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교계·교회 칼럼
에큐메니칼 운동, 선도성과 대중성의 너머에서이훈삼 목사님께 드리는 마지막 편지
황용연(사회적 소수자 선교센터 무지개센터 대표) | 승인 2023.08.25 01:58
▲ NCCK 외부에서 NCCK와 상관없이 생겨난 자생적 에큐메니칼 운동을 NCCK가 함께 하지 못한다면 NCCK는 활력을 어디에서 얻을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할 것이다. ⓒ홍인식

1. 제 개인적인 경험을 하나 이야기하면서 시작하겠습니다. 총회 파송 사회선교사로서 교단 게시판에 성소수자 관련 사역글을 올리는데, 성소수자 혐오 입장인 어떤 목사가 시비를 걸었습니다. 그 시비의 내용이 뭐였나면 제가 총회 파송 사회선교사로서 총회의 보조를 받게 되면 그 보조금 중에는 자신을 비롯한, 성소수자를 반대하는 목사가 목회하는 교회의 헌금에서 나온 상회보조금이 포함되어 있을 텐데 그렇다면 그런 돈을 받으면서 성소수자 옹호 입장의 사역을 한다는 건 말이 안 되지 않냐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저는 총회의 보조를 받지 않기 때문에 그 이야기를 해서 그 상황을 넘어가긴 했는데요. 지금 와서 생각하면 이렇게 말했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하나님께 일단 헌금을 드렸으면 그 헌금이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되어야지 왜 헌금 낸 사람 뜻대로 사용되냐 마냐를 따지냐고 말입니다.

2. 사실 이훈삼 목사님의 두 번째 글을 읽고 나서는 다시 답글을 쓸까 말까 고민을 좀 했습니다. 답글을 쓰려면 쓸 내용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이 목사님이나 저나 자신의 논점을 많은 부분 드러냈고 드러난 논점 사이의 차이도 꽤 선명히 드러났다 싶었기 때문에 이 정도에서 마감해도 되지 않을까 싶었거든요. 그런데 지난 수요일에 모 기독교인터넷 신문에 실린 김종생 NCCK 총무의 인터뷰를 보고서 이건 그냥 넘어가면 안 되겠는데 싶은 생각이 들어서 다시 한번 글을 써야겠다 마음먹었습니다.

본격적인 논지 전개 전에 한 가지 말씀드릴 것은, 김종생 총무의 저 인터뷰를 보고서 저는 저 사람이 NCCK 총무를 하면 안 되겠구나라는 생각을 굳혔다는 점입니다. 명성교회에서 야당이었다 운운하면서 자신이 명성교회 내부 인사였음을 밝힌 것부터가 그렇거니와, 명성교회의 세습을 두고 새노래명성교회를 합병하는 우회로를 택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어이없는 생각을 했다는 것,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고 조언까지 했다고 저런 인터뷰에서 대놓고 말할 정도로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 이 모두가 명색이 명성교회의 경우 같은 세습으로 인한 교회의 사유화와는 정반대되는, 교회의 보편성을 추구하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일선 지도자라는 NCCK 총무로는 심각한 결격사유가 아닐 수 없으니까요.

3. 이 글의 주 쟁점이고 이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 먹은 이유는 김종생 총무의 인터뷰 중에 이훈삼 목사님의 지난 글에서 드러난 구도와 비슷한 구도를 그리는 생각이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목사님의 표현을 가지고 이야기한다면 선도성과 대중성이 대비되는 구도에서 NCCK와 에큐메니칼 운동이 대중성에 더욱 천착해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 말입니다.

김종생 총무의 인터뷰에서는 선도성에서 한 술 더 떠서 전투성이라는 표현까지 나오던데, 저 같은 입장에서는 도대체 NCCK의 최근 행보가 언제 ‘전투적’이었나 싶은 생각도 들고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저런 표현을 쓴다면 김종생 총무 자신이 지금의 NCCK마저 ‘전투적’으로 보일 정도로 이미 상당히 보수화된 분이로구나 싶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 목사님이 지난번 글에서 잘 지적하신 대로, 민주화운동 시기에 NCCK를 비롯한 에큐메니칼 운동이 보여 주었던 선도성은 그 물적 기반이 외국 교회의 원조에 있었고, 그 원조가 끊어진 후 NCCK와 에큐메니칼 운동은 지금까지 물적 기반의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해서 운동의 유지와 존립에 많은 문제를 겪었습니다.

원래 선도성과 대중성의 대비는 사회운동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에게 익숙한 구도라서, 그 구도로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해 사유한다면,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운동의 유지와 존립에 문제를 겪고 있는 상황에서 에큐메니칼 운동이 대중성에 더욱 천착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의견은 굳이 이 목사님이나 김종생 총무만이 아니라 운동에 관심과 애정을 가진 많은 분들이 낼 수 있는 의견일 것입니다.

4. 이 지점에서 저는 서두에 인용했던 제가 겪은 에피소드를 다시 환기해 보려고 합니다. 저 에피소드에서 제가 내린 결론이 하나님께 이미 바친 헌금을 두고 헌금 낸 사람 뜻대로 사용되느냐 마느냐를 왜 따지느냐였는데요. 선도성과 대중성의 대비 구도를 여기에 끌어 온다면 대중성이 상응하는 자리는 ‘헌금 낸 사람 뜻대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헌금 낸 사람 뜻대로 사용되느냐 마느냐를 따지는 게 아니라 이미 낸 헌금이 하나님 뜻대로 사용되어야 하는게 당연하다는 생각을 연장하면, 에큐메니칼 운동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교회의 보편성은 대중성과는 다른 또다른 영역을 필요로 할 것이고, 보편성을 담지하지 못하는 대중성은 결국 이기주의가 된다는 생각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겁니다.

보통 선도성과 대중성의 대비 구도를 그리면 선도성은 ‘당위’에, 대중성은 ‘현실’에 대응한다는 식의 생각이 많이 나오게 되지요. 그런 배경에서라면 제가 방금 한 이야기는 ‘당위’에 대한 이야기로 비칠 지도 모르겠습니다.

5. 그런데 저는 선도성과 대중성, 당위와 현실 등등의 말들을 들을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말하자면 이런 구도를 그려 놓고 하는 이야기들은, 몸에 좋은데 매우 써서 사람들이 별로 안 좋아하는 약(선도성)을 어떻게 당의정을 잘 씌워서(대중성) 먹게 할까 이런 식의 생각을 배경에 깔고 하는 이야기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속된 표현을 써 보자면, 어떻게 ‘삐끼질’을 잘 할 것인가라는 이야기라고나 할까요.

물론 당의정이고 삐끼질이고 그것이 정 필요하다면 해야 하고 필요가 없는 것은 아니겠습니다만, 제가 의문을 갖는 건 에큐메니칼 운동, 아니 어떤 사회운동이든 운동이 본질적으로 과연 당의정과 삐끼질로 조직이 되는 것이던가입니다. 운동은 궁극적으로 운동 자체의 활력에 공감과 공명을 이끌어 냄으로써 조직이 되는 것 아닌가 싶은 겁니다.

특히 최근에 와서는 더욱 더 앞에서 이야기한 공감과 공명의 중요성이 더 커지고 있지 않은가 싶습니다. 사람들이 어떤 행동에 나서는 경로가 그것이 옳다고 생각해서라기보다는 그것에 마음이 끌려서인 경우가 점점 더 많아진다 싶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선도성이나 대중성 등등을 따지기 이전에 먼저 물어야 할 것은 지금 개신교 내부에 어떤 활력이 발생하고 있고 어떤 공감과 공명이 이루어지고 있는가 하는 점일 겁니다.

6. 개신교 사회운동에서 지금 활력을 가장 많이 보여주는 운동을 꼽자면, 옥바라지선교센터 등으로 대표되는 도시 재개발 현장 운동이나 청어람 아카데미 등으로 대표되는 신앙학습운동 등을 꼽을 수 있을 겁니다. 아시다시피 이런 운동들은 에큐메니칼 운동으로 자신을 규정하지만 전통적인 에큐메니칼 운동의 영향 바깥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했거나 아예 전통적으로는 에큐메니칼 운동으로 간주되지도 않는 운동들입니다.

이런 운동들, 특히 도시 재개발 현장 운동을 떠올리다 보니 김종생 총무의 발언 하나를 짚고 넘어가야겠네요. 김종생 총무는 본인을 ‘현장의 사람’이라고 지칭하면서 그 동안 현장에서 일할 때는 박수만 받았는데 이번 총무 인선 과정에서 비난을 많이 받아서 괴로웠다는 발언을 했습니다. 저는 그 발언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현장에 나갔다는 사람이 도대체 어떤 현장만 다녔길래 그 동안 박수만 받았냐고요. 이 분의 정체를 꽤 많이 보여주는 발언이구나 싶었달까요.

활력 이야기가 나온 김에 보수 개신교에 대해서도 활력이라는 관점에서 살펴 보자면, 솔직히 말해서 지금 보수 개신교의 활력이 가장 잘 드러나는 지점, 아니 활력을 보이는 거의 유일한 지점은 성소수자 혐오와 차별금지법 반대 아니겠습니까? 동료 시민이자 동료 신앙인인 성소수자를 자기들 마음대로 공적으로 혐오받아 마땅한 존재라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앞에서 이야기한 교회의 보편성과 정반대되는 이기주의의 너무나 뚜렷한 실례가 되겠구요.

이 목사님도 그런 말씀을 하셨고 김종생 총무도 그런 발언을 했고, 그 외의 여러 사람들이 성소수자와 차별금지법 이슈에 관련해서 개신교 내에 대화가 필요하다는 말씀을 많이 하십니다. 물론 대화가 필요합니다만, 그 대화에는 조금 심각한 전제가 필요하지 않을까 합니다. 앞에서 지적한 대로, 성소수자 혐오와 차별금지법 반대가 보수 개신교가 보이는 거의 유일한 활력이고 그 활력이 교회의 보편성과 정반대되는 이기주의의 발현이라면, 이건 사회적인 문제에 교회가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의 문제만이 아닌, 교회의 현재 신앙 그 자체의 심각한 문제가 된다는 전제 말입니다.

7. 전임 NCCK 총무가 사직한 직후 있었던 몇 번의 토론회 중에 어떤 청년활동가가 이런 이야기를 했답니다. 솔직히 NCCK가 없어진다 해도 청년활동가인 자신의 활동에 영향을 미칠 것은 크게 없다고 말입니다. 어떻게 보면 지금의 NCCK와 에큐메니칼 운동이 가장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발언이 아닐까 합니다. 지금의 NCCK가 앞에서 언급한 개신교 내의 어떤 활력과도 연결이 잘 안 되고 있다는 징후를 보여 주는 발언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앞에서 이야기한 도시 재개발 현장 운동 등의 활력과 연결이 된다고 하더라도 NCCK의 현재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 있는 건 아닐 테고, 특히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는 무척 힘들겠지요. 그러나 그런 활력과 연결조차 되지 않는다면 아예 다시 시작하기조차 어려운 상황인 것을 김종생 총무 선출이 역설적으로 보여 준 것 아닌가 합니다.

다르게 말해 보면 어쩌면 이런 질문들이 필요할 수 있겠지요. 선도성과 대중성이라는 말을 또 빌어온다면, 선도성이라는 차원에서는 왜 도시 재개발 현장 운동 이외의 다른 운동들은 그런 활력을 지금 보이기가 힘든지, 대중성이라는 차원에서는 성소수자 혐오/차별금지법 반대 말고, 다른 활력의 지점을 도대체 어떻게 물색하고 찾아낼 것인지 등등의 질문이 필요하리라 생각이 듭니다.

아마 별다른 일이 없다면 이 글이 제가 이훈삼 목사님께 드리는 마지막 글이 될 것 같습니다. 처음에 약간 당황스럽게 얽히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성실한 글로 대화를 나누어 주신 데 대해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황용연(사회적 소수자 선교센터 무지개센터 대표)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황용연(사회적 소수자 선교센터 무지개센터 대표)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대학로 19 한국기독교회관 503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 홍인식  |  편집인 : 이정훈  |  청소년보호책임자 : 홍인식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23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