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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비인간화<정현진의 출애굽기와 노닐기 22>
정현진(수도교회 담임목사, 한신대 대학원 외래교수) | 승인 2015.07.03 16:07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돌이켜 바다와 믹돌 사이의 비하히롯 앞 곧 바알스본 맞은편 바닷가에 장막을 치게 하라 3 바로가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들이 그 땅에서 멀리 떠나 광야에 갇힌 바 되었다 하리라 4 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즉 바로가 그들의 뒤를 따르리니 내가 그와 그의 온 군대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어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하시매 무리가 그대로 행하니라 5 그 백성이 도망한 사실이 애굽 왕에게 알려지매 바로와 그의 신하들이 그 백성에 대하여 마음이 변하여 이르되 우리가 어찌 이같이 하여 이스라엘을 우리를 섬김에서 놓아 보내었는가 하고 6 바로가 곧 그의 병거를 갖추고 그의 백성을 데리고 갈새 7 선발된 병거 육백 대와 애굽의 모든 병거를 동원하니 지휘관들이 다 거느렸더라 8  여호와께서 애굽 왕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자손의 뒤를 따르니 이스라엘 자손이 담대히(높은 손으로) 나갔음이라 9 애굽 사람들과 바로의 말들, 병거들과 그 마병과 그 군대가 그들의 뒤를 따라 바알스본 맞은편 비하히롯 곁 해변 그들이 장막 친 데에 미치니라

출 14:1은 출 13:1과 아주 똑같다. ‘말하다’는 말(dd¹bar, °¹mar)이 두 번 되풀이 나오는 이 구절들은 하나님께서 매우 중요한 것을 말씀하시리라는 기대를 갖게 한다. 그분의 말씀을 따라 출애굽 한 이스라엘 자손이 가던 길을 돌이켜 이집트 쪽을 향하였다.(출 13:18)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신 곳은 에담이다.(1-2절). 우리는 이곳이 어디인지 잘 모른다. 출 14:1에는 세 곳(믹돌, 바알스본, 비하히롯)의 지명이 자세히 설명되었는데, 그 곳들의 위치와 관련하여 믹돌에 대해서만 어렴풋이 알 수 있을 뿐이다.(렘 44ㅣ1; 46:14 참조)

물론 그 장소가 어디인지를 아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그보다는 이렇게 자세히 소개하는 목적이 훨씬 더 중요하다.(J. Durham, Exodus [WBC 3], 328 참조) 한편으로 그것은 그 장소가  널리 알려지지 않은 곳일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 출애굽과 홍해바다 이야기의 역사성을 강조하는 것이리라. 이렇게 가던 길을 돌이켜 해변가 비하히롯 (troyxih; yPi)에 장막을 쳤다. 이 말은 아카드어 pi-hiriti에서 따온 것이다. 그 뜻은 수로(운하)의 시작이다. 이로 미루어 보건데 그것은 아마 오늘날 수에즈 운하 근처 어디쯤으로 보인다.

이스라엘 자손은 가나안을 향해 가다가 되돌아와 바다가에 진을 쳤다. 이와 관련하여 2절에는 장막을 치다는 말(카나 µ¹nâ)이 두 차례나 거듭 쓰였다. 이것은 출애굽 한 이스라엘 자손이 세 번째로 장막을 친 것이다.(숙곳 12:37, 39; 에담 13:20 참조) 이것이 파라오에게 이스라엘 자손을 추격하게 결정하는 동기가 되었다.(또 다른 동기는 5절에 나온다) 그는 마치 그들이 길을 잃고 헤매는(bbûk) 것, 곧 광야가 그들을 가두어 놓은(s¹gar)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3절 직역: 그러자 파라오가 이스라엘 자손에 관해 말하였다: ‘그들이 그 땅 안에서 자기끼리 방황하고 있다. 그 광야가 그들을 가두어놓았다) 마치 그들이 오갈 데 없이 광야에 갇힌 것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그의 말처럼 이스라엘 자손은 실제로 양옆에는 산, 앞에는 바다, 뒤에는 사막 등 진퇴양난의 위치에 진을 쳤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향해 하는 말은 대체로 자기 자신에게 적용되는 말이다. 그 말의 뿌리를 파고 들어가 보면, 그 사람 자신의 사고방식(세계관)이 그 바탕에 깔려 있다. 그리고 자기 주변의 사람이나 일을 바라보며 하는 이 말이 결국 그 자신의 선택과 그에 따른 결과로 되돌아오곤 하였다.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 갇혔다고 생각하고 말한 파라오는 그 자신이(홍해바다에) 갇히고 말았던 것이다.

하나님은 파라오의 마음을 한 번 더 완악하게 하셨다.(4절; 출 9:12, 35; 10:20, 27; 11:10) 아마 그의 눈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독안에 든 쥐로 보였을 것이다. 이에 그들을 그냥 내버려 두어 가게하고 싶지 않은, 곧 이스라엘 자손을 다시 잡아들여 노예로 부려먹으려는 완악한 생각이 그 가슴에서 불같이 이글거렸을 것이다. '비둘기는 하늘을 날아도 콩밭을 잊지 못한다'는 말처럼 그는 노예를 부려먹는 이점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은 파라오의 이런 마음을 아셨다. 그리고 '내가 그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였다‘는 말은 원래 선량하던 파라오의 마음을 일부러 악하게 만드셨다기보다는 이스라엘 자손을 향해 악한 마음을 품는 파라오를 그대로 내버려 두셨다는 뜻이다.(출 9:12 참조)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목적이 4절에는 두 가지로 언급되었다: i) 하나님께서 파라오와 그 군대를 통해 영광받으심(여호와의 존귀하심이 만천하에 드러남), ii) 이집트인들이 여호와를 알게 됨. 특히 영광스럽다는 말(카베드 k¹b¢d)이 니팔형으로 쓰임으로써(붸잌카브다), 그 뜻은 '그리고 내가 스스로를 영광스럽게 하련다' 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여기서는 능력의 발휘(군사적 행동)로 표현되었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이 능력은 '여호와가 누구냐'며 하나님을 무시하던 파라오(출 5:2 참조), 가지각색의 우상을 숭배하는 파라오와 그 백성에게 여호와만이 유일하신 하나님이심을 밝히 드러내 주었다.

하나님은 이로써 이집트인들에게 두 번 다시 하나님의 백성을 넘보지 않게 만들려 하셨다. 사람들은 성경에서 배운 이 전술과 전략, 곧 아군의 모습을 적군에게 일부러 노출시키는 고도의 기법을 예나 지금이나 즐겨 답습하고 있다. 파라오의 이런 계획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행하였다. (봐야아수 켄 출 14:4c)

그 어떤 사람이나 환경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가로막을 수 없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에게 길을 돌이켜 가되 이집트로 되돌아가지 말고, 바다 근처 어느 광야(국경선 근처)로 가게 하셨다. 이는 파라오가 일으킬 군사행동을 충분히 고려하신 결정이었다.

파라오는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를 떠난 사실을 보고받았다. 이에 그 마음이 바뀌었다. 이것이 그가 이스라엘 자손을 추격하기로 결정하는 두 번째 동기이다. 1-3절에는 그것이 이스라엘 자손의 행군경로 변경과 관련 되었다. 여기서 그의 심경변화를 나타내는 말(하파크 h¹fak)은 아카드말에선 머리 위엔 얹어놓다, 내던지다, 우기릿어와 페키니아어에선 뒤집다, 와해시키다, 아람어에선 뒤집다, 망가뜨리다, 아랍어에선 부패하다, 거짓말하다 등으로 쓰였다. 이는 주로 생각과 말에 관련되어 있다. 이것이 본문처럼 심장(마음)과 함께 쓰이면, 가슴 속에 들어있던 결단이 바뀌는 것을 의미하였다.(애 1:20; 호 11:8 참조) 이는 감정의 요동 및 급격한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THWAT I, 456쪽)

변심한 그는 신하들과 함께 “우리가 이것을 어찌 행하였느냐? 진정 우리를 섬기는 이스라엘을 우리가 쫓아내었다는 것인가?” 라고 말하였다.(5절 직역; 개역개정은 '놓아 보내었는가'로 옮김) 아마 크게 화를 내며 버럭 소리를 질렀을지도 모른다. 이스라엘 자손이 도망하였다(n¹gad)고 말한 것은 아마 표적들과 얽힌 전후 사정을 모르는 이들, 특히 밤중에 급히 나간 이스라엘 자손을 본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다. 또는 갑자기 노예를 상실하고 막막해하는 이들의 의사가 반영되었을 것이다.

이 보고를 받은 파라오와 그 신하들은 자신들이 그들을 쫓아내었다고 말하였다.(š¹laµ 샬라흐의 강의형) 이는 말아야 할 일을 하였다는 뜻이다. 그들을 노예로 부리는 자신들의 경제적 이해관계가 직접 얽혀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파라오가 가라고 풀어 준 일을 놓고, 쫓아내었다는 부정적인 말로 자신들의 감정과 기분을 표현하였다. 이에 파라오는 막강한 군대를 동원시켰다.(6절) 그리고 자신도 직접 이 일에 뛰어 들었다. 아마 그들은 이집트에서 최정예부대였을 것이다. 욕심(완악함)이 그를 열한 가지 표적으로 겪었던 시련을 까마득히 잊게 하였고, 더 나아가 그로 인해 겪는 백성의 고통에 아랑곳하지 않게 만든 것이었다.

출 14:5-6은 이스라엘 자손도 '백성'으로, 이집트인도 '백성'으로 불렀다.(±am ) 이는 이스라엘 자손과 이집트인이 서로 상대가 될 만한 세력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낱 노예였던 이스라엘 자손의 위치가 이 정도로까지 격상된 것이다. 이는 하나님 은혜로 말미암아 된 일이다.

7절 이하에는 마음이 완악해진 파라오가 펼치는 행동이 낱낱이 기록되었다. 그것은 파라오 군대의 질적 수준과 체계적인 지휘계통을 설명하는 것이 시작되었다. 이에 따르면, 선택된(탁월한, 우수한 bb¹µar) 병거부대는 파라오의 명령에 직접 따르도록 하였고, 큰 병거부대에는 각각의 지휘관을 배치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출14-15장에는 ‘모든 병거’(kol-rekeb) 란 말이 14회, ‘모든 기병(마병)’(kol-sûs)이 12회 쓰였다. 이는 아무런 방어 수단없이 이집트를 떠난 이스라엘 자손과 아주 대조적인 것이었다.(J. Durham, Exodus 336)

유다 왕 르호보암 시절 당시 이집트 왕 시삭은 병거 1200승을 거느리고 예루살렘을 공격하였다. (대하 12:1-5) 이런 기록에 비추어 볼 때, 비록 시대는 다르지만 파라오가 병거 600승 정도 동원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이렇게 선발된 정예 부대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들이닥칠 것이다. 그러니 그 긴장감이 얼마나 고조되겠는가! 8절은 4절에 이어 '그리고 여호와께서 파라오의 마음을 이렇게 완악하게 만드셨다.(µ¹zaq 카자크 피엘형) 라고 시작한다.(직역)

파라오가 이러는 줄 전혀 모르는 그들은 담대히(직역: 뻬야드 라마 b®j¹dr¹m¹h = 손을 높이 들고) 나갔다.(야차 j¹șâ°) 8절에 손을 높이 들었다는 뻬야드 라마의 말의 뜻이 분명하지 않기에 성경마다 조금씩 다른 뉘앙스로 번역하였다.(KJV. ELB: with a high hand = 높은 [든] 손으로, 개역개정: 담대히, 표준. 천새: 당당하게, 공동: 의기양양하게; LÜ die Macht der starken Hand = 강한 손의 능력 아래; RSV defiantly = 도발적으로; NIV boldly = 담대하게)

   
▲ 오른손을 높이 든 바알신.
그 용례를 보아가며 그 의미를 알아보자. 민 15:30에서 그것은 규칙(율법)어기는 행위를 묘사한 것으로 ‘제멋대로 교만하게 행한다’는 뜻이다. 물론 이것은 출 14:8; 민 33:3에서 이집트에서 출애굽 하는 이스라엘 자손의 모습을 서술하며 승리를 의미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전능하신 행위를 가리킬 때, ‘강한 손과 편 팔’(신 4:34; 5:15; 6:15; 7:19; 11:2; 26:8; 시 89:11-14; 136:12; 렘 32:21) 로 표현하였다. 이것은 또한 상대방을 경멸(모욕)하는 몸짓을 나타내기도 하였다.(시 18:28; 131:1; 잠 6:17; 21:4; 30:13; 사 10:12; 렘 48:29)

이런 것은 본디 고대 근동에서 자주 발견되는 손을 높이 든 신상에서 나왔으리라. 이 때 높이 든 손은 전투태세를 갖춘 모습을 나타내거나, 사람 또는 다른 신에 대해 위협하는 몸짓을 보여주는 것이다. (ThWAT VII, 427쪽)

9절은 '그리고 이집트인들이 그들의 뒤를 쫓아왔다.'(직역)는 말로 시작된다. 이어서 그들이 추격해오는 구체적인 모습을 '그리고 해변의 장막 친 데까지 그들을 따라잡았다, 파라오의 병거들의 모든 말들과 그의 기병들과 군병이 바알스본 앞 비하히롯 곁에'(직역)라고 서술하였다. 아주 긴장되는 순간이 온 것이다. 4절과 8절에 이어 9절에서도 뒤쫓다는 동사(라다프 r¹daf)가 전치사(아하르 °aµar = )와 함께 거듭 쓰이면서 매우 긴박한 상황을 보여주었다. 이런 용법은 창 35:5을 비롯하여 구약성경에 45차례 사용되었다. 아카드말에서 라다프는 '뒤쫓아 추격하다, 서둘러 ...을 하다'는 뜻이다. 이곳에서 그러하듯이 이것은 많은 경우 전투적-공격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말이다. 출애굽기에는 이 낱말이 다섯 번 쓰였다.(출 15:9 등)

출 14:1-9의 중심주제는 파라오의 마음이 다시 완악하여졌다는 데 있다. 그의 이런 태도는 열한 가지 표적으로도 모자라, 하나님께서 일으키실 더 큰 표적 (홍해바다 사건)을 잉태한 것이었다.

* 오늘의 적용

1) 하나님의 숨은 뜻

인간적으로 말하자면, 이스라엘 자손이 출애굽하자마자 노선을 바꾼 것은 커다란 실책으로 보일 수 있다. 그렇게 만드신 하나님 또는 그 길로 인도한 모세-아론이 첫출발부터 적합한 선택을 하지 못하였다고 말할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 선택이었다. 그런데도 이 과정을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롬 11:29)는 믿음의 눈으로 보면 어떻게 될까? 하나님은 홍해바다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 자손을 두고두고 공격하며 괴롭힐 파라오(이집트군대)에게 두 번 다시 그런 마음을 먹지 못하게 만들어 놓으셨다. 겉으로 보이는 것과 믿음의 관계를 성경은 이렇게 교훈하였다: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고후 5:7; 히 11;1 참조)

2) 인도하시는 손길에 내어맡기는 자

하나님은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할 길로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하셨다. 심지어 파라오조차 혼란스러워할 정도로. 그 속뜻을 알길 없는 그들은 그 길을 수긍하고 받아들이기가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도 그들은 순종하였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자신의 운명을 내어맡겼다. 그리고 하나님의 속뜻이 실현되는 날,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다. 찬송가 413장이다: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3) 하나님을 가로막을 자 누구냐?

파라오는 다시 하나님의 계획을 가로 막으려 하였다. 이를 위해 그는 정예부대를 소집하였다. 무기나 무장 등 방어수단을 전혀 갖추지 못한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 그는 병거 600승과 기병, 보병 등을 동원하였다. 그렇게 하고도 그는 이전 열한 가지 표적이 시행될 때 무기력하였던 것과 똑같이 하나님의 일을 가로막을 수가 없었다.

이런 일은 후대 전설이나 소설의 단골 소재가 되었다. 이를 테면 어떤 사람(영웅)이 하늘의 뜻을 품고 태어났다 하자. 이를 감지한 그 주변 사람들이 그를 제거하려고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하곤 하였다. 그런데도 그 사람은 각종 위기와 위협을 딛고 일어나 결국 하늘의 뜻을 이루고 만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런 이야기가 수없이 많다. 이것은 하나님의 정하신 뜻을 아무도 거스를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4) 자충수

무엇이든 있다가 없어지면 서운하기 마련이다. 하물며 마음껏 부려먹을 노예들이 사라지면, 파라오와 그 백성에겐 더욱 더 그럴 것이다. 자신들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행한 행패와 횡포, 비인간적인 대우를 생각하지 못하는 그들은 아쉽고 서운한 감정을 못내 지울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런 마음이 들리라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섭섭한 마음을 욕심으로 이어갈 지 아니면 전후사정을 살펴가며 건전하게 풀지를 결정해야 한다. 이런 경우 욕심은 끝이 없다는 말이 있다. 이 말대로 따르다보면 파라오와 같은 무리수를 두게 된다. 그리고 그 부메랑은 고스란히 자기 자신에게 자충수가 되어 돌아온다. 섭섭증이나 서운증에 걸린 상태, 그리고 욕심이 주도하는 상태에서 내리는 결정은 제대로 될 리가 없는 까닭이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약 1:15)

5) 인간의 비인간화

파라오와 그 신하들은 히브리노예를 소유하고 부려먹으려는 욕심을 버리지 않았다. 권력욕 소유욕, 지위상승 욕구에 몰두하는 인간이 얼마나 비인간화되는가? 이런 것에 신물이 난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은 의산문답에서 지구 자전설을 풀어 쓰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무릇 지구는 우주에 살아있다. 흙은 그 피부와 살이고, 물은 그 정액과 피며, 비와 이슬은 그 눈물과 땀이고, 바람과 불은 그 혼백과 혈기다. 그래서 물과 흙이 안에서 빚고 태양빛이 바깥에서 구우며, 원기가 모여서 여러 생물이 무성하게 자라는 것이다. 초목은 지구의 머리카락이고 사람과 짐승은 지구의 벼룩과 이다.”

이 지구촌에서 사람과 짐승은 벼룩과 이라는 말이 섬짓하다. 그가 활동하던 시대에 비하면 지금은 지식과 산업이 놀랄 정도로 발달하였다. 그리고 사람이 벼룩이나 이만도 못하게 행동하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그대로이다. 오늘날에도 이 세상에는 타인이나 자연을 물어뜯고 괴롭히는 무리가 참 많다는 말이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자손을 향한 파라오와 그 신하들의 행태도 여기에 속한다.

6) 신분의 변화

한낱 노예였던 이스라엘 자손에게도 이집트인을 가리키는 낱말인 ‘백성’이 그대로 붙었다. (5-6절 참조) 이는 벽해상전이요, 경천동지할 일이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만드셨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신분이 변화된 사람이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12)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자격이 없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신분이 변화된 것이다.

11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 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엡 2:11-13, 19-20)

정현진(수도교회 담임목사, 한신대 대학원 외래교수)  psalme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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