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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에게 피해 될까 도망쳤다”[기획특집 3] 피해자 신의주 선생을 통해 들어본 녹화사업의 모습
임석규 | 승인 2023.07.05 02:01
▲ 녹화사업 대상자로 군대로 끌려가 갖은 고통을 겪었던 신의주 선생은 가족에게 피해가 될 것 같아 제대 이후 도망치듯 노동현장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임석규

에큐메니안은 지난 6월 21일부터 박정희~전두환 군사독재정권 시절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당시 기독청년들을 대상으로 불법 강제징집·프락치 활동 강요한 ‘녹화사업(綠化事業)’을 기획특집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지난 첫 기사는 많이 그리스도인들이 생소해 할 녹화사업의 개념과 1970~80년대 역사적 배경을 짚어냄으로 기획특집의 문을 열었으며, 두 번째 기사는 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의 자료를 통해 녹화사업의 다양한 사례들을 살펴봤다.
이후 녹화사업으로 인해 피해를 봤던 그리스도인을 만나 그날의 참상을 직접 듣고 녹화사업 피해자들에 대한 사과와 배·보상을 위한 특별법 제정 과정 및 기독교대책위의 활동 등을 다룰 예정이다. - 필자 주

경상북도 청송군이 고향인 신의주 선생은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조부의 영향을 받은 기독교 가문의 6남 3녀 중 일곱째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가족의 영향을 받아 신앙심이 깊었던 신 선생은 고등학생 시절까지 지역 노회의 대표로 교단에서 진행한 성경 고시대회에 출전까지 했을 정도로 주변에서 인재라 칭송받았다.

서울에서 만난 낯선 사회와 새로운 신앙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대구로 유학을 간 신 선생은 학업에도 뛰어나 연세대학교 법학과에 진학했다. 공명정대한 법조인이 되리라는 포부를 품고 서울 신촌에 입성한 그는 기독인이기에 부지런히 학문에 매진하면서도 기독학생모임에도 참여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어 곧바로 연세대 기독학생회(SCA)에 찾아가 가입했다.

당시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 아래의 각 대학교 기독학생회는 기존의 대학교 선교단체들과는 달리 신학뿐만 아니라 사회과학도 함께 학습하며, 농촌봉사·야학·민주화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해 현실사회와 신학에 대한 진보적 기조가 강했다. 가문의 영향으로 복음을 일찍 받아들였던 신 선생도 KSCF를 통해 민중신학을 배우면서 성경과 사회를 바라보는 눈이 뜨게 되었다.

특히 연세대 SCA는 일제강점기 시절 3·1운동에 직접 참여해 일제로부터 극심한 탄압을 받았으며, 박정희 정권기인 1960~70년대에도 각종 긴급조치 및 간첩 조작 사건 등으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국내 민주화운동의 최전선에 서 있었다. 신 선생이 입학하기 이전인 1981년 9월 연세대 경제학과 4학년 재학 중이던 김태홍 씨가 재일교포 간첩 사건으로 인해 보안사 요원들에게 납치·고문당했으며, 신 선생이 녹화사업 당한 이후인 1985년 9월에는 구미(歐美) 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연세대 졸업생 김성만 씨(물리학과 75학번) 등 서울 내 대학생 19명이 기소를 당하는 등 직·간접적 수난을 당했다.

녹화사업의 대상자로 끌려갔다

신 선생이 녹화사업 공작을 당한 상황을 되돌아본다. 1983년 4월 19일, 4·19혁명 23주기를 맞아 대학가 곳곳에서 시위가 전개되었다. 당시 대학생들은 대학·거리에서 4·19혁명 정신으로 전두환 정권을 타도하자고 외쳤으며, 경찰들은 그런 대학생들을 체포하고 강압적인 조사를 진행했다. 이때 2학년이던 신 선생도 경찰에 체포되어 이틀 동안 조사를 받아야 했다. 당시 경찰이 고래고래 소리를 치고 화날 때마다 조서 뭉치로 머리를 내리치기도 했지만, 그는 이보다 더 잔혹한 고문을 받았던 선배들을 떠올려 기도하며 참았다고 회고했다.

그런데 일은 신 선생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급전개되었다. 2일 뒤인 4월 21일 신 선생을 비롯한 몇몇 청년·학생들은 갑작스럽게 강원도 춘천시에 있는 103 보충대로 이동하게 됐다. 그때서야 그는 이것이 대학교에서 소문으로만 들었던 강제징집이었던 것을 직감했다.

보충대에 도착한 일행들은 키·몸무게·시력 등 신체검사를 받았지만, 그들이 겪은 절차는 당시 입영 절차를 무시한 약식 검사나 다를 바 없었다. 검사를 마친 신 선생의 서류에는 ‘특수학적 변동자’라는 붉은색 도장이 찍혀있었다. 그 붉은색 도장보다 더 뇌리에 박혔던 것은 특수학적 변동자로 낙인찍히게 되면 제대로 된 사회생활을 할 수 없다던 목소리였다.

그렇게 신 선생은 강원도 삼척 68훈련단에서 6주간 군사훈련을 받은 뒤 22사단 55연대의 소총수로 배치받고 복무했다. 나중에 강제징집 당한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종합하면서 알게 된 사실은 특수학적 변동자로 강제징집 당한 인원들은 모두 주특기를 소총수로만 고정돼 최전방으로 보내지거나, 해군의 경우 전방 고속정으로 강제 배치를 당했다.

신 선생의 갑작스러운 실종에 가족들 역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대학교에서 공부와 신앙생활을 병행하고 있어야 할 아들의 옷가지가 군 소포로 도착하자 가족들은 신 선생이 어디로 징집되었는지를 몇 날 며칠 동안 수소문했다. 겨우 소재를 확인한 신 선생의 아버지는 부대 후문에서 아들을 한 번만이라도 만나게 해달라고 호소했다. 아버지의 간절한 호소에 마음이 열린 위병(衛兵)들의 배려로 신 선생은 부친과 잠시 만날 수 있었다. 상황을 짐작한 아버지는 그저 아들이 무사히 전역할 수 있기를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 회유와 감시 속 견디기 힘든 날들을 담담히 증언하고 신의주 선생 ⓒ임석규

6주간 훈련단에서 일반 훈련병들과 똑같이 훈련받아 강제징집 당했던 사실을 제외하고는 다른 점이 없었지만, 자대배치를 받고 난 이후 신 선생은 부대 내에서 본격적으로 감시·회유를 받았다. 몇몇 사람들은 복무 중에 보안사 예하 보안부대 또는 보안분실로 끌려가 고문까지 동원한 조사를 받았다. 심지어 그 여파로 인해 피해자 중 일부는 조사 이후 부대 내·외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주검으로 발견되기도 했다.

그에게 녹화공작을 진행했던 당사자들은 부대 내 상관과 선임병들이었다. 상관들은 신 선생을 짐짓 위로하면서도 연세대에서 학생운동 했던 경력이나 관련자들을 이야기할 것을 주문했으며, 선임병들은 신 선생을 부대 내에서 따돌리면서도 그와 학생운동 경력 있는 후임들에게 얼차려(기합)와 구타 등 폭력을 가했다.

신 선생은 선임병들이 그에게 가했던 육체적 폭력으로 인한 고통은 그래도 어느 정도 감내할 수 있었지만, 자신이나 후임들의 학생운동을 고발하라는 프락치 강요가 가장 괴로운 일이었다고 고백했다. 괴로운 복무 속에 달콤한 유혹이 몰려올 때마다 수많은 매질과 조롱을 받으며 갈보리 언덕 위에 십자가를 지고 오르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떠올리며 고통을 피하려고 양심을 팔지 않도록 해달라고 남몰래 숨죽여 울며 기도했던 그 시절을 떠올린 신 선생의 표정에는 아직도 그 트라우마가 진하게 남아있었다.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관심을 가져주시길

1985년 9월 5일, 2년 동안 괴로웠던 군 생활을 하루하루 버티던 신 선생은 드디어 제대의 순간을 맞이했다. 그러나 그는 가족들에게 미안했고 그들에게 피해를 주기 원치 않아서 곧바로 가출해 노동 현장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전국적으로 민주노조 운동이 한창이던 노동 현장도 결코 안전한 곳은 아니었다. 노동조합 운동이 이적단체로 내몰리던 시기라 노태우의 6·29 선언 이후 민주화 정부가 수립됐음에도 불구하고 불안은 계속됐다.

그러던 도중 신 선생은 1988년 5월에 노동 현장에서 일하다가 그만 오른손 손가락들이 절단되는 산재사고를 겪었다. 이때 산재 보상금으로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세브란스병원에서 수술·치료를 받으며 가족들과 다시 만나게 되었고, 신 선생은 그제야 자신이 국가로부터 당했던 녹화사업에 대해 털어놓을 수 있었다. 수술 후 건강을 되찾은 신 선생은 통신회사에서 노동조합 활동을 하다가 1997년에 퇴직하게 됐다.

민주화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 연세대 SCA 및 기독학생 조직에 대한 녹화사업을 비롯한 보안사의 공작들이 세상에 드러났다. 이에 신 선생을 비롯한 연세대 기독학생 동문들은 녹화사업을 세상에 알리고 이에 대한 진상조사·재발 방지 대책 수립·피해자 대상 배·보상 등을 요구하기 위해 ‘녹화사업·강제징집 피해자들을 위한 기독교대책위원회’에 합류할 예정이다.

신 선생은 인터뷰를 마치면서 군사독재정권이 종교계를 대상으로 1970년부터 간첩·용공주의자 몰이 등으로 탄압을 진행했으며, 하나님이 가르치신 정의를 지키기 위해 정권의 프락치 활동 강요에 거부하고 가혹한 고문을 받아 목숨을 잃거나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증언했다. 특히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이 민주화운동 시기의 역사에 대해 올바른 관점을 회복해 당시 국가의 폭력을 드러내고 지금의 국가가 이를 반성할 수 있도록 희생자들을 위한 특별법 제정에 동참해달란 부탁을 덧붙였다.

임석규  rase21cc@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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