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학술 칼럼
식민지배가 만든 주체 넘어서기헤겔의 인정투쟁: 알제리와 인도 그리고 너머에 (5)
정승훈 교수(시카고 루터신학대학원) | 승인 2023.03.18 15:31
▲ 타루어는 영국의 인도 식민지배가 남긴 폐해에 대한 강하게 비판했다. ⓒAFP 2023 / MONEY SHARMA

“간디, 아직도 그자가 살아있나?”

정치가이자 평론가인 샤시 타루어(Shashi Tharoor)는 영국의 인도의 약탈을 통렬하게 비판한다. 인도를 통치하던 영국의 제국주의 정부는 총체적으로 비도덕적이고 탐욕적인 제국주의적 메카니즘이었고 자본주의적 수익을 위해 인도인들을 종속시킨 정치체제였다. 이것은 영국의 경제성장과 번영을 위해 인도의 부와 자연원료를 탈취하고 고갈시켜버린 이론으로 폭로된다. 인도에서 행해진 영국의 식민지 근대성은 고갈이론으로 민낯을 드러낸다.

영국의 경우를 들여다보자. 1857년 세포이 반란을 빌미로 동인도 회사를 폐지하며 영국의 인도식민지배(1858-1947)를 시작한다. 영국 의회에서 1858년 인도 통치 개선법이 통과되고, 빅토리아 여왕은 1876년 국왕 칭호법의 의하여 인도의 여왕으로 즉위했다. 의회에서 행한 여왕의 선언서는 인도의 영토에 사는 모든 원주민들에게 영국의 국민처럼 동일한 권리를 제공하고, 종교적 관용과 인도의 관습, 인종차별을 금하는 것이었다.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한 법적보호가 보장된다고 약속되었다. 인도를 위한 마그나 카르타처럼 보였지만 이후 역사는 정반대의 길을 보여준다.

존 홉슨의 제국주의 분석에 의하면, 영국은 초기 단계에서 동인도회사(1600-1874)를 설립하고 상업적인 교류와 자유무역을 발전시켰다. 점차적으로 정치적인 지배와 자체 군사력을 강화하면서(동인도회사가 보유한 2십 6만명의 군인은 영국의 군인의 두배에 달했다), 일부 영토를 식민지화했다. 영국의 정착민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동인도회사의 실제적 지배는 1757년 플라시 전투로부터 시작하고, 세포이 반란을 진압한 후, 1858년 대영제국이 인도를 식민 통치했다. 이에 발맞추어 인도를 문명화하고 기독교화하는 종교의 역할이 부각된다. 경제적인 무역동기와 인도의 원료 착취가 홉슨의 제국주의 이론에 결정적이다. 이것은 남아프리카에서 영국이 일으킨 1, 2차 보어전쟁(1880-1881/1899-1902)에서도 제국주의적 패턴을 잘 보여준다.

홉슨의 증손자인 존 M. 홉슨은 영국 셔필드 대학의 국제정치학 교수인데 2004년 출간한 《서구문명의 동양적 기원》에서 증조 할아버지의 정신을 풍부한 자료와 경험적 분석에 기초에 확장시켰다. 그는 유럽중심주의 신화를 파헤치고 1400년부터 1800년 사이에 인도 경제가 영국의 식민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상대한 규모의 발전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한다.

인도의 외교장관이자 정치가인 샤시 타루어는 홉슨 가의 반제국주의 유산을 높게 평가했다. 2015년 5월 타루어가 영국의 인도 식민지를 비판하면서 옥스포드 유니온에서 영국의 배상을 요구하는 감동적인 연설을 했을 때, 영국은 거의 맨붕상태가 되고 말았다. 그는 역사학을 전공했고 타고난 문인이기도 했다. 2016년 출간된 《명예롭지 못한 제국》에서 그는 영국이 인도에 어떤 파렴치한 범죄행위를 했는지 조목조목 역사적 자료에 기초해서 분석한다. 영국 식민통치는 인도 국민들에게 공포와 재앙만 초래했을 뿐이다.

영국이 인도에게 준 철도와 차 그리고 영어는 자신들을 위한 것이었다. 인도인들은 더러운 삼등칸을 타기 위해 비싼 운임료를 지불했다. 중국으로부터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영국은 차를 인도의 대농장에서 재배했다. 그러나 인도의 일꾼들은 저임금으로 노동을 했고, 숲들과 자연환경 그리고 전통 부락들은 대농장을 만들기 위해 파괴되었다. 차는 거의 대부분 영국이나 해외로 수출되고, 인도에는 남은 차들은 비싼 가격으로 판매되었다.

이것이 식민지 근대화의 모습이다. 1750년 중국과 함께 세계산업의 75%을 담당하던 인도가 1947년 독립했을 때 세계에서 가장 낙후하고 질병이 난무하고 문맹으로 넘치는 국가로 전락했다. 영국이 인도에 민주주의와 언론자유와 법적 지배를 가져왔다고 말하지만, 그런 것은 존재한 적이 없다. 1799년 동인도회사는 언론 탄압법을 제정하고 모든 신문들의 출판검열을 행했다. 영국인들이 소유한 언론에서 인도인들을 향한 인종차별적인 태도와 언어는 엄청난 것이었다. 인도인 하인을 총으로 쏘아죽인 영국인은 6개월이라는 구금의 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영국 여성을 강간하려다 체포된 인도인은 20년 형을 선고 받았다.

영국 제국주의 법은 식민통치를 공고화하는 수단에 불과했다. 1770년부터 1947년 사이에 기아로 죽은 사람들이 삼천 3500만명이나 된다. 1943년 뱅갈에서 일어난 대기아에서 400만명이 굶어죽었다. 1943년부터 45년 사이에 일어난 대기근은 영국 군인들의 식량조달과 유럽비축을 위한 윈스톤 처칠 정책 때문이었다. 이 시기 처칠의 말은 악명이 높다. “간디 그 자가 아직도 살아있나?”

250만명의 인도인들이 1, 2차 세계대전에 군인으로 징집되었다. 영국의 문명선교는 “백인들의 부담”(루디아드 키플링)으로 미화되고, 계몽된 전제 지배는 야만과 약탈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도 코이누르 다이아먼드는 영국 여왕의 모자에 버젓이 달려있다. 1849년 동인도 회사에 의해 시크 제국의 마지막 황제가 폐위되면서 이 보석은 영국 빅토리아 여왕에게 받쳐졌다고 알려져 있다. 1877년부터 빅토리아 여왕은 인도를 지배하는 제국의 주인으로서 코이누르를 사용했다. 인도의 여제로 즉위한 빅토리아 여왕은 코이누르를 다양한 장신구에 달아서 썼다. 이후 역대 영국 왕비들은 대관식에서 이 왕관을 썼다. 올해 봄으로 예정된 대관식에서 커밀라 영국 왕비가 전례대로 훔쳐온 인도의 보물인 다이아먼드를 쓸수 있을까? 이것은 인도에겐 피눈물 나는 과거 식민지의 상징이다. 만일 쓴다면 영국은 스스로 야만적인 나라임을 세계에 공포하는 셈이다.

2백년에 걸친 부정의와 잔혹스런 식민정책은 보상될 수가 없다. 그러나 사죄의 표시로 약탈해간 인도의 보물인 코이누르 다이몬드는 돌려주어야 하고 향후 200년 동안 영국민 개개인이 1파운드씩 해마다 상징적인 의미로 인도인에게 배상을 해야 한다. 이것이 샤시 타루어의 시민운동의 시작이고 인도인의 인정과 회복의 정치이다.

고갈이론과 모방욕구

타루어의 고갈이론은 마르크스의 영국의 인도지배에 가깝게 접근한다. 그러나 호미 바마는 라캉을 통해 파농의 헤겔을 모방욕구의 극점으로 밀어가고 식민지 문제를 매개하는 통역 정치로 파악한다. 라캉에게서 상호주관적인 인정욕구는 중요한데, 그러나 라캉은 헤겔의 절대지가 인정투쟁을 통해 예속자들에 의해 성취되고 지배자를 동등한 존재로 인정해주는 역사적 단계로 보지 않는다. 라캉에게서 절대지는 성취될 수가 없고, 여기에는 봉쇄당한 타자의 자리가 없다.

오히려 라캉은 절대지를 ‘모든 것이 아닌 것”(pas-tout)이며, 실제의 불가능성에 대한 강조와 타자의 결여를 통해 오히려 헤겔의 변증법을 봉쇄한다. 라캉은 반-헤겔적이며, 실재계가 현실의 사회-싱징적 네트워크 속에 포함되지 않은 불가능한 것으로 파악하는 한, 칸트의 물자체 에 가깝다. 호미 바바는 파농의 인정투쟁과 모방요구를 라캉의 상징계 안으로 통합시키고, 자유 의 진보와 상호간 인정을 위한 투쟁과 해방을 봉쇄한다. 모방인은 경계에 서 있는 변종의 존재로 나타난다. 호미 바바는 식민지배 문제를 헤겔의 인정투쟁이 아니라 라캉의 심리학의 모방욕구로 대치한다.

라캉과 헤겔

지젝은 “라캉: 어떤 점에서 그는 헤겔적인가?”란 글에서 라캉은 여전히 코제브와 이폴리트의 헤겔 해석에서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다. 거울의 단계인 상상계를 거처 에고는 언어 상징계에서 즉, 사회 안에서 주체로 전환한다. 사회가 에고를 주체로 규정하도록 매개하고 상상계의 에고와는 다른 상징체계이다.

라캉에게서 상징계에서 상호주관적인 언어(파롤)는 상호간의 욕구 인정을 위한 매개로 드러난다. 충만한 언어를 통해 그리고 기표(시니피앙)에서 욕망을 인정하고 생산한다. 그러므로 인정욕망은 의미화 작용의 틀에서 통합된다. 모든 분석적인 경험은 언어의 의미화 작용의 경험이다.

그러나 실재계에서 나타나는 라캉의 리얼의 세계는 봉쇄당한 타자와 더불어 절대지는 ‘모든 것이 아니다’로 드러난다. 이것은 기표를 넘어서는 초월적 실제의 영역(초월적 기의)이며, 여기에 주체는 접근할 수 없다. 라캉이나 지젝은 헤겔의 지양이나 개념에서 사물이나 타자에 대한 죽음이 일어난다고 보는 데, 죽음충동은 상징화 과정에서 사물과 타자를 파괴해 버린다. 사물과 타자는 자신의 실제에 도달하기 위해 개념적 일치를 위해 죽어야한다.

그러나 나는 이 지점에서 곤혹스럽다. 헤겔의 《대논리학》에서 개념원리는 타자를 무해의 원리와 창조성 그리고 인정과 자유안에 회복시킨다. 역사와 자유의 진보과정에서 사라져가는 것은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라캉은 상징계에서 언어를 통해 인정투쟁이 일어나고, 상호주관적인 인정을 기초로 헤겔의 절대지에 대한 해석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헤겔의 절대지는 라캉의 기표와 기의를 구별하고 실재계를 선험적 기의로 등치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라캉에게서 하나님은 실재계에서 만나지만 접근될 수 없는 지고의 존재로 드러나지만, 헤겔에게서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화육을 하고 화해와 인정의 원리로 나타난다. 심지어 내적인 하나님의 존재까지도 헤겔은 개념적 파악을 통해 논리화 시키면서, 하나님의 존재는 라캉처럼 매개되지 않는 즉자적인 지고의 존재가 아니라, 후설의 생활세계처럼 하나님의 존재는 상징계와 매개된다.

인간 주체성은 라캉처럼 언어 상징체계에서 문화의 상호작용(언어와 욕망)의 산물일 뿐만 아니라, 헤겔은 경제, 정치, 그리고 문화세계에서 일어나는 다차적인 인정투쟁의 계기들에 주목한다. 인간은 라캉적인 심리적 욕망주체가 아니라, 사회적 앙상블에 엮어진 인정투쟁을 위한 비판적이며 성찰적인 주체로 설정된다.

칼리반 헤겔과 예속된 자의 희망

모방욕구는 헤겔의 구체-보편성의 틀에서만 삶의 전체성을 파악하게 하고 식민지 시대에서 지식인들과 하위계급들의 담론정치를 중요하게 보게한다. 지양의 개념적 의미는 삶의 총체성에 기초된 상호 연관성을 파악하게 하는데, 반제국주의 운동에서 다양한 그룹과 계층 그리고 계급의 연대는 담론과 인정정치로 나타난다. 그러나 식민지 지배에 아첨하는 그룹도 존재한다.

현상학의 드라마에서 헤겔은 예속된 자들을 위한 희망을 표현한다. 예속된 자들의 삶이 역사에서 파묻혀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 참된 자유와 창조성과 새로운 변혁의 의미가 이들의 삶에 주어진다. 개념적 파악에서 헤겔의 변증법은 타자와 다름 그리고 예속된 자들의 삶의 풍부함을 배제하지 않고, 오히려 자유, 창조성, 비폭력의 빛에서 고려한다.

식민지화된 사물의 질서에서 여전히 저항의 의식은 살아있다. 모방욕구는 불행의식에 속하지만, 저항의식은 식민지적인 삶의 콘텍스에서 예속된 자들의 생활세계에 근거한다. 인정은 주인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예속된 자들의 노동과 저항과 해방의 담론으로부터 매개된다. 헤겔은 여전히 일본 식민지를 경험했던 대한민국의 사회에서 식민지 근대성과 불행한 의식을 거절하고 아첨의 언어를 넘어서서 나가게 한다. 헤겔은 포스트콜로니얼 사회에 새로운 근대성을 자유, 창조성, 인정 그리고 무해의 원리에서 모색하게 하는 칼리반으로 남아있다.

정승훈 교수(시카고 루터신학대학원)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정승훈 교수(시카고 루터신학대학원)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김상옥로 30, 402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 홍인식  |  편집인 : 이정훈  |  청소년보호책임자 : 홍인식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23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