고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후에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한’ 일 밖에는 없습니다(마태 26,75). 우리는 유다의 자살을 결코 폄하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회개를 거부한 후 자살로 삶을 마침으로써 유다는 자기 자신의 심판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죽음 자체로서 죄를 속죄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죽음은 다만 죄의 최종적인 완성일 뿐입니다. 유다는 속죄의 죽음을 죽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불순종한 자가 맛보아야 하는 전적으로 절망적이고 무익한 죽음을 죽었습니다. 그의 죽음은 희생의 죽음이 아니라 다만 하나의 형벌일 따름이었으며, 그러므로 아무런 교훈과 생명도 낳을 수 없었습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어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거나, 아니면 삶이 너무 견디기 힘들어서 자살을 하려는 충동을 가져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살, 곧 자신에 대한 스스로의 심판은 구원의 은총을 스스로 포기하는 행위입니다.

유다는 낙인을 받은 자요, 추방당한 자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요, 내쫒긴 자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그 단어적 의미에서 ‘거룩한 자’, ‘구별된 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유다의 잘못을 조금도 줄일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서의 분명한 설명에 따르면 유다의 버림받음은 모든 사도, 온 이스라엘의 버림받음의 계시로만 이해될 수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유다는 예수님과 매우 다름에도 불구하고 ‘유사성’도 지니고 있습니다. ‘버림받음’이 그것입니다. 유다의 버림받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받으신 버림받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버린 돌이 모퉁이 돌이 되고, 버림받은 자가 언젠가 선택된 자리에 앉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전은 모든 버림받은 자들의 희망의 근거가 됩니다.

유다는 배신의 개인적 전형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집단적 모상입니다. 유다는 우리 가운데 있고, 우리도 유다 안에 있습니다. 아니 유다가 예수님을 넘겨주었을 때, 유다의 행동 안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행동하셨습니다. 아니 유다가 예수님을 넘겨주기 전에 하나님은 예수님을 넘겨주셨고,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넘겨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제자의 넘겨줌의 대상이 되시기 전에 하나님은 예수님을 넘겨주셨으며, 예수님도 자기 자신을 넘겨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인격 안에서 자기 자신을 넘겨줌의 대상으로 만드셨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기 자신을 넘겨줌의 대상으로 만드셨습니다.

그 누구도 아닌 하나님 자신이 자신을 넘겨줌의 대상으로 만듬으로써 마침내 이 세상에는 용서받지 못할 죄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유다는 더 이상 배신과 저주의 상징이 아니라, 자살로 자신을 심판함으로써 용서하지 못할 죄가 없는 하나님의 은총을 거부한 인물의 원형인 것입니다.

▲ Giotto di Bondone, 「The Kiss of Judas (between 1304 and 1306)」 ⓒWikipedia

< 3 >

자살의 원인은 다양하지만(생활고, 병고, 비관, 염세, 가정불화, 양심의 가책, 결백의 주장, 배신감, 실연 혹은 자발적 안락사 등), 자살의 책임은 전적으로 자살한 사람 자신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자살한 사람은 이미 자살을 통하여 윤리적으로 책임질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살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무거운 상처를 주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구원의 은총을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책임적 인간, 특히 신앙인이 취할 마지막 선택이 아닙니다. 생명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는 그리스도교의 근본적인 생명이해는 인간이 살 권리만이 아니라 죽을 권리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할 수 없게 합니다. 삶은 권리만이 아니기 때문이며, 또한 자신만의 소유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삶은 태어나면서부터 관계 속에 있기 때문에 삶은 권리만이 아니라 의무인 것입니다. 물론 사람은 자신의 생명을 자신의 의도대로 끝맺을 자유와 권리를 가질 수 있다는 주장은 존중되어야 합니다. 더욱이 더 이상 육체적으로 존속할만한 가치가 없다고 판단되는 극단적인 상황에서 선택되는 자살은 인간답게 죽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빛으로 우리를 인도하시지만, 우리 앞에서 인도하시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우리 등 뒤에서 길을 비추시는 분이심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앞에서 비추는 빛은 우리 눈을 오히려 뜨지 못하게 합니다. 빛은 오직 등 뒤에서 비출 때 길을 밝힐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빛은 언제나 그림자를 만들어 냅니다. 하나님의 빛에 비추인 길 위에도 그림자는 있는 법이고, 그리고 그 그림자는 언제나 우리 자신의 그림자입니다. 빛 없는 그림자 없고, 그림자 없는 빛도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삶, 빛으로 밝히시는 길 위에도 어둠과 그림자는 있다는 것을 아는 신앙인에게 자살은 있을 수 없습니다.

채수일 목사(경동교회)  sooilcha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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