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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세계의 빛들과 종교 간의 대화칼 바르트의 빛의 론 ⑸
최영 소장(기독교장로회 목회와신학연구소) | 승인 2022.05.14 16:49
▲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와 인간은 분리될 수 없다. 그 안에 존재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렇기에 끊임없이 인간의 창조 세계의 소리를 듣게 된다. ⓒGetty Image

창조세계의 빛들: 그 가능성과 근거(미주 1)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화해의 사건이 하나님에 의해 피조된 세계에서 일어났다는 점을 주목하면서, 하나님에 의해 선택되고, 의도되고, 근거되고, 지배되는 창조세계에 속한 빛들, 말과 진리들에 대해 논하려고 다시 창조론(CDⅢ/1)의 논제로 돌아간다.

창조는 하나님이 인간과 맺으신 은혜의 계약의 외적 근거가 되고, 이 계약은 창조의 내적 근거가 된다(참고 CDⅢ/1, §41). 그런데 바르트가 창조와 계약을 어떻게 관계시키는가를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그의 선택론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 즉,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이 되시고자 미리 작정하셨다. 하나님은 이 목적을 실현하기 위하여 그의 행동 가운데에 처음 행동인 창조의 일을 이루셨다. 이 창조세계는 하나님이 자신과 인간 사이에 있을 은혜의 계약을 세우고, 실현하시기 위한 장소인 것이다. “창조는 은혜의 계약사가 전개될 무대”(CDⅢ/1, 54)이고, 바로 이 장소에서 화해와 구원의 사건이 일어난다(CDⅣ/3-1, 138). 이렇게 창조의 목적은 화해이다. 그러나 화해론에서 이 관계는 단지 화해에 대하여 갖는 의미뿐만이 아니라 창조에 대하여 갖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고려해야 한다.(2)

하나님은, 그의 화해하시는 활동에 비추어 볼 때, 그의 피조 세계를 보증하고 지지하고 보호하시는 분이시다. 바르트는 이렇게 말한다.

“창조주의 신실성에 피조물의 영속성과 항구성이 상응한다. … 하나님의 창조적인 은총의 활동은 그의 화해의 활동을 목적으로 하고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은 또한 언제나 그가 창조하신 세상의 보증인, 지지자와 보호자이다.”(CDⅣ/3-1, 138)

이 같이 창조는, 창조주 하나님의 신실한 활동이기 때문에, 인간의 파괴적인 죄에도 불구하고 영속성과 항구성의 특징을 갖는다. 피조 세계가 그 자신의 고유한 빛들과 진리들, 다시 말하면 그 자신의 언어와 말들을 갖고 있다는 것은 이 창조주의 신실성에 기인한다. 바르트에 의하면 피조된 세계는 이 사실을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표현하는데, 이것을 표현하는 언어가 “피조된 세계의 자기 증거”(CDⅣ/3-1, 139)이고, 그들이 증언하는 것은 “창조주가 그의 피조물들에게 신실하다”(CDⅣ/3-1, 153)는 바로 그것이다.(3) 이와 관련하여 바르트는 “원계시”와 “창조의 계시”와 같은 현대의 위험한 표현들도 그것이 “피조물의 계시들”을 지칭하는 한 분명하고 탁월한 의미를 지닐 수 있다고 본다(CDⅣ/3-1, 140).

이와 같이 하나님에 의해서 피조된 세상은 그 자신의 언어와 말을 갖고 있기 때문에 단지 존재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를 사람들에게 알리면서 말을 하기도 한다. 그것은 “읽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교과서인 동시에 그 자신의 독자이며 해설자”(CDⅣ/3-1, 141)이다.(4) 그래서 우리는 피조 세계의 빛들, 말들, 진리들을 무시하거나 부정할 수 없다. 우리는 실제로 그것들과 함께 살아가고 그것들 없이는 살 수 없다. 이 세상의 빛들과 진리들은 세상의 생활 속에 혼돈이 침입하는 것을 저지한다(CDⅣ/3-1, 141). 이것은 창조주가 그의 피조물에 대해 신실하다는 사실을 나타낸다(CDⅣ/3-1, 153).

그러나 그 빛들은 세상적인 진리일 뿐이지 하나님의 계시, 영원한 진리들은 아니기 때문에, 화해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고, 따라서 그 빛들은 “인간의 죄를 근절시키지 못하며 그를 죽음에서 구원하지 못한다”(CDⅣ/3-1, 141, 142). 그러나 바르트는 하나님의 유일한 생명의 빛과 피조된 빛들의 차이를 밝히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 빛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유일한 빛과 관련되는지를 묻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유일한 빛과 피조된 빛들 사이의 단순한 차이와 대립이 마지막 말이 된다면, 하나님과 그의 행위의 일관성이 심각하게 문제되기 때문이다(CDⅣ/3-1, 151).

유일한 참 생명의 빛과 다른 빛들의 관계

바르트에 의하면, 이 관계는 하나님의 진리가 피조물의 진리에 문제를 제기하고, 상대화하는 동시에 제정하고 통합하는 것에 의해서 이루어진다(CDⅣ/3-1, 153). 여기서 하나님의 진리는 절대적으로 구속력이 있는, 통일성과 전체성과 철회할 수 없는 궁극성의 성격을 갖는 하나님의 유일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예언, 진리이다.

(1) 절대적으로 구속력이 있는 하나님의 진리와의 관계

절대적으로 구속력이 있는 하나님의 진리에 직면하여 피조물의 진리는 도전을 받고 상대화된다. 피조물의 말과 진리들도 그 나름대로 구속력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들은 단지 경험된 실존의 항수들에 대해서만 말할 뿐 인간에게 실제로 문제가 되는 심판과 멸망, 은총과 구원, 죄인의 의인과 성화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죄된 인간을 진정으로 자유롭게 하지는 못한다.

따라서 바르트는 우리가 그것들과 함께 살고 있고, 그것들 없이는 살 수 없지만(우리는 이 세상의 말들, 진리들에 둘러싸여 살아간다!), “그것들 없이도 잘 살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CDⅣ/3-1, 155). 왜냐하면 우리는 그것들에 의해서 살아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CDⅣ/3-1, 155, 163). 그러나 그 빛들 한 가운데서 절대적으로 구속력이 있는 하나님의 진리, 은총의 계약의 말씀이 선포되기 때문에, 그 빛들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말씀이 빛나고 은총의 계약의 메시지가 표현되는, 그리고 구원하는 유일한 진리가 울려 퍼지는 장소가 될 수 있다”(CDⅣ/3-1, 157).

(2) 통일성과 전체성을 이루는 하나님의 진리와의 관계

하나님의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기 때문에, 충만하고 나누어지지 않고 분할할 수 없는 통일성과 전체성을 형성한다. 그에 반하여 피조물의 소리는 다양하고, 그 많은 소리들을 하나로 요약할 수 없다(CDⅣ/3-1, 158). 그러나 하나이고 전체적인 진리, 생명의 빛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이 사실을 승인하지 못한다. 그는 완고하게 그 어떤 피조된 빛들 가운데서 그것을 이미 발견했다고 주장하거나 또는 그것을 다른 모든 것들 가운데 위대한 빛으로 인식할 수 있는 그 날을 기다린다고 고집할 것이다(CDⅣ/3-1, 159).

그러나 하나이며 전체인 생명의 빛이 그 빛들 가운데서 빛을 발하고 분명하게 모든 피조된 빛들의 상대성을 드러냈기 때문에, 피조물의 이러한 자기 증거들은 통합과 제정 안에서 하나님이 그것들을 사용하는데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봉사하는데 사용될 수 있다. 그때, 그것들은 극도로 다양하고 모호하지만 같은 방향을 가리킬 수 있고, 따라서 통일성과 전체성이란 특징을 취할 수 있다. “하나이며 전체인 하나님의 말씀과 연결되어... 그것들은 자신들의 잡다한 내용들을 넘어서 창조의 통일성과 전체성의 어떤 것을 지시할 수 있다”(CDⅣ/3-1, 159).

(3) 궁극적인 하나님의 진리와의 관계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한 빛”이다. 그 빛이 빛나지 않은 때는 없었다. 그 빛은 그것으로 말미암아 다른 모든 빛들이 존재하게 되었고, 그 빛이 없으면 그것들은 빛을 잃게 되는 그런 빛으로 빛난다. 그 말씀은 “영원하고, 파괴할 수 없고, 본래적이고, 최종적인... 생명의 빛이다”(CDⅣ/3-1, 160). 그래서 하나님의 진리는 진정한 물음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와 반대로 그것은 피조물의 진리들에 물음을 제기하는 주체이다.(CDⅣ/3-1, 161) 하나님의 말씀에 직면하게 될 때, 피조물의 진리들은 도전을 받고 상대화되고 결정적이 아닌 것으로 판명된다(CDⅣ/3-1, 162). 그러나 여기서 “상대화시킨다는 것은, 비판적으로 말하면 어떤 것을 제자리에 두는 것”을 의미하고, “긍정적으로 말하면, 그 한계에 의해 정확하게 지시된 관계 속에 두는 것”, 즉 “계약의 외적 근거로서의 창조의 맥락 속에 두는 것”을 말한다(CDⅣ/3-1, 163).

그러므로 이 피조물의 빛들은 단지 하나님의 말씀과의 관계 속에서만 나름대로의 힘과 가치와 타당성을 지닐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과 분리하여 고려할 때, “그들의 문제성 자체가 의심스럽게 드러나고, 그들의 상대성 자체가 상대적인 것으로 나타날 것이다!”(CDⅣ/3-1, 163). 그러나 그들 가운데서 빛나는 유일한 진리의 빛이 그 빛의 통일성, 전체성과 절대적 궁극성 안에서 이 빛들을 상대화시키는 동시에 그 빛을 봉사하도록 제정하고 통합하기 때문에, 그 빛들은 자유롭게되면서 생명의 빛을 봉사하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CDⅣ/3-1, 152-164). 그래서, 바르트는 말하기를, 하나님의 유일한 빛과 피조된 빛들에 대한 논의에 있어서 공통된 이해는 피조된 세계 안에서 반짝이는 모든 빛들, 수많은 진리들을 복종시키는 하나님의 유일한 진리를 보는데 있다고 했던 것이다(CDⅣ/3-1, 153).

(4) 세상의 빛들과 자연신학의 문제

더 이상 제기되는 물음에 대한 대답을 미룰 수 없다. 만약 하나님의 유일한 진리가 다른 진리들 안에서 그 자체를 증거하고, 창조의 영역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면, 이것은 바르트가 거부한 소위 자연신학과 어떻게 구별되는가?

바르트는 두 가지 사실을 말한다. 세속의 영역에서 말해지는 참된 말들과 소위 자연신학 사이에 있는 첫 번째 차이는 전자가 예언자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증거와 그것의 봉사에 쓰여진다는데 있다. 그러나 “성서와 교회를 제쳐놓는 자연신학을 통해서는 단지 최고 존재, 만물의 창조주와 지배자이신 하나님의 실존, 그리고 그를 향한 인간의 책임에 관한 추상적인 정보들만 얻을 수 있을 뿐이다”(CDⅣ/3-1, 117). 그와 같은 최고 존재는 결코 유일한 하나님, 살아 계신 참된 하나님과 동일시될 수 없다.

그러나 교회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전승된 성서의 증언과 완전히 일치하며, 따라서 이 증언에 의해 검증되고 비교된 성서와 교회의 울타리 밖에 있는 참된 말들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아들 안에서 아버지로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이 자기를 알리는 증거들이다”(Ibid.). 말하자면, 성서와 교회의 말들과 같은 “하늘나라의 비유들”로써 고려될 수 있는 말들이 문제되는 것이다. 바르트는 자연신학이 하나님과 일반적인 사람에 관하여 참된 말들로써 제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것에는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그리스도론의 확실한 근거를 떠나지 않는다”(Ibid.).

둘째로, 성서 안에서든, 교회나 혹은 교회 밖의 세상에서든 그러한 참된 말들이 존재할 수 있고 말해질 수 있는 것은 오직 살아 계신 참된 하나님 때문이고, 언제나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관계된다(CDⅣ/3-1, 118). 그에 반하여 자연신학은 인간의 자연적 능력을 말한다. 그러나 참다운 신학은 인간과 세상에 있어서 그들을 위한 활동 가운데 있는, 인간의 능력을 초월해 있고, 그래서 기적인 말씀에 관해 말한다. 하나님에 관한 참된 지식은 언제나 은총의 이 기적에 근거하고 있다(Ibid.).

그렇기 때문에 바르트에 의하면 그 둘 사이에는 커다란 심연이 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으로 이끄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상들의 예배로 이끄는 것이다. 전자는 진리들을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하여 적절한 맥락에 놓는 것이고, 후자는 그로부터 그것들을 떼어내어 허위적이고 거짓되게 만드는 위험한 탈선이다.(5)

바르트에 의하면 피조 세계의 빛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참된 빛 안에서 그리고 그 능력에 의해서만 그러한 것으로 빛을 발한다. 따라서 그러한 빛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없는 독자적인 증거의 능력을 부여하는 것은 그것들을 비인간화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CDⅣ/3-1, 148). 단지 하나님의 유일한 말씀에 의해 상대화되고 통합되고 제정됨으로써만 그 빛들은 빛을 발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할 수 있을 뿐이다. 말자하면 그것들은 야간에 자동차 불빛을 반사하는 “야간 반사 장치”(cat's eye)와 같다.(6)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지만 단지 화해의 빛과 능력에 의해서만 그럴 뿐이다. 빛들은 환히 밝혀질 준비를 하고 있지만, 그러나 유일한 참 빛이 우주 속에서 빛을 발하고, 우주에 허락된 빛들을 밝히고, 그들의 방사의 힘을 현실화시키기 전에는 빛을 발할 수 없다(CDⅣ/3-1, 164). 이런 식으로 바르트는 피조물에게 그 자체로 증거의 능력을 부여하는 자연신학은 사실 아주 비자연적인 것이고, 인간과 창조 세계의 진리들은 다만 유일한 생명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사용되어질 때만, 현실적이고 의미가 있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7)

바르트의 화해론과 종교 간의 대화

앞선 글들에서 바르트가 화해론에서 일관되게 단호하고 배타적인 그리스도론적 집중을 관철했다는 것을 확인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함께 하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다. 그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은 그가 진정으로 “이 세상의 유일한 참 생명의 빛”이심을 나타낸다. 따라서 참된 이 빛 앞에서 다른 모든 빛들은 그 빛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바르트는 이러한 배타적인 그리스도론적 진술을 통해서 피조 세계의 언어들, 빛들과 진리들을 부정하거나 무시하지 않고, 그와 반대로 그 모든 것들을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류를 사랑하셨다는 사실에 비추어 이해하고자 했다. 그러므로 바르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론은 인간, 자연, 그리고 창조를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단지 예수 그리스도에 비추어서만 있는 그대로의 그 모든 것들이 올바로 이해되고 알려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종교 간의 대화는 외면할 수 없는 중요한 신학적 과제가 되고 있다. 오늘날 바르트의 이 배타적인 그리스도론적 진술은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단지 시대착오적이고 교조주의적일 뿐인가, 아니면 일부 급진적 신학자들에 의해 독점됨으로써 전교회적인 운동에 이르지 못하고 답보 상태에 있는 종교간의 대화에 참으로 새로운 활력을 줄 수 있는가? 우리는 바르트의 그리스도론적 진술이 결코 교조주의적이 아님을 확인했다. 또한 그의 신학과 사상이 그에게 우호적이거나 비판적인 후진들에 의해서 계속 되풀이되고 있다는 점에서 시대착오적도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문제는 그의 “빛과 빛들의 교리”가 오늘날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는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종교 간의 대화에 대한 몰트만의 입장은 바르트를 새롭게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는 말하기를, 기독교인들이 다른 종교와 대화하려고 한다면, 결코 기독교의 특수성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만약 기독교인들이 기독교의 특수성을 상대화하고, 보편적 다원주의를 옹호한다는 명분으로 이를 포기한다면, 이런 행위는 결코 다른 종교들과 대화하는데 도움을 주지 않는다. 누가 기독교다운 점을 더 이상 분명하게 대변하려고 하지 않는 기독교 신학자들과 대화하는 일에 관심을 갖겠는가? … 진지하게 대화하다보면, 각자가 갖는 특성이 부각되기 마련이다. 더 높다고 생각되는 진리를 옹호한다는 명분으로 자신의 독자적인 입장을 포기하는 자는 대화할 능력도 없거니와, 대화할 자격도 없다.”(8)

이러한 몰트만의 입장은 바르트의 견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바르트는,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원론이나 일원론의 오류를 피하면서, 하나님의 진리가 피조물의 진리를 제정하고 통합한다는 사실을 말했다. 하나님이 그의 영원하신 선함 속에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생명의 빛과 창조 세계의 빛들 사이에 있는 이러한 비판적이면서도 긍정적인 관계는 종교간의 대화의 문제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바르트는 교회의 선교에 대하여 말할 때, 종교간의 대화의 문제를 언급했는데, 그에 의하면, 교회의 선교는 교회가 타종교들을 진지하게 평가하고 받아들이는 동시에 그들과 타협하지 않고 독특하고 새로운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는 것을 전제한다. 만약 이 두 가지 전제들이 엄격하게 고려되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서 만약 우리가 타종교들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동시에 그들에게 전적으로 새롭고 낯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제시하지 않는다면(타종교들에 대하여 솔직한 존중의 결여를 보여주지 않는다면), 교회의 선교는 무의미하고 소망이 없는 일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CDⅣ/3-2, 875).

그러므로 바르트에게 교회와 세상 사이의 대화의 기초는 브룬너가 말한바 있는 자연신학적인 ‘접촉점’이나 혹은 마르크바르트가 바르트의 An-Enhypostasis 교리를 해석하면서 시도했듯이 그리스도론적 Anhypostasis를 집단적인 ‘인류’의 인간학적 Enhypostasis로 확장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9) 그것은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의 화해사역에 의해 모든 사람들이 잠재적으로 그리고 사실상 그의 사람들이라는 사실에 있다(CDⅣ/2, 155; CDⅣ/3-1, 117). 그리고 대화는 이렇게 그들이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이 참된 지식에 인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여기서 대화의 기준은 ‘불신앙’이 아니라 ‘계시’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불신앙은 화해 속에서 계시된 인간의 현실적인 본성에 일치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지 성서만이 사람에게 계시의 의미를 분명하게 하고 그에게 화해의 사실을 확신시킬 수 있다. 자연신학은 결코 인간을 도울 수도 없고 신앙에 이르게 할 수도 없다. 단지 하나님의 유일한 진리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자연신학과 그것의 전제들을 진지하게 다루는 것은 대화에 있어서 인간에게 해로울 뿐이다. 왜냐하면 만약 자연신학이 출발점이 되고 그로써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된 길이 가려진다면, 칼빈이 말했듯이, 사람들은 결국 참된 하나님이 아니라 그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신들을 예배하게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10) 이런 점에서 바르트의 화해론은 종교 간의 대화에 비판적이면서 동시에 긍정적인 공헌을 할 수 있다고 본다. 물론, 바르트는 본격적으로 종교다원주의의 문제들과 씨름하지 않았고, 어느 곳에서도 종교다원주의의 가능성이나 혹은 가능한 해석학의 갈등조차 다루지 않았다.(11) 그러나 바르트는, 의심의 여지없이, 다원적 사회 속에 있는 모든 파트너들과 대화하고자 했다. 따라서 바르트의 화해론은 종교 간의 대화를 위한 하나의 범례가 될 수 있다. 바르트에게서, 몰트만이 우려했던, “관계성과 동일성의 위기”(12)는 종식되고 만다. 왜냐하면 그는 종교개혁의 오직 그리스도만(Solus Christus!)과 바르멘 선언의 제한 속에서 기독교의 특수성을 제시하지만, 모든 것을 제정하고 통합하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의 빛들을 긍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르트가 제시한 이 대화의 원칙과 방향을 따라갈 때, 기독교 자체만이 아니라 기독교와의 대화에 참여하는 타종교마저도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고, 이러한 대화만이 인류와 인류사회의 미래에 긍정적인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미주

(미주 1) E. Jüngel, Gottes Sein ist im Werden, 19-21를 참고, 여기서 윙엘은 “생명의 빛과 창조세계의 빛들”에 대한 바르트의 견해를 매우 훌륭하게 정리하고 있다.

(미주 2) Ibid., 19.

(미주 3) 이와 같이 피조된 세계의 빛들은 그들의 임무에 엄격히 제한되어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신을 스스로 계시하고 표명하기 때문이다”(CDⅣ/3-1, 139).

(미주 4) 바르트가 세상을 이해할 수 있고 또한 이해력이 있다고 진술할 때, 그는 물론 이 진술이 단지 사람에 관해서만 타당하다는 것을 생각한다: “우리는 세상의 존재가 인간에게 알려졌고 인간은 결과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확증하는 것에 만족해야 한다”(CDⅣ/3-1, p.140). 그러므로 엄밀히 말해서 우리는 단지 사람의 이해력에 관해서만 세상의 이해가능성과 이해력을 단언할 수 있다. J. Macken. SJ. The Autonomy Theme in the Church Dogmatics, Karl Barth and his critic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1990, 72-75를 참고.

(미주 5) J. Thompson, Christ in Perspective, 122.

(미주 6) Ibid., 123.

(미주 7) Ibid., 125.

(미주 8) J. Moltmann,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역사』, 이신건 옮김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7), 9 이하.

(미주 9) An-Enhypostasis는 예수 그리스도의 두 본성의 관계를 가리키는 관계의 용어들이기 때문에 어떠한 확장도 이 관계를 파괴하고, 결국 둘 다 위험에 빠트리고 만다. 우리는 이것을 에비온주의, 가현설 등의 초대교회의 이단들에게서 뚜렷하게 볼 수 있다.

(미주 10) Natural Theology, Comprising “Nature and Grace” by Prof. Emil Brunner and the reply “No!” by Dr. Karl Barth. tr. by Peter Fraenkel, 107.

(미주 11) Werner G. Jeanrond, “Karl Barth’s Hermeneutics”, in Reckoning with Barth, Essays in Commemoration of the Centenary of Karl Barth’ Birth, ed. by Nigel Biggar, London: Mowbray, 1988, 92, 96.

(미주 12) J. Moltmann, Der gekreuzigte Gott, 김균진 옮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79), 13-37를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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