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연재 “빨간 구두의 추억”은 상상만 해도 즐거운 이야기로 우리를 인도했었다. 남성과 교황이라는 권위주의의 결정체에 분연히 맞서서 빨간 구두를 신고 교회 문을 넘는 여성들의 혁명이 세상을 바꾸는 아름다운 이야기 말이다. 그런데 생각해 본다. 지금은 그 구두를 누가 신고 있을까? 오늘날 교황도 내다버린 그 구두(“빨간 구두의 추억” 참조)를 말이다.

인터넷 뉴스에서 발견한 사진 한 장에는 도시락을 먹어가며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것을 기만적으로 과시하)는 새누리당 의원들 뒤로 “노동개혁으로 청년에게 좋은 일자리를”이라는 빨간색 일색의 구호가 선명하다. 임금피크제를 도입하여 자본가들은 손해 보는 일 없이 노동자들끼리 나누어먹기를 하라는 뻔뻔한 요구를 아무렇지도 않게 노동개혁이라고 말하는 그들이 신고 있는 신발은 다름 아닌 빨간 구두다. 지금 대한민국에서는 권위에 도전하던 저항의 깃발이 권위를 휘두르는 사람들의 가식적 욕망을 숨기는 포장지로 쓰이고 있다. 이로 인해 빨간 구두가 가진 저항성은 이들이 연출하는 촌극과 함께 희화화되고 만다.

이 촌극의 핵심에는 저항의 대상이 저항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기막힌 발상의 전환이 있었다. 빨간 구두는 원래 권위주의자들이 독점하던 것이었고 억압받는 자들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금기였다. 이때의 빨간 구두는 권위의 상징이다. 억압받는 자들은 이 금기의 경계선을 가로질러 권위주의자들의 독점물을 취해서 함께 그것을 향유하고자 시도했다. 그럼으로써 금기를 허물고 빨간 구두를 권위주의자들이 만들어 놓은 위계질서의 최하위층까지 신을 수 있는 평범함으로 인도하고자 했다.

이때의 빨간 구두는 권위 위에 덧칠해진 자유와 해방의 상징이다. 권위주의자들은 바로 이 사실에 착안했다. 억압받던 저항자들이 신고 있는 빨간 구두에는 권위와 해방이라는 두 욕망이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에 말이다. 그들은 해방을 외침으로써 자신들의 잃어버린 권위를 되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그래서 이 직감에 따라 저항의 대상이 아니라 저항의 주체로 연기하기 위한 시나리오를 짰던 것이다.

이 시나리오에 따라 주인공으로 나선 그들은 저항의 대상에서 저항의 주체로 그려진다. 돈과 권력, 그리고 언론의 후원을 받아서 화려하게 한국현대사라는 무대에 오른 그들은 빨간 구두를 신고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춘다. 광야를 떠도는 저주의 춤을 화려한 조명 아래의 신나는 춤으로 대체하면서 말이다. 희망과 열정을 전면에 내세운 그들의 세련된 연극은 그러나 촌극이다. 이 연극에는 저항의 대상 없이 저항의 구호만 울려 퍼지기 때문이다.

저항의 대상이 저항의 주체로 자리를 옮겼기 때문에 벌어진 이 우스꽝스러운 상황을 생각해보라. 이것은 마치 종이를 만드는 회사가 “자연을 생각합니다.”라는 광고를 하고 있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민중을 해방하고 노동개혁을 이루겠다는 구호로 현실과 사실을 기만하고 있는 한 편의 코미디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도 이 촌극은 흥행에 성공했다. 이유가 무엇일까? 이들이 기획한 빨간 구두 연극이 빨간 구두가 가진 저항성을 희화화해버렸기 때문이다. 권위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전유물이었던 빨간 구두를 만인의 해방을 의미하는 빨간 구두로 바꾸고자 했던 저항의 기획을 역으로 이용했다. 저항의 빨간 구두가 ‘누구나 동등한 권위를 가지고 있음’을 가져오고자 했듯이, 권위주의자들의 빨간 구두도 ‘누구나 민중을 해방할 수 있음’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선전했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저항의 구호를 자신들의 연극 대사로 편입시킴으로써 저항의 목표물이 되는 것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저항이 무력하고 덧없으며 심지어는 기만적이라는 생각을 유포하는 것에도 성공했다. 저항이 무력하고 덧없다는 생각은 저항을 피곤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저항의 목표를 실현하지 않는 저항적 구호만을 반복함으로써 영원히 오지 않을 희망을 덧없이 강요하는 피곤하고 기만적인 것이 바로 저항이라는 생각을 대중심리 속에 심어놓은 것이다. 자, 이제는 아무나 책임감을 느끼지 않고도 저항을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어차피 저항은 작동하지 않을 것이고, 그래서 말해봤자 피곤하기만 하지 않겠는가?

사태가 이러하다면, 우리가 꿈꾸는 빨간 구두의 이상은 지금 매우 난처한 상황에 있다. 책임감을 걸머진 민중 진영의 저항 이야기가 책임감 없이 기만적으로 떠들어대는 권위주의자들의 저항 이야기에 묻혀 그 진정성을 밝히기 힘들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하여, 권위의 상징인 빨간색과 저항의 상징인 빨간색이 어지럽게 뒤얽혀서 욕망의 방향을 설정할 수 없게 된 오늘의 현실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겠는가? 어떤 정치인들처럼 빨간색을 내버리고 파란색을 선택하면 되겠는가? 그게 아니라면, 우리가 기댈 수 있는 언덕은 무엇일까?

그 어느 때보다도 성실하게 책임을 다하여 저항의 춤을 추는 빨간 구두 소녀가 절실하다. 이야기책을 뚫고 세상에 나와 민중이 내는 곡소리에 맞추어 춤을 추는 빨간 구두가 간절하다. 자, 이제 춤의 왕들을 다시 소환할 때이다. 곡소리는 지금도 계속 울려 퍼지며 그 애통함의 깊이를 더하고 있다. 누가 이 장단에 맞추어 춤을 추겠는가?

<필자 소개> 신익상 서울대학교에서 물리학을 공부한 후 감리교신학대학교 박사원에서 종교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공회대학교 신학연구원과 감리교신학대학교 기독교통합학문연구소, 그리고 변선환아키브를 중심으로 학술활동을 하면서 감리교신학대학교, 협성대학교, 성공회대학교 등에서 후학들을 가르치고 있다. 한편으로는 신학과 과학의 대화에, 다른 한편으로는 종교간 대화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자신이 추구하는 학문이 해방적인 삶에 기여할 수 있는 바를 모색하고 있다. 현재 NCCK 정의평화위원회 위원, KCRP 종교간 대화위원회 위원으로서 종교의 사회적 책임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활동하고 있다.

신익상 (성공회대학교 신학연구원)  yotyoj@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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