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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화형식의 주범이 되다인생의 변곡점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온다 ⑵
이해학 목사(겨레살림공동체 이사장) | 승인 2021.08.15 17:07
▲ 동아일보 기자들이 10·24 선언 이후 자유언론수호를 위한 실천에 들어가자 정부는 광고탄압을 자행했다. 1975년 1월 15일 육군중위의 격려 광고를 트집 잡아 광고국장 등 3명을 연행하자 동아일보 기자들이 항의 집회를 갖고 언론자유만세를 부르고 있다. ⓒ한국기자협회

위수령 파동이 있기 일주일 전 학생회 임원들이 나를 찾아왔다. 나는 순복음신학을 거쳐 오느라 학교도 늦게 들어왔을 뿐 아니라 군대 제대를 한 복학 선배 격이었다. 또한, 한신대 앞에서 가족들과 식품점을 하고 있었기에 바쁘기 짝이 없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청량리 옆 경동시장에 가서 짐바리 자전거에 식품 과일 생선 등을 잔뜩 싣고 논스톱으로 달려와 짐 내려놓고 학교에 가던 시절이었기에 학우들과 어울릴 시간이 없었다. 그런데 시대가 시급한 위기감을 안고 있기에 학생회 간부들은 나에게 <언론화형식>을 하려는데 선배님이 성명서를 써 주어야겠다는 것이다.

나는 사양할 수 없어서 쓰겠다고 하고 밤을 새워 썼다. 다음날 <언론화형식>을 하는데 성명서 읽기로 책임 맡은 사람이 안 왔다는 것이다. 간부가 찾아와서 선배님이 썼으니 선배님이 읽으셔야지요 한다. 거기서 거절 못 하는 것이 나의 성품이고 한계이다. 나는 가끔 이런 경우 사건의 중심으로 빨려들곤 한다. 활활 타는 불길 앞에서 나는 외쳐 부르짖었다. “언론이여 일어나라!!” 화형식은 그럴듯한 퍼포먼스가 되었다. 이런 걸 신문이 실어주어야 하는데, 기자 한 사람 없이 데모하는 변두리 대학의 한계에 아쉬움을 느꼈다.

화형식을 마치고 우리는 수유리 화계사 밑 한신대에서 출발하여 복숭아밭을 지나 신일고등학교 쪽으로 행진하고 있었다. 그런데 경찰들이 그 행진을 그냥 둘리 없다 방망이를 휘두르며 무작위로 체포할 때 대부분의 학생들은 복숭아밭 쪽으로 튀었다. 나도 우악스러운 경찰에게 체포되어 성북서로 압송되었다. 처음에는 한 20여 명이 웅성거리며 장난들을 치면서 조사에 응하였다. 한 사람씩 석방되어 풀려나갔다. 나야말로 어린아이들을 기르며 부지런하게 일하며 공부하는 고학생이요 착한 모범 시민임을 자부하며 나도 곧 풀려나겠지 생각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이상한 느낌이 든다. 모두 나갔다. 그리고 나만 덜렁 남았다. 성북서에서 형사의 추궁에 나는 아무것도 안 했다고 버티다가 뺨을 맞으며 곤욕을 치른 뒤에 성명서만 써 주었다고 말하고, 조인트를 한참 까이고도 안 불었던 사실을 사진을 보고야 인정하였다. 거기에는 훨훨 타는 모닥불 앞에서 내가 목에 핏줄을 세우고 성명서를 읽고 있는 장면이 그대로 찍혀있었다. 그것도 여러 장이나.

화계사 입구 3층 건물 옥상에서 망원렌즈 카메라로 찍었을 것이다. 빌어먹을 놈들 처음부터 보여주며 “이거 네 사진 맞지!” 하면 좋았을 것을. 내 다리 정강이가 시퍼렇게 까인 것보다 더 힘든 것은, 그 많은 언어의 실랑이와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양심의 가책이다. 취조관은 입버릇처럼 “너는 구속감이야!”를 반복하였기에 나는 나를 합리화 시킨다. 이대로 구속이 되면 새벽에 경동시장 먹거리는 누가 실어오며 저녁에 가게 문은 누가 닫아야 하나? 걱정이 거짓말을 하는 양심을 이기고 있었다. 순진한 시절의 내 모습이다.

그때 내가 쓰고 읽었던 성명서가 이런 것 같다.

언론은 한 시대에 사회를 살리는 몸의 혈관 같은 것이다. 언론의 사명은 온몸을 살리기 위해서 몸의 핏줄이 골고루 돌 듯 우리 사회를 돌아야 한다. 그런데 독재 권력이 강제적 힘으로 머리에만 피를 못 돌게 한다면 그것은 그 시대의 죽음을 의미한다. 언론은 정권이 자기 권력을 위해 봉쇄하거나 잘못 통제하려 할 때 그 시대를 병들게 하고야 만다. 오늘날 언론은 ‘권력의 노리개’ 이다. 언론의 생명력은 언론인 스스로가 찾아야 한다. 언론인이여! 일어나라!

열정적으로 읽었다.

그리고 취조관은 뜬금없이 사생활에 관한 질문을 하였다. “몇 월 며칠에 부인과 함께 택시를 타고 어디를 갔는가?”라는 물음에 나는 억지로 헛웃음을 가장하였지만 범죄 용의자처럼 감시당하고 있다는 사실에 모골이 송연해지고 기분이 더러워졌다.

그러고 보니 어느 때부터인지 동네가 달라졌다. 후에 슈퍼마켓이라고들 하였지만 우리는 그저 <가나안>이라는 식품 가게였다. 아침 6시부터 문을 열고 저녁 12시 어떤 때는 새벽 1시까지 열 때도 많다. 우리 집이 모서리 가게이고 우리 옆집이 약국이고 그 옆이 세탁소이다. 자연히 우리가 옆 공터와 골목에 물건도 진열하기 좋았다. 약국집 약사와는 나는 그를 <J 형>이라 부르고 그는 나를 <이 형>이라고 불렀다. 가끔 박카스도 한 병씩 따주며 가깝게 지냈다. 어느 때부터인가 이분 표정이 웃음이 사라지고 표정이 굳어 보였다. 그리고 말을 해도 시비조다. 우리 물건이 많아서 골목이 지저분하다느니 우리 집 햇빛 가리개 천막 때문에 자기네 간판이 멀리서 안 보인다느니 이런저런 시비를 걸어와서 당황하였다.

우리 가게에 따른 방은 하나이다. 거기서 나와 아내와 1살, 2살로 연년생인 두 딸과 어머니와 일하는 일꾼과 함께 지내야 했다. 좁은 방에서 불편을 감수하며 말없이 살아주는 아내가 고맙기도 하였다. 겨울에는 난로까지 놓아야 했다. 그래서 늘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과 감사하는 마음이 쌓여오던 과정이었기에 결혼을 기념하는 의미로 택시를 불러 하루 여행을 다녀왔다. 그것도 신혼여행이랍시고 갔던 숙소에서 하루를 보내고 왔다. 그런데 그 일로 심문을 받게 되니 기가 탁 막혀버렸다. 온 동네 사람이 감시원같이 보였다. 실제 형사들은 자기들의 정보원을 몇 명씩 둘 수 있었다. 그곳을 떠난 뒤에도 나는 가끔 약국에 들리곤 한다. <J 형>은 기원 형 목사님 시절 내가 다녔던 송암교회 장로가 되어 있었고 부인은 권사로 열심히 살고 있었다.

나를 취조하는 형사는 질문하는데 밑에 깔아놓은 몇 장의 종이를 들추어 보면서 묻는다. “어느 교수 시간에 무슨 질문 안 했느냐? 적도(赤道)라는 시화전은 누가 주도했느냐?”

나는 광주공고를 다니며 신문 배달을 하면서도 조송현이라는 상고 친구와 청도(靑島)라는 문학동인을 운영한 경험이 있다. 광고, 광주여고, 전남여고, 광주상고, 숭일고에서 문학하는 학생들을 모아서 문학 수업토론을 하였었다. 광주에 결핵 요양을 하시던 김현승, 뜨거운 열정을 가지신 박봉우 시인, 우체국 근무를 하면서도 소설을 쓰시는 오상원 선생들께 지도받으며 <靑島문집>까지 냈다.

그러기에 한신대에서도 당연히 고석희·유원규·윤옥균 등과 만든 문학동인회는 靑島 다음 赤道였다. 그런데 나도 나를 의심하게 된다. 왜 島를 道로 바꾸었지? 한신에서 고석희 의견이었던가? 아니면 우리에게 늘 와서 중국 정보를 알려주고 리영희 선생의 <8억인과의 대화>를 소개하던 중앙대 최자웅(뒤에 성공회 신부가 됨)인가?

취조관은 적도의 의미는 무엇인가? 심각한 질문을 쏟아 놓다. 나는 단순했다. 청도를 해보았으니 적도를 하는 것이 순서이지만 붉은 섬은 없으니 島가 道로 변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고 보니 적도 시화전을 알리는 팸플릿 밑에 누군가가 빨간 펜으로 <Red line>이라고 표기해놓은 것이 생각난다. 아, 나는 지금 사상범으로 몰리고 있구나. 등골이 오싹해진다. 나는 세상은 다양할 뿐 아니라 복잡한 거미줄 같이 엉켜있음을 알아가는 중이다.

나는 형사가 가끔 밖에 나가서 지시받고 오는 사이에 밑에 깔아놓은 종이를 들추어 보았다. 보아서는 안 될 판도라 상자였다.

이럴 수가, 거기에는 <SKK의 보고>라고 쓰여 있었다.

나는 SKK 형과 인연이 깊었다. 내가 군대 생활하던 전곡 8인치 포병대에서 경리 사병으로 복역하다가 결핵에 걸려 의정부 101 보충대를 거치며 마산요양원까지 이르는 동안 많은 젊은이가 죽어가는 것을 보았다. 결핵보다 쥐 진드기에 감염된 유행성 열병에 더 많이 죽어갔다. 나는 운 좋게 마산 육군 요양병원에서 <아이나>, <파스> 약을 복용하고 <스트렙토마이신> 주사로 치료하며 의병 제대하였다.

나는 거기에서 사귄 핸섬 한 장교 환자인 그분을 만났다. 그는 지방대학 졸업 후 보수적 신학대학에 진학하겠다는 의지가 있었다. 나는 어쭙잖은 설득을 늘어놓았다. 세계적 흐름이 진보로 가는 경향이다. 그리고 한신에는 독일에서 돌아온 안병무 박사와 미국에서 돌아온 문동환 박사가 현재 신학계의 흐름을 주도한다. 길이 아닐 때는 보수를 하고 진보로 오기는 어려워도 진보를 하고 보수로 갈 수도 있다. 등등으로 설득하여 한신으로 끌어들인 인연이 있다. 그런데 그가 나에 대하여 미주알고주알 보고서를 만들어 바쳤다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배신감보다 더 깊은 슬픔이 심연에서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권력은 쉽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통치하기 위해서 백성들에게 외통수 길을 만든다. 이 길에 걸려든 사람들은 항복할 것인가 죽을 것인가? 갈등에 빠져 고민한다. 실제 우리 주변에 많은 친구들이 변절도 하였지만 또한 죽어갔다. 그중에서도 내게 잊지 못할 친구는 황주석이다. 그는 나의 갈등과 고민을 알아준 친구이다. 항상 땀내가 펄펄 나는 그는 우리 좁은 가게 뒷방에 와서 “형님 너무 굳어있어요. 유연하지 못하면 우리가 지는 겁니다.” “형님은 너무 순진해서 한 가지에 집착하는 결벽증 습관이 있어요. 세상에는 여러 갈래의 길이 있어요. 한 길만을 가야 한다고 고집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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