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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영가 이야기 1<주대범의 교회음악 산책 6> 고상함과 천박함
주대범 장로 (중앙루터교회 성가대 지휘자) | 승인 2014.09.18 11:18

미국의 흑인을 칭하는 말로는 Negro, Black man, Ebonic people, Afro-American 등이 있다. 흑인영가는 <Negro Spiritual>을 옮긴 말이다. 근래에는 <Afro-American Spiritual>이라 고쳐 부른다. 호칭도 어느 정도 고상해졌고, 대통령도 배출했으며, 그들의 인권이나 삶의 질도 꽤 향상되었다고는 하나, 마르틴 루터 킹 목사가 1963년에 외쳤던 <I have a dream>의 <꿈>은 아직도 갈 길이 아득하기만 하다.

   
▲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연설 모습
근자에도 “너희들 그 정도 해주었으면 됐잖아?”라며 고상한 Yankee들은 천박한 Negro들을 몰아세운다. 그러나 인종차별의 아픔은 Negro 뿐만 아니라 Yellow들도 일상적으로 겪는 바가 비근하다.

“너희들 그 정도 해주었으면 됐잖아? 피곤하게 굴지마!”에 가로막힌 <세월호 진상 규명>의 아픔은 유가족들만의 것이 아니어서 지속적으로 분노를 치솟게 한다. 몰지각하다 못해 천박한 일베들의 행동은 잠깐의 분노를 유발하지만, 유가족들과 일부러 대척점에 서려는 듯, 법과 민생을 앞세워 고상한 얼굴로 동충서돌(東衝西突)하는 이 나라의 권력자들을 보고 있노라면 나의 분노는 눈덩이처럼 점점 커져만 간다. 더구나 고상하다 못해 거룩한 대통령을 함부로 모독하지 말라며, 내 할 일이 이제 뭐가 있느냐는 대통령의 강변(强辯)을 어제 접하고는 밤새 깊은 잠을 자지 못했다.

<효와 화해>로 한껏 고상해진 최성규 목사의 국민일보 광고글을 대하면서도 분노가 치밀다 못해 가슴이 먹먹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고상한 진리가 분명 하나라면, 기독교인으로 바라보는 세월호 문제는 우리 사회에 있어 제 멋대로 이렇게 저렇게 할 수 있는 아디아포라(adiaphora)가 아니다. 우리가 꼭 지켜야하는 디아포라(diaphora) 아닌가? 아무리 오순절파라 해도 이 분이 예수 믿는 목사인가 싶었다.

분을 삭이기 위해 하릴없이 허튼 짓을 했다. 편백나무토막을 깎고 다듬어 연필꽂이를 하나 만들다보니 격한 분노가 조금은 가라앉았다. 붉은 색연필로 뒷면에 썼다.

   
▲ 세월연필꽂이

<바다와 내 조국 – 공권력에 대하여>
  의심을 품거나, 어이없어 하거나
  분노하거나, 때론 슬퍼하거나
  정의를 노래 부르면 안돼!
  이 땅에서는 엎어져도, 무너져도
  침몰해도, 깔려도 그냥 가만히 있어!

나는 고상하지 않은 가수, 김수희의 <애모>를 즐겨 듣는다. 이 노래를 임형주가 리메이크하여 다소 고상하게 불렀는데, 역시 김수희를 넘지 못했다.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를 들으면, “이 땅의 정의와 진실, 인권과 도덕은, 법과 공권력 앞에만 서면 왜 사그라지는 것일까?”가 떠오른다. 법과 공권력이 고상하게 집행된다면 정의와 진실, 인권과 도덕이 죽었다가도 되살아나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 사회에서 법과 공권력이 천박하게 집행되고 있다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앞으로 독자 여러분은 나와 더불어 교회음악의 <고상>한 장르들을 충분히 산책하겠으므로 먼저 덜 고상한 <흑인영가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 미국 땅에서의 흑인들의 삶은 정말 <고상>하지 못했다. 단순히 <고단하다>, <가련하다>, <처절하다> 등의 몇 개의 단어로 뭉뚱그려 흑인영가를 본다면 이 역시 <천박>한 일이 될 수 있다.  

우선 그들의 <삶>과 <종교>에 초점을 맞추어 보자. 우리나라 남정네들이 일본 제국주의 시절, 징병·징용 당하듯, 우리의 곱디고운 누이들이 정신대라는 명목으로 전쟁터의 창녀로 끌려갔듯이 그들은 자기네 풍요로운 땅에서 총칼에 잡혀 아름다운 신세계 에 와 팔리는 노예 신세가 되었다. 고향과 친척, 언어와 종교를 박탈당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느냐고 요즘 사람들은 반문할지 모르지만, 1세기 전까지의 엄연한 역사이다. 그것을 당연시 했던 그들의 가치관에 대해 우리는 분노하지만, 특히 예수를 잘 믿는다는 사람들이 그런 짓에 서슴없었다는 점에 우리는 경악해야 하고, 미국이란 나라는 이 노동력을 통해 세계 최강의 국가로서의 자존심을 지금껏 잃지 않고 경찰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여야 한다. 

일본의 강점을 통해 우리나라가 근대화 될 수 있었다고 주장하는 친일파들의 이야기처럼, 지금 와서 보면 그 척박한 아프리카에서 빈곤과 굶주림 속에서 고생하느니 미국 땅에서 복지 혜택을 받으며 사는 것이 얼마나 다행이냐고 되묻는 경우도 우리는 가끔 본다. 정말 언어도단(言語道斷)이다.

동물들에게 기독교 신앙이 왜 필요한가? 그들은 신세계의 <고상한 종교>인 기독교를 믿는 일도 차단당했다. <배움>도 없었고, 피부색 때문에 신분 세탁도 불가능했다. 무식했고, 무감각해졌으며, 분노를 표현할 수도 없으니, 언제라도 포기를 강요당할 수 있는 하찮은 목숨이었다. 이런 면에서 흑인영가는, 고달픔을 잊기 위한 <탄식과 염원의 노동요>에 지나지 않는다고 볼 수도 있다. 또한 무식한 민중이 만들어낸 흑인영가는 결코 <고상>한 음악이 될 수도 없었다.

미국 흑인들의 침례교회가 아니면, 대부분의 지휘자들이 공동예배 시간에 흑인영가를 연주하지 않는다. 그것은 바흐를 비롯한 고상한 작곡가들의 클래식한 성가곡에 비하여 격이 떨어지고 품위가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요즈음 한국 개신교 성가 출판 시장을 보면, 90% 이상이 미국 현대 성가들로 채워져 있다. 세련되고 화려한 서양 화성법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그 가사나 곡의 감각적 추구는 흑인영가의 진정성과 영성에 훨씬 못 미치는 다소의 천박함을 가져왔다. 포장만 화사한 과자와 같이 한 입 쪼개 물면 다시 손이 가지 않는 경우도 많다.

복음적이지 못한 찬송들도 한국교회에서 많이 불려진다. 율법적이거나(예-오늘 집을 나서기 전 기도했나요), 배타적이거나(물이 바다 덮음 같이), 자아도취거나(내 눈 주의 영광을 보네 우린 서네 주님과 함께), 신사도운동적인 축복송, 파송의 노래들이 그것이다. 

그런 노래들에 비하면 흑인영가는 매우 고상하다. 백인들이 유색 인종에 비해 결코 우월하지 않듯이 백인들의 음악이 가장 규범적인 음악이라고 말할 수는 결코 없다. 아리랑의 ‘십리도 못 가서 발병난다’라는 가사나 가락, ‘쾌지나칭칭나네’의 생활과 밀접한 다소 상스런 사설들이 다른 나라 그 어떤 고상한 민요에 뒤진다고 생각해 본적이 없으므로 나는 흑인영가를 그 어떤 Traditional(전통적 노래)보다 존중하고 사랑한다.
  특히 가난과 고통을 많이 겪었던 우리 민족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그것은 노예로서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로 끌려와 죽지 못해 삶을 영위했던 그들과 너무도 흡사한 면이 많아 그 정서에 동정하고 동정 받는다. 따라서 나는 사순절기에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를 즐겨 연주하고, 3·1절에는 <가라! 모세>를, 대림절기에는 <여기 오소서, 내 주여!>를 부른다.

나는 처음 로저 와그너 합창단의 흑인영가에 매료됐었다. 백인풍의 세련되고 고상하게 편곡된 그들의 합창은 어린 시절 나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흑인영가를 잘 듣지 않는다. 어쩌다 The King’s Singers, The Golden Gospel Choir, Greensleeves Gospel Choir 등의 백인들의 흑인영가 합창도 듣지만, 거의 다 한번 들으면 끝이다. Elvis Presley, Alfie Boe, Russell Watson 등 뛰어난 가창력의 영가도 그 깊이가 덜하다.

   
 
나이를 먹을수록 좀 더 흑인적인 것을 찾게 된다. 거칠지만 전혀 천박하지 않으며, 발음이 색다르지만 전혀 저속하지 않은 Harlem Spirituals, London Community Gospel Choir, The Seraph Choir 등 흑인합창단의 노래를 즐겨 듣는다. 그들은 리드미컬하지만 자유롭고, 슬프지만 힘이 있는, 세련되지 못했어도 비밀스런 영성을 천부적으로 표현한다. 또한 Marian Anderson, Mahalia Jackson, Derek Lee Ragin, Jessye Norman 등의 노래도 늘 나의 영혼을 깨운다. (검색을 위해 이름을 영어로 표기했다.)

흑인영가는 바로 그들의 삶이며 그들의 가능성이다. 그들은 소박하지만 진솔하게 믿음을 고백하였고, 뛰어난 아프리카 가무의 전통도 담았다. 그들의 희망과 염원을 최고 수준의 기도로 승화시켰으며, 죽음을 뛰어넘는 천국을 소개했다. 만약 그들에게 영가가 없었다면 그들은 삶을 지탱하지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생존의 문제를 승화시킨 흑인영가는 결코 천박할 수 없다. 따라서 <세월호> 시대를 살면서 <천박>한 일들을 수없이 목도하는 우리들에게 흑인영가는 끝없는 위로를 준다.

누가 고상하고 누가 천박한지는 역사로 기록될 것이다. 철야기도회를 통해 304인 목회자들이 주님께 아픔을 아뢰었으나 주님께서는 이미 알고 있다 하실 것이다.

다음 산책에서는 흑인영가의 속살을 함께 보자.


필자소개

   
▲ 주대범 장로
1955년 서울에서 출생, 교육에 종사한다.

대학에서 문학을, 개인적으론 작곡을 공부했다.

고등학교 국어교사를 10년 한 후, 출판사를 운영 했었다.

교회합창곡도 작곡하고, 글도 쓰면서

누가 부탁하면 목수 일도 하고, 시각디자인도 한다.

중앙루터교회 성가대 생활을 39년째 하고 있다.

주대범 장로 (중앙루터교회 성가대 지휘자)  bawee100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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